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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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슬픈 사색 댓글:  조회:38  추천:0  2024-09-07
우리 중국 조선족들은 오늘날처럼 처량해보기는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이 세상에 성립을 고하면서 우리 조선족들은 그들과 많은 운명을 하였다. 말도 많고 풍파도 많고 위험도 많았던 중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조선 사람이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중국 56개 민족중의 일원으로서 이 땅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망국의 쓴맛을 맛볼 대로 맛본 부모님 세대들은 중국에서 자기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부모님 세대들은 고향에서 깨여진 꿈을 중국에서 하나하나 주어모아 키우기 시작하였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그들의 꿈을 누가 공짜로 실현시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하여 중국공산당과 공조하면서 신임을 얻어 사회의 직위와 권리를 늘여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소수민족 중 민족간부 비례가 가장 높았고 우리 말 우리글을 배울 수 있는 소학교로부터 대학교까지 구전이 갖추어놓았고 우리 말 신문사, 방송국도 꾸리고 민족 촌, 민족향진, 자치주가 생겨났다.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하에 사라져가던 우리 말, 우리글을 부모님 세대들은 중국이라는 이국에서 새롭게 꽃피워 갔다. 나는 지금 일 글을 쓰면서 우리 부모님 세대들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또 그들의 현명한 처사와 먼 앞날을 내다보는 고견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후대들에게 지상낙원을 만들어 주기 위해 부모님 세대들은 피와 땀을 흘렸고 심지어 아까운 생명가지 바쳤다. 뿐만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 이 나라에서 꿋꿋이 살아갈 수 있는 민족자존심도 심어주었다. 해마다 조선족 촌들을 기본 단위로 운동회를 조직함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면서 서로 단합하는 모범도 보여 주었다. 지금 우리 중국 조선족들은 오늘날처럼 처량해보기는 없었다. 촌은 황폐하고 학교는 무너져 가고 총각들 장가들기 힘들고 가족은 동강나고 빚 때문에 숨어 다니고... 적지 않은 우리 조선족들이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한중수교나 “잘 살지만 또 무정한 고국-한국”에서 찾고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언제 고국인 한국이나 조선을 원망했던가. 그리고 또 중국을 원망했던가. 원망이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원망, 원망만 하다간 원망만 생길 뿐 아무런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것을 그래 모른단 말인가. 일본 제국주의가 이 땅에서 물러간 것도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총 들고 나서서 싸웠기 때문이지 집에 앉아 무릎을 치며 넋두리 원망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한중수교 어언30년이 넘었다. 양국 두 정부사이 엄청난 발전변화를 가져왔다. 하지만 우리 같은 민족사이의 관계는 오히려 퇴보를 가져오고 있다. 서로 의심하고 깔보고 비난하고... 조선족(한민족)의 한 일원으로서 나는 구태여 한국이 어쩌고저쩌고 말하고 싶지 않다. 마치 친구사이 모순이 생겼을 때 먼저 친구에게서 잘못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 못을 먼저 찾듯이. 그래서 “한중수교가 없었더라면”이라는 가설로 오늘날 우리 조선족사회의 모든 불행을 한국에 떠밀지 말아야 한다. 그런 가설은 다만 독자들을 오도하게 되고 그보다도 우리 조선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조선족들이 한국에 가서 진짜 약만 팔고 가짜 약을 팔지 않았다면... 만약 친척방문을 간 조선족이 한국친척에게 정신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기한내로 중국으로 돌아왔다면... 조선족연수생이 말 그대로 연수하고 계약대로 중국으로 돌아왔다면... 한국에서 조선족들이 조용히 돈벌이에만 전념하고 패거리 싸움을 하지 않았다면... 이국이라고 외롭다는 핑계로 돈 번다는 우월감으로 고향의 가족을 멀리하고 임시부부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한국에서나 중국의 한국기업에서 월급을 더 많이 주는곳이 있다고 미리 통보도 없이 훌쩍 떠나가는 현상이 없었다면. 같은 민족이라고 믿고 맡기는 거금을 가지고 달아나지 않았다면... 허황한 황금 몽에 외국수속 함네 하고 논을 팔아치우고 빈둥거리며 놀지 않았다면... 외국에서 눈물겹게 벌어 보내온 돈을 마작 판에 화투판에 밀어 넣지 않고 사흘이 멀다하게 식당으로 카라OK로 가지 않았다면... 개혁개방당시 우리 민족의 특색인 김치 짠지를 가지고 도시 진출하던 그 창업정신과 근면을 오늘날까지 보존 발전하였다면... 눈앞의 이익만 보고 어린자식들을 한족학교에 보내지 않았다면... 돈을 급급히 향수하는데 쓰지 않고 기술을 배우거나 경제활동에 참여하는데 쓰였다면... 민족간부들과 민족지식인들이 한중간 민간교류가 활발히 벌어지는 그때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인과 사회주의 체제의 조선족들과 있게 될 마찰과 모순에 대한 심도 있게 연구하고 미리 발전방향과 대응책을 내놓았다면... 그리고, 우리 부모님 세대들의 삶의 지혜와 그 정신, 모든 일을 남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열심히 삶의 환경을 개선하고 주위와의 관계를 유연하게 보존하면서 신임을 쌓아 나는 너를 위하고 너는 나를 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면서 낯 설은 곳에서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배낭을 풀어 살기 좋은 제2고향을 만들어내는 부모님 세대들의 간고분투와 자력갱생하는 정신 그리고 그 어디서나 진공과 방어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그 지혜를 이어받았다면 그리고 자기들의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함으로서 단점을 미봉할 줄 아는 자아완성의 방법을 이어받았다면 오늘의 불행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모두 힘냅시다. 오늘의 사회가 아무리 살기 어렵고 경쟁이 치열하고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어찌 우리 부모님 세대들의 그 헐망한 세상과 비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운명은 바로 우리들의 손에 쥐여져 있습니다. 