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포럼
나의카테고리 : 칼럼/단상/수필
지난 년말에 일본에 있는 아들에게서 “일본 와세다대학 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교수가 김학철 선생님의 소설을 번역 출판하여 요즘에 출판기념회를 한다는데 본인은 불참 한답니다.”는 전화를 받았다. 오무라 선생님의 겸손은 비록 여러모로 들었지만 당신의 저서 출판 기념회에마저 불참한다고 하니 겸손이 너무나 지나치지 않은가는 생각이 뒤따랐다. 그런데 요즘에 알고 보니 선생님의 건강 상황이 참석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전에 오무라 선생님이 병환으로 1월 5일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뒤따라 1월 15일에 향년 89세로 타계하셨다는 급작스러운 부고에 필자는 무턱대고 무정한 코로나를 성토할 뿐이다.
“윤동주문학과 동아세아의 미래적 가치” 국제학술대회 현장
오무라 선생님은 일본의 중국문학, 조선문학 연구학자이며 평론가, 번역가이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지금부터 꼭 5년 전이다. 2018년 2월 3일에 아들의 안내로 일본 릿교대학(立教大学)에서 진행한 “윤동주문학과 동아세아의 미래적 가치”국제학술대회에 참석했을 때이다. 그 국제학술대회에 오무라 교수가 사모님을 모시고 참석하였다. 곁군의 소개로 우리 부자간을 만난 선생님은 자애롭게 실눈 웃음을 지으시며 우리의 손을 잡고 기뻐하셨다.
선채로 서로 수인사를 마치고 케이오대학에서 종신 교수로 근무하는 아들이 자기의 저서를 교수님께 드리니 미리 준비가 있은 듯 오무라 선생님도 “윤동주와 한국문학”(저자 오무라), ”윤동주평전”(저자 송우혜)이란 두툼한 책을 나에게 선물했다. 이어서 나도 본 국제학술회에 참가차로 준비했던 2016년에 윤동주 여동생 윤혜옥, 오형범 부부를 취재했던 길림신문기사 두 편을 선생님께 드렸다. 기사는 윤혜옥, 오형범 노부부(83세 동갑)가 초청을 받아 일본에서 진행하는 윤동주기념비 낙성식에 참가하고 돌아오는 길에 연길에 들렀을 때 만나 인터뷰한 내용이다.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과 그의 남편 오형범(두 분은 당년 83세 동갑)
그 자리에서 기사를 읽어본 사모님은 기사에 나온 오형범 씨가 결혼하여 3일만에 가족들이 세운 「시인 윤동주 묘비」 낙성행사에 참가한 일, 화룡에서 살다가 1948년 6월에 한국 서울대학에서 공부하는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의 형님이 쓴 시집(하늘과 바람, 별과 시 총 19편)을 가져오라는 편지를 받고 윤동주시집(노트책)과 윤동주 사진첩을 가지고 조선 원산을 거쳐 6개월만인 1948년 12월 31일에 서울에 도착했다는 내용이 정말 생동하고 인상적이라고 하였다.
그날 우리는 행사장과 점심 식사 장소, 커피숍에서 줄곧 오무라 교수님 내외분과 자리를 같이하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첫 화두는 당연히 윤동주였다.
내가 선생님께 “오무라 교수님은 세월의 행간에 유실될 뻔했던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찾아내 세상에 알리고 시인의 고향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최초의 윤동주 연구자이다.”는 룡정•윤동주연구회 김혁 회장의 기사를 곁들었더니 오무라 선생님은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나는 오무라 선생님이 주신 “윤동주와 한국문학”(563페지)을 두루 펼치다가 한국 서울대학 김윤식 교수(문학평론가)가 이 책을 평론한 한 단락의 글에 눈길을 멈추었다.
“우리 민족의 시인 윤동주의 사적(事跡)을 발굴 조사한 지구상에서 최초의 연구가로 저자 오무라 마스오 교수의 이름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일본인이라는 당시로는 썩 유리한 처지에 있었기에 가능한 업적이라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이 저자가 윤동주의 유고 육필을 조사, 검토한 지구상에서 최초의 연구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모종의 토를 달 독자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싶다. 이 사실은 강조되어 마땅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실질적 엄밀성을 체득한 연구자의 자세, 노력 및 생동적 성실성이 없이는 결코 가능한 업적은 아니었을 터이다. 특히 경이로운 것은 탐구자로서의 저자의 이러한 열정 및 그 밀도의 지속성이 아닌가 한다.”
이 단락을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읽으며 나는 우리 민족을 그렇게 사랑하는 일본의 문학거인과 자리를 함께 한 오늘이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다음의 화제는 “교수님이 어찌하여 조선족과 그렇게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였습니까?”는 나의 질문이었다.
이에 선생님은 얼굴에 인자한 웃음꽃을 피우며 지난 과정을 몇가지로 나누어 간약하여 말씀 하셨다.
- 나는 사회주의 중국이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한 년대에 대학에 들어가 중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한 것을 계기로 하여 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져 중국어와 중국문학에 열중하게 되었다.
-1957년에 대학원에 들어감과 함께 조선어를 배우기로 결심하고 중국문학을 전공한 기초에서 조선반도의 문학에 대한 연구를 거쳐 중국 조선족문학연구까지 60여년을 정진하였다.
-1985년도에 연변대학에서 1년간 재외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연변과의 인연을 맺고 30년 넘게 연변과 중국조선족 지성인들과 끈끈한 감정과 돈독한 우정을 쌓고 있다.
그 다음 화제는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중국조선족문학의 거장인 김학철 선생님이었다.
오무라 선생님은 김학철 선생님과 오래된 마음의 지기이고 상호 가족들끼리도 30년간의 깊은 교분을 갖고있는 가까운 사이로서 김학철 선생님의 많은 작품을 번역하여 일본에 널리 알렸다.
끝으로 필자가 “교수님의 느낌에 로신과 김학철, 어느 분이 더 위대하다고 봅니까?”고 당돌하게 묻자 선생님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혼잣말인 듯 “로신 선생님은 붓으로 나라를 지켰고 김학철 선생님은 붓과 총칼로 나라를 지켰다”고 하였다.
오오무라선생님 부부와 함께(완쪽이 저자 오기활)
글을 맺는 이 시각 “연변은 나의 제2고향입니다”고 하며 연변을 자랑한 오무라 선생님, “리홍매(길림신문 특파기자)는 연변의 내 딸입니다”하며 조선족을 사랑한 오무라 선생님이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는듯 싶다.
두 손 모아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오기활
2023년 1월 31일 도문에서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