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아니, 오늘이 생시요 꿈이요!?”
1946년에 내가 만난 정석룡(郑锡龙)은 지초와 란초마냥 나를 동화시킨 친구이자 스승이다.
첫 만남
정석룡은 1946년 내가 태양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우리 횡도 9대(향양)에 이사를 왔다. 갓 이사를 왔을 때엔 내가 교직에 있다보니 별로 래왕이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정석룡은 가정성분이 지주라고 해서 좋은 학교를 다녔지만 직업이 없이 농촌에 왔다고 했다.
정석룡은 해방전에 연길공업학교를 다녔는데 후에 알고 보니 나의 둘째동생 문철(文哲)이와 연길공업학교 토목과의 동기동창생이였다.
정석룡은 성분 때문에 비관하지 않았고 자진하여 일을 찾아했다.
당시 태양구(太阳区)의 정치령도는 팔로군에서 파견한 왕두(王斗)라는 분이 책임졌고 지방간부로는 리의일(李义日)과 최일룡(崔日龙)이 기억에 남아있다.
1947년초에 나는 룡정의과대학(龙井医科大学)에 입학했다가 신입생 정치신분 재심에서 성분(纠编中农) 때문에 락방되여 농촌에 내려갔다.
그로 하여 고민하며 갈팡질팡하던 중 어느 날 나와 같은 처지인 정석룡을 떠올렸다.
‘옳다, 그는 나를 리해하고 동정해줄 거야!’
1947년 춘삼월의 어느 날 저녁에 나는 정석룡을 찾아갔다.
그의 집에는 땅을 분배받은 사람들의 이름을 쓴 나무패말들이 방구석을 채웠다. 그의 부인[임해순(任海顺)]은 나를 진작 알고 있다며 반가워하였다.
마침 저녁식사 때여서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기에 둘이서 소주까지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같은 처지인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허물없이 토로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마침 정석룡이 자기가 지금 한창 태양구모택동사상선전대를 책임지고 문예공연을 준비한다며 나의 협조를 바랐다.
“우리가 지위와 보수를 따지지 않고 능력과 열정을 다한다면 꼭 해 뜰 날이 있을 것이요.”
정석룡은 내가 전혀 생각도 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로 나를 감화시켰다.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정석룡과의 만남으로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였다. 그는 나의 마음속 기둥이며 나에게 삶의 희망을 준 지기지우였다.
정석룡은 성분문제로 비관하지 않고 토지개혁공작대를 찾아가 일을 돕겠다고 자진해나섰다.
공업학교 토목과 출신인 그를 놓고 말하면 토지 측량과 분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당시 사람들은 무보수로 일을 했지만 불만이 전혀 없었고 서로 앞장서서 일을 찾아하면서 조직에서 자기를 써주는 것을 다행과 축복으로 생각하였다.
정석룡은 농촌에서 사상이 단정하고 일정하게 재간이 있으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인재’를 모집하여 태양구모택동사상선전대를 조직함으로써 조직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가 해방 초기에 남들이 생각지도 못하는 ‘모택동사상선전대’를 조직한 것은 지금 봐도 그는 확실히 남보다 앞서가는 인재였음을 알 수 있다.
정석룡은 당지 군중들 속에서 위신이 높은 부녀대표와 함께 며칠 사이에 예쁜 녀성 15명으로 구성된 모택동사상선전대인 ‘태양구가무단’을 설립하였다.
그 때 나는 공업학교 출신인 그가 단막극(短幕剧)의 곡(曲)까지 창작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정석룡은 후에 류감수(柳甘洙) 등 세명의 남자배우를 받아들였는데 류감수는 배우 겸 독창가수로 인기가 많았다.
무대장치는 목수에게 맡기고 무대의 채색화 배경과 배우들의 얼굴화장은 내가 담당하였다. 나는 이런 재간을 태양소학교 한계성(韩启星) 교장한테서 배웠다.
그 때 태양구가무단은 재미 있는 단막극과 아름다운 춤노래로 가는 곳마다에서 박수갈채를 받았다. 당시 대중들의 문화갈증을 풀어줬으니 손바닥이 터질 듯한 박수갈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태양구모택동사상선전대의 모든 성과는 정석룡의 멸사봉공(灭死奉公)의 사업정신과 사업태도로 얻어진 것이다.