마치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중국에서 오늘날의 기업을 일떠세웠듯이 우리도 우리들의 내일의 기업을 위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다듬어 진정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국제시민이 되기에 다 함께 노력합니다. 우리들의 가치는 바로 우리들이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또한 우리 민족이 이 세상에서 우수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새봄이 상큼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군요. 일년지계는 봄에 있고 일일지계는 아침에 있다고 합니다. 새해 아침부터 좋은 하루 되시고 새봄에 품은 아름다운 씨앗이 가을엔 주렁 진 열매를 맺기를 삼가 바랍니다. [소감: 이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우리의 앞날을 개척하기위해 피와 목숨을 바친 선조들의 얼에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들도 생존을 위해 금전이 필요 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이 후대를 위해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 단아한 민족 주거지, 교육시설, 민족문화 ...이것을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였습니까. 하여 지금은 많은 조선족 인재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민족의 명맥이 점점 미약해져 감을 느낍니다. 여기에는 후손인 우리들이 책임과 의무를 다 하지 못함을 말합니다. 지금 국내에 있는 단체나 인사들 중, 그리고 재한 교포들 중 동포사회를 위해 발 벗고 나서서 자원봉사 하는 분들을 보면 매우 존경스럽습니다. 누구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사명감을 가지고 힘을 합쳐서 선조들의 얼을 이어 갑시다. ]
56    [친구찾기] 친구 김효정 金效廷 찾아요 댓글:  조회:78  추천:0  2024-08-26
건공소학교 1반, 실험중2007년급 1반, 연길시2중 2반(2014년 졸업) 졸업한 동창생 김효정 金效廷 (본명 김란 金兰)을 찾습니다. 김효정金效廷씨 생일은 1994년 1월 20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집은 철남 재정국 근처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효정씨의 친구거나 김효정씨를 알고 계신분, 현재 김효정씨와 연락하고 계신 분들은 저한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전화/위챗: 15944318256 QQ: 2934636643, 2047940864 mail: 2047940864@qq.com huangjingyou0433@163.com
55    한복 韓服 —이상각 — 댓글:  조회:187  추천:0  2024-06-29
한 복 韓服 이상각 당신의 살결처럼 부드럽습니다 당신의 체취처럼 향긋합니다 당신의 모습처럼 어여쁩니다 당신 몸에 어울리는 당신의 한복 언제나 당신을 떠날수없습니다 조용히 서있으면 노을입니다 사뿐히 걸어가면 물결입니다 말쑥한 그 모습 선녀입니다 마음으로 만져본 당신의 한복 이 몸도 당신을 떠날수 없습니다
54    광고 책구합니다 "녀자애들의 왕국 사내애들의 천당" 댓글:  조회:549  추천:15  2024-04-26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된 록색 표지의 이야기책 상,하권을 중고로 사려고 합니다. 고서점을 하시거나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된 책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은 련락주시기 바랍니다.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된 도서 "녀자애들의 왕국 남자애들의 천당"편 “女孩的王国,男孩的天堂” 이 이야기책들을 구합니다. 이 책들을 가지고 계시거나 파시려는 분들은 련락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출간한 《조선왕조 궁중음식》책도 사렵니다. 전화, 위챗: 15944318256
53    광고 중고책 사렵니다 "녀자애들의 왕국, 사내애들의 천당" 댓글:  조회:521  추천:7  2024-03-17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된 록색 표지의 이야기책 상,하권을 중고로 사려고 합니다. 고서점을 하시거나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된 책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은 련락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된 도서 《녀자애들의 왕국, 남자애들의 천당》 《女孩的王国,男孩的天堂》 이 이야기책들을 구합니다. 이 책들을 가지고 계시거나 파시려는 분들은 련락주시기 바랍니다. 한국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출간한 《조선왕조 궁중음식》책도 사렵니다. 전화, 위챗: 15944318256
52    고구려,백제, 신라,가야, 발해 왕계표 댓글:  조회:976  추천:0  2023-09-03
(7) 고구려 왕계표 왕명 : 왕, 태왕(太王), 대왕(大王), 열제(烈帝) - 성(姓) : 고(高) - 28대 705년(7161~7865, BC37?∼서기668)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연호 재위기간 약 사 1 추모왕(芻慕 鄒牟) 주몽왕(朱蒙王) 동명성왕(東明聖王) 7161-BC37 다물 多勿 18 名은 주몽(朱蒙), 추모. 해모수의 4세손. 父는 불리지, 母는 하백의 딸 류화柳花. 2 유리명왕(琉璃明王) 7179-BC19 37 名은 유리, 유류(孺留), 여률(북사). 母는 예씨부인. 3 대무신왕(大武神王) 7215-18 26 대해주류왕. 名은 무휼(無恤), 막래(북사).母는 다물국 송양의 딸 송씨부인. 4 민중왕(閔中王) 7241-44 4 名은 해색주(解色朱). 대무신왕의 동생. 5 모본왕(慕本王) 7245-48 5 名은 해우(解憂), 해애루. 대무신왕의 원자. 6 태조왕(太祖王) 7250-53 융무 隆武 93 국조왕. 名은 궁(宮). 유리왕의 2대손. 륭무(隆武) 7 차대왕(次大王) 7343-146 19 名은 수성(遂成). 태조왕의 동생.명림답부에게 죽음 8 신대왕(新大王) 7362-165 14 名은 백고(伯固) , 백구(伯句). 태조왕의 막내동생. 9 고국천왕(故國川王) 7376-179 18 名은 남무(男武), 이이모(북사). 신대왕의 2자 10 산상왕(山上王) 7394-197 30 名은 연우(延憂) ,위궁(位宮).신대왕의4자(형 발기를 제끼고 왕이되어 형 발기가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죽음)선황후우(형수)를 황후로 맞이함.을파소 참전계경 11 동천왕(東川王) 7424-227 21 동양왕. 名은 우위거(憂位居). 12 중천왕(中川王) 7445-248 22 중양왕. 名은 연불(然弗). 13 서천왕(西川王) 7467-270 22 서양왕. 名은 약로(藥盧) , 약우(若友). 14 봉상왕(烽上王) 7489-292 8 치갈왕. 名은 상부(相夫) , 삽시루. 15 미천왕(美川王) 7497-300 31 호양왕. 名은 을불(乙弗) , 우불(憂弗). 서천왕2대손. 父는 고추가 돌고. 16 고국원왕(故國原王) 7528-331 永和 40 국강상왕. 名은 사유(斯由) , 쇠(釗).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교전중 사망. 17 소수림왕(小獸林王) 7568-371 13 소해주류왕. 