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흥변부민》의 선두에 선 민족간부 리덕수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5월24일 16시40분    조회:381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리덕수

전임 중앙통전부 부부장이며 2기에 거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련임한 리덕수는 40여년간 소수민족지구와 전국 소수민족사업을 위한 사업에 혼신을 헌신해온 조선족의 우수한 지도간부다.

리덕수는 1943년 11월 길림성 왕청현 동광향 전산자촌에서 출생했다. 고향에서 소학교, 중학교, 고중공부를 마치고 1962년 19살 되던 해에 리덕수는 연변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학식을 넓혔을뿐만아니라 대학시절에 사회주의교육사업대 공청단위원회 부서기직무를 맡고 농촌에 내려가 단련하면서 정치적으로도 크게 진보하였다.

1968년 리덕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흑룡강성 수분하지구 해방군 모 부 농장으로 배치를 받았다. 농장에서는 그에게 학생련 반장직무를 맡겼으며 그는 농사에서뿐만아니라 집수리, 채석 등 모든 일에서 앞장섰다.

1970년 리덕수는 고향인 왕청현으로 돌아와 현혁명위원회 정치부 조직조에서 사업하게 됐다. 때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인지라 극《좌》사조가 여전히 범람했으며 많은 대학생들이 공장에서 육체로동을 하면서 단련받았다. 리덕수는 공장에 내려가 대학생좌담회를 조직하면서 우수한 인재를 발견하면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그의 노력으로 여러명의 대학생들이 지도일군으로 선발되였으며 그중에는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주급 지도일군으로 된 간부도 있다.

1972년말부터 1978년 2월까지 리덕수는 선후로 왕청현당위 상무위원과 공청단서기, 선전부장, 현당위 부서기로 사업하였다. 그리고 1978년 3월에는 공청단길림성위 부서기으로 임명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난지 얼마 안되는지라 혼란상태를 바로잡는것이 급선무였다. 그는 우파로 획분된 5명의 간부에 대해 조사하고 전부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두가지가 돌출한》간부를 처리함에 있어서도 실사구시적이고 차별없이 대함으로써 적지 않은 간부를 보호하였다.

1983년 3월 리덕수는 연변으로 돌아와 연길현(지금의 룡정시)당위 서기로 사업, 그해 11월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서기 겸 자치주 주장으로 발탁되였다.

1984년 중국공산당 제12기 3중전회에서는 우리 나라 정치, 경제 형세를 전면 분석하고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을 선언하고 나섰다. 연변도 개혁하지 않으면 더는 출로가 없고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했다. 리덕수는 연변에서 바다로 나가는 길을 뚫은 사람이다. 두만강출해권을 회복하기 위해 그는 적극적으로 국가 관련 지도자와 관련 부서에 이 정황을 꾸준히 회보하였으며 그들의 지지를 쟁취하기에 성공했다. 리덕수의 적극적인 노력과 국가 관련 부서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드디어 두만강출해의 꿈은 현실로 바뀌였다.

두만강항로 출해권 회복에 이어 리덕수는 또 연변의 하늘길을 열기 위해 동분서주, 그의 노력으로 연길ㅡ북경항로가 개척되였으며 도문ㅡ북경철도도 개통됐다. 리덕수가 연변의 지도자로 사업한 시기, 연변의 9년제의무교육과 고등교육은 큰 발전을 가져왔는바 과학기술대학이 새롭게 건립되였으며 연변예술학교와 연변사범학교는 대학으로 승격하였다.

1990년 11월, 리덕수는 47년간 생활해오던 길림성을 떠나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990년부터 2008년 3월까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중앙통전부에서 사업하는 기간 리덕수는 《흥변부민행동》, 《인구가 비교적 적은 민족의 발전계획》, 《서부대개발》, 《소수민족사업'11.5'계획》 등 일련의 프로젝트들을 실천했다.

