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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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 잃은 흰둥이 댓글:  조회:807  추천:0  2018-10-18
소설 집 잃은 흰둥이 김영분     1흰둥이가 길을 잃다   흰둥이는 배가 너무 고파서 깨갱소리도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산책을 나왔다가 꽃잎 주위를 맴도는 나비에 홀려 길을 잃고 헤매고 다닌지 벌써 한달이 넘는다. 따뜻했던 보금자리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꼬리를 잔뜩 움츠리고 눈꼽이 덕지덕지한 두눈을 거슴츠레 뜨고 하염없이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아마도 여기는 공단 같았다. 사면팔방으로 쭉쭉 뻗은 아스팔트길 량옆에는 네모반듯한 회색 건물들이 줄을 지어 서있었고 대문들이 검은 흑대구아가리에 지퍼가 달린 모양으로 철썩하니 닫겨 져 있었다. 그래도 량옆에 도랑에는 시커먼 오물이 졸졸 술래잡기라도  하는듯 앞거니 뒤서거니 으슬렁 거리면서 흘러간다. 행여나 먹을 것이 있을려나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먹을 거는 고사하고 썩은 냄새만 코를 찔렀다. 쓰레기를 뒤지면서 연명해오던 이 나날속에 향긋한 샴푸에 샤워를 하고 드라이까지 받아보던 세월은 꿈속에서도 멀어져가고 한 여름의 쓰레기더미에서 풍기는 악취는 이제 흰둥이의 끔찍한 일상이 되여버렸다. 흰둥이는 삼검불처럼 헝클어지고 때국물이 쫄쫄 흐르는 두귀의 털이 자꾸 눈앞을 가려 짜증나 앞발로 치우려고 했지만 현기증이 심해서인지 자꾸 자기 코를 긁지 않으면 눈을 내리 찍어서 괜한 아픔에 시달렸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라도 피신처를 찾아야 한다. 아니면 비참하게 유기견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또 거슴츠레한 눈에 힘을 주어 슴벅거렸다. 한 공장앞을 지나는데 대문이 버젓이 열려있었다. 차량이 들락날락 하는 광경을 보아서는 아마도 흥성흥성한 공장 같았다. 깨개갱! 흰둥이는 멍멍하고 힘차게 짖으려 했지만 깨개갱 소리밖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대문옆에 조그마하게 생긴 집을 향해 짖어댔다. 삐꺼덕하고 작은 집의 창문이 열리더니 밭고랑처럼 얼기설기 주름이 패여있는 늙은 할아버지가 머리를 내밀고 흰둥이를 쳐다보았다. “에이구. 어디서 밥도 못먹고 다녔구먼. 불쌍도 해라. 어서 오거라.” 흰둥이는 좋아라 힙겹게 꼬리를 흔들며 할아버지 발밑으로 다가가서 요리조리 캐갱캐갱하면서 돌아쳤다. 할아버지는 어느새 개밥그릇을 흰둥이 앞으로 가져왔다. 아마도 다른 개도 키우고 있는 모양이다. 아침에 먹다 남은 찌꺼기밥이 어지럽게 개밥그릇에 달라붙어 있었다. 예전에 주인집에서는 전용 우유에다가 향긋한 과자 알갱이들을 먹었는데 이젠 누렁개의 찌꺼기 같은 개밥도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며칠을 굶었는데. 흰둥이는 연신 코를 그릇에 방아 찧으면서 눈 깜짝할새에 다 먹어치웠다. 그러는 사이 할아버지가 또 물도 부어주고 남은 빵도 부스려주었다. 흰둥이는 커억커억 트럼할 새도 없이 바삐 먹었다. 이제야 살 거 같다. 할아버지를 자세히 보니 실눈을 하고 희죽이 웃으면서 마치 손자가 맛잇는 음식을 게눈 감추듯 먹는 모습을 기특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흰둥이를 바라보면서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어이구. 배가 많이 고팠구나. 천천히 먹으라구. 이젠 돌아다니다가 배고프면 여기로 와서 먹어. 여기 검둥이도 있어. 친구도 하고 말이야. “ 할아버지 말이 떨어지게 바쁘게 흰둥이보다 덩치가 조금 더 큰, 할어버지 무릎까지 오는 키를 한 검은 개 한마리가 불쑥 나타났다. 흰둥이는 검둥이를 보자마자 꼬리를 찰싹 내리우고 쏘옥 할아버지 발밑에 엎드렸다. “검둥아. 괜찮아. 얘는 배가 고파서 잠깐 들린거란다. 너도 친구도 하고 잘 지내보렴” 검둥이는 납작 엎드린 흰둥이를 둘러싸고 꼬리를 내렸다 올렸다 하면서 머리를 쪼아렸다가 궁둥이를 쳐들었다가 기분이 복잡한 듯 씩씩거렸다. 흰둥이는 쫓겨날가봐 무서웠다. 꾀죄죄한 모습이 수치스럽기도 했다. 검둥이는 반지르르한 윤기나는 털에 생긴 것이 여간만 멋있는 것이 아니였다. 아휴. 이 와중에 멋진 검둥이를 보니 괜한 수치심은 웬 일이지. (제발. 나 좀 있게 해줘. 나 얌전히 잘 있을게. 나 쫓겨나면 죽을지도 몰라. ) 흰둥이는 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검둥이가 꼬리를 쳐세우고 코를 맞대고 냄새를 맡더니 입으로 흰둥이를 밀치고 닥치고 하면서 간지럼을 피워댔다. “에고고. 나 간지러워. ㅋㅋ” 흰둥이와 검둥이는 금세 좋은 친구가 되여 온 공장마당을 누비며 뛰여 다녔다. 여름이라 담장둘레에 할아버지는 작은 밭도 일구어놓았다. 모종을 했는지 비닐하우스도 여러개 있었다. 화단에서는 군자란처럼 생긴 기다랗게 생긴 꽃이 노란물감을 토해내듯 찐하게 피여있다. 차량들은 흰줄을 그은 선안에 차곡차곡 세워져 있고 자전거도 판자로 막은 그늘밑에 잘못을 저지른 애들마냥 조론히 서 있었다.   점심 종소리가 따르릉 울리면 공장 대문에서 우와하는 함성과 함께 어림잡아 백명은 될 듯한 노동자들이 식당으로 즐겁게 밀물 쓸듯 쓸어들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는 착하고 예쁘게 생긴 청이라는 녀직원은 흰둥이를 아주 귀여워했다. 청이는 드문드문 수도물가에 데려가서 흰둥이에게 깨끗하게 몸도 씻겨주었다. 사무실에는 항상 옷도 품위있게 입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면서 악수를 하고 웃고 어깨를 타독거리면서 분주히 오갔다. 점심에 태양이 기염을 토해낼 때는 검둥이와 흰둥이는 시원한 담장 구석에 드러누워 한잠씩 늘어지게 자곤했다. 차량들의 빵빵 소리가 아니라면 그대로 하루종일 잘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오직 먹고 뛰놀다가 서먹한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오면 고작해서 멍멍하고 헛기침하듯 몇번 짖어대고 그늘을 찾아 잠자는 것이 일상이였다. 흰둥이는 새로 접하고 보는 광경이라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바쁜 나머지 처음에는 흰둥이가 왔는지 조차 주의를 하는 거 같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검둥이 그리고 청이만 흰둥이에게 관심이 있었다. 저녁에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면 청이는 종종 소세지를 들고 와서 흰둥이랑 검둥이랑 놀아주곤 했다. 차츰 지나자 깨끗하게 씻긴 흰둥이의 고급스런 자태가 금방 공장직원들한테 귀여움을 받았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털에 청이가 목에다 예쁜 딸랑방울까지 달아줘서 귀여운 강아지공주가 따로 없었다. “흰둥아. 정말 귀엽다. 처음에는 안쓰럽게 초라했는데 요즘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예쁘네. 나도 오도가도 없는 신세란다. 엄마 아빠가 없는 고모네 집은 이젠 가기도 싫고 여기가 제일로 편안하단다. 난 20세가 되기까지 이렇게 자유롭고 마음이 편안해보기는 처음이란다. 우리 잘 지내자. 가끔 찾아올테니 너무 외로워하지 마, 알았지.” 가끔은 청이는 혼자말처럼 흰둥이에게 주절거렸다. 함치르르한 생머리를 뒤로 묶어넘긴 탓에 앞이마가 톡 튀여나왔다. 코마루가 오똑 하게 서서 우수에 찬 두눈을 섯뿔리 바라볼 수가 없는 청이다. 흰둥이는 꼬리를 내흔들면서 날름날름 청이의 손바닥을 핥았다. 향긋한 크림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상이 참 좋다. 이렇게 좋은 팔자가 다 있을가싶었다. 정말 개팔자 상팔자다.     2 할아버지   흰둥이와 검둥이는 너무 즐거운 나머지 매일 공장마당에서 숨박곡질 하듯이 뛰여 다녔다. 그러던 중 어느날 외부에서 들어오는 차량에 흰둥이가 하마트면 치일뻔하여 큰 소동이 일어났다. 