하얀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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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토와의 재회
2021년 10월 26일 15시 56분  조회:376  추천:0  작성자: 하얀 진주
수필
흑토와의 재회
김영분
 
얼마전 조카의 결혼식차에 흑룡강 W시를 방문하게 되였다. 할빈 시내에서 자가용차로 다섯시간이나 줄창 달려야 도착하는 변방의 작은 도시였다. 차로 이동하는 내내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은 초원을 달리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로 푸른 곡식들이 아득히 넘실거렸다.

이전에는 북대황의 흑토가 비옥하여 중국의 5분의 1이나 되는 인구의 량식을 책임지고 있어 북대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싱그러운 곡식들로 줄세워진 벌판이 지평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눈 그득히 밀려올지는 생각지도 못했다.
높은 위도에 위치해서인지 해발이 높지 않아도 하늘과 가까운 동네인 듯 해살이 살갗을 따끔따끔 내리쬐였다. 청명한 하늘은 파란 물감을 푼 듯 산뜻해 보였다.공업폐기가스가 없는 관계로 공기도 상큼하고 투명했다. 갑자기 시들하던 시력이 좋아진 것처럼 모든 물체가 빤하게 보였다.

우리는 예전에  동북에서 벼를 심으며 살고 있던 농민이였으나  갑자기 농사에 신물이 난 것처럼 꽤 오래전 연해도시로 뿔뿔히 흩어져나간 사람들이다. 고향이 흑룡강인 남편은 끝없이 펼쳐지는 벌판을 보면서 감회가 새로운 듯 경작지의 장엄한 모습과 깨끗한 공기에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나 판도라의 마법상자를 열 듯이 흑토를 둘러싼 감탄은 줄에 줄을 이어 생겨났다.
     
잔치집에서 준비한 환영만찬에 사돈 내외의 형제들이 많이 모였다. 조카사위 부친의 여섯 남자형제가 다 모였는데 자기소개를 듣고는 고향을 등지고 여러해동안 시내에서 허둥대던 우리 친정 쪽 친척들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조카사위 부친의 형제중 세 사람은 모두 농민이였다. 얼핏 보기에는 옷차림이 점잖고 얼굴은 검스레 하나 풍상고초의 흔적이 별로 보이지 않아 우리 부모세대의 농민과 전혀 매치되지 않는 모습이였다. 도리여 다부진 농촌의 간부 티가 물씬 거렸다. 참말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맞을가 하고 잠시 갸우뚱 하는 사이 조카사위 부친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자기는 100헥타르좌우의 경작지를 부치고 있고 다른 두 형제도 자기와 비슷한 면적을 부치고 있다는 것이다. 계산이 느린 내가 속으로 천천히 따져보니 어마무시하게 100만평방메터나 되는 면적이였다. 어림잡아 축구장 140개나 되는 면적이였다. 그것도 삼형제이니 거의 420개 축구장면적이 아닌가.
      
겸손하게 농민이라고 허리를 낮추었음에도 실은 농장주와 다름없었다. 사돈들은 몇십년전 산동에서 배를 곯지 않으려고 산해관을 넘어 동북으로 어렵사리 이주를 한 한족들이다. 처음에는 추위와 배고픔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억척스레 개간을 하고 부지런히 토지를 넓혔단다.
날씨가 춥고 경제구조가 단일한 동북지역을 꺼리여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사돈들은 공을 들여 터전을 늘리는데 공력을 꾸준히 들였다고 한다. 밭 한 고랑의 길이가 8,000메터인 농장도 있었다. 밭고랑의 길이 만큼이나 어렵고 긴 세월들을 지나 형제들이 오손도손 손을 모아 서로 돕고 힘을 보태며 큰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이렇게 풍채름름한 농민은 처음 본다며 땅 부자에 지주라고 롱도 섞어가면서 기꺼이 부러운 마음을 전했다.웬지 든든해보였다. 뿌리를 깊숙히 박은 나무처럼 느긋하고 힘이 넘쳐 보였다.