名은 구부(丘夫). 18 고국양왕(故國壤王) 7581-384 8 名은 이련(伊連) , 지지(只支) 소수림왕의 아우. 19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7589-392 영락 永樂 21 광개토경호태왕, 名은 담덕(談德). 20 장수왕(長壽王) 7610-413 건흥 建興 79 장수홍제호태열제,名은 거련(巨連). 475년 백제 한성으로 공격하여 개로왕 주살. 21 문자명왕(文咨明王) 7689-492 명치 明治 27 문자호태열제,名은 나운(羅雲).장수왕 2대손.父는 조다(助多). 22 안장왕(安藏王) 7716-519 12 名은 흥안(興安). 23 안원왕(安原王) 7728-531 14 名은 보연(寶延). 안장왕의 아우. 24 양원왕(陽原王) 7742-545 14 양강왕. 名은 평성(平成). 25 평원왕(平原王) 7756-559 대덕 大德 31 평강상호태열제. 名은 양성(陽成), 탕(북사). 26 영양왕(拏陽王) 7787-590 홍무 弘武 28 영양무원호태열제, 名은 원(元), 대원.사서 5권 편찬.수나라 양왕 광의113만 대군을 대장군 을지문덕이 물리침. 27 영류왕(營留王) 7815-618 24 名은 건무(建武),성(成)영양왕의 이복동생.연개소문에게 죽음 28 보장왕(寶藏王) 7839-642 개화 開化 26 名은 장(臧). 영류왕의 아들 태양왕의 아들로 연개소문에 의해 옹립.당 이세민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연개소문의 세아들 남생,남건,남산의 분란으로 7865(AD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멸망) 7865-668 (8) 백제 왕계표 왕명 : 왕(王) - 성(姓) : 부여(夫餘,扶餘) - 32대 678년 (한기7180~7857, BC18?∼서기660)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약 사 소서노(召西努) 7156-BC42 고구려의 신하 연타발의 딸로,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이다.(BC31)년에 고구려에 의해 제후로 인정. 1 온조왕(溫祚王) 7180-BC18 45 고주몽의 아들. 형은 비류(沸流). 2 다루왕(多婁王) 7225-28 49 온조왕의 맏아들. 처음으로 논에서 쌀농사 3 기루왕(己婁王) 7274-77 51 다루왕의 맏아들. 4 개루왕(蓋婁王) 7325-128 38 기루왕의 아들. 북한산성을 쌓았다. 5 초고왕(肖古王) 7363-166 48 소고(素古).개루왕의 아들. 6 구수왕(仇首王) 7411-214 20 귀수(貴須). 204년 위구태의 구태백제에 복속하여 온조백제는 구태백제의 후국이됨 7 사반왕(沙伴王) 7435-234 1 구수왕의 아들.사반왕이 너무어려 정사를 볼 능력이 없어 폐하고 고이왕이 왕위에 오름 8 고이왕(古爾王) 7436-234 52 초고왕의 아우. 9 책계왕(責稽王) 7483-286 12 고이왕의 아들. 청계(靑稽).AD298년 가을 9월, 한 나라가 맥인들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전사하였다. 10 분서왕(汾西王) 7495-298 6 책계왕의 맏아들 11 비류왕(比流王) 7501-304 40 구수왕의 아들. 12 설왕(契王) 7541-344 2 분서왕의 맏아들 13 근초고왕(近肖古王) 7543-346 29 비류왕의 둘째아들. 고구려 평양성에 쳐들어가 고국원왕을 살해. 고흥이 서기 집필 14 근구수왕(近仇首王) 7572-375 9 휘수(諱須). 15 침류왕(枕流王) 7581-384 1 근구수왕의 맏아들. 16 진사왕(辰斯王) 7582-385 7 근구수왕의 둘째아들. 17 아신왕(阿莘王) 7589-392 13 아방(阿芳).침류왕의 아들 18 전지왕(전支王) 7602-405 15 직지(直支). 혹은 여영.아신왕의 맏아들. 19 구이신왕(久爾辛王) 7617-420 7 전지왕의 맏아들. 20 비유왕(毗有王) 7624-427 28 구이신왕의 맏아들. 21 개로왕(蓋鹵王) 7652-455 20 근개루(近蓋婁). 名은 경사(慶司).고구려 장수왕 공격으로 아차산에서 사망(475년) 22 문주왕(文周王) 7672-475 2 개로왕의 아들.웅진으로 도읍을 옮김.병관좌평 해구에 의해죽었다. 23 삼근왕(三斤王) 7674-477 2 임걸(壬乞). 문주왕의 맏아들. 24 동성왕(東城王) 7676-479 22 名은 모대(牟大) 혹은 마모(摩牟). 문주왕의아우 곤지(昆支)의 아들. 25 무령왕(武寧王) 7698-501 22 名은 사마(斯摩). 동성왕의 둘째아들.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에 가서 한솔 해명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 26 성왕(聖王) 7720-523 31 名은 명농(明농). 도읍을 사비[소부리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27 위덕왕(威德王) 7751-554 44 名은 창(昌). 28 혜왕(惠王) 7795-598 1 名은 계(季). 성왕의 둘째아들. 29 법왕(法王) 7796-599 1 名은 선(宣) 혹은 효순(孝順). 30 무왕(武王) 7797-600 41 名은 장(璋). 31 의자왕(義慈王) 7838-641 19 7857(AD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 (멸망) 7857-660 (9) 신라 왕계표 왕명 : 거세간(居世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 왕(王) 성(姓) : 박(朴),석(昔),김(金) -56대 992년 (한기7141~8132, BC57 ∼ 서기935)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성 왕호칭 약 사 1 혁거세(赫居世) 7141-BC57 61 박? 거세간 나이 13세에 양산촌등 6부 촌장에 의해 왕으로 추대.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2 남해(南解) 7202-5 19 박 차차웅 혁거세의 아들. 3 유리(儒理) 7221-24 33 박 이사금 남해의 아들.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부의 성(姓)을 하사.관직을 이벌찬등 17등급으로 제정 시행. 4 탈해(脫解) 7254-57 23 석 이사금 토해(吐解).남해의 사위.김알지 탄생 5 파사(婆娑) 7277-80 32 박 이사금 유리의 둘째 아들. 6 지마(祇摩) 7309-112 22 박 이사금 지미(祇味). 파사의 아들 7 일성(逸聖) 7331-134 20 박 이사금 유리의 큰아들 혹은 일지(日知) 갈문왕의 아들이다. 8 아달라(阿達羅) 7351-154 30 박 이사금 일성의 맏아들. 9 벌휴(伐休) 7381-184 12 석 이사금 탈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각간(角干) 구추(仇鄒)이다. 10 나해(奈解) 7393-196 34 석 이사금 벌휴의 손자. 11 조분(助賁) 7427-230 17 석 이사금 제귀(諸貴). 벌휴의 2대손으로 아버지는 골정(骨正) 갈문왕이다 12 첨해(沾解) 7444-247 15 석 이사금 조분의 동생이다. 13 미추(味鄒) 7459-262 21 김 이사금 미조. 김알지(金閼智)의 5대손 구도(仇道)의 아들. 14 유례(儒禮) 7480-283 15 석 이사금 조분의 장자. 15 기림(基臨) 7495-298 12 석 이사금 기립(基立)조분의 2대손 父는 이찬걸숙(乞淑) 16 흘해(訖解) 7507-310 46 석 이사금 나해의 2대손. 父는 각간 우로 (于老). 17 내물(奈勿) 7553-356 46 김 이사금 나밀(那密). 구도仇道)의 2대손. 父는 각간 말구(末仇). 18 실성(實聖) 7599-402 15 김 이사금 김알지의 후손. 父는대서지 이찬 19 눌지(訥祗) 7614-417 41 김 마립간 내물의 아들. 20 자비(慈悲) 7655-458 21 김 마립간 눌지의 맏아들. 21 소지(炤知) 7676-479 21 김 마립간 비처(毗處).