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복교수를 찾아간것은 지난 12월 9일 오전, 오후에 곧 있게 될 그의 수필집 《사랑의 사회학》 출간식과 이튿날 있게 될 《제10회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 준비로 너무나 다망한 때였다. 이를 헤아려 일정이 끝나기를 기다릴가고 생각하다가 행여나 하고 인터뷰를 청탁드린것이 선뜻 승낙을 받을줄이야! 반가움과 함께 황송했다.
황유복 교수의 사무실 북경 중앙민족대학교 중앙청사 한국문화연구소 703호실. 컴퓨터가 놓인 황유복교수의 사무상이 책더미에 묻혀 창문가에 자리잡은 가운데 책상 몇개를 붙여놓고 그 주위에 걸상들을 둘러놓았으니 사무실이지 네 벽에 천정까지 치솟은 서재는 물론 책상우 지어 바닥에까지 쟁여져있는 많은 책들과 자료는 이 곳을 도서관 장서실을 더 방불케 했다.학술의 내음으로 물큰하는 순간이였다...
짧은 동안에나마 컴퓨터조작으로, 전화통화로, 박사생들과의 분부로 다망한 일들을 정연하게 처리하는 모습은 도무지 이순(耳 )을 넘긴년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효률적이고도 홀가분했다.
바로 이 사무실에서 황유복교수는 중국조선족 및 동아세아에 대한 학술연구의 먼길을 꾸준히 걸어왔고 민족교육에 지성을 다 바쳐왔으며 민족발전심포지엄을 직접 구상하고 진척시켜온것이다.
《학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사람》
황유복(1943년생). 중앙민족대학교 민족학과 사회학학원 박사생 지도교수, 중앙민족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소장, 중국조선(한국)사연구회 회장...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출생인 그는 1961년 길림시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에 입학, 민족사를 전공했다. 1966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선후로 중앙민족대학 당위사무실, 민족언어문학학부, 민족학연구소, 민족학학부에서 조교, 강사, 부교수, 교수, 박사생도사로 지금까지 봉직해왔다.
1983년 미국 코네디컷대학에 초청되면서 황교수의 해외학술연구활동은 정식으로 시작되였다. 그때 미국에 가면서 그는 이미 학부의 부주임으로 내린 지령을 사임했는가 하면 이듬해에 귀국해서도 행정직은 굳이 사절해 버리고 본격적으로 학술연구에만 전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행정직을 맡으면 학문연구에 영향을 받는다는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학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사람》이였던것이다. 이어 1985년엔 일본에, 1986년-- 1989년 3년간은 미국 하버드대학에 교환교수로 초빙되여가 있었다.
이 기간에 그는 《중국과 미국의 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비교연구》를 완수하면서 미국한인사회를 광범히 조사했고 그 과정에 학술적으로 자신을 풍부히 한것은 물론 조선민족을 더욱 사랑하게 되였고 우리 민족을 위해 무언가 실제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1988년엔 미국에서 직접 한국에로 초청되여 인천,서울, 대구, 광주 등지의 10개 유명대학을 선정해 한달간 교류, 연구, 특강을 했다. 90년대에 들어서 연구생 지도로 긴박한 가운데서도 단기출국으로 학술연구와 교류를 끊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선후로 미국, 일본, 한국, 카나다, 로씨야, 몽골, 향항 등 나라와 지역에 수십차 다녀오며 학술연구 및 교류를 하였다.
현재 그는 중앙민족대학 민족학 사회학학원에서 주로 민족학분야의 연구와 교류에 종사하고있다. 민족학은 쉽게 말하면 민족문화의 연구이다. 때문에 지도하고있는 박사생들 연구방향은 북방민족문화연구. 북방민족연구는 또 조선족, 만족계렬, 몽골족계렬을 포함한다. 황유복교수는 현재 북방민족문화연구에서 유일한 학자라 할수 있다.
지금까지 그는 《중국조선민족연구》, 《중국조선족사회와 문화의 연구》, 《봉사도》,《아세아문화연구》와 같은 28권의 저서를 출간했고 펴낸 론문은 130여편이 있다.
한국어학교 건립에 혼신을
황유복교수는 1971년 중앙민족대학교 당위사무실에서 근무하던 때에 벌써 당시의 민족언어문학학부에 조선어전업이 없는것을 감안하고 조선어전업 건립 보고서를 작성해 올려보냈다. 그것이 비준을 받자 첫패의 조선족 학생 29명을 모집해오고 직접 조선어교연조의 교원으로 내려가 학생들을 가르쳐 졸업시켰다.