조선족사회에 더욱 많은 우수한 인재가 나오기를 바라는 리덕수 전임 국가민위 주임.

《발전은 민족사업의 근본임무다.》 리덕수는 우리 나라 전반 소수민족사업의 중심고리이자 귀결점을 발전에 뒀다. 그는 자신과 민족사업에 종사하는 사업일군들에게 무엇보다 청렴하고 맡은바 사업에 충직할것을 요구하면서 《민족사무위원회 간부들은 반드시 민족지구에 깊은 감정을 가져야 하며 민족사업에 깊은 애정을 가져야 한다. 민족이란 밥가마의 밥을 먹는 국가공무원으로서 소수민족 형제자매들에게 미안한 일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말했다.

1999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는 국무원의 여러 부서와 련합하여 《흥변부민》행동을 발기, 5년동안 중앙에서는 변강 소수민족지구에 110억원의 자금을 투입했으며 2만개의 대상을 가동했는바 2100만에 달하는 백성들이 혜택을 입었다.

개혁개방이래 우리 나라 소수민족사업은 큰 발전을 가져왔으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여전히 뒤떨어졌있으며 조화사회 건설을 저애하고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번째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사령탑을 잡은 리덕수주임은 대오를 인솔하여 우리 나라에서 첫번째로 되는 소수민족사업 5년 계획 작성에 들어갔다. 이렇게 출범된것이 바로 국가 《소수민족사업 제11차 5개년계획(2006ㅡ2010)》이다. 생활형편이 어려운 소수민족군중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민족기초교육을 지원하며 민족대학교 건설, 소수민족전통의약 발전, 소수민족문화발전, 인재육성, 법제건설, 대외교류, 민족사무관리정보화, 소수민족현황조사, 민족사무서비스체계 건설 등 11개 부분으로 된 이 계획은 소수민족사업의 지도성적인 문건으로 되였다.

리덕수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틀어쥔 《흥변부민계획》, 《22개 인구가 비교적 적은 소수민족 발전계획》과 《소수민족사업 제11차 5개년계획(2006ㅡ2010)》 등 3개 프로젝트는 전부 국가발전계획에 들어갔으며 국가의 전략행동으로 실천에 옮겨졌다. 그는 또 3차례나 중앙민족사업회의를 준비하고 조직했는바 우리 당에서 민족문제와 관련한 정책과 방침, 교훈을 총화하고 새로운 시기 시대의 발전에 부합되는 리론과 정책을 새롭게 제정하고 민족문제 및 민족사업의 기본리론과 정책, 연구방법 등 적잖은 면에서 돌파를 가져왔다.