정석룡에 대한 나의 평가다.
첫째, 성질이 유순하고 침착하며 남의 걱정을 내 걱정으로 여기여 사람들의 존중을 받으며 ‘동네아바이’로 불리웠다.
둘째, 모든 일을 미리 계획하고 준비 있게 추진하였기에 하는 일이 진전이 빠르고 실수가 없었다.
셋째, 타인의 우점을 찬양해주고 상대에게 희망을 주는 사업형 인간이다.
넷째, 인내성이 강하고 망동하지 않으며 하는 일을 끝까지 책임진다.
그런데 우리는 농촌을 떠난 후 45년간이나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지난 80년대 어느 날, 멀지도 않은 룡정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났다.
그 때 그는 룡정화학공장에 출근하다가 공장이 파산되는 바람에 만년을 어렵게 보내고 있었다. 나는 정석룡의 연줄로 당시 태양향의 소학교 동창과 옛친구들인 손창익(孙昌翼), 한성우(韩圣禹), 박명권(朴明权)의 소식을 알게 되여 우리 넷은 한동안 서로 다니며 즐겼다.
“제가 바로 정석룡의 아들입니다!”
2016년 1월 11일, 나는 건강자문으로 나를 찾아오겠다는 오기활기자의 전화를 받고 “장담은 못하나 놀러 오는 셈 치고 와보라.”고 했더니 이튿날에 조양천 삼성촌에 있는 우리 집에 왔다.
오기활기자는 같이 동행한 손님을 전임 ≪길림신문≫, ≪연변일보≫ 부주필, ≪지부생활≫잡지 주필을 지낸 정경락이라며 지금 페암치료중이라고 소개하였다.
서로 건강상식에 대해 얘기하던 중 내가 정경락의 명함을 다시 보면서 “정석룡을 아오? 내가 지금 정석룡의 아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정석룡은 나와 한마을(태양향 횡도촌 9대)에서 살았는데 우리는 당시 모택동사상선전대에서 함께 활동한 동갑내기였소.”라고 말했더니 글쎄 정경락씨가 “제가 정석룡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86세에 타계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이것이 꿈이요 생시요? 정석룡의 아들이 우리 집에 오다니?”
“더 가까이 오오, 내가 좀 안아보기오.”
나는 돌연적이고 우연한 만남에 한참이나 그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오기자가 암환자를 데리고 온다더니… 석룡의 아들이 암으로 나를 찾아 왔구만…”
오기자도 눈물을 흘렸다.
경락씨는 갖고 온 음식으로 점심상을 차리고 나에게 술을 올리며 큰절을 하였다.
“신문사 부주필까지 했다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구만… 오늘 정말 좋은 분들을 만났소.”
나는 너무나 반가워 손자한테서 선물로 받은 일본술을 내놓았다.
“이 술을 이 기쁜 날에 안 마시면 언제 마시겠소. 경락이 우리 한잔 하기오!”
나도 경락씨에게 술을 부어주었다.
나는 경락씨가 기침을 할 때마다 그의 등을 다독이면서 나의 처방 대로 1년간을 견지하면 병이 치유될 것이니 걱정을 말라며 희망을 주었다.
그 날 정경락씨와 오간 대화이다.
정: “92세까지 살면서 어느 때가 제일 황금시기였습니까?”
김: “지금이오. 지금은 시간이 많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깐 정말 행복하오. 지금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소. 이 세상이 다 내 것인 것 같소.”
“혼자서 일하는 멋이 있고 혼자서 사는 법도 배우오. 나는 로친을 딸집에 보내고 혼자서 해야 할 일을 다그치고 있소.”
정: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 “겁이 안 나오. 자연사를 인생으로 받아들이오. 죽음이란 참외나 도마도가 다 익으면 절로 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요. 이것이 자연사요. 옛날엔 화장터가 겁났는데 지금은 친해지오. 자연사는 철학적 인생이라오.”
정: “법정스님이 하늘냄새가 그립다고 했는데 하늘냄새란 무엇입니까?”