자비의 맏아들. 22 지증(智證) 7697-500 14 김 마립간 名은 지대로(智大路). 내물 3대손 갈문왕 습보(習寶)의 아들. 23 법흥(法興) 7711-514 26 김 왕 名은 원종(原宗). 24 진흥(眞興) 7737-540 36 김 왕 名은 삼맥종(삼麥宗) 혹은 심 맥부(深麥夫) 법흥의 왕제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 25 진지(眞智) 7773-576 3 김 왕 名은 사륜(舍輪). 진흥의 2자. 26 진평(眞平) 7776-579 53 김 왕 名은 백정(白淨).진흥의 태자 동륜의 아들 27 선덕(善德) 7829-632 15 김 왕 名은 덕만(德曼). 진평의 장녀. 28 진덕(眞德) 7844-647 7 김 왕 名은 승만(勝曼). 진평의 모제 국반(國飯) 갈문왕의 딸. 29 무열(武烈) 7851-654 7 김 왕 名은 춘추(春秋). 진지의 아들 이찬 용춘 (龍春)의 아들. 백제를 멸망 시킴(A.D 660) 30 문무(文武) 7858-661 20 김 왕 名은 법민(法敏). 무열의 원자.당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 31 신문(神文) 7878-681 11 김 왕 名은 정명(政明) 혹은 명지(明之) 문무의 장자 32 효소(孝昭) 7889-692 10 김 왕 名은 이홍(理洪). 신문의 태자. 33 성덕(聖德) 7899-702 35 김 왕 名은 흥광(興光)신문의 둘째아들로 효소의 동복 아우. 34 효성(孝成) 7934-737 5 김 왕 名은 승경(承慶)성덕의 둘째 아들 35 경덕(景德) 7939-742 23 김 왕 名은 헌영(憲英)효성 이복 동생 36 혜공(惠恭) 7962-765 15 김 왕 名은 건운(乾運). 경덕의 적자. 37 선덕(善德) 7977-780 5 김 왕 名은 양상(良相). 내물의 10대손 으로 아버지는 사찬 효방(孝芳). 38 원성(元聖) 7982-785 14 김 왕 名은 경신(敬信). 내물의 12대손. 39 소성(昭聖) 7996-799 1 김 왕 名은 준옹(俊邕). 원성의 태자 인겸(仁謙)의 아들. 40 애장(哀莊) 7997-800 9 김 왕 名은 청명(淸明). 소성의 태자. 41 헌덕(憲德) 8006-809 17 김 왕 名은 언승(彦昇)소성의 동복아우 42 흥덕(興德) 8023-826 10 김 왕 名은수종(秀宗)헌덕의동복아우 43 희강(僖康) 8033-836 2 김 왕 名은 제륭(悌隆).원성의 손자이고 이찬 헌정(憲貞)의 아들. 44 민애(閔哀) 8035-838 1 김 왕 名은 명(明). 원성의 증손이며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 45 신무(神武) 8036-839 김 왕 名은 우징(祐徵). 원성의 손자이며상대등 균정(均貞)의 아들. 46 문성(文聖) 8036-839 18 김 왕 名은 경응(慶膺). 신무의 태자. 47 헌안(憲安) 8054-857 4 김 왕 名은 의정(誼靖)신무의이복아우 48 경문(景文) 8058-861 14 김 왕 名은 응렴(膺廉)희강의아들아찬 계명 (啓明)의 아들 49 헌강(憲康) 8072-875 11 김 왕 名은 정(晸). 경문의 태자. 50 정강(定康) 8083-886 1 김 왕 名은 황(晃) 경문의 둘째 아들. 51 진성(眞聖) 8084-887 10 김 왕 名은 만(曼). 헌강의 여동생. 52 효공(孝恭) 8094-897 15 김 왕 名은 요(嶢). 헌강의 서자. 53 신덕(神德) 8109-912 5 박 왕 名은 경휘(景暉). 아달라왕 (阿達羅王)의 후손 54 경명(景明) 8114-917 7 박 왕 名은 승영(昇英).신덕의 태자. 55 경애(景哀) 8121-924 3 박 왕 名은 위응(魏膺)경명의동복아우. 56 경순(敬順) 8124-927 8 김 왕 名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으로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 8132(AD935)년 나라를 고려에 넘기었다. (멸망) 8132-935 (10)가야 왕계표 왕명 : 왕(王) - 성(姓) : 김(金) - 10대 520년(한기7239~7759, 서기42 ∼ 562) 대 왕 명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기간 약 사 1 수로왕(首露王) 7239-42 157 2 거등(居登王) 7396-199 54 어머니는 허황후(許皇后). 기묘(己卯; 199) 3월 13일에 즉위(卽位), 치세(治世)는 39년으로 계유(癸酉; 253) 9월 17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이며 태자(太子) 마품(麻品)을 낳음. 3 마품(麻品王) 7450-253 38 신해(辛亥; 291) 1월 29일에 죽음. 왕비(王妃)는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孫女) 호구(好仇)로 태자(太子) 거질미(居叱彌)를 낳음. 4 거즐미(居叱彌王) 7488-291 55 금물(今勿)이라고도 하며 김씨(金氏). 영평(永平) 원년에 즉위.병오(丙午; 346) 7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아궁아간(阿躬阿干)의 손녀 아지(阿志)로, 왕자(王子) 이시품(伊尸品)을 낳음. 5 이시품(伊尸品王) 7543-346 61 혹은 이품(伊品). 정미(丁未; 407) 4월 10일에 죽음. 왕비는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으로, 왕자 좌지(坐知)를 낳음. 6 좌지(坐知王) 7604-407 14 용녀(傭女)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의 무리를 관리로 등용하니 국내가 시끄러웠다. 용녀를 내쳐서 하산도(荷山島)로 귀양보내고, 정치를 고쳐 행하여 길이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신유(辛酉; 421) 4월 12일에 죽음. 왕비는 도령대아간(道寧大阿干)의 딸 복수(福壽)로, 아들 취희(吹希)를 낳음. 7 취히(吹希王) 7618-421 30 질가(叱嘉)라고도 함. 김씨(金氏). 신묘(辛卯; 451) 2월 3일에 죽음. 왕비는 진사각간(進思角干)의 딸 인덕(仁德). 왕자(王子) 질지(질知)를 낳음. 8 질지 7648-451 41 김질왕(金질王)이라고도 함.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함.임신(壬申; 492) 10월 4일에 죽음. 왕비는 김상사간(金相沙干)의 딸 방원(邦媛). 왕자 겸지(鉗知)를 낳음. 9 겸지(鉗知王) 7689-492 29 김겸왕(金鉗王)이라고도 함. 정광(正光) 2년 신축(辛丑; 521) 4월 7일에 죽음. 왕비는 출충각간(出忠角干)의 딸 숙(淑). 왕자 구형(仇衡)을 낳음. 10 구형(仇衡王) 7718-521 41 임오(壬午; 562) 9월에 신라 진흥왕(眞興王)의 침략으로 멸망. (멸망) 7759-562 * 좌지왕 이후 가야연맹체의 주도권이 대가야로 넘어가게 되었다. (11) 대진국(발해) 왕계표 왕명 : 제(帝),황제(皇帝) - 성(姓) : 대(大) - 15대 259년 (한기7865~8123, 서기668 ∼926) 대 왕 명 연호 즉위년도 (한기-서기) 재위 기간 명 약 사 묘호(廟號) 시 호(諡號) 1 세조(世祖) 진국열황제皇帝 중광 重光 7865-668 31 중상(仲象) 후고구려로 개국 2 태조(太祖) 성무고황제皇帝 천통 天统 7896-699 20 조영(祚榮) 대진국으로 개명 3 광종(光宗) 무황제(武皇帝) 인안 仁安 7916-719 19 무예(武藝) 동생 대문예 당으로 망명 4 세종(世宗) 광성문황제皇帝 대흥 大興 7935-738 56 흠무(欽茂) 국사 25권 편찬 5 대원의(大元義) 7991-794 세종의 아우.포악하여 바로쫏겨남 6 인종(仁宗) 성황제(成皇帝) 중흥 重興 7991-794 1 화여(華璵) 세종의 아들인 굉림 (宏臨)의 아들. 7 목종(穆宗) 강황제(康皇帝) 정력 正曆 7992-795 14 숭린(崇璘) 인종의 황숙(皇叔). 8 의종(毅宗) 정황제(定皇帝) 영덕 8006-809 3 원유(元瑜) 9 강종(康宗) 희황제(僖皇帝) 주작 朱雀 8009-812 5 언의(言義) 10 철종(哲宗) 간황제(簡皇帝) 태시 太始 8014-817 1 명충(明忠) 11 성종(聖宗) 선황제(宣皇帝) 건흥 建興 8015-818 14 인수(人秀)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4세손. 12 장종(莊宗) 화황제(화皇帝) 함화 咸和 8029-832 26 이진(尋震) 13 순종(順宗) 안황제(순皇帝) 대정 大正 8055-858 14 건황(虔晃) 14 명종(明宗) 경황제(景皇帝) 천복 天福 8069-872 29 현석(玄錫) 15 애황제(哀皇帝) 청태清太 8098-901 25 인선 8123(AD926)년 요에 의해 멸망. (멸망) 8123-926