1989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의 3년간의 연구를 마치고 귀국할 때 그는 미국서 초청강의하면서 모은 강연료를 별도로 모아(인민페 15만원) 들고왔다.
이것을 투자해 그는 《북경조선어학교》(후에 한국어학교로 개칭)를 세웠다. 당시 도시조선족청년의 80%가 조선어를 모르는 엄연한 현실앞에서 그는 조선어학교를 세우기로 작심했던것이다.
이렇게 시작된것이 걷잡을수 없이 오늘까지 17년째, 《북경한국어학교》, 《석가장시조선어학교》, 《심양세종조선어학교》, 《목단강조선어학교》,《할빈시중급한국어학교》, 《단동시조선어학교》, 《장춘시백학한국어학교》, 《위해한국어진수학교》, 《내몽골사범대학 외국어학원 한국어학교》, 《길림시진흥한국어양성부》, 《해구 korea 언어예술학교》 등 11개 학교가 북으론 할빈에서 남으론 해구에 이르기까지 11개 도시에 분포되여있다.
특히 그가 교장을 담임하고있는 《북경한국어학교》는 지금까지 학원들에게서 학비 한푼 받지 않고 모든 경비를 황유복교수가 전부 지출해오고있다.
국외에서의 강의료 등 개인수입이 전부 이 학교에 흘러들고있는것이다.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을 펼쳐오며
개혁개방이후 도시들에서 유흥업소가 대중없이 흥성하고 한국에 시집가는 조선족녀성이 많아지고... 조선족사회가 어쩐지 기형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고 진맥한 황유복교수.
이걸 념두에 두고 그 해결책으로 1994년부터 시작한것이 《중국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 오늘까지 주욱 10회를 이어오는 중이다. 초기 3회까지는 거의 도시에서 조선족애들의 민족언어류실문제를 둘러싸고 제4회부터는 사회문제, 경제문제, 교육문제, 벤처산업 인재육성, 농촌경제발전, 도시화발전 등 쩨마별로 조선족사회에서 문제점으로 떠오른것을 선택해 알차게 추진해오고있다.
이 학술회의의 특점은 《대학교수들만 모이면 학술적으로만 론하고 끝나게 된다》는데 비추어 전문학자들이 사회를 진단하는것도 좋지만 그 진단이 반드시 사회발전에 그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데서 여러 지방 민족간부, 교수, 학자, 기업인대표, 농민대표 등을 광범히 참가시키고있다.
하여 몇기의 심포지엄 워크숍은 참가자가 500명을 이루기도 했다. 학술심포지엄은 《조선족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노력》하고있다.
즉 회의리론결과를 여러가지로 실천하고있는바 동북지역에서 실시하는 조선족집중촌건설문제는 사회에 제기되여 학술토론이 벌어지고 다시 지역에서 실제추진이 되여가고있다.
그리고 부분적 지역에서 불거져나왔던 한국인과 당지 조선족간의 갈등문제 등도 실제해결을 보았다.
특히 이번 《도시화와 조선족경제발전전략》을 주제로 한 제10회 학술심포지엄 워크숍은 국내외 학자들의 참여 및 학술정보교류로 글로벌시대에 세계조선족 네트워크의 구성 등이 광범히 거론되면서 세계와 발걸음을 같이하려는 양상을 보이고있다.
학술심포지엄은 또 장학활동도 곁들이고있다. 황교수는 《동북민족장학회》와 《남호장학회》 2개를 직접 운영하면서 가정환경이 곤난하거나 우수한 조선족학생들에게 정신적 경제적 지원을 하고있다.
위기앞에서 대책은
현존 조선족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는 황유복교수. 조선족사회의 변화에 대해 현재 학계에는 두갈래 설이 있다. 즉 발전론과 위기론. 발전론은 조선족이 농촌경제에서 도시경제에로 진입했기때문에 발전했다는 설, 위기론은 조선족이 자기 전통문화를 잊어가고있고 민족교육이 무너져버리고있기에 위기라는 설이다.
이 두가지 설에서 《발전이란 기회가 있다는 뜻이고 위기란 어떤 도전이란 뜻》으로서 《조선족 사회는 기회와 도전이 공존한다》는 결론이다. 실존하고있는 위기중에서도 《인구감소를 크나큰 위기》로 짚고있는 황교수.