사무실에서 곱살스레 생긴 양홍이가 나오더니 할아버지한테 얼굴을 찡그리면서 호박 베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저씨. 이봐요. 오늘 거래처 사장님이 강아지를 칠뻔해서 너무 놀랐단 말이예요. 우리회사에 아주 중요한 손님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어떡해요. 오늘부로 흰둥이 검둥이 다 개집에다가 가두어야겠어요. 안그러면 개를 다 다른데 줘야겠어요.” 아뿔싸. 흰둥이와 검둥이의 행복한 나날은 그날부터 골목바람에 콰다당 닫긴 대문처럼 갑작스레 닫겨버렸다. 그들은 각각 공장 한구석에 이전에 지어놓은 허줄한 벽돌집옆에 목을 묶이운채로 지내야 했다. 그래도 한눈에 공장이 다 보이고 사람들이 돌아치는 상황을 다 볼 수 있어서 너무 까막눈이 되지는 않을 거 같았다. 밥 먹이를 줄 때만이 할아버지가 개밥통을 들고 나타나셔서 “오늘은 잘 지냈냐? 에구. 까부는거 봐서 일 치겠다 했지. 그래도 여기에 잘 있어라. 내가 때때로 먹을 거 가져다 줄테니까.” 하신다. 눈물나게 고마운 할아버지시다. 그런데 하루는 할아버지가 개밥을 주러 오셔서 “내일부터는 내가 며칠 청가를 내야 한단다. 90세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누워계시는데 또 위독한 상황이란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꼭 지켜야 한단다. “ 하시면서 한숨을 쉬는 것이였다. 으슬으슬 비집고 올라온 주름살들이 할아버지의 걱정처럼 얼기설기 늘어져서 풍상고초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캐갱캐갱. 할아버지 속상해하지 마세요.” 흰둥이는 연신 할아버지 다리에 매달리려고 깡충거렸다. 그 바람에 청이가 달아준 딸랑방울이 쨍그랑쨍그랑 소리가 귀막을 자극했다. 할아버지는 인자하신 그대로였다. 환갑도 넘으신 할아버지는 언제나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말을 하시곤 했다. 흰둥이는 할아버지 덕분에 그동안 길에서 치이고 쫓기고 배고프던 불안함을 많이 해소할 수 있었다. “그래요. 할아버지. 노할아버지 잘 모시고 오세요”흰둥이는 앞발을 들어 할아버지 다리에 매달렸다.     3 청이   “어때. 여기 묶이니 심심하지. 내가 야근하지 않을 때 꼭꼭 너 보러 한번 올게.” 청이도 드문드문 흰둥이를 보러 왔다. 그럴 때마다 흰둥이는 한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흰둥이는 점차 청이의 불쌍한 과거를 알게 되였다. “흰둥아. 내가 태여날 무렵 엄마아빠가 삼륜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를 당해서 그만 나만 태여나고 두분 다 저세상으로 가셨단다. 그래서 고모네 일가가 나를 데려다 키웠어. 고모는 나때문에 힘든 밭일을 하고도 고모부한테 엄청 욕도 많이 먹고 매도 수태 맞았단다. 고모는 나를 이뻐하다가도 종종 나때문에 가정이 불란스럽다고 짜증을 내셨단다. 나는 정말 복이 없는 사람일가. 나는 엄마 아빠를 죽음으로 몰고 갔단다. 나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고모는 툭하면 에그에그 하면서 나를 보고 쯧쯧거렸지, 고모부는 재수없는 년이라고  나만 보면 흥하고 들어오다가도 집을 나갔단다. 그집에는 오빠하고 언니가 있는데 오빠는 집에 꼬마 황제이고 툭하면 나보고 밥축만 내는 아이라고 소리를 질렀고 오빠보다 두살 큰 언니는 보모살이나 다름 없단다. 그래도 그 언니는 나한테 맛있는 것도 가만가만 챙겨주곤 했어. 하지만 그 언니도 그 동네 건달한테 시집가는 바람에 아주 비참하게 살고 있단다. “ 흰둥이를 쓰다듬고 있는 청이의 손이 파르르 가늘게 떨렸다. 흰둥이는 깨갱깨갱하면서 쪼크리고 앉은 청이의 주위를 코로 냄새 맡듯이 빙빙 돌다가 청이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사람도 이렇게 이집저집 엄마 아빠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살고 있구나. 나는 사람들은 모두 화목한 가정에서 행복한 줄 알았는데. ) 흰둥이는 자기도 태여나서 두달만에 낯선집에 팔려간 신세를 한탄하게 되였다. 비록 주인집에서 애지중지 키웠지만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었고 옹기종기 같이 태여난 형제들이 그리웠다. 강제로 팔려가던 날 흰둥이는 무섭고 두려워서 작은 개집에서 꼼짝도 안하고 엎드려있지 않았던가. 흰둥이는 갑자기 동병상련의 감정이 북받쳐 꼭 청이를 지켜줘야겠다고 다짐했다.     4 재호가 입사하다   누구도 흰둥이를 보러 오지 않을 때도 많았다. 아이, 심심해. 흰둥이는 때로 날아다니는 날벌레를 뱅뱅 쫓으면서 지루함을 달랬다. 껌둥이도 잘 지내겠지. 그들은 멀리서 쳐다보면서 컹컹하며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외로움과 답답함을 달랬다. 같이 뛰고 놀던 그 정경이 눈앞에 삼삼거렸다. 한 여름이라 모기떼도 성가스럽게 윙윙거렸다. 시간은 소리없이 물에 떠내려가는 쪽배처럼 시름없이 흘러갔다. 이런 지루한 일상이 계속되던 하루 공장 문어구에 새로운 남자 직원 한명이 들어섰다. 검스레한 피부가 윤기가 반들반들하고 팔뚝이 탱탱한게 다부지게 생긴 청년이였다. 눈이 판들거리는 것을 봐서는 아주 령리한 사람처럼 보였다. 흰둥이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새로 온 청년을 향해 컹컹거렸다.     5할아버지의 가족   흰둥이는 며칠동안 할아버지를 보지 못해서 너무 안달이 났다. 식당의 아주머니가 기계적으로 밥만 퍼주고 눈길도 안 마주치고 가버렸다. 행여나 흰둥이가 친해지려고 캐갱거리면 “에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이런 걸 다 키워가지고 나를 귀찮게 하네. 그저 콱.”하면서 욕을 한바가지 퍼붓고는 휑하니 가버린다. 이런 아주머니가 주는 밥을 계속 먹자니 정말 목에 꺽 막히고 소화도 안된다. 괜한 개밥을 발로 툭툭 차면서 아주머니를 비난했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개의 운명이니 어쩌겠는가. 울며겨자먹기로 흰둥이는 찬밥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버텨나갔다. 열흘이 지나자 할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에구. 흰둥아. 잘 있었냐. “ “캥캥. 네 . 할아버지. 보고싶었어요.” 흰둥이는 좋아서 폴짝폴짝 뛰였다. “그래그래. 나도 반갑단다. 슬프게도 나의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다. 여태 장례식을 치르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단다.” 할아버지는 침울한 표정으로 꿇어앉아 흰둥이랑 오래 얘기를 나눌 타산이였다. 흰둥이는 이러는 할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워 또 할아버지 발밑에 납작 업드렸다. 할아버지는 손으로 흰둥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사실 나는 아버지의 친 아들이 아니란다. 주어온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친아들처럼 지극정성을 다 해서 키우셨단다. 농사면 농사 품팔이면 품팔이, 심지어 짐꾼도 했었지. 가난했지만 아버지는 정직하셨단다. 자기의 로동으로 먹고 사는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하셨지. 나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단다. “ 여기까지 말하고 할아버지는 그만 너무 슬퍼서인지 목이 컥컥 메이시는 거 같았다. “그런데 흰둥아. 나는 아버지가 중풍으로 5년 누워있는 동안 짜증도 많이 냈단다. 마음으로는 아버지가 가엾고 불쌍하지만 정작 누워서 바지에 똥칠하는 아버지를 몇년 모시기란 쉽지 않단다. 나의 마누라는 양노원에 보내자고 몇번을 졸랐는데 기어이 내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만 멀리 일하러 가버렸단다. 바로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색시가 달아난거지. 휴“ 흑흑, 할아버지는 세차게 흐느끼셨다. “그래도 어쩌겠니. 내가 의지가지 없는 아기일 때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극진히도 보살펴주었단다. 