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음력6월 25일) 나의 백부 오광준이 56세 나이에 도문시 홍광공사 수남7대(달라자)에서 “문화대혁명”폭도들에게 원을 품고 타살된 50주년이 되는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 비참한 날이다.
그때 필자는 조실부모로 하여 큰집에 얹혀살던 22살 나이였다.
1968년6월 25일(음력) 아침, 달라자 한복판에 자리한 흑판보에 “오늘 저녁에 오광준투쟁대회를 한다”는 “자발군중전정소조”의 종이에 쓴 해보(海報)가 나붙었다.
소위 “자발군중전정소조”란 “문화혁명”후기에 대련합을 하라는 모주석의 최신지시에 따라 대대로부터 시급에 이르기까지 대련합의 시달로 군중조직간의 파벌싸움을 끝내고 대련합을 한 형세하에서 달라자에서 아래웃집으로 재내는 서춘권이 딴 심보를 품고 비공개적으로 친근을 사촉하여 “4인 자발군중전정소조”를 조직한 비법적인 조직이다.
이틑날 오광준의 사망소식을 접한 홍광공사의 책임자들이 즉시 현장에 내려와 반복적인 조사를 거쳐 “오광준의 사망은 타살이다”, “자발군중전정소조는 비법적인 조직이다”고 결론을 내리고 “자발군중전정소조”를 해제시켰다.
“오광준투쟁대회”는 서춘권이 남양, 송림 등 외지마을 사람들을 조직하여 진행, 서춘권과 최동우(송림사람, 서춘권의 측근)의 발언을 이어 처음부터 “사람을 때리는 것을 락’(打人为樂)으로 삼는 망나들과 딴 심보를 품은 야심가들이 때리고 차고 쓰러 눕히고 찬물을 끼며 행패를 부린 사람잡이였다. 그때 필자는 투쟁대회에 참가할수 없자 투쟁대회마당의 뒤 집인 오송준(필자의 9촌숙부)네 집에 숨어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당일 저녁, 투쟁대회장으로 불려나가기 전에 백부님은 필자를 불러 “오늘 저녁에 서춘권이 정녕 나를 때려 죽이겠는데 나는1대1로 죽겠다”며 몸속에 칼을 품고 나갔다가 기회를 찾아 서춘권을 찔러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을 필자가 안된다고 말렸다. 그러니까 필자가 서춘권을 살린것이다.
오광준이 56세 나이에 “조선특무”란 억울한 모자를 쓰고 망나니들에게 타살 된 데는 이런 억울한 사연이 얽혀 있었다.
1952년에 조선전쟁이 한창일 때 조선서 최남주라는 사람이 달라자에 있는 매부 (오세준)네 집에 밀수건으로 종종 다닌다는 말이 돌았다. (최남주는 해방전에 왕청현 석현구에서 살다가 해방후 조선으로 갔다)
당년에 새중국이 건국된지 3년밖에 안되고 게다가 조선전쟁이 한창 긴장하게 진행되는 형세에서 정치형세에 민감해야만 했던 촌과 지방간부들은 최남주의 소식을 듣고 “최남주가 조선특무”라며 다시 오면 체포하기로 하였다.
그때 오세준과 6촌형제인 오광준은 한마을인 오세준네집에 다니며 사돈간인 최남주를 만나 보았고 (오광준의 동생 오호준(필자의 아버지)도 함께 놀았다고 한다)오광준의 아들인 오기풍은 최남주를 도와 물수품을 제공해 주었다.
1952년 어느 날, 달라자의 생산대 대장과 빈하중농대표로 지내는 김철국이 한낮에 배앓이 병이 도져서 마을의 길옆에 있는 허룸한 널판자변소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다가 최남주가 나타난 것을 보고 급히 바지춤을 올리고 나서 키가 크고 힘이 센 우세로 당장에서 그자를 체포했다.(김철국의 자술)
최남주는 체포되여 심문을 받으며 달라자로 나들던 과정을 실토하였다. 하여 간부들이 최남주의 제공에 따라 오세준, 오광준, 오호준을 불러 최남주를 만난 과정을 조사할 때 오세준이 먼저 최남주를 만난적이 없다고 말하니 오광준도 형제간인 당사자가 승인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승인하겠는가는 단순한 생각으로 최남주를 만난사실을 승인하지 않았다.(동생인 오호준은 만났다고 승인)
그로부터 계속하여 촌간부들은 어느 날 저녁에 촌부가 있는 수남에서 “오광준투쟁대회”를 조직하고 오광준에게 “2년 지방관제” 라는 처분을 주었다(후에 정책에 따라 해제)
이 사건으로하여 오광준의 마음속에는 (최남주가 오세준네 집에 다녔는데 왜 오세준은 문제없고 나를 투쟁하고 관제까지 했는가)는 억울함으로 촌간부들에게 늘 불만이 있었다. 그러다가 1967년 초의 어느 날 “문화대혁명을 동원하는 생산대 대회”에서 오광준이 “이번 문화혁명에서 나의 억울함을 해명해 달라”는 발언을 하였다.