51    옷차림의 특색 댓글:  조회:504  추천:0  2023-07-01
옷차림의 특색 조선민족의 옷차림은 자기의 발전행정에서 간단없이 개선되고 변화되였으며 민족적특색을 가지게 되였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아한대지방에서 살았기에 옷차림도 내한과 내열에 알맞게 저고리, 바지, 치마, 겉옷, 쓰개, 신발 등으로 구성되였으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봄에는 화창하고 가을에는 청량하게 마련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온돌에서 좌식생활을 해왔으므로 그 옷차림도 좌식생활에 알맞게 짜여졌다. 말하자면 녀자들의 치마는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남자들의 바지 역시 폭에 여유가 있어 주저앉기와 서기에 편리하였고 걸터앉아도 보기 흉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의 옷은 체구와 조화되도록 지어졌다. 일반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일체비례상 상체가 비교적 길고 하체가 상대적으로 짧았으므로 하반신이 긴 서양사람들의 양복과는 달리 웃옷(저고리)을 짧게 하고 아래옷(바지 혹은 치마)을 길게 함으로써 옷을 우리 조상들의 체격에 알맞게 조화시켰다. 특히 치마는 폭이 넓고 길이가 길어서 하체를 더 풍부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민족의 옷은 일반적으로 몸의 선을 선명하게 나타내지 않고 자연스러운 옷의 선으로 몸의 선을 부드럽게 조화시키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우리 민족의 옷선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세련된 그리고 민족적특색이 짙은 옷선이다. 우리 민족의 옷선은 직선과 곡선을 리용하였는데 옷고름 하나라도 그것이 실용가치를 가지게 하였을뿐만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고도 우아한 선을 나타내게 하였다. 우리 민족의 옷선에서 직선이나 곡선 어느것을 막론하고 모두가 유기적으로 자연스럽게 배합되였으며 인공적인 무리감을 주지 않았다. 지어는 옷주름살같은것도 구김살을 보이지않고 조화롭게 만들어졌다. 사실 직선이란 선률적인 곡선보다 좀 딱딱하고 굳어보이지만 그러나 저고리에서는 곡선과 잘 배합되고 조화되여 선률을 이루는데 한결 더 운치를 돋구어주었다. 이를테면 녀자저고리에서 화장등선이라든가 뒤등골직선, 앞섶선 또는 끝동선 같은 직선들이 모두다 서로 어기고 곡선들의 도움을 받아 참으로 우아한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저고리동정, 고대 또는 동정끝 꺾이선까지도 단아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옷선을 직선과 곡선의 대비방법으로, 때로는 십자형대비의 방법으로, 때로는 교차대비의 방법으로, 률동선으로 조화되게 한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사물조화의 원리를 잘 파악한 증거라고도 말할수 있다. 우리 민족의 옷선은 실로 아름다울뿐아니라 이런 옷선으로 특징되는 옷들은 강한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강하고 단정해보이는 함축성과 깊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흰옷을 즐겨입었다. 하여 우리 민족을 ,, 라는 말이 생겼다. 그렇다고 우리의 조상들이 꼭 흰옷만 입은 것은 아니였다. 처녀들은 노랑저고리에 분홍치마, 금박댕기를 늘여 개나리, 진달래를 나타내기도 했고 결혼한 부인들은 옥색저고리에 남색치마를 례복으로 입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옷은 많은 경우에 한 개 바탕(한가지 옷감-같은 색의 바탕)에 여러가지 색을 복잡하게 섞은 것이 아니라 되도록 단일한 색채로 그 특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였다. 이를테면 한가지 옷감(같은 색의 바탕)에 무늬를 놓아도 동색으로 무늬를 놓아 진하고 연한 빛이 서로 어울려 아름다워보이게 하였다. 또한 우리 민족의 조상들은 옷색갈의 다채로움에도 류의하였다. 말하자면 색동저고리의 색배합을 보아도 5색이 령롱하게 그 하나하나의 채색의 특성을 그대로 보이면서 5색이면 5색, 7색이면 7색이 죄다 조화롭게 서로 합리적으로 배합되게 함으로써 다채로움과 화려성을 보여주었다. 상술한데서 알수 있는바 우리 민족의 전통적옷의 색갈은 매우 단순하고 간결하고 담박하고 우아하며 경우에 따라 다채롭고 화려한 것이 특색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옷의 또 다른 하나의 특색은 사철옷이 기후의 각이한 특성에 알맞게 잘 마련되였다는 그것이다. 우선 겨울옷은 훈훈하고 포근하게 만들어 방한에 주의가 잘 돌려졌다. 봄옷은 화창한 기분을 돋구는 차렵옷, 겹옷 등이였다. 이를테면 봄철에는 꽃분홍이나 연보라, 연분홍치마우에 반회장저고리를 입었고 가을에는 봄철에 볼수 있는 더운 빛깔계통의 빛깔이 아니라 찬 빛깔계통의 색채 말하자면 더운 빛깔계통의 빛깔이 아니라 찬 빛깔계통의 색채 말하자면 진옥색 같은 빛깔을 맞추어 옷을 지어입었던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옷빛갈은 절기의 자연조건을 떠나서 만들어진 것이 거의 없다. 만일 봄옷빛갈이 살구꽃, 배꽃, 복숭아꽃, 진달래꽃과 같은 꽃빛갈의 정취를 떠나지 않았다면 가을옷빛갈은 도라지꽃, 석죽화, 들국화, 산나리꽃 같은 경쾌하고 청상한감을 자아내는 그런 빛깔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옷과 자연이 서로 어울리도록 하였다. 여름옷의 경우도 례외가 아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시원한 느낌을 줄수 있는 옷감에 그런 색갈을 맞추어 옷을 지어입었다. 이를테면 여름에는 잠자리날개와 같은 한산세모시나 열두새 세부포나 꾀꼬리빛갈 같은 안동포로 치마와 적삼을 해입었던것이다. 모두어말하면 조선민족의 옷차림에는 조선민족의 고유한 성격과 기호가 반영되였으며 전통적인 옷 특히 녀자옷은 간편하고 활동적이며 단순하면서도 우아하고 산뜻하며 세련되였다. 하기에 우리 민족의 녀자옷은 지금도 자기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자기의 우세를 자랑하고 있는것이다. 우리 민족 인민들은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는 것을 첫째가는 례절로 여기였다. 문밖을 나설 때면 꼭 옷매무시를 둘러보고 옷과 모자를 단정하게 손질하였다. 특히 손님을 맞을 때에도 외출할 때와 마찬가지로 옷차림을 단정히 하였다. 우리 민족 인민들은 웃옷을 벗은채로 손님을 맞는 일은 례답지 못한 것으로 여겼다. 언제나 깨끗한 것을 좋아한 우리 민족 인민은 옷이 더러워질세라 동정을 갈아달고 자주 빨아입었다. 그리하여 항상 단정하고 깨끗한 옷차림을 하여왔다.