김: “하늘은 령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무런 욕심이 없소.”
정: “정말 멋지게 터득을 하셨습니다.”
경락씨가 박수를 쳤다.
경락씨의 물음에 답하는 내가 마치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는 학생 같아보였다. 또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경락씨의 모습이 마치 그의 아버지의 모습처럼 보여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데 60년전에 나의 앞길을 밝혀주던 지기지우가 7년전에 떠나갔고 그의 아들마저 2016년 7월에 63세 나이로 하늘나라에 갔다니 비감하기 그지없었다.
이 글을 오기활기자의 칼럼 <뒤늦은 효도>로 마감한다.
뒤늦은 효도
선친님은 시공대(工程队)의 대장직에 계시면서도 집이 없어 여덟번이나 이사를 하며 세집살이를 했으므로 우린 선친님을 무능하다고 했답니다. 자식의 취업으로 선친님이 앞당겨 리직휴양을 할 때 우린 이는 선친님이 응당 해야 할 책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정성분으로 우리가 영향을 받을 때 우린 선친님의 자식으로 된 것을 원망하였습니다. 이런 자식들의 앞에서 선친님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원래 말씀이 적으신 선친님은 모든 아픔과 고통, 유감과 불행을 침묵으로 묵새겼을 것입니다.
오늘 뒤늦게나마 이런 도리를 알게 된 이 아들의 마음은 아프기만 합니다! 이 아들은 부모님에 대한 가장 큰 효도가 돈이 아닌 리해임을 오늘에야 뼈저리게 느낍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여있을 때는 그 존재의 가치를 깊이 느끼지 못하다가 불행하게 이승을 떠난 후에야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끼게 됩니다. 이 아들은 ‘있을 때 잘해’라는 말뜻을 오늘에야 비로소 절감합니다.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은 어머님을 잘 리해하면서 아버님한테 하지 못한 효도를 어머님께 해드리는 것 하나뿐입니다…
이는 지난 2009년 8월 6일 리직휴양간부 정석룡옹(86세)의 추도식에서 한 아들(정경락, 56세)의 <추모글> 한단락이다.
아버지의 일생을 ‘근(勤)’, ‘렴(廉)’, ‘엄(严)’으로 귀납한 경락씨는 ‘십년내란’시기에 억울하게 투쟁을 당하면서도 공장이 안 돌아가면 목에 걸었던 ‘개패’를 벗어놓고 공장을 위해 달아다녔고 공장이 돌아가면 또다시 ‘개패’를 목에 걸고 투쟁을 받던 일, 시공대 대장으로 일하면서도 집이 없어 여덟번이나 이사하며 세집살이를 했던 일, “일생동안 아버지와의 대화가 100시간이 안된다.”는 실례로 아버지의 ‘근, 렴, 엄’을 추억했다.
아버지를 저승에 보내며 ‘뒤늦은 효도’를 하는 경락씨는 고인에게 남처럼 술을 부어올리며 효성을 표할 대신 86(86세를 뜻함)송이의 흰 국화꽃을 드리는 것으로 깨끗하고 순결한 인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빌었다.
국화는 늦가을 서리에도 어김없이 청초한 꽃을 피우며 꿋꿋한 삶을 사는 군자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사람들은 “의지가 강한 사람이 그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음”을 국화로 표현한다.
그러니까 86송이의 흰 국화를 받은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가. 그리고 국화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효도를 표하는 자식들 역시 사랑스럽고 행복해보였다.
필자는 정경락의 ‘뒤늦은 효도’가 정경락 혼자만의 ‘뒤늦은 효도’가 아닌 모든 자식들의 ‘제철 효도’로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존경하는 ‘근, 렴, 엄’님!
고인님은 이제부터 이 산 저 산에 피여난 천국의 아름다운 꽃밭에서 사세요. 그리고 두견새, 파랑새로 다시 태여나 가고팠던 저 먼곳으로 훨훨 날아가세요.
고 존경하는 아버지시여!
생전의 슬픔이랑 아픔이랑 훌훌 다 털어버리고 좋은 일만을, 행복했던 일만을 기억하면서 저승에서 영생하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길림신문≫(2009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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