나는 항상 아버지가 만드신 따뜻한 밥을 먹고 학교를 갔단다. 동네에서 아버지를 더벅머리 총각이 애를 하나 키워서 어떻게 장가를 가겠냐고 해도 끄덕없이 나를 지켰단다. 결국엔 장가도 못갔지. 다 나때문이란다.” “와. 할아버지 아버지는 대단해요. 할아버지는 정말 행복했겠어요. 캥캥” 흰둥이는 세상을 떠나신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너무 위대해보였다.   “캥캥. 베품과 사랑을 할줄 아는 인간세상이 너무 부러워요. 할아버지.” 흰둥이는 고개를 쳐들고 올롱하니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자상하고 혼신의 힘으로 사랑을 주신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우리 할아버지는 얼마나 힘드실가. 흰둥이는 할아버지를 위로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혀로 날름날름 허름한 구두를 핥았다.     6 청이와 재호가 사랑에 빠지다   “너는 요즘 묶여있어서 답답하지. 회사사람들이 다 퇴근한 다음에 차량이 안 다니는 밤에는 풀어줄게. 그런데 여기저기 뛰여다니면서 말썽을 피우면  또 들키니까 껌둥이랑 조용히 다녀. 그럴수 있지.” 할아버지는 매일 묶여있는 흰둥이가 불쌍했는지 밤에는 풀어주겠다고 한다. “앗싸. 할아버지. 너무 좋아요. 할아버지 최고예요. 나 얌전히 다닐게요. “ 흰둥이는 좋아서 캐갱소리가 그만 헹헹하고 나왔다. 오랜만에 듣는 희소식이다. 또 껌둥이와 같이 뛰여놀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역시 할아버지가 있는 세상은 살만해. 흰둥이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날부터 흰둥이는 밤이 되면 껌둥이와 함께 풀려나서 마음대로 쏘다니게 되였다. 퇴근을 한 공장울안으로 건뜻 걸린 달과 휘붐한 공장내 가로등이 적막한 빛를 뿌리고 있었다. 그래도 흰둥이네가 쏠락거리면서 다니기엔 충분한 조명이였다. 그야말로 독안에 든 쥐를 풀어놓은 양상이다. 둘은 좋아서 서로 깨물기도 하고 다리로 서로 코등을 쳐놓기도 하면서 날고 뛰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할아버지가 모종을 했던 자리는 고추와 가지, 파 등 농작물을 심어놓아 이젠 제법 키가 훌쩍 컸다. 둘은 고랑 사이를 오고가면서 숨박곡질을 해댔다. 문득 밭고랑이 끝나는 담장 모퉁이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밭고랑과 공장건물이 맞붙는 으슥한 곳이였다. “청이씨. 청이씨를 처음 볼 때부터 너무 마음에 들었어. 청이씨는 소박하고 얌전한 여자라구.” 청이라구. 청이언니라구. 흰둥이는 귀가 쫑긋해졌다. 누가 청이언니랑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휘뿌연 먼지가 가득 낀 가로등이 초췌하게 조명을 하고 있는 공장모퉁이로 흰둥이는  청이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캥캥. 흰둥이는 청이 바지가랭이를 물고 머리를 요리조리 흔들면서 자기가 왔노라고 신호를 보냈다.그리고는 꼬리를 연신 저어댔다. “흰둥이구나. 너가 어찌 여기까지. 흐흠. 할아버지가 풀어놓았구나. 아이구. 좋겠다.” 청이도 너무 좋아서 흰둥이를 펄쩍 들어올렸다. 청이 품에 안겨보니 청이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은 남자였다. 며칠전 금방 입사한 검은 피부의 청년이였다. “청이씨는 마음이 참으로 곱네요. 강아지도 이렇게 이뻐해주다니요.” 검은 피부 청년은 뚫어져라 청이를 바라보면서 다정다감하게 말을 했다. “휴. 재호씨도 참. 난 그리 훌륭하지 못해요.” 청이는 부끄러워하면서 함초롬한 얼굴을 한쪽으로 돌렸다. 무안했는지 행복에 취했는지 연신 손으로 흰둥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달빛은 청이의 까만 머리결을 부드럽게 만져주고 있는듯 했다. 머야. 이건. 청이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거야. 흰둥이는 그만 검은 피부 청년한테 청이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끄으응. 흰둥이는 볼멘소리를 해댔다. 이렇게 흰둥이는 종종 조용한 밤이 되면 청이랑 숨박곡질하듯 여기저기 찾아 다녔다. 청이와 피부검은 청년은 어떤 때는 밭고랑끝에서 어떤 때는 건물 모퉁이에서 어떤 때는 사무실 앞 화단에서 도란도란 사락사락 끊임없이 소곤거렸다. 둘은 많이 행복해보였다. 흰둥이와 검둥이에게 맛있는 소세지를 던져주기도 했다. 아름다운 청년 남녀의 연애는 청이를 한떨기 수선화처럼 활짝 피게 하였다. 하얀 목뒤로 수시로 머리카락을 넘기는가 하면 걸음걸이도 더 사뿐해졌다. 어느 하루 점심시간에 청이가 흰둥이를 찾아왔다. “흰둥아. 난 요즘 너무 행복하단다. 누구도 나를 이렇게 눈여겨 봐준 적이 없단다. 스무해를 살아오면서 나는 항상 천덕꾸러기였지. 나는 내가 이렇게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단다. 재호씨는 나의 은인보다 더 고마운 사람이란다. 그는 나를 정말 소중한 존재로 봐주고 있단다. “ 끄으응. 흰둥이는 행복에 잠긴 청이를 질투나게 올려다보았다. “넌 어떻니? 넌 검둥이가 마음에 드니. 검둥이도 멋있는 녀석이거든” “에이. 청이언니두 참. 쿄쿄” 갑작스런 말에 흰둥이는 가슴이 활랑거렸다. 검둥이? 검둥이는 멋있는 녀석이라고. 쿄쿄. 재미있는데. 흰둥이도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이는 것 같았다. 그래. 검둥이의 미끈한 다리며 반지르르한 털이며 개중에 내세울만한 개였다는 것을 흰둥이는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에이. 부끄러워. 검둥이는 그냥 나랑 좋은 친구야. 흰둥이는 속으로 웨쳐댔다. 청이언니한테도 말하고 싶었지만 킁킁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흰둥이는 검둥이를 흠모하게 되였다. 괜시리 검둥이를 보면 가슴이 널 뛰듯 두근거렸다.     7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화해를 하다   할아버지는 예나 다름없이 꼬박꼬박 흰둥이에게 맛있는 개밥을 날라오군 했다. 밥주러 올 때는 한참이나 흰둥이를 보고 푸념 늘어놓 듯 길게 말타래를 풀다가 간다. “휴. 흰둥아. 아버지 장례식날에 내가 그래도 우리 로친을 끄집고 와서 마지막길에 절을 올리고 인사를 시켰단다. 우리 마눌도 착하디착한 할미인데 어쩌다가 우리 아버지를 싫다고 내팽개치고 달아날 생각까지 했는지. 장례식 끝나니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또 집에 눌러앉았지 뭐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니? 그래도 살 비비고 반평생을 같이 산 로친인데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야겠지. 아버지는 항상 모든 일을 너그럽게 생각하라고 하셨지. 중풍때문에 누워있으시면서도 항상 자신때문에 집에 불화가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눈가에 눈물이 줄줄 흐를 때도 있었단다. 우리 로친도 나한테 시집와서 고생이야 많이 했지. 미안한 마음도 꿀뚝같고 얄미운 마음도 산 같단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척하고 로친한테서 밥 얻어먹어야겠지.” 캥캥. 흰둥이는 좋아라 날뛰였다. “그래요.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남은 시간 오붓이 잘 보내세요. 할머니도 많이 미안해하실 거예요. “ 할아버지는 그야말로 소박하고 정직한 인간세상의 화신처럼 보였다. 슬프고 기쁜 일을 예고없이 자주 겪다보니 풍상고초가 어린 얼굴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하면서 감정이 골짜기에 흐르는 물처럼 유유히 흘러다녔다. 사람들은 이처럼 많은 고민을 하고 살아가는구나. 판자로 된 허술한 집과 따뜻한 밥만 있으면 살것 같은 개의 인생은 그야말로 상팔자 인생이라고 흰둥이는 놀라운 생각을 했다.     8 재호가 떠나다   청이는 이젠 재호씨를 떠날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게 되였다. 