50    상경룡천부 댓글:  조회:485  추천:0  2023-07-01
기행문]상경룡천부 160여년간 발해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상경룡천부옛성터(홀한성이라고도 함)는 흑룡강성 녕안시 발해진에 위치해있다. 3월 30일 이른 아침, 연길을 출발한 승용차는 4시간 여를 달려서야 발해진에 도착했다. 발해진에 들어서는 첫 어구에 옥수수술공장이 있는데 그 길목으로부터 외성이 시작된다. 외성은 방대한 평지성이였다. 성터우에 올라서서 사방을 바라보니 멀리 장광재령과 로야령이 아득히 보이는 사방 수백리의 평원지대였다. 상경룡천부외각으로 목단강이 흘러지나고 25킬로메터 떨어진 곳에 경박호까지 있으니 이곳은 수려하고 아름다운 황성옛터였음이 틀림없어보인다. 길가에 세워져있는 외성을 소개한 비문에는 외성의 길이는 18.5킬로메터, 평균높이는 2메터라고 적혀있었다. 시내길을 따라 곧추 들어가다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에 접어들어 조금 가니 바로 오봉루(일명 “오문”이라고도 함)라고 부르는 궁성정문이 보였다. 마당에는 상경룡천부유적비와 말을 매였던 돌들이 여기저기 세워져있거나 쓸어져있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옛우물 하나가 있었다. 오문자리에 남아있는 기단은 6메터남짓 높아보이고 동서길이 60메터, 남북의 너비 20메터 남짓 되는것 같았다. 오문을 지나 뒤로 가보니 기단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르니 궁성내가 한눈에 안겨왔다.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원모습 그대로거나 보건된 궁전터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한무리의 양떼들이 궁성내에서 뛰여다니면서 풀을 뜯고있었고 어디선지 경운기가 통탕거리는 소리가 들릴뿐 궁성은 자못 한적해보였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수십개의 웅장한 초석이 단단히 박혀있었다. 그 초석이 받쳐주는 기둥에 루각이 건축되였겠으니 얼마나 웅위로웠을가. 궁성은 발해왕실의 거주지인 동시에 국가의 통치권력을 행사하던 곳이다. 오문에서 내려 200메터쯤 들어가니 제1궁전자리였다. 기단을 쌓은 돌은 옛돌 그대로 보였다. 기단의 높이는 3메터, 길이는 56메터, 너비는 25메터였다. 밖으로 돌을 쌓고 안에 흙을 다진 기단우에는 대형원형초석이 묻혀있는데 56개가 건재해있었다. 그 초석을 딛고 궁궐이 일어섰겠으니 그 웅위로움 또 얼마나 가관이였겠는가. 5개의 궁전이 한 개의 중추선우에 배렬되여있는데 제1궁전과 제2궁전사이는150메터, 제2궁전과 제3궁전 사이는 130메터, 제3궁전과 제4궁전 사이는 30메터, 제4궁전과 제5궁전 사이는 80메터였다. 궁전터 일부는 복원되였지만 더러는 기단이 허물어진 상태의것들이였다. 물론 궁전의 전각들은 모두 소실되여있고 기단우에는 원형모양의 초석들만 박혀있었다. 궁전터사이의 공지는 경작지로 리용되고있었다.궁전터곁이거나 밭머리에는 궁전터에서 주은 기와파편을 쌓아놓은 커다란 무지가 여기저기 있었다. 제2궁전자리의 동쪽에 “팔보유리정”이라는 패말이 세워져있는 옛우물이 있었다. 우물은 정자로 보호되여있었다. 돌을 던져보니 마른 우물이였다. 때마침 양치기늙은이가 다가와서 물었더니 이 우물은 원래 꿀은 탄것처럼 달고 시원한 샘이 솟는 우물이였다고 한다. 마을의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돌과 나무가지를 무작정 던져넣어 지금은 페우물이 되었다는것이였다. 아쉬운 일이였다. 이상하게도 궁성내의 많은 고목이 말라죽고있었다. 다가가보니 나무밑턱을 누군가 둥그렇게 칼로 파놓아 우정 죽게 한것이였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오봉루에서 듣던 경운기소리는 제5궁전곁의 넓고 기름진 밭에서 들린것이였다. 농부들이 경운기로 한창 밭갈이를 하고있었다. 외성내에 있는 남대묘에 보전되여있는 석등탑 또한 유명한지라 이리저리 물어서 찾아가보았다. 석등탐은 발해시기 많은 유적, 유물 가운데서 가장 뛰여나고 잘 알려져있는 불교조각품이다. 이 탑은 현무암으로 만든것인데 밑부분은 지대석우에 복련화문을 조각한 하석대를 올려놓은 양식으로 만들고 그우에 원주형으로 된 간주석을 세웠으며 간주석우에는 양련화문을 조각한 상대석을 올렸다. 그우에는 8개의 창문과 16개 구멍을 낸 화사석을 놓았고 그우에는 8각의 옥개석이 올려져있다. 옥개석우의 상륜부는 7층의 보륜을 장식하였다. 석등탑의 높이는 5메터남짓 되어보였다. 탑은 능히 뜯을수도 있고 조합할수도 있다고 한다. 비록 천년동안의 비바람을 맞았지만 발해인들의 창조적이고 천재적인 재능에 기대여 오늘까지도 꿋꿋한 자태를 자랑하는 모습 멋지기만 하다. 외성의 흥륭사에 보존되여있는 대석불 또한 발해시기의 유명한 유물이라고 하는데 이날 유감스럽게 가보지 못했다.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830년까지 즉위)이 최고 흥성기를 이루었다. 선왕은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정복활동을 벌여 발해력사상 최대의 령력을 확장했다. 중국의 사서 “신당서” 발해전에 서술한 사방 5천리땅내에 설치한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은 이때에 완비했던것이며 세상은 이를 두고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상경룡천부는 755년부터 785년까지 30년간, 그후 성왕 대화여시기에 도읍을 다시 길림성 훈춘의 동경룡원부로부터 옮겨 망할 때까지 132년간, 도합 162년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698년 대조영이 돈화의 동모산에서 일으켜 오동성,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시 서고성), 동경원룡부(길림성 훈춘시 팔련성)를 거쳐 상경룡천부에 이르기까지 228년동안 15대 왕을 이어오던 발해는 926년 내분과 자연재해(지진), 거란의 외침에 의해 망하게 된다. 발해의 흥망성쇠를 생각하니 귀로의 차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마음 저으기 안타깝기만 하다. 160여년의 력사와 문화의 숨결이 묻혀있는 상경룡천부, 궁성안에 당나라 장안성을 본딴 주작대로까지 건설해놓고 고관대작을 거느리던 황포의 발해사나이와 궁궐을 수놓았을 어여쁜 발해녀인들의 웃음, 대륙을 주름잡았을 발해의 무적의 장수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자신들이 엮었던 찬란한 꿈을 되돌아보고있을가. 발해진에서 멀어지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홀한성의 외성은 시내를 멀리할수록 오히려 더 뚜렷히 눈에 안겨온다. 상경룡천부옛터는 참으로 웅장하고 기품이 있는 도읍지자리였다.
