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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씨의 구분
김정룡 재한 조선족칼럼니스트
안재을의 중편소설 <정걸세계에로(도라지 2005.9~10)>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박주국과 류씨 사이에 자식이라곤 수향이라고 부르는 딸애가 하나뿐인데 그마저 벙어리다. 수향이는 시집갈 나이가 꽉 찼지만 벙어리인 탓에 마땅한 대상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에 마누라를 한국에 보내고 홀아비신세로 살고 있는 철민이와 남몰래 재미를 보고 임신한다. 수향이는 배가 불어가게 되자 임신사실을 숨길 수가 없지만 아이아버지가 누구라는 것만은 한사코 비밀에 붙인다. 류씨는 처녀가 임신한 것도 그렇거니와 애비가 불분명한 애를 어떻게 세상 빛을 보게 할 수 있느냐며 떨어버리라고 닦달한다. 허나 주국의 생각은 달랐다. 다 익은 과일이 따먹는 임자가 없이 저절로 땅에 떨어져 썩어간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는 것이다. 그것도 그렇거니와 손주를 안아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면서 기어코 낳아 기르겠다고 고집부리는 딸애에게 뒷심이 되어준다. 수향이는 방치돌 같은 아들을 낳는다. 철민이는 슬그머니 아이이름을 광(光)이라 지으라고 수향이한테 일러준다. 그리하여 아이가 이름이 있게 되었으나 성이 문제였다. 주국이는 마치 집집마다 아이가 태어나면 제멋대로 이름을 짓듯이 외손주의 성을 지어주기로 하고 인근마을에 없는 ‘나갈 진(進)’을 선택했다. ‘진광’. 안재을 씨는 이 이야기를 개괄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이렇게 진명촌 밀양 박씨네 집에서 조선족 씨족사에 없는 나갈 진씨가 발족되었다. 참 울다가도 웃을 일이다.”
여기서 ‘조선족 씨족사’라는 말에 상당한 어폐가 있다. 만약 문학에서는 성과 씨의 구분이 없이 혼동하여 써도 문제가 없다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문학도 상식을 따라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면 왜 어폐가 있는가를 말해 보려한다.
조선민족의 성씨는 중국 성씨문화를 본 따 사용해왔기 때문에 먼저 중국의 성씨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朱駿聲의 <<說文通訓定聲)에 의하면 “성이란 것은 사람이 태어난 바를 나타낸다. 女라는 글자와 生이란 글자로 분해되는데 회의자다. 이때 물론 生을 聲字로 볼 수 있다. 옛날의 신령스러운 성인들은 모두 그 어미가 하늘에 감하여 아기를 낳아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칭하여 하늘의 아들(天子)이라고 하는 것이다. <春秋>隱公8년조에 좌씨가 단 주해에 이르기를 ‘하늘의 아들이 덕을 세울 때 그 태어난 바를 따라서 성을 받는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생각건대 신농의 어미가 姜水에서 살았고, 黃帝의 어미가 姬水애서 살았고, 舜의 어미가 姚虛에서 살았기 때문에 바로 그 어미가 산 지명을 따서 그 성을 삼았다. 그러므로 성이란 어미의 생한 바를 따르는 것이다.”
성이 어미가 산 지명과 연관이 있다면 씨도 역시 마찬가지로 산 지명과 연관이 있다. 이에 관해선 <<通志·氏族略序>>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삼대(夏商周)에 성과 씨를 구분하였다가 漢代부터 성과 씨의 구분이 없어진다. <<통지·씨족약서>>에 의하면 “삼대 이전에는 성과 씨를 둘로 나누고 귀한 자는 씨가 있고 천한 자는 이름만 있고 씨는 없었다. 그러므로 성을 씨라 부를 수는 있으나 씨는 성이라 부를 수 없다.”고 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지으면서 성과 씨의 구분을 없애고 혼동하여 썼다(姓氏之稱,自太史公始混而爲一). 허나 성과 씨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예하면 ‘복희는 성이 풍씨였다.’를 결코 ‘복희는 씨가 풍성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씨는 존칭을 나타내는 의미가 있을뿐 결코 성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민족의 성씨는 중국성씨문화를 본따서 사용해왔지만 중국인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 한족들은 조적 혹은 적관이 있기는 하나 조선민족의 본관과는 개념이 다르다. 한족들이 말하는 조적 혹은 적관은 조상들의 고향을 의미할 뿐 조선민족처럼 ‘밀양 박씨’ ‘김해 김씨’ 식으로 ‘무슨 왕씨’ ‘무슨 진씨’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족은 한고향이라는 향토의식이 뿌리 깊지만 조선민족처럼 초면인데도 본이 같다고 해서 벌을 따져보고 환갑이 넘은 노인이 새파란 젊은이를 삼촌벌이나 형님벌이 된다고 당장에서 깎듯이 대하면서 친척을 만났다고 기뻐하는(한국에서 아직까지 이런 기풍이 심하다) 등 유사한 행위가 없다.
조선민족은 이 본관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의 머리를 무겁게 지배하고 있어 씨를 붙이기를 좋아하며 성문화를 성씨문화라 하거나 상대의 성을 물을 경우 ‘성씨가 무엇인가?’ ‘성씨를 어떻게 쓰는가?’하면서 씨를 붙인다. 한족은 상대의 성을 물을 경우 씨를 붙이지 않으며 대답하는 사람도 자신의 성에 씨를 붙이지 않는다. 조선민족이 성에다 씨를 붙여 ‘최씨’ ‘김씨’라 부르거나 본관에 씨를 붙여 ‘밀양 박씨’ ‘김해 김씨’라고 부를 경우 씨는 상대를 높이기 위해 붙이는 것이지 결코 씨가 성을 대체하거나 본관을 대체하지 않는다.