은은한 달빛사이로 사랑이 움트더니 이젠 제법 찰싹 붙어다니게 되였다. “재호씨. 오늘 점심에 식사를 많이 안하는 거 같던데 어디 아픈가요?” 청이는 조심스레 묻는다. “아니요. 내가 이전부터 허리병이 있는데 또 도진 거 같아요. 내가 부두에서 막일을 좀 했었거든요. 집에 아버지 엄마가 많이 아프다보니 나는 어릴 때부터 사회로 나와서 무거운 일 더러운 일 많이 했소. ” 검은 피부 청년은 머리를 떨구고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청이에게 말을 했다. “어떡해요. 너무 힘들었겠어요. 그럼 내일 회사 청가 내서 하루 쉬세요. 밥은 제가 날라갈게요.” 청이는 안타까운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래야겠소. 내일 병원에 좀 다녀와야겠소. 그나저나 내가 회사로 온지 한달도 안되여 봉급도 못받았는데 어쩜 이런 일이 생겼는지. 휴. 청이씨 보기 민망하네요. 아직은 내가 너무 못났소. 가진 것도 없고 아프기까지 하니.  청이씨한테 행복을 주지 못할 거 같아 너무 미안하게 생각하오. 청이씨 볼 면목이 없소.” 검은 피부 청년은 큰 죄를 지은 죄인마냥 머리를 푹 두다리 사이에 묻었다. “아니예요. 재호씨. 난 여태까지 살면서 재호씨처럼 사랑했던 사람이 없어요. 다 나를 무시하고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요. 그런데 재호씨는 달랐어요. 밥먹을 때 채소도 집어주고 따뜻한 물도 떠다주고 자기전에 잘자라고 문자도 해주고 . 정말이지 난 지금 하늘만큼 행복해요. 우리 흰둥이가 알아요. 난 흰둥이한테 아무 일이나 다 말하거든요. ” 청이는 밤마다 찾아오는 흰둥이를 쓰다듬으면서 다정스레 재호씨한테 말을 했다. 그날 밤이 지난 뒤 재호씨는 자주 청가를 내고 병원을 다녀오는 거 같았다. 아침이면 나갔다가 퇴근 무렵 회사로 들어왔다. “재호는 회사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데 매일 청가예요. 허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청가를 안 내줄 수도 없구요. 물리치료를 한다는데 걸어다닐 때 보면 또 멀쩡하고. 휴. 팀 생산에 영향이 많아서 과장이 여러번 반영을 했어요. 아무래도 재호를 찾아서 단단히 얘기를 해봐야 할 거 같애요. 금방 입사한 사람이 근무태도가 저모양이니 장차 회사에 도움이 안될 거 같아요. 회사는 생산성이 생명인데 재호 한사람때문에 전반 생산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되요. 사람을 대체하든지 해야겠어요. ” 흰둥이는 사무실에 예쁘장하게 생긴 양홍이 사무실 앞 화단에 서서 구구절절 사장님과 얘기를 나누는 걸 보았다. “아뿔사. 이걸 어쩌지? 우리 청이언니랑 재호씨는 어떻게 되는거야? 안돼 안돼. 청이언니는 재호씨가 없으면 많이 슬퍼할 거라구.” 흰둥이는 한시 바삐 청이한테 알려주고 싶어서 목에 줄이 메여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캐갱캐갱하면서 연신 올리 뛰면서 부산을 피웠다. “에끼. 조용해. 문이나 잘 지킬 것이지 또 풀어달라고 생떼야. 마당에서 뛰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쩔려고.” 양홍은 날뛰는 흰둥이를 보고 책망섞인 목소리로 나무랐다. 끄으응. 흰둥이는 삽시에 조용히 눌러앉았다. 그것도 그럴것이 양홍은 사무실뿐만아니라 이 회사에서 제일 권력이 있는 사람이였다. 저번에 보니 현장에 키 큰 과장도 양홍한테 굽신거리지 않던가. 양홍은 외부에서 멋있게 옷을 입은 손님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며 또한 사장님이 계시거나 안계시거나 제일 일찍 출근하고 제일 늦게 퇴근하는 사람이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자전거가 아닌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였다. 흰둥이는 개의 짧은 안목으로 양홍이 사장님 다음으로 제일 힘이 센 권력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날이 있은 후 흰둥이는 재호가 여러번 사무실을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았다.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돌아갈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가 축 처져서 걸어갔다. “휴. 어쩌지? 허리가 빨리 나아야 할텐데.” “청이씨. 사무실에 양홍경리가 이젠 더 이상 청가를 주지 못하겠다고 하오. 회사 생산에 막대한 영향을 가져온다고 금방 입사한 사람이 자꾸 청가하면 곤난하다고 여러번 닥달을 했소.” 재호의 근심 어린 얼굴우로 새초롬한 달빛이 비껴갔다. “그래도 허리가 아파서 도저히 오래 일을 못하겠소. 알다싶이 자재창고의 자재가 얼마나 무거운지 천근만근처럼 내 몸을 누르오.” “내일 물리치료를 더 받아야 하는데 혹시 청이씨 돈 좀 빌려줄 수 있소. 아직 한달이 안되여 봉급을 받을 수가 없는데 그동안 내가 있는 돈은 다 썼소.” 재호는 죄를 지은 사람마냥 머리를 푹 숙였다. “재호씨. 근심말아요. 나는 이 회사에서 2년 넘게 일을 해서 모아놓은 돈도 좀 있어요. 얼마나 필요한가요? 내가 내일 출근을 해서 은행을 갈 수가 없으니  은행카드를 재호씨한테 드리겠어요. 자그만치 내가 1년 넘게 만원을 모았어요. 재호씨가 필요한만큼 찾아서 먼저 병원 가보세요.” 청이는 안타깝다 못해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이렇게 자상하고 착한 재호씨한테 안타깝게도 때이르게 허리병이 찾아와서 애를 먹인다는 생각에 청이는 속이 바질바질 탔다. “청이씨. 정말 청이씨밖에 없소. 나같은 못난 놈을 이렇게 믿어주다니. 내가 돈을 많이 벌면 꼭 이 은혜를 갚겠소. ” 깽깽. 흰둥이는 재호를 향해 세차게 짖어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청이언니가 너무 경솔한거 같았다. “흰둥아. 이리 와. 너도 재호씨가 안타까워서 그러지. 점차 좋아질 거야.” 청이는 흰둥이를 보면서 되뇌이였다. 그 검은피부 청년 재호는 그 이틑날 물리치료를 받는다고 회사를 떠나고 다시는 오지 않았다. 청이는 울먹이면서 달빛아래서 흰둥이를 마주하고 억울하게 울고 있었다. “흰둥아. 어떻게 재호씨가 연락이 안될 수가 있지. 난 믿을 수가 없어. 나를 그토록 따뜻하게 대해줬는데. 손도 꼭 잡아줬었고 더욱이 나를 그윽히 바라보던 그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는데. 혹시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지나 않았는지 걱정스러워 죽겠단 말이야. 혹시 나한테서 돈을 빌려가고 미안해서 그러는 것은 아닌지. 나는 그 돈을 그냥 줄 수도 있는데. 나는 정말 재호씨가 인간대접을 해줘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했는데. 어떻게 보름이 지나도록 나한테 연락도 없고 아무 소식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구나.” 크으응. 흰둥이는 안타까워서 청이의 발밑에 납죽 엎드렸다. 사람이였더라면 정말 청이언니를 살포시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 재호라는 남자를 길거리에서 찾아서 당장 물어다 청이언니앞에 끌어오고 싶었다. 검둥이에게 도움이라도 청해서 재호를 시원하게 물어주고 싶었다. 이렇게 착한 청이를 슬프게 하다니. 청이는 점점 수척해졌고 얼굴에 늘 어두운 그림자가 비껴있었다. 재호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에게 원한이 목이 꺽 막히게 쌓였는지 또 아니면 믿을 것이 더이상 없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눈빛은 항상 퀭해있었다. 그런데 반년이 지난 뒤 개밥 주러 온 할아버지한테서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였다. “흰둥아. 너 그 재호 생각나니? 글쎄 그놈이 여태 우리동네 근처에서 세방을 잡고 살았다지 뭐야. 그런데 어제 건달들이 한무리 와서 죽도록 팼단다. 인사불성이 되여서 집주인이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지뭐야. 