《국가의 통일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최고리익이며 민족단결은 여러 민족 인민들의 공동한 념원이다. 56개 민족 인민들의 의지를 단합하고 그들의 적극성과 지혜를 남김없이 발휘한다면 우리는 꼭 초요사회의 웅대한 목표를 실현할것이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할것이다.》 민족이라는 밥가마의 밥을 먹는 간부ㅡ리덕수는 40여년간 민족지구와 전국의 소수민족사업을 책임지고 사업해오면서 마음속으로 항상 인민들을 생각했으며 소수민족지구의 경제사회 건설과 안정을 위해 실천하면서 동분서주해왔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원제: 매편의 기사 모두 작품처럼] 《훌륭한 기자, 편집이 되려면 우선 신문사업이 신성하고 영광스러운 사업이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문화대혁명》이전부터 신문 기자, 편집 사업을 해온 김경석선생은 신문사업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기자, 편집을 하기 어렵다고 력설한다. 김경석선생은 1960년 연변대학 조선언어문...
  • 2005-11-09
  • 중앙 1호문건이 시달되자 농민들의 농사열정이 크게 제고되여 왕년에 버려져있던 묶은 경작지마저 다시 부치고있다. 그런데 경작지 면적에 비해 농촌의 로력이 딸리여 농망철이 되면 모두가 인력난으로 쩔쩔매고있다. 이를 감안한 화룡시 투도진 룡원촌 제2조의 황명선 촌민은 대담하게 7만 5000원의 돈을 들여 종합수확기 ...
  • 2005-11-08
  • [원제: 중국 진출 선진기술 앞세워라] 중국 진출 4년만에 발을 붙였다는 소문을 듣고 방문을 갔더니 대화 첫 머리부터 “중국은 시장이 큰만큼 기회도 많지만 그래도 진출시에는 반드시 선진기술을 앞세우고 들어 와야 한다”며 총화발언을 하는 김인규사장, 그는 건축도료 전문회사인 장춘(주)코미톤건자재유한회사의 주인...
  • 2005-11-08
  • [원제: 인생은 끝없이 일하면 사는것] 사업을 해본 사람이라면 큰 사업이 아니더라도 창업이란 얼마나 신고스러운 일인지 잘 알고있다. 그리고 우리는 쉽사리 창업의 마음을 내리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넉넉한 퇴직금에 자식들마저 잘 되고있어 아무런 뒤근심이 없다 할수 있는 퇴직자가 창업에 뛰여든다면 리해를 하지...
  • 2005-11-08
  • 상해 미술 전문학교 우등졸업 한낙연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당시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이란 큰 목표 아래 국공합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한낙연에게 상부로부터 특별한 임무가 부여됐다. 그것은 국민당에 위장 입당해 대외적으로는 국민당으로 활동하라는 지시였다. 물론 중국공산당당적은 비...
  • 2005-11-07
  • 10월 21일 오전, 도문시 량수진 량수촌 21촌민소조의 조장 문영금씨로부터 시동생 최동원일가에 대한 소개를 듣고 그들을 찾았다. 《정말 그들처럼 착실하게 살면 외국에 돈벌러 가려고 아득바득 할 필요가 없습니다.》 량수촌권복순서기도 문영금조장의 말에 동을 달았다. 《부부가 손잡고 올해 논과 밭을 5헥트를 다루고있...
  • 2005-11-07
  • [원제:12살 연변소년 리소명 하버드대학생으로] 어린시절부터 《대통령》이 꿈, 올 대학입시서 660점 6월에 있은 전국고등학교입학통일시험에서 12살밖에 안되는 연변조선족소년 리소명이 660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따낸 뒤 7월 그리고 8월에 있은 2차례의 하버드대학 중국류학생선정시험에서까지 계속 우수한 성적을 확보해...
  • 2005-11-07
  • [원제:비룡실업의 진로밑에 깔린 《문화감각》] 박성룡총경리의 남다른 속궁리를 적어본다 1997 년 3 월18 일에 중국광전부의 허가를 받고 길림성광전청에서 전문 국내외 위성설비판매설계설치허가증을 취득하여 설립된 길림성비룡실업유한회사(간칭)는 현재 중국내에서 유일하게 국내외위성방송설비 판매, 설계,설치, 권한...
  • 2005-11-05
  • [원제:력사를 알아야 자존심 지킨다] [img count='1' img] 20여년간 조선인혁명가들을 조사연구해온 최룡수교수를 만나 9월중순, 길림대학 조봉빈교수로부터 중앙당학교 최룡수교수가 쓴 글을 받았는데 그것은 혁명과 예술을 결합시킨 한락연의 사적을 담은 글이였다. 그 글에서 우리 민족혁명가들의 사적을 발굴하기 위해 ...
  • 2005-11-05
  • [원제: 79세로인 웅변대회에 참가해] 발표시간: 2005-11-03 오후 3:33:10 주당위 선전부 문명판공실에서 주최한 전주 선진사적 웅변대회가 어제(2일),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있었습니다. 이는 올해 67세에 나는 훈춘시교육국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인 량조희가 전주 선진사적 웅변대회>에서 한 말입니다. 전...
  • 2005-11-0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