현재 조선족사회는 출생인구가 줄어드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1989년 1999년 10년 사이에 4분의 3의 출생인구가 줄었다. 이렇게 내려가면 상당한 시간이 지난후 조선족은 사라지게 된다.왜냐면 뿌리가 잘렸기 때문.헌데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아직 인식이 깊지 못한 해당 학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고 위기이다. 학교가 무너지는것도 애들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것이 출생인구 감소를 근원으로 하고있다. 어떻게 할것인가?
기술교육 급선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선족청년들에게 반드시 기술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 이 주장은 학술심포지엄에서 7, 8년전부터 제기되여왔지만 지금껏 추진중으로서 해결을 보지 못하고있다. 조선족청년들의 기술창업교육을 위한 사립대학교 설립이 그만큼 힘든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조선족청년들이 기술을 배울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술을 배워야만 도시에 취직이 되고 취직이 돼야만 총각들은 장가갈수 있고 따라서 인구출생률 하강도 자연히 해결을 보게 되는것이다.
새형태의 조선족 탄생론
현재 중국에 있는 한국인을 30만명으로 집계하고있다. 2010년엔 100만명으로 늘어나리라 짐작하고있고. 북경 망경(望京)에 등록된 한국인만 3만명, 전 북경엔 7만명이 등록되여있다. 좌우간 조선족과 한국인은 서로 보완되기에 한 곳에 모이게 된다. 이 과정에 서로 통혼하다보면 새로운 형태의 조선족이 형성되게 된다. 따라서 현재의 조선족인구 감소현상도 완화할수 있을것이고.
학자수필의 개척자
철두철미 학자인 황유복 교수 학술연구시간을 갉아간다고 행정직무도 사절하고 술과 담배와도 담을 쌓은 그. 하지만 문학과만은 끊을수 없는 인연을 맺고 2001년 58세에 첫작품을 《데뷔》시켜서 오늘 수필집을 펴내기까지에 이르렀다.
그의 수필집 《사랑의 사회학》은 일전 중앙민족대학에서 출간식을 가졌다. 작품들은 문단에서 학자수필로 불리면서 높이 평가되고있다.
그는 수필쓰기를 두고 《<도라지>잡지와의 원고예약으로 매기마다 독촉을 해서야 마지 못해 한편씩 썼다.》면서 겸손, 시간부족도 시간부족이려니와 론문을 쓰던 사유를 문학작품에로 돌리는 어려움도 절감했다고 한다.
역시 그의 말을 빈다면 《지금까지 써온 론문만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였다는 생각을 바꾸어 새로운 시작을 시도하는 초학자의 자세로 수필쓰기에 림한것》이였다.
《수필집》은 《도라지》잡지에 2001년 제3호부터 게재된 글을 모은것으로서 《남계인생수필코너》의 글, 사랑, 인간관계,민족발전에 관한 글, 수필공부를 하면서 쓴 글 등을 다루고있다.
남계 황유복교수의 수필작품은 문단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되고있다.
《박학다식, 탁 트인 국제감각, 몸에 배인 문학적소양이 하나로 어우러져 엄숙한 리성의 혼과 자유로운 수필의 옷이 완벽하게 결합된 남계수필은 수필문단에서 좀처럼 발견할수 없었던 학자수필의 령역을 개척했다.》
《순수성은 남계수필의 기본바탕이다. 때문에 그의 수필은 항상 청초하고 싱그러운 향기를 풍긴다. 순수한 삶,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추구해온 남계만이 쓸수 있는 아름다운 수필이다.》
《남계수필은 우리 문학이 력사학이나 철학이나 인류학이나 기타 학문의 종합적인 안받침과 지원을 얼마나 필요로 하고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하고 그러한 린접 학문들이 어떻게 립체적이고 다각적으로 우리 문학을 보완해주고 부추겨주고있는지를 현장감있게 실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남계수필의 매력은 학문으로 수필을 포장했거나 학문을 수필속에 용해시킨 점에 있는것이 아니라 수필 그 자체를 아예 학문과 동일시한 점에 있다. 그래서 남계 수필은 문학수필인 동시에 학문이고 학문인 동시에 또한 문학수필이기도 하다.》
《민족의 미래는 저절로 열리는것이 절대 아니다. 바람직한 미래는 우리 민족 모두의 엄청난 노력과 지혜를 통하여 이루어지는것이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은 해방전의 조선문화도 아니고 현재의 조선이나 한국 문화도 아니며 중국의 한족문화도 아닌 새로운 조선족문화를 창출해낸것으로서 바로 조선족문화 그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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