그런데 왜 뭇매를 맞았는지 너 알아? 글쎄 이놈이 어느 공장의 여자아이를 꼬셔서 임신시켜놓고 돈도 많이 홀려서 쓰고는 또 잠적을 했다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여자아이한테 들켜서 그애 오빠가 사회불량배들을  많이 데리고 와서 한바탕 두들겨놓았단다. 에코. 쌤통이지. 우리 착한 청이가 불쌍하지.” 할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듣던 흰둥이는 더없이 흥분이 되여서 풀쩍풀쩍 뛰였다. 빨리 이 소식을 청이한테 알리고 싶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나도 빨리 청이한테 알릴 생각이야. 그런데 그 아이가 더 충격에 빠질가봐 걱정이구나. 모르는게 약이라고 재호의 본심을 알게 되면 청이가 더 슬퍼할가봐 걱정이구나. ” “그래도 알려줘야해요. 청이언니가 계속 저렇게 침울하게 지내는 것은 아직 미련이 남아서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나도 류랑개시절이 지루하다못해 죽을 것 같았어요. 다행이 할아버지가 나를 받아줬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길가의 꾸정물에 콱 박혀 죽을가 하고 생각도 했었어요. 길게 아픈 것보다 짧게 확실하게 고통받고 끝내는게 더 낫다구요.” “재호 이놈, 기다려봐. 내가 언젠가 검둥이랑 같이 갈기갈기 물어서 찢어 놓을거야. 우리 검둥이는 절대 날 버리지 않을 거라구. 검둥이보다 못한 놈.흥.” 흰둥이는 착한 청이를 얼려서 마음도 돈도 뜯어간 재호가 죽어라고 미웠다.     9 청이가 아이를 낳다   “흑흑,흑흑” 청이는 흰둥이를 쓰다듬으면서 슬프게 울었다. “흰둥아, 어쩜 좋니? 나 임신했단말이야.” 청이는 임신을 했지만 딱히 의논할 사람도 없었다. 시골에 있는 고모가 알면 지지리도 재수가 없는 애가 시원찮은 남자한테 감정도 돈도 다 빼앗기고 그 마당에 임신까지 했다고 하면 정말 다리몽둥이라도 분질러 놓을 것 같았다. 회사에는 더욱 말할 수가 없다. 사사건건 원칙을 내새우는 양홍이 알게 된다면 이것은 이유불문 해고였다. 산아정책사무실에서 안그래도 일년에 두번씩이나 가임녀성들을 검사시켜 계획외 임신을 막는 상황에 결혼도 안한 처녀가 애기를 가진 것을 알면 무조건 추방이다. 공장에서도 해고지만 공장단지를 관리하고 있는 촌에서도 부녀주임이 가만둘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류산을 하려니 이미 5개월이나 지나서 섣뿔리 류산을 할 수도 없었다. 이 마당에 그래도 실마리처럼 간직하고 있던 재호라는 작자는 관습적으로 녀자등을 쳐서 먹고 사는 놈이라고 하지를 않나. 청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루하루 수심에 차서 지내다나니 얼굴이 해쓱해졌다. 종이에 불을 감쌀 수 없듯이 청이의 배도 하루하루 커져갔다. 다행이 겨울이 되여서 작업복을 크게 입고 다녀서 그러는지 회사내에서는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워낙에 청이가 조용하고 눈에 안 띄여서 자기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설이다. 회사는 보름동안 긴 휴무에 들어갔다. 다른 직원들은 크고 작은 보따리를 꿍져서 고향집으로 간다고 희열에 휩싸여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면서 하나 둘씩 떠나갔다. 흰둥이도 사뭇 즐거웠다. 공장에 와서 쇠는 첫 설명절이 아닌가. 요즘 설이라고 할아버지가 맛있는 소세지도 주고 뜨문뜨문 우유도 한봉지씩 주곤 하였다. 회사 현장건물은 시커먼 자물쇠가 능청스럽게 걸려있다. 사무실건물도 빨간 복자를 새긴 알록달록 빨강색종이들이 대문마다 창문마다 붙혀져있고 경비실 대문에는 춘절을 경축한다는 초롱불이 줄느런히 매달려있다. 경비실 할아버지는 껌둥이와 흰둥이를 거느리고 회사 곳곳을 점검하러 다녔다. 숙소에 아직 남아있는 직원이 있는지 대문이 열려져있었다.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고 숙소건물에 들어서니 숙소가 열몇칸 쭈욱 보인다. 방마다 다 잠겨져 있었는데 유독 한칸이 열려져있다. 노크를 했지만 인기척이 없다. 슬그머니 문을 열어보던 할아버지는 경악을 한다. 허걱. 이게 웬 일인가?! 어지럽게 널려진 8인실 숙소에는 두층짜리 침대가 량옆으로 두줄로 나뉘여졌는데 청이가 그중의 한 밑층 침대에 누워서 얼굴이 땀벌창이 되여서 끙끙거리면서 누워있었다. 심한 고통을 겪는지 얼굴은 온통 일그러져있었다. “청이야. 너 대체 어디가 아픈거냐? 왜 그러는거냐?” 할아버지가 다급히 묻자 청이가 맥없이 대꾸했다. “할아버지. 나 살려줘요. 나 지금 애기 낳을 거 같애요.” “뭐라고? 어이크. 큰 일 날 소리. 그런데 왜 아직 이러고 있어. 빨리 병원 가야지. 가만있어봐. 내가 구급차 부를게. 좀만 기다려.” 할아버지는 너무 당황하여 가슴이 세차게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할아버지. 구급차 부르지 마세요. 나 혼자 여기서 낳을래요. “ “어이크. 사람잡겠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그리고 너희 가족한테 알려야지. 전화 줘봐. 내가 연락할게.” “아닙니다. 절대 연락하면 안되요. 나 누구도 알리기 싫어요. 정말 나혼자 여기서 낳을래요. “ 청이는 아픔을 참느라 입술을 사려물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억지로 말을 뱉어냈다. “안되겠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내가 우리 로친 불러올테니 혼자 잠시만 참고 있어.” 할아버지는 허겁지겁 숙소문을 나섰다. 회사에는 도움을 청할려 해도 휴무가 시작한지 사흘이라 모두 집에 가고 누구도 없다. 감쪽같이 애기를 낳느라고 허줄한 침대에 누워있는 청이, 그리고 몇발자국 뛰려고 해도 관절이 시큰거리는 별 볼일 없는 늙은 경비할아버지, 거기에 하루세끼 밥을 챙겨줘야 하는 개 두마리가 있을 뿐이다. 가족도 알리지 말고 구급차도 부르지 말라니. 저러다가 혹시 인명사고라도 나면 큰 일이였다. 할아버지는 머리가 띵해났다. 본능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할멈은 분명 어떻게 해야 할지 좋은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할멈을 데리고 숙소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숙소에는 청이가 없었다. 그 대신 고운 담요에 싸여있는 갓난 아기가 조용히 잠자고 있었다. “청아. 청아. 청이는 어디로 간거야?” 할아버지가 껌둥이와 흰둥이에게 물었지만 개들은 그냥 초롱불이 데롱데롱 달린 대문을 향해 컹컹거릴 뿐이다. 할머니가 갓난 아기를 안아올리자 아기가 꼼지락거린다. 앙앙 하면서 우렁찬 울음을 터뜨린다. 새 생명이 탄생한 것이다. “령감. 우리 평생 아기가 없었는데 이 아이는 천사예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선물이라고요. 우리 잘 키워봐요. “ 할머니는 어느새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적막한 공장건물과 붉은 초롱들을 뒤로 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꽃포대기로 아이를 꽁꽁 싸안고 집으로 향했다. 흰둥이는 검둥이곁에  붙어 서서 찬 바람을 맞으며 물끄러미 시커먼 대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를 감싼 꽃포대기는 유난히 알락달락했다.  
2    새옹지마 댓글:  조회:672  추천:1  2018-07-23
