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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본지 129호에 실린 “세상사람들 다 형제가 아닙니까?”란 기사를 읽고서
나는 본지 129호에 실린 “세상사람들 다 형제가 아닙니까?”란 기사를 읽고 다시 림민호 교장선생님을 머리에 떠 올리게 되였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나의 모교 교장선생님이시다. 내가 대학교를 다닐 때에는 그이는 이미 문화대혁명가운데서 박해를 받아 세상을 뜬 뒤여서 비 록 그의 직접적인 교육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나의 모교 제1임 부교장(당시 연변대학 교장으로는 자치주 주장 주덕해동지가 겸임하였는데 학교의 일상 사무는 림민호 교장선생님이 주관하시였다.)이시고 연변대학을 창립하는데 서 탁월한 기여를 하신 분이시고 중국 조선족의 제1대 걸출한 교육가라는 데서 그이를 매우 사모를 한다. 그러기에 림민호 교장선생님에 대한 자료들 을 즐겨 읽었다. 오늘 그이를 사모하면서 내가 본 자료와 선배님들에게서 들어 온 이야기들을 간략하여 이 글에 올린다.
1. 항일구국운동의 선구자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그이는 1920년 3월 룡정동흥중학교(지금의 룡정3중)에 입학하여1923 년 4월에 졸업하고 화룡현 동성촌 룡천동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이 듬해 2월 명을 받고 화룡현 투도구에 가서 "동아일보"투도구지국 기자와 상 점주인의 신분으로 지하사업을 하셨다.
1928년 9월 중순, 조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하였 으며 1932년 5월 동 방대학교에서의 4년간 학습생활을 끝마치고 9월 조선 함흥, 흥남 지역으로 파견되여 지하사업을 하다가 3월 28일 흥남에서 일본 헌병에 체포되여 6년 판결을 받고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되였으며 감옥에 서 감옥당국과 맞서 싸웠기에 1년 연기되여 7년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1940년 출옥한 그이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다가 1942년초, 돈화에 서 일자리를 찾았다. 1945년 일제가 무조건투항을 선포하여 광복을 맞이한 후 돈화현 부현장으로 사업을 하였으며 1946년 10월 "연변일보" 전신인 "길림일보" 조선문판의 총편집으로 임명되였다.
2. 중국 조선족의 제1대 걸출한 교육가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영용한 항일투사였을 뿐만아니라 또 연변대학창립 에도 탁월한 기여를 하신 분이시다. 1948년초, 당시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있던 림춘추와 함께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석하시여 연변에 민족대학을 꾸릴것을 제기하였으며 그해12월에 연변대학주비위원회가 성립되였는데 주 비위원회 주임으로는 림춘추, 부주임으로는 림민호가 임명되였으며 구체사 업은 림민호가 맡아 하도록 하였다. 그이는 학교의 성질을 문과, 리공과, 의과 농과를 망라한 종합성 민족대학으로 규정하였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전국 각지에서 조선족 지식인들을 물색하여 손수 초빙장을 써서 그들에게 보내여 교원문제를 해결 하였는데 가장 큰 곤난은 경비문제였다. 그때는 국내전쟁이 한창인 때여서 동북인민정부거나 길림성 정부에 손을 내밀 형편이 못되여 조선족 유지인사들과 함께 “연변대학리사 회”를 건립하여 상점, 약방, 공장을 꾸려 갓 창설된 학교경비를 보탰으며 유지인사들을 동북 각지에 파견하여 조선족들에게서 의연금과 물자를 지원 받기로 하였다. 결과 동북 각지 조선족들이 쌀과 돈, 그리고 학교에 수요되 는 많은 물품들을 무상으로 지원하였다.
초창기 학생이였던 선배님들의 말에 의하면 교실이 없어 공업학교를 빌어 쓰다가 1950년대초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올 때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 둥산이였으며 불에 타버린 일본관동군 병영이 벽체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교장선생님은 친히 교직원과 학생들을 이끌고 불에 타 버 린 병영을 수리하여 교실로 쓰고 새로운 사무청사와 실험실을 설계하여 짓 고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은 이렇게 조선민족대학의 창립과 발 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시고 피타는 노력을 기울려 오시였으며 당의 교육방 침을 관철집행하고 근검하게 학교를 꾸려 특색있는 민족대학의 교풍을 수립 하고 교육과 교수개혁을 진행하여 연변대학의 창립과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쌓았다. 하여 그이는 1950년 10월, 동북조선족을 대표하여 국경1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하시여
3. 불행한 인생
1966년에 일어난 중국의 "문화대 혁명"에서 수많은 좋은 간부들을 박해를 받았다. 림민호 교장선생님도 례외가 아니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얼마되지 않아 홍위병들에게“변절자”,"주자파"(자본주 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로 몰리워 박해를 받았다. 그때 나는 비록 초급중학 교 학생이였지만 연변대학을 창립하시고 15년 넘어 그 학교를 운영하시느라 로심초사하신 분이 그 학교 학생들에게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 정말 리해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항일구국운동을 위하여 영용히 분투하시고 연변대학의 창립과 발전을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하여 오신 분이 어떻게 변절자, 주자파로 되느냐? 하는 의문이 생겼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문화대혁명의 박해를 받아
4. 시대의 공정한 평가
림민호 교장선생님이 사망한 뒤 8년이 지난
1989년 연변대학창립 40돌에 즈음하여 연변대학에서는 대학교정에 림 민호 교장선생님의 반신석상을 세웠다가 연변대학창립 55주년이며 교장선 생님의 탄생 100주년인 2004년에 석상을 동상으로 바꾸어 그의 업적을 기 리고있다. 나는 연변대학에 갈때마다 꼭꼭 교장선생님의 동상 앞에 가서 정중히 허리굽혀 세번 절을 하여 교장선생님에 대한 사모의 정을 표시하군 한다.
림민호 교장선생님이 우리 민족교육사업에 기여하신 그 업적 길이길이 후 세에 전하여 지리라!
《중국동포타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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