김철국은 실사구시하고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다. 하여 그는 비록 문맹이지만 대장을 지내면서 상급회의에 참가하여 회의기록은 못했지만 “회의정신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몽땅 전달한다”는 평판을 받았다.
지난 세기 60년대 초, 연변에서 “면(面)의 사회주의교육운동”이 한창일 때 김철국이 생산대 정치대장인 필자를 찾아 몇 번이나 이런 말을 하였다.
“오대장, 신문이라고 다 믿을 것이 못 됩데, 신문이 도삽(거짓)입데…” “…그때 내가 최남주를 체포했는데 신문에는 수남촌민병련장인 안창렬(송림사람)이 오세준네 궤짝에 숨어 있으며 정찰하고 최남주를 체포했다”고 신문에 안창렬의 사적이 났습데…”
필자는 김철국의 이 말씀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십수년 후에 “연변일보”기자로 된후 연변일보자료실에서 당년의 신문을 찾아봤더니 과연1952년 8월 16일자 “동북조선인민보”(東北朝鮮人民報)에 “길림성 1등 민병모범 안창렬”이란 제목으로 지승원련환화로 기사를 엮은 안창렬의 사적이 3기로 나누어 실리였다.
이하는 련환화에 배합된 신문기사내용다.
“안창렬이 오가네 집에 가서 그가 없는 틈을 타 큰 꿰짝안에 밤낮 이틀을 숨어있으며 동정을 살폈다. 사흘되는 날 밤에 오가와 그의 안해의 말가운데 ‘모래 실으려 간다고 수레를 끌고가서 최특무를 데리고 오기로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그는 궤짝에서 뛰여나와 오가네 부부를 다른 민병을 시켜 지키게 하고 다음날 민병네명과 함께 오가와 최특무가 약속한 지점에가서 숨어있다가 최특무를 잡았다. 그는 이와 같이 하여 악패지주와 반혁명분자 六명을 잡았다.(사진배합)
실로 어처구니 없이 황당한 날조였다.
이하는 필자가 백부님에게서 들었고 또 백부님을 지켜본 백부님에 대한 평가이다.
백부(1911,12,10ㅡ 1968, 6,25)는 지난세기 20년대 초에 원적(原籍)인 朝鮮 咸鏡北道 穩城郡 穩城邑 美浦面 長德洞 長德里에서 부모님과 함께 남자 3 형제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도문시 곡수2대에 잠시 삶터를 잡았다가 1927년 경에 물 건너 달라자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백부는 문화가 있고 사상이 진보적이였다.
백부는 자식들에게 늘 석현지구의 오중하 등 항일투사들의 이야기와 고려툰(지금의 흥진)의 항일력사를 들려 주었다. (한번은 항일하는 사람들의 심부름도 했단다.)
백부는 독서를 즐겼다.
도문에 가면 꼭 서점에 들렀고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우리 민족의 력사책을 사서 읽었고 타살되기 전까지 모택동저작을 1권부터 4권까지 통독을하였다.
한번은 정치대장인 필자와 백부간에 생산대문제로 의견분기가 있었는데 필자가 모택동저작에서 “자유주의를 반대하자”는 문장을 읽어 드리며 해석하니 “그렇다면 나에게는 할말이 없다” 심복(心服)하였다.
백부는 경제의식이 높고 계산이 빨랐다.
50년대 해방초에 농촌서 생산합작사를 꾸리며 가가호의 소, 수례 등 많은 농구를 헐값으로 생산합작사에 입고시킬 때 백부는 소구유의 값을 3원으로 치니 그 좋은 자료로 칼판을 만들어 팔아도 한 개에 3원씩 받겠다며 끝내 작두와 소구유를 입고하지 않았다.
60년대에 정치적으로 비판하던 “소생산”을 “조카들까지 공부를 시키려면 15명이나 되는 대가정이 자력갱생을 해야 한다”며 수백마리나 되는 양계장을 경영했고 담배농사를 많이 해 도문시장에가 팔았다.
백부는 친척을 중히하고 부모없는 조카들을 그렇게도 아끼고 사랑했다.
그때 석현구(진)수남촌은 왕청현에 속하였기에 수남촌학구의 학생들이 중학교를 다니려면 먼저는 대흥구 중학교, 후에는 석현중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때 연길현인 도문중학교에 전학을 하려면 문이 없이는 쉽지 않았는데 백부님의 노력으로 우리 오누이를 집가까이 도문중학교에 전학시켜 공부에 편리를 주었다.
60년대 가난한 시기에 필자가 도문중학교를 다닐 때 하루는 백부님이 필자를 데리고 장마당에 가서 꿩을 한자웅(암수두마리)을 사가지고 반주임인 권경혁(權慶赫)선생님네 집을 찾아가 “부모없는 조카를 선생님께 맡기니 잘 돌봐 주십시요”라고 부탁하였다.
가정경제형편이 곤난한 시기에도 필자에게 바일론을 사주겠다고 하였고 현금 22원을 팔아 명표스케트를 두 틀이나 사주었다. 그때 중국의 명표 인“장백산”표스케트가 14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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