터벅터벅. 순희는 출근을 마치고 지친 다리를 끌며 집에 도착했다. 남편과 랭전중인 순희는 기분이 썩 좋지 않은 표정이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지. 대문에 공문이 한장 붙어있다. 자세히 보니 법원에서 내려온 전표(传票)가 아닌가. 순희님은 6개월전부터 집 대부금을 납부하지 않은 관계로 건설은행에서 로산구인민법원에 소송이 걸려왔습니다 …… 순간 머리가 뗑해났다. 아니. 대출? 요즘 왜 핸드폰으로 대출납부 메시지가 오지 않았지. 그러고 보니 메시지를 못받은지 퍼그나 오래된 것 같았다. 앗, 순희는 이마를 탁하고 쳤다. 폰번호를 설전에 바꾸었는데 은행에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메시지를 받을 리가 없었다. 집 대출은 매번 납부날자 며칠전이면 은행에서 친절하게 알람메시지가 날아오군 했다. 순희는 기계적으로 메시지를 보고 매달 갚아야 할 금액만큼만 대출통장으로 이체를 해서 납부했다. 그런데 공고문을 보고나니 정말 몇개월은 이런 메시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저런 일에 정신을 팔며 다니느라 정작 중요한 집대출은 몇개월이나 내지 않고 있었다. 이 공고문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얼마나 오랜 시간을 방치해둘지 모를 일이다.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만큼 착한 순희에게 법원에서 공고문이 내려오다니. 그것도 금융안건으로 말이다. 순희는 공문을 받아들고 손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거 어떡하지. 혹시 집이 경매로 넘어간 것은 아닐가. 벌금을 많이 안길려는가. 소송을 어떻게 대응해야지. 이거 남편이 알면 불호령이 떨어질텐데. 가뜩이나 남편이 넉넉치도 않은 상황에 친구에게 빌려준 돈때문에 지금 순희가 바가지를 긁어대고 있어서 랭전중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순간 순희의 머리는 하얗게 비였다가 다시 거센 홍수가 밀려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문고리를 따고 집에 들어섰다. 이튿날 순희는 공고문에 있는 법관 전화번호로 전화를 여러번 했지만 애매한 뜨르릉소리만 들릴뿐 받는 사람이 없었다. “이 법관은 자리를 안 지키고 대체 어디를 다니는거야. ” 할수 없이 순희는 은행 대출부 전화를 검색해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순희라고 하는데요. 집 대출 건 때문에 전화했어요.” “아, 순희예요. 순희라는 사람이 드디여 전화 왔네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복잡한 소리가 들려왔다. 순희가 전화를 걸어와서 반갑다는  소리였다. “아, 네. 저희들이 아무리 연락을 해도 찾을 길이 없어서 법원에 소송을 걸었습니다. 전표(传票)를 받았군요. 혹시 손님께서 전화번호를 바꾸셨나요. 10년을 꼬박꼬박 갚으셨는데 갑자기 안 갚고 사라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은 했지만 남편 전화도 바꾸었는지 역시 연락을 취할 수가 없었어요. 하도 연락이 안되여서 정상적인 법 절차로 진행을 했습니다. ” 그쪽에서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설명을 했다. 아, 이런 일이였구나.  남편도 몇년전에 데이터량 관계로 전화번호를 바꾸었으니 그야말로 은행 대출부와는 아무런 연락도 닿을 수가 없는 상황이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지요. 고의적으로 갚지 않은게 아니고 단지 메시지를 못받고 잊어먹고 안 냈는데요.” 구차하지만 구구절절 변명을 늘여놓았다. “네, 그래서 저희들이 변호사 한분을 소개해드릴게요. 손님과 연락이 안되여서 대리변호사가 여태 법원과 시간을 벌고 있었습니다. 오래동안 연락이 안되면 집이 경매로 넘어갈 수도 있어서 말입니다. ” 순희는 철렁하는 가슴을 부여잡고 변호사 연락번호로 바로 전화를 했다. 변호사는 정중한 목소리로 자신이 이제 피고인과 연락이 되였으니 여차여차 리유를 설명하고 날을 약속잡아 법원으로 함께 가서 조정을 하자고 했다. 법원까지 가야 한다니 순희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기업도 운영하고 자질을 높이려 여러가지 공익활동에도 몸소 참여하는 순희가 모범시민상을 받아도 모자랄 판에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야 한다니 기가 막힐 일이였다. 이건 정말 말도 안돼. 휴.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였지. 남편하고 상의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아침에도 밥을 먹을 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되려 삼켰었다. 시원하게 혼줄 날 것이 뻔했다. 자기가 돈 뜯겼다고 앙앙불락하더니 순희녀사님도 이런 일을 만들 수가 있냐고 랭소할 것이 훤히 보였다. 그리고 애들한테 밥상머리에서 구구절절 엄마를 비난할 것이다. “너네 엄마는 말이야. 혼자 똑똑한 척하더니 지금 법원놀음하게 생겼단다. 흐흐흐흐” 아휴, 생각만 해도 신경이 곤두섰다. 여태 애들만 내편이구나 하고 버티고 살아왔는데 애들은 또 엄마의 이런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일가. 순희는 억울한 나머지 깊은 고뇌로 허덕이던 몇개월 전으로 저도 모르게 달려갔다.   지난 설을 앞둔 12월이였다. 남편과 같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련이은 인원감소로 그리고 건물임대기한 만기로 지금보다 더 작고 아담한 공간으로 이주하기로 했다. 설전이라 오더가 넘쳐나는데다가 하청업체 관리도 해야 하는 판국이였다. 한쪽으로는 트럭으로 기계설비를 실어나르며 이사를 하고 한편으로는 자재업체가 설휴가에 들어 가기전에 자재를 확보해야 하기에 미리미리 자재대금을 송금해야 한다. “으흠, 이제 보니 전자대문이 원할하지 않던데 레루가 망가졌더군. 그거 내가 큰 돈 들여서 설치한 것인데 고쳐놓게나.” “숙소에 벽에도 못을 마음대로 박아놨던데  그거 다 수리해주게.”  건물주가 이사를 간다고 하니 심술을 부리는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따박따박 대꾸를 하면 더 불리해질게 뻔했다. 이 판국에 또 시집편 삼촌이 사놓은 집이 있는데 역시 한국으로 일하러 떠나면서 임대를 순희네한테 맡겼다. 그런데 그 집이 또 물이 새여 아래층을 다 후줄근하게 적셔놓았다. 아래집에서 배상을 해내라고 하니 세입자는 건물 자체 상수도가 터진 것을 자기는 부담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멀리 있는 삼촌은 자기가 살다가 물이 터진 것도 아닌데 세입자가 물어줘야지 어떻게 자신이 배상을 하냐고 화를 내는 바람에 설득은커녕 되려 순희가 구정물 세례를 받은 셈이다. 이런저런 일로 시달림을 받고 있는데 원래 건물주가 한수를 더 친다. 전화번호를 명의변경을 못해주겠단다. 그런 의무가 없단다. 정말 고약하다. 회사 전화를 설치할 때 건물주 이름으로 신청한거라 핸드폰번호도 건물주 이름으로 신청이 되였던 것이다. 이사를 가는 마당에 건물주와 따지고 들면 또 다른 피해가 생길 것 같아 화김에 새 전화번호를 땄다. 회사일도 많고 가족일도 복잡한 상황이라 부지런히 전화번호를 변경했다고 메시지를 날렸지만 정작 자신의 은행대출부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실컷 절하고 자기집 조상은 술을 안 권한 셈이다. 그뒤로 설연휴가 들어가고 설 쇠고 회사 복귀해서는 새로 이사한 공장을 꾸미고 정리하느라 두달이 지나갔다. 애들도 졸업반 마지막학기 개학이라 눈코 뜰새 없이 바삐 돌아쳤다. 그 나날들은 여기저기 뛰여다니느라 머리들어 태양도 본적이 없었던 거 같다. 팽이처럼 돌아치는 인생살이였다. 그래도 방향을 잃지 말아야지 하면서 견뎌온 나날들이다. 순희는 여태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법원에서 전표가 날아오다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보듯 놀라고 답답한 마음은 무거운 돌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 상황을 남편한테 알려야 한다. 살림을 대체 어찌하냐고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다달이 물어야 하는 은행대출을 메시지를 못받아서 안냈다고 하면 믿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도 반년씩이나 안내고 있었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남편앞에서 온갖 꼼꼼한체를 다 하면서 쓸데없이 헤프다고 얼마나 닥달을 했던가. 이제와서 순희 실수로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 남편의 얼굴은 어떨가. 순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장변호사입니다. 