49    호태왕비 ; 광개토대왕비 댓글:  조회:482  추천:0  2023-07-01
호태왕비(김철호) (사진은 1998년에 찍은 호태왕비이다.)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5 ㅡ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6.39메터의 거대석 우뚝 솟은 웅장한 기세와 힘찬 남성을 방불케 하는 호태왕비을 바라보노라면 우선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게 된다. 집안시 태왕향 태왕촌에 세워져있는 호태왕비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이 부왕 담덤(淡德) 즉 호태왕의 공로와 수묘인의 관리제도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호태왕은 고구려 제19대 왕인데 호는 령락태왕, 시호는 국강상관개토경평안호태왕이다. 18세에 등극하여 39세에 작고하기까지 22년간 64개의 성과 1천4백개의 촌락을 정복하면서 서북으로 료하를 넘어 료서지방을 공략하고 북으로 잔존촌락을 모두다 통합하였다. 남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았으며 한강계선의 백제령토를 점령하였다. 한편 동남으로 신라를 위압하여 또한 조공을 바치게 하였으며 락동강하루지방의 가야족에 침입해온 왜족을 격퇴시키면서 광대한 지역에 세력을 떨친 고구려에서의 가장 걸출한 국왕이다. 비석은 높이 6.39메터, 각면의 너비 1.3ㅡ2메터 사이이고 중량이 37톤이나 되는 하나의 방추체자연형모양의 회색 응회암(凝灰岩)의 화산석을 조금 다듬어서 만든것이다. 석좌(石座) 역시 거대한 화강석으로 다져졌는데 보매 원래는 한덩이였댔으나 어떤 원인으로 깨여져 지금은 세쪽으로 되였지만 의연히 땅에 단단히 배겨있으면서 비석을 굳게 받들고있었다. 호태왕비의 석재는 모래구성이 있는 응회암으로서 이런 종류의 석재는 오직 화산구부근에서만 발견되는 돌이다. 집안경내에서는 이와 같은 돌이 나는곳이 없다. 그러니 가능하게 백두산천지주위에서 채굴하여 옮겨온것으로 사료된다. 머리속에 거대석재를 운반하는 장면을 상상만 해보아도 저절로 혀가 차진다. 애급의 금자탑을 세우는 그 장면과 뭐가 다를바가 있겠는가. 또 37톤이나 되는 거석을 들어 올릴수 있는 설비도 없었던 그 시기에 이 돌을 어떻게 세웠으며 무슨 수로 1580여년의 자연계와 인류사회의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도 끄떡 않게끔 고정해놓았을가. 그리고 사면 석면에는 어떻게 글을 새겼고… 비석은 1면에 11줄, 2면에 10줄, 3면에 14줄, 4면에 9줄 이렇게 모두 44줄의 글자를 새겨넣었는데 한줄에 41자가 새겨져 1804자가 되겠으나 결자가 생겨 실제로는 1775자이다. 줄과 줄사이에는 세로로 칸을 나누어 선을 그었으며 좌로부터 우의 순서에 따라 정방형으로 조각하였는데 글씨의 크기는 손만큼 했다. 《옛날에 시조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울 때 북부여에서 왔노라. 그이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였노라. 알을 깨고 출생하매 원래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노라…(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母河伯女郞, 剖卵降世, 生子有聖德…)》 이렇게 고구려의 건국신화로터 서술되여있는 비석에는 왕위의 계승과 전쟁업적, 조상의 묘를 지키고 생계를 유지하는 등 당시의 당부까지 까근히 기록되여있어 그야말로 고구려력사를 연구하는 진귀한 자료가 아닐수 없다. 15세기 좌우, 조선의 사람들은 압록강 건너편에서 이쪽을 바라보면서 이 거대석을 금나라 황제의 묘비가 아닐가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70년에 와서야 당지 채벌농민들에 의해 이끼가 차고 넝쿨이 덮인 선돌로 발견되여 소문이 났는데 청나라 화인현 현지사 아래에서 일하는 관원 관월산(關月山)이라는 사람에 의해 그 깊이가 파지게 된다. 관월산은 돌에 낀 이끼를 뜯다가 뜻밖에도 글이 새겨져있는것을 발견하고 미칠듯이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탁본을 만들려고 했지만 이끼가 덮여 도무지 되지 않아 겨우 뜯어낸곳에서부터 몇글자를 탁본할수밖에 없었다. 그는 탁본한것을 친구들께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은 우분, 마분을 바르고 마른후 불을 달아 이끼를 없애고 탁본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때 불에 달구어지면서 돌이 튀는 바람에 귀중한 몇글자를 손상받게 되였다. 찬찬히 바라보니 불에 튄것 같은 자리와 금이 선곳이 보였다. 우리의 안내를 맡은 태왕체창시자이며 태왕체서예학회 회장인 진유국씨는 호태왕비의 서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호태왕비의 서법은 소박하고 무게가 있으며 웅위롭고 대범하며 안정된 산과 같이 드맄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호방하다.》 호태왕비건립년대는 기원 414년, 바로 중국의 동진시대로서 진나라 황실이 남하하면서 남북이 대치하는 국면이 형성된 시기이다. 이로인해 중원지구가 계속 전화를 겪고 황실이 흔들리자 이 혼란한 틈을 타 고 구려가 이 지역에서 신흥력량을 이루었다. 고구려정권이 형성된후 무력이 끊임없이 증강되고 령토 역시 부단히 확대되여 직접 황실까지 위협하자 진나라 조정에서는 고구려에 많은 군사를 파하여 토벌과 진압을 단행했으나 이러한 전쟁은 오히려 고구려로 하여금 더욱더 정치경제의 높은 봉우리로 밀어올려주었을뿐이였다. 또 이 전쟁은 중원의 서법예술을 북방에 전달하는 역활을 하여 고구려민족의 기질과 상호 융합되게 한것이다. 호태왕비는 고구려의 형성과 발전의 력사를 탐색하는데 극히 중대한 사료를 제공해주는 자료보고(寶庫)이며 고구려민족의 지혜가 슴배인 건축예술의 명주이다. 호태왕비는 압록강 푸른물을 바라보면서 고구려의 유풍을 영원히 보존하는 기념비로 솟아 세인들을 불러들일것이다. 우리들은 경탄의 마음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호태왕비를 우러러 크게 머리를 숙였다. 연변일보 1999년 3월 26일
48    화려한 고구려고분벽화 댓글:  조회:381  추천:0  2023-07-01
기행문]화려한 고구려고분벽화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4 ㅡ1400년 추월추풍에도 색바래지 않은 고구려고분벽화 길림성 백산시문물관리소에서 일하고있는 태왕체창시자이며 태왕체서예학회 회장인 진유국씨가 이날 우리를 인도해 오회분탐방을 진행했다. 진유국씨는 다년간 고구려유적에 대해 깊이 탐구한 한족학자로서 집안의 유적지를 들고꿰는 사람이였다. 오회분참관도 금지되여 있는 상황이었지만 관리일군과 막연한 사이였는지라 손쉽게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묘에 대한 시간적 제한없는 참관을 할수도 있었다. 아래에 서술되는 묘실에 대한 묘사와 벽화에 대한 묘사는 진유국씨가 그날 구체적이고 생동하게 설명해주어 가능했었다. 또 그가 다년간 연구한 자료와 《집안문물지(集安文物志)》가 큰 도움을 주었다. 통구고분군 우산묘구에는 5기의 높고 큰 봉토묘가 있는데 동서 한일자로 배렬되여있고 5개의 큰 투구같기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오회분(五盔墳) 또는 오괴분(五塊墳)이라고 부르고있다. 오회분은 통구평원중부 우산묘구 최남단에 위치해있는데 남면은 철도주택구이며 북면은 논밭이다. 남으로 집안역과 350메터쯤 떨어져있고 서에서 동으로 다섯번째 묘가 바로 5호묘인데 민간에 유일하게 개봉한 벽화무덤이다. 