현재 중국조선족은 대다수가 성과 씨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고 또 본이란 무엇인지 모르며 아울러 씨를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인이 조선족을 만나 대화할 경우 거개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화룡, 왕청’이라 대답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허나 한국인이 묻는 것은 조상의 고향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니 할아버지(조상을 뜻함) 고향이 어디냐?”고 하면 절대다수가 “모름다.”고 대답한다. “그럼 본이 무엇인가?”고 물으면 아무리 나 어린 애들마저도 본을 모르는 조선족은 하나도 없다. “그 본이 곧 조상의 고향이자 당신들의 고향이요.”라고 말해주면 “우린 그런 걸 모름다.”고 툭 쏜다. 쉽게 말하자면 조선족은 자신이 밀양 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밀양’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상대가 성을 물으면 ‘경주 최씨’ ‘전주 이씨’라고 대답한다. 혹은 초면에 인사 나룰 때 자신의 성에다 씨를 붙여 통성명한다. 남들 앞에서 ‘우리 최씨네는 여자들이 드살이 세다.’하거나 집안끼리 모여 ‘우리 선산 김씨는 술을 잘 마신다.’는 등 자기네절로 성이나 본에다 씨를 붙여 말한다. 이렇게 자신의 성 혹은 본에다 씨를 붙이는 것은 대단히 실례이다. 왜냐하면 씨는 상대를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사용해선 안 된다. 만약 자신에게 씨를 붙이면 자기 스스로 높이고 존경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말할 때 절대 씨를 붙이지 말고 ‘김가’ ‘최가’ 혹은 ‘밀양 박가’ ‘전주 이가’라 말해야 한다.
모두어말하자면 씨는 상대를 높이는 존칭이지 결코 성이 아니며 성을 대체할 수도 없다. 때문에 성과 씨, 본과 씨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할 때 될 수 있는 한 씨를 붙이지 말고 그냥 ‘김가’ ‘최가’라 하는 것이 합당하다. 만약 새로운 성이 나타나면 마땅히 객간적인 서술이기 때문에 ‘조선족 성씨역사에 없는 새로운 0가가 발족되었다.’고 말해야지 안재을 씨처럼 ‘조선족 씨족사에 없는 진씨가 발족되었다.’고 말한다면 상식에 어긋난다. 한 가지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중한일 동양문화권에서 사용하고 있는 씨란 말은 원시 씨족사회를 지칭하는데서 유래된 것이라는데 대해선 더 의논의 여지가 없다. 중국학자들의 연구(오천명저, 중국신화연구)에 의하면 은상시대까지 중국(중국이란 국호는 3천 년 전 주나라 초기에 생겨났음)에는 2만 여개 씨족이 있었는데 각기 자기네 씨족명칭에 따라 성을 붙이게 되었다(華胥氏란 화서는 성이자 씨족명칭이다). 그러다가 주초에 분봉제와 정전제의 의해 華之諸族과 夏之諸族이 융합되어 화하족으로 통합됨에 따라 씨족이 부족으로 부족이 민족으로 변이하는 과정에서 본래 혈통을 중심으로 되어 있던 씨족 관념은 점차 희미해지고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관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의 통일국면을 맞게 됨에 따라 부족관념이 거의 사라졌고 또 漢代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통일중앙집권제가 확실하게 자리매김 되었고 경제, 문화, 등 다 방면에서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함에 따라 본래 화하족이 한족(한족은 수만 갈래 혈통이 문화를 토대로 묶어진 민족임. 민족이란 개념은 혈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를 공통분모로 이루어진 집단공동체이다.)이라는 하나의 민족으로 대통합되었고 또 한족이란 통합민족 개념의 등장에 따라 주초 2만여 개 성씨가 대략 470여 개만 남게 되었던 것이다. 백성이란 사회밑바닥에 있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굳어져왔는데 이는 성과 씨의 구분, 즉 성은 혈통을 의미하고 씨는 존칭을 나타내는 것으로 변이된 결과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절대 ‘百氏’라 말할 수 없다.
중국은 역사기재가 가장 유구하고 가장 체계적이고 가장 완벽하기 때문에 중국인의 씨족, 부족, 민족역사에 대해서 일단 파고들면 일복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조선민족은 역사기재가 형편없이 부재하기 때문에 자민족사를 연구하려면 엄청 힘들다. 예하면 한국역사교재나 통사류의 서적이거나 전문 서적을 뒤적거려보면 한반도 상고사에 관해 대충 얼버무리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우리의 주제와 관련되는 조선민족 씨족사에 관해선 도통 알 수가 없다. 단군신화로부터 시작되는 고조선사는 씨족이 아닌 부족사회부터이다. 그리고 삼한(변한, 진한, 마한)의 역사도 대충 78개 부족국가였다는 것과 민속 풍속을 서술하고 있으나 이러한 史實은 전부 중국고전 위서, 한서, 북서, 양서, 당서 등의 기재를 베껴온 것들이다. 여기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씨족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씨족사란 말의 사용을 삼가라는 뜻이고 더욱이 씨족사가 결코 성씨사가 아니며 양자를 혼동하지 말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조선민족이 본격적으로 성씨문화를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 겨우 조선조 중후기의 일이기 때문에 씨족사란 말은 상당한 어폐가 있으며 가령 성씨역사, 성씨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에도 우리 머리에는 반드시 씨가 존칭을 나타내는 의미만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필자도 이 글에서 성에다 씨를 붙여 성씨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는데 이것은 조선민족의 관습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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