담당법관하고 이번주 수요일날 약속 잡혔으니 그날 오전 여덟시까지 법정에 와줄 수 있으시죠.” “네. 그리하겠습니다.” 순희는 약간은 무서웠지만 그래도 빨리 해결을 봐야 한다는 생각에 냉큼 대답했다. 막막하다고 생각할 때는 막 해야 한다던 말이 생각이 났다. (그래. 까짓거 법정에 갔다와서 보자. 어떤 판결이 날지 나도 모르니까. 그러고 이게 머 다 내 잘못인가. 나도 일부러 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처녀가 애기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고 순희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이젠 자기방어단계에 들어섰다. 그랬더니 나름 떳떳해진거 같기도 하고 숨도 길게 나오고 어깨도 쫘악 펴졌다. 오랜만에 홀가분해졌다. 살것만 같았다. 래일은 또 래일의 태양이 떠오르겠지 하면서 수요일을 기다렸다. 수요일 아침 일찍 순희는 콜택시를 타고 시내에 있는 법원으로 향했다. 난생처음 법원이라는 곳을 가본다고 생각하니 그곳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설레이기도 했다. 이미 엎지른 물인데 죽으라는 법이야 없겠지 하는 심정이다. 죽은 돼지는 따가운 물을 무서워 하지 않는다더니 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이렇게 모범이고 기품 있는 시민이요 하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 정장에 스카프까지 착용을 했다. 아무렴. 내가 낸 세금으로 일을 하고 먹고 사는 법관인데 설마 나쁜 의도로 체납한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순희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을거란 생각도 기 죽지 않으려고 억지로 꾸역꾸역 떠올렸다. “변호사님. 여기 사자 두 마리가 서있는 법원 동쪽 문에 도착했습니다.” 장엄한 법원앞에 내린 순희는 그 위풍에 슬슬 겁이 질렸다. 죄를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떠오르면서 땀구멍이 스륵스륵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목 뒤덜미도 섬뜩해지는 것 같앗다. “네. 동문이 안 열려있을 것입니다. 구석에 보면 쪽문이 있는데 거기로 6층으로 오셔서 저한테 전화 주세요.” 변호사는 변호비용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종일관하게 침착하고 친절하게 순희를 대했다. 다행이다. 변호사가 괜히 변호사겠는가. 들이마신 먹물은 얼마며 머리도 얼마나 령리하겠냐는 생각에 다소 안심이 갔다. 6층 복도에서 변호사를 만나니 변호사가 깍듯이 인사를 한다. “먼저 여기 의자에 앉아서 안건을 설명드리겠습니다. 2008년부터 건설은행융자로 노산구에 위치한 아파트를 구매했지요. 순희님과 순희님 남편 두분의 담보로 융자 50만을 받았고 20년에 거쳐 다 갚기로 했죠. 거의 10년을 꼬박 갚았는데 연락두절이 되여서 건설은행 행장이 순희님한테 소송을 걸었구요. 현재 남은 금액은 35만이고 그에 해당한 법원에서 받을 소송비와 로펌에 지불해야 할 변호비는 여기에 쓰여 있는 금액 그대로입니다. 융자할 당시는 50만이지만 리자를 다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첫 몇해는 거의 리자를 갚는거로 되여있기 때문에 원금은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헉, 이렇게 많다니. 만원이 펄쩍 넘어갔다. 이 돈이면 대출을 몇개월 갚을 수 있었다. 정말 후회막급이였다. 배가 아팠다. “이 제의에 동의를 하시고 조정을 받아들이시면 이 비용에서 소송비와 변호사비용을 절반을 깎아줍니다. 그리고 대출을 일시불로 완납할 시 변호사비용이 또 30프로 절감이 됩니다. “ “절반? 30프로?” 순희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맞고소를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누가 하겠는가. 순순히 조정을 받고 절반 비용 절감을 해야지. 그런데 완납을 하면 30프로 내려준다는데 30몇만원을 어디 가서 한시에 내놓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50프로 내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것 같았다. 결국은 법정출두라는 것이 법관과 작은 사무실에서 간소하게 의논하고 서류 작성하고 싸인하고 끝났다. 체납금을 내고 소송비 그리고 변호사비를 내면 일은 원만히 해결된 셈이다. 돈으로 액을 피했다고 생각하자. 어찌 좋은 날만 있으랴. 인생살이 새옹지마라고 이 일을 통해 평생을 살아도 못할 법정구경도 했으니 경험 넓혔다고 생각하자. 헌데 이 일을 어떻게 남편한테 말을 해야 할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순희는 매사에 깐지고 세심하고 책임감이 있는 녀자로 남편에게 알려지지 않았는가. 남편이 지인에게 돈을 빌려주어 왕창 뜯겼을 때 사정없이 몰아부쳤지 않았던가. 이런저런 새로운 아이템을 가동시켜보려고 애쓰다가 손해보면 구구절절 잔소리를 늘여놓지 않았던가. 그래서 남편은 아무 일이나 점점 순희한테 털어놓기 싫어했다. “아니, 돈 빌려간 사람은 골프 치러도 잘 다니던데 우리 돈은 언제 갚는대요. 내가 그렇게 빌려주지 말자고 했는데 기어코 빌려주더니.” “아참, 그만하라구. 누구는 받고 싶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가. 돈이 없다는데 난들 어떻게 하겠소.”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듣는 시늉이라도 하던 남편은 연이은 바가지 긁는 소리에 순희를 보면 슬슬 피해다녔다. 순희는 택시를 불렀다. 둘이 랭전중이지만 곧장 회사로 가서 남편한테 알려야 했다. 이젠 더 이상 지체할수가 없었다. 대체 이 법원 전표는 왜 나한테 날아왔지. 내가 무얼 잘못했지. 남편한테 무엇부터 먼저 알려야 하지. 일이 꼬인데는 무슨 원인이였지. 순희는 택시안에서 눈을 감았다. 심한 어지럼증때문인지 멀미때문인지  일그러진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보. 할 말이 있어요.” 순희는 울며 겨자먹기로 남편한테 실토를 했다. 눈을 딱 감았다. 순희가 남편한테 노발대발했던 것처럼 자신도 심한 소리를 들을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이게 정말이요. 그런데 왜 진작 나한테 말을 하지 않았소. 정말 혼자서 법원 갔다오는 길이요? 이 아둔한 마눌이 글쎄. 이런 일은 남편인 나랑 같이 해결해야지. 혼자 무섭지도 않았소? 그래서 요즘 얼굴이 반쪽됐구만. 난 또 나한테 화가 안 풀려서 당신 마음이 심란해서 그러는가 했지.” 의외로 남편은 순희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흑흑.” 비난대신 관심이 섞인 위로의 말을 들으니 그동안 옥죄였던 마음의 바줄이 스르르 풀리면서 순희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자신이 그동안 남편의 잘못을 쪽집게 집듯 집어내면서 비난한데 대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제 잘못으로 그만 큰 손해를 보게 됐어요. 흑흑.” “괜찮소. 돈은 또 벌면 되지만 마눌 혼자 큰 일 때문에 속 썩이게 해서 미안하오.” 남편은 얼른 순희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위로를 해주었다. “혼자 법원까지 가게 해서 정말 미안하오. 그래도 당신이 여장부요. 큰 일을 했소. 우리 애들한테도 자랑스럽게 얘기하겠소.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 우리 식구들 간만에 외식하는게 어떻소. ” “욕 먹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외식까지 시켜줘요?” “허허. 나도 요즘 당신 눈치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먹은 거 알지. 그리고 당신도 이 일로 속 썩이느라 얼굴이 헤쓱해졌구만. 애들도 힘들게 공부하는데 오늘만큼은 맛있는거 먹고 푹 쉬게 하고 그리고 엄마가 얼마나 당당한지도 알려줘야 하지 않겠소.” “아니. 무슨 자랑할 일이라고. 애들한데까지.” “아니요. 우리 애들도 이젠 다 커서 집안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리고 장차 커서 살아가면서 무슨 일에 부딛칠 수 있는지 알아야 할 일이요. ” 순희는 남편의 리해와 지지가 고마웠다. 그동안 대출사건때문에 혼자 속을 끙끙 앓은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자자. 얘들아. 오늘은 우리 엄마를 위해서.” 남편과 아이들의 환소속에 순희는 쑥스럽게 잔을 들었다. 혼자 긴장하고 무서워 했던 날들이 안개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였다.    