그 젊은 시절에 미련없이 떠났고 중년후반이 되여 그리움이 잔뜩 묻어 돌아온 우리에게 고향이 펼치는 흑토의 풍경은 경이롭고 새로웠다. 흔히 동북은 후지고 돈벌이가 안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가 아니였던가.다 파먹은 김치독이라고 얼마나 안타까워 했던가.글로벌 시대에 발전없이 같은 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고 얼마나 애탄했던가.
새로 정착한 연해도시에서 쉼없이 앞만 바라보고 달려야 했던 우리의 마음에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이름모를 파문이 일었다. 새끼붕어라도 낚아본 늪에는 언제나 미련이 남아있듯이 아쉬움과 서운함이 섞이고 부러움이 교차했다. 잠시나마 만약 고향을 떠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땅부자로 떠오르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설픈 도시인 행색이 무색해질 정도로 흑토가 풍기는 위력은 배포 유하고도 막강하게 와닿았다. 그래도 사돈들은 덩치만 컸지 돈벌이는 시원찮다고 연신 겸손을  뚝뚝 떨구며 손사래를 친다.
도리여 두 주먹만 믿고 타향에서 크게 성공한 우리네가 부럽다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그 칭찬을 듣는 순간 속이 뜨끔해났고 웃음으로 펴지던 얼굴이 굳어지면서 나쁜 일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쓰르르 아려났다.
과연 그들이 바라본 성공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타향에서 성공을 위해 발바닥이 닳도록 앞만 보고 달려왔다.허겁지겁 청춘을 불태운 덕에 조그마한 성취를 거두었고 그들보다 조금 세련된 옷을 걸치고 있었다. 적당한 크기의 아빠트에 살고 있고 낯선 곳에  드문드문 폼나게 려행도 다니느라 한다.

많이 가진 것 같아도 마음 깊은 곳에는 날아다니는 연처럼 어딘가에 든든하게 정착하지 못한 아쉬움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뿌리가 얕은 나무가 가지를 무성하게 치는 것처럼 유독 비바람이 두려웠다.
어망결에 뒤돌아본 고향의 풍경은 바다를 구경하다가 바다물을 뒤집어 쓴 려행객의 입처럼 짜고 쓰겁고 찜찜해났다. 고향에 남은 사람들이 진정 폼이 나보였다.

사돈들의 삶에 깊이 수긍을 하고 나니 괜스레 우리 자신도 여태 너무 잘해왔지 않냐 하는 자기 위로가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상실감을 느끼면 보상을 바로 맛보아야 하는 아이처럼 말이다.
“나무는 옮기면 죽고 사람은 움직이면 산다”는 말처럼 가령 우리가 고향에 남아있었다면 땡볕을 이고 흑토를 파헤치며 농장주로 탈바꿈했을가 하는 큰 의문도 갖게 되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살아가는 내내 선택을 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선택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삶이라면 자신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이기는 삶이 되겠다.
땅부자 사돈들도 산동에서 떠난 사람들이 아니였던가. 떠나서 정착한 곳에서 쉬지 않는 오리발을 저었기에 떵떵거리는 성공한 땅부자로 거듭났을 것이다. 그분들도 산동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여느 소시민들과 다를 바 없이 적은 농사에 여가시간을 리용해 밀물처럼 쓸어든 외자회사에 출근하는 평범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밤에 뜨는 달을 보는 것처럼  상대방의 가장 밝은 측면만 눈여겨 본다.우리 모두는 각자 선택을 위해 춥고 어두운 밤들을 수없이 보냈으니 서로의 눈에 성공의 신기루를 보여줄 수 있었다.
안일한 삶을 미련없이 뒤로 하고 배수일전(背水一战)의 각오로 더 잘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새로운 삶터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한 치렬한 몸부림이 서로의 눈에 빛나는 오늘의 사돈과 우리의 모습을 만들지 않았을가?
선택은 설명될 수 없고 경험될 뿐이다.선택의 길목마다에 도전과 사는 맛이 마련되여 있으니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새파란 하늘에서 해살이 쏟아지고 있다. 
12시 종소리를 들은 신데렐라처럼 흑토를 다시 한번 뒤로 하고 순순히 삶의 터전으로 복귀를 서둘러야겠다.
   
연변문학 2021.10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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