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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5.1국제로동절과 전국로동모범들
청해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5.1국제로동절과 전국로동모범들”이란 내용으로 말씁드리려 합니다.
메이데이(May Day)라 불리는 국제로동절의 유래를 보면 1886년 5월 1 일 미국 시카고의 20여만 로동자들이 8시간 로동제를 요구하는 파업과 시위행진을 단행하였습니다. 로동자들은 반동당국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투쟁을 견지하여 8시간 로동제를 쟁취하였습니다. 1889년 7월에 빠리에서 열린 제2국제당 창립대회에서 5월1일을 로동계급의 국제적 명절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1949년 12월에 중앙인민정부 정무원에서는 5월1일을 로동절로 규정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매년 5.1절을 계기로 전국로동모범 표창대회를 가집니다.
저는 금년 5.1절을 맞으며 조선족 전국로동모범들의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지난세기 50년대 연변의 전국 로동모범들의 사진에 가서 눈길이 머물면서 그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되였습니다.
전국농업로동모범이며 저명한 농민벼전문가 최죽송은 1948년부터 벼고산재배시험을 하여 1951년에 벼 무당 산량 700근을 돌파하여 그해 길림성 정부에서 특등로동모범칭호를 수여하였고 1957년에는 전국농업로동모범칭호를 수여 받았습니다.
후에 그는 계속해 벼 풍산기술을 연구하여 1955년에는 무당 산량 800근을 돌파하였으며 1966년에는 신풍대대의 벼 무당 산량이 1026근에 달하였으며 1962년에 주은래총리가 신풍대대를 시찰하실 때에 최죽송의 대면적 벼 풍산 경함을 칭찬하였으며 그의 벼 재배기술이 1964년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중대과학기술성과 2등상을 받았으며 선후로 네 차례나 국무원 풍산상을 탔습니다.
그는 《중국벼재배학》편집공작에도 참가하였으며 저서로는 《최죽송 벼풍산기술》입니다. 1964년 9월 전국농업회의에서는 국무원 부총리 담진림동지가 “남진(영강) 북최(죽송)”이라고 칭찬하면서 “북방농민벼전문가” 칭호를주었으며 길림성 농업과학원과 중국농업과학원에서 그를 특약연구원으로 초빙하였습니다.
1970년 후에는 주로 북방지구의 벼 저온랭해방지에 대한 연구를 연구를 하여 벼 온산고산기술을 보급하엿습니다. 1973년 소주에서 열린 전국 벼연구회의에서 “랭해전승”문제를 제기하여 높은 중시를 잃으켰으며 그의 벼 재배기술경험은 재빨리 북방13개성시에 보급되였으며 북방 벼 재배지구에서 벼 풍산을 거두는데 그나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는 선후로 농업사 주임, 대대 당지부서기, 장백인민공사 부사장 등 직무를 력임하였고 길림성 제3차 당대표대회 대표, 길림성 제1기, 제2기, 제3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습니다.
전국로동모범 김시룡은 1946년 연변에서 첫 호조조를 조직하였으며 1951년 3월에는 첫번째 초급사-농업생산합작사를 성립하고 1953년 3월에는 길림성의 첫번째로, 전국에서 두번째로 되는 《새벽집체농장》을 세웠으며 1958년 《전국문맹퇴치회의》에 참석하여 《농민은 문화를 수요하고 문화를 배울수 있다》란 제목으로 발언하여 진의 부총리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고향에 돌아가 농민과외학교를 꾸리라고 부탁하였다. 김시룡은 진의의 이 지시를 받들고 돌아와서 그해 5월 1일 전국에서 첫번째 반농반독의 《새벽농민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는 1949년 길림성 특등로동모범, 1950년 전국로동모범 1957년 전국농업로동모범 등 칭호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리고 선후로 호조조 조장, 농업사 주임, 인민공사 사장, 새벽농민대학 명예교장 등 직무를 력임하였으며 제1기, 제2기,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제5기, 제6기 전국정형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27차례나 모주석과 중앙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았습니다.
김시룡은 언제 어디서난 추호도 리기적이 아니고 오로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간고분투, 대공무사하고 렴정봉결하고 공명정대한 사나이중의 사나이로서 높이 서서 멀리내다보면서 사회주의 새농촌건설에서 코기러기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저는 5.1절을 맞으며 당년의 전국로동모범이며 영화《붉은 기러기》의 주인공의 원형인 리호천선생을 방문하였습니다.
리호천선생님은 81세의 고령에도 아주 명석한 의식으로 매일 텔레비, 라지오, 신문, 잡지를 다 보면서 정치와 시사학습에 게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와 함께 리호천선생님을 모델로 한 영화 《붉은 기러기》를 DVD로 보면서 그가 30여년동안 우편배달사업을 한 지나간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리호천은 우전배달사업에 참가하여 매일 8,90근 되는 우편물을 지고 네개의 령, 11갈래의 하천을 넘나들고 근 100리 길을 걸으면서 당의 간행물과 기타 우편물을 전달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10년, 20년, 지어는 36년간이나 갈라져 있던 육친들의 편지도 전달하여 주고 그들의 상봉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편지들은 어떤것은 주소가 잘못 적히고 어떤것은 수신인이 여러곳을 이사하였기에 수신인으를 찾는것이 여간만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편지들을 하나도 돌려보낸적이 없이 어떻게 하나 이곳 저곳 수소문하여 모두 찾아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소가 불명확한 우편물들을 찾아 준 것이 2800여건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의 우편배달로정은 96만리, 지구둘레길이의 12배에 해당됩니다.
그는 “나의 일체는 당과 인민을 위하여”란 오직 이 하나의 신념으로 30여년간 중국우정사업에 몸바쳐 왔습니다. 하여 1956년에 전국 우전계통 선진생산자, 1958년에 제2차 전국청년사회주의건설자 적극분자, 1959년에는 전국로동모범으로 당선 되였으며 선후로 7차례나 모주석과 당중앙 령도동지들의 접견을 받았으며 길림성 제3기, 4기, 5기 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습니다..
그는 퇴직후에도10여년간 농촌의 의무배달원으로 나서서 신문잡지를 주문하여 보도록 선전공작을 하였으며 주소가 불명확한 편지를 전달하여 준것만 하여도 400여건이나 됩니다.
저는 이러한 전국로동모범들의 사적을 되새겨보고 리호천 선생님을 직접 방문하면서 이러한 로동모범들은 우리 나라의 번영발전에 크나큰 공헌을 하였으며 이들은 연변의 자랑이고 우리 조선족의 자랑이며 우리들이 영원히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이라고 생각 되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중국의 조선족이다. 나의 고향은 연변이다. 그럼 나는 우리 중국의 조선족을 위하여, 나의 고향 연변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하겠는가를 많이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오늘은 이만 끝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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