1    사기 댓글:  조회:910  추천:1  2018-05-03
미니소설 사기 김영분    모 쇼핑가 2층에 위치한 강당이다. 안에는 어림잡아도 백명은 넘을 듯한 할머니들이 얼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박수를 치면서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다. 무대에서는 밴드가 곡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띄우고 검정 쟈켓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준수한 중년 남자가 마이크를 현란하게 돌리며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   “잘한다. 잘해. 앵콜.” “박지점장이 최고여.”  중년남자를 둘러싸고 앉은 객석에서 흥에 겨운 할머니들이 소녀처럼 얼굴이 상기되여 무대를 향해 소리지르고 있다. 흘러간 청춘이 야속한참에 터프하고 흥겨운 메들리는 가을에 말라가는 락엽같은 할머니들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다. 숙자할머니도 부자연스럽게 박자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며 노래를 따라불렀다. 복덩이 홍보관이 해변의 작은 도시에 자리잡은지 한달이 되어간다. 숙자 할머니는 아파트에 같이 사는 할머니들이 나누어 주는 작은 쪽지를 받고 추천 받아서 열심히 출석도장을 찍으며 다니고 있다. 여기에서는 매일 노래와 춤으로 할머니들을 즐겁게 해준다. 집으로 돌아갈 때는 휴지나 간장과 같은 생필품을 공짜로 나누어 준다.  그리고 운이 좋을 때는 점심에 간간히 떡국도 얻어먹을 수 있다. “아이구 사모님, 래일은 건강에 억수로 좋은 천일염으로 선물을 준비했으니 친구들을 데리고 꼭 나오세요. 자, 이 쪽지는 추천서이구요. 많이 데리고 오시면 선물도 많이 드립니다. ” 얼굴이 허여멀쑥한 박지점장은 푸짐한 선물과 구수한 입담으로 한달사이에 허리를 뒤로 제낀 로파로부터 90도로 구부린 할머니들까지 골고루 불러모았다. “사모님. 오늘 즐거우셨나요. 많이 웃어요. 웃어야 복이 옵니다. 웃으니 너무 예쁘잖아요. 소녀같아요. 래일은 더 재미있는 얘기를 준비했습니다.” 풍선처럼 마음이 들뜬  할머니들을 박지점장은 친절하게 배웅을 하고 있다. 순간 숙자할머니는 황홀하다. 70평생에 언제 이렇게 사모님이라 불리워보고 왕후대우를 받아봤을가. 원수같은 령감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다 크지도 않은 아이들과 50을 갓 넘긴 자신을 저버리고 차사고로 그만 황천길로 먼저 가버렸다. 하늘나라로 떠나간 사람은 발 펴고 자는지 모르지만 령감이 떠나간 그날부터 숙자할머니는 혼자  두 남매를 공부시키고 시집장가 보내느라 허리 펼새가 없었다. 살아 생전에도 무뚝뚝하기로 손 한번 살뜰히 잡아보지 못했다. 자식들은 다행히 둘다 대학을 나오고 혼기에 맞게 반반하게 시집장가를  가서 이젠 자기 살림을 온천히 하고 있어 그나마 덜 억울하다.     하지만 숙자할머니는 쉬지 않고 돌아가던 기계가 기름칠 할 때가 된 것처럼 여기저기 삐거덕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몸에 부품들이 제 기능을 충실히 하지 못할 신세가 되였다. 삭신이 쑤시고 아파서 남들이 다 한국 가서 로후대책으로 돈벌이 한다는 그 흔한 보모노릇도 못할 지경이여서 딸네 집으로 와서 살기로 했다.  “경애야. 이봐라. 오늘은 몽고표간장이다. 요즘 안 그래도 간장 살려했더니 잘 됐다. 이 에미가 공짜로 얻어온거라 좀 내다보거라.”   “엄마두 참. 공짜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그 사람들이 할머니들한테 매일 공짜선물 주면서 잘 구워놓은  다음에 비싼 물건들 팔려고 그러지요.” 경애는 할머니들을 노리는 홍보관 사람들이 아니꼽던 참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래그래 니 아는게 많다. 이젠 에미 말이라면 그냥 메주로 콩 쑨대도 못 믿는구나. 이래서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고 했지라. 내 팔자에 무슨……흑흑” 어느새 숙자할머니는 서러운듯 손등으로 눈굽을 훔쳤다. 경애는 홀로 자식들을 위해 애를 쓴 엄마가 70이 되고 몸이 쇠약해지니 판단력도 흐려지고 유난히 자식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숙자할머니는 끝내 홍보관에 갔다 오더니 4000원짜리 침대커버를 두개 사왔다. “경애야, 빨리 와봐. 이건 토마린성분이 들어간 침대커버다. 토마린이 있어 원적외선을 방출한단다. 관절염도 고치고 실면증도 고칠 수 있대. 그리고 얼마나 튼튼한지  20년을 써도 문제 없단다. 너무 좋다 해서 두개를 샀다.”  “헉, 엄마!” 경애는 너무 놀라 소눈방울이 되여서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 좋으면 하나 사면 되지 그것도 두개씩이나. 지금 4000원하는 침대커버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설령 있다 해도 우리가 그리 비싼 커버 쓸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경애는 련주포처럼 마구 쏟아냈다. “아니. 절대 비싼 것이 아니다. 박 지점장이 자신을 믿고 한번 써보라고 했어. 그 사람 참으로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이 침대커버를 펴고 자보면 후회 안한다고 했어. 만병통치한단다.” 숙자할머니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석쉼한 목소리에 힘을 실으려고 안깐힘을 썼다. “엄마때문에 내가 못살아. 참 내원. 아, 나 몰라. 성준이한테 전화 할거예요.” 경애는 씩씩거리며 남동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성준아. 엄마가 오늘 4000원짜리 침대커버를 두개나 사셨다. 어떡해. 너가 좀 말해봐.” 경애는 홱 하고 전화기를 엄마손에 쥐여주었다. “그래. 에미다. 성준아.” 숙자할머니는 잘못을 저지른 소학생처럼 풀이 죽었다. “엄마, 침대커버 사셨어요?” “그래. 좋다고 해서 너까지 주려고 두개를 샀는데 글쎄 너네 누나가 내가 비싸게 주고 샀다고 야단을 치는구나.흑흑”숙자할머니는 억울하다 못해 흐느끼였다. “엄마.그거 우리 장모님도 사왔는데 내가 잠을 자보니 몸도 상쾌하고 개운하고 좋더라구요. 나 안그래도 엄마하고 누나한테 알려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우리 엄마 정보력이 좋아서 금방 알고 사셨네요. 참 잘했어요. ” “성준아, 정말이니? 그거 자보니 그렇게 좋디?” 숙자할머니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고개를 돌려 딸을 바라본다. “경애야, 전화 받아봐라. 내 말이 안 틀렸다잖아.” 경애는 눈쌀이 꼿꼿해서 전화기를 콱 나꾸어챘다. 수화기 저쪽에서 동생 성준이의 느긋한 목소리가 전해왔다. “누나, 엄마때문에 많이 당황했지? 엄마가 속으신거 같은데 즐겁게 샀으니 우리도 편히 받아주자고. 그 돈은 내가 낼테니 누나랑 나랑 효도하는 셈치고 속아주는게 어때? 다음엔 절대 속지 않게 내가 단단히 얘기해놓을게.” 앗. 성준아. 못된 놈. 언제 이렇게 철 들었니. 이러면 누나가 민망하잖아. “아. 그렇니. 이 침대커버가 그렇게 좋은 거야. 오. 알았다. 우리 엄마 참 잘 하셨네. ” 경애는 웃으면서 얼른 엄마손에서 커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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