이 묘는 항일전쟁때 이미 도굴다했었다. 바깥문을 따라 묘도에 들어서니 넓은 공간이 있고 묘실로 인도하는 용도(甬道)좌우에는 힘찬 력사(力士)가 그려져있었다. 한사람은 활에 살을 먹여 당기고있고 다른 한사람은 손에 창을 쥔채 묘실을 지키는 모습이였다. 순간 묘실안은 신비로운 분위기에 싸이면서 종교적성역에 들어선것 같은 착각이 오는것 같았다. 묘실의 평면은 반듯한 정방형으로 동서길이 4.37메터, 남북 너비 3.56메터에 정교하게 다듬은 큰 화강암석재로 쌓았고 백회로 틈을 메웠다. 네벽은 높이가 2.18메터로 약간 안으로 경사졌고 그 우로 량방(樑枋)을 바로 두었다. 량방우는 말각천정으로 교차되는 구조이며 맨 우는 반듯한 돌로 천정을 막았다. 묘실의 높이는 4메터쯤 되여보였다. 묘실안에는 세개의 돌로 된 관대를 두었는데 동서로 배렬되였다. 관은 없고 텅빈 관대만이 남아았었다. 용도 좌우벽을 비롯해서 묘실 네벽, 천정에 화려한 벽화가 그려져있었는데 그 절묘하고 신비로움에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벽화는반듯한 석재 암면우에 직접 그려졌는데 찬란하고 다채로우며 화려하고 웅장했을뿐만아니라 뛰여나고 류창했다. 묘실 네벽에는 큰 폭의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있어 전체 벽화의 주체를 이루고있었다. 머리는 남을 향해 치켜세우고있는 자태인데 황, 록, 홍갈색을 입혔다. 사지는 흰 날개가 달려있고 발톱은 예리했다. 이 묘의 벽화중에는 룡이 모두 39마리 있다고 한다. 서벽에 그려져있는 벽화는 남으로 뛰여나오는 자세였다. 몸은 백색이고 묵선으로 얼룩무늬를 묘사했으며 복부는 분홍색이였다. 다리뒤에 흰 날개가 달려있었다. 남벽은 용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량단으로 나누어지는데 각각 주작을 한마리씩 그렸다. 부리는 뾰족하고 가늘며 붉은 색은 불타듯 강렬했다. 몸은 홍색, 꼬리와 날개는 황색, 홍색으로 구분되여있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서로 마주보며 복판 련화자에 서있는 모습이 금방 날개치며 날아갈것만 같았다. 북벽은 현무(玄武)인데 거북과 뱀이 뒤엉켜있었다. 거북은 몸은 서쪽으로 향하면서 머리를 돌려 우를 향하여 아래로 뻗쳐있는 뱀머리와 상대하고있었다. 묘실 네귀퉁이에는 괴수가 천정기둥을 받치고있는데 모두 짐승얼굴에 사람몸이였다. 뿌리있는 라체였다. 신비하고 상징적인 주제를 합리적인 배치와 보완적인 배렬을 통해 현란한 색채와 동중정(動中靜)의 붓길로 표현한 기교에 저절로 혀가 차졌다. 벽화의 다른 부분의 내용은 신선, 우인(羽人), 비천(飛天)으로 천정석말각에 교차된 천정우에 그려졌다. 첫번째 천정석의 4면에는 각각 룡이 한마리씩 그려져있는데 발은 량방에 서있고 배와 등은 천정끝에 닿아있었다. 입은 크게 벌려져있어 마치 석벽우의 작은 구명을 물고있는것 같았다. 구멍안에 백회흔적이 보이는것으로 미루어 진주거나 옥석같은것을 상감으로 장식했었지 않았을가 짐작된다. 동남면 말각석우에는 오른쪽으로 소머리를 한 사람과 비천이 있었다. 소머리를 한 사람의 눈은 송록석(松綠石)을 상감했고 몸체는 선인의 형태로 갈색의 깃이 뽀족하고 소매가 넓은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록색의 천이 졸라매여져있었다. 오른 손에는 벼이삭을 쥐고 뒤를 향해 무엇인가를 부르고있었다. 그 뒤는 비천인데 머리를 풀어헤치고 코수염을 길렀다. 황색의 깃이 뾰족하고 소매가 긴 도포를 입었는데 오른 손에는 홰불을 들고있었다. 동북에는 복희, 여와의 일월신이 그려져있었다. 동방의 천지창조신이다. 서북에는 룡을 탄 선인과 나는 기발을 탄 사람이 그려져있었다. 서북에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제륜신(制輪神)이 있다. 그리고 제륜신의 오른쪽에는 갈색의 긴 우의(羽衣)를 입은 사람이 보리수아래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언가를 조작하고있는데 틀림없는 야철신(冶鐵神)이다. 고구려 제철업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하는 벽화이다. 두번째 천정석의 각면에는 룡을 타고 앉은 기악천인(伎樂天人)이 그려져있었다. 천정석아래와 천정의 두껑돌에는 몸을 틀고있는 룡 또는 룡호상박의 그림이 그려져있었다. 추상적인 소재의 현실적인 표현은 그야말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있었다. 진유국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이 묘의 벽화에는 원래 도금무늬가 입혀져있었고 조수(鳥獸)의 눈은 청옥(靑玉)으로 상감되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한 선인의 오른쪽 눈에 송록석이 박혀있는 외에 그 나머지 상감물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상감을 입힌 흔적만 있을 따름이였다. 봉토의 규모, 화면내용의 풍부하고 화려함으로 볼 때 이 묘임자는 고구려왕족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굉장한 묘실구조와 완숙한 회화기교로부터 고구려인들의 뛰여난 재능을 충분히 볼수 있었다. 1400년의 추월추풍속에서도 의연히 생동한 색채를 보존하고있는 벽화를 우러르노라니 한편 고구려는 강대한 국력을 갖고있는 문화의 대국이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뿌듯해났다. 연변일보 1999년 3월 23일
47    동방의 피라미드ㅡ장군총 댓글:  조회:331  추천:0  2023-07-01
[기행문]동방의 피라미들어ㅡ장군총 집안시고구려유적답사.3 피라미트형의 고분 장군총(將軍塚)은 집안시교의 동북쪽 5킬로메터쯤 상거한 룡산기슭에 우뚝 솟아있다. 마주하는 순간 애급의 피라미트를 바라보는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누구라 없이《금자탑!》하고 부르짖게끔 웅위롭기 한량없는 고구려의 적석고분이였다. 뭇박힌듯 우두커니 서서 그 장엄함에 매혹되여 련속 경탄을 터치는데 예쁘게 생긴 안내원 한족아가씨가 장군총에 대해 까근히 해설해주었다. 장군총의 외형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방형 7단의 피라미드형으로 만들었는데 바닥밑변 한변의 길이는 35.6메터, 높이는 12.4메터 된다. 웃부분은 뽀족하여 면마다 보호하기 위한 큰돌이 세개씩 세워져있다. (12개 받침돌가운데 1개가 잃어져 지금은 11개가 남아있다.) 1100여개의 세밀히 가공된 석재가 사용되였는데 가장 큰 석재의 길이는 5.7메터, 너비는 1.12메터, 두께는 1.10메터나 되였다. 장군총에서 서북 20킬로메터 떨어진 양차향 고대촌 상록수다리부근에서 고구려채석장 하나를 발견했는데 장군총석재와 석질이 똑 같다고 한다. 지금도 정자리가 또렷한 돌과 채 다듬지 않은 석재가 널려있는 채석장은 장군총석재의 원지임이 틀림없다고 하니 돌을 캐여 현지에서 잘 다듬은후 20킬로메터의 험하고 가파로운 산길을 운반했음이 분명하다. 여름의 땡볕에 그을고 겨울의 한풍에 얼면서 선혈로 이룩한 고루려사람들의 장거이다. 맨 밑층의 석재는 허리께를 넘었다. 잘 드는 칼로 썩둑 벤든 곱게 다듬은 석재를 손으로 쓸어보니 너무도 깔끔했다. 정자리 하나 없이 다듬느라니 얼마마한 정력과 지혜가 들었으랴. 자그마한 오차도 없이 모가 딱 맞게 다듬은 석재는 현대도구로 가공한대도 이렇게 바를수가 있을가. 작은돌 무게 15톤 릉묘의 무너지을 방지해 기대여놓은 보호석은 다듬지 않은 자연석이였는데 높이가 3.5메터쯤씩 되여 보였고 가장 작은 돌의 무게가 15톤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장대석을 받쳐놓은 곳은 지금도 평형을 잡고있는 반면 하나 잃어져있는 뒤면 오른쪽 벽은 돌의 틈새가 벌어지면서 곧 무너져내릴것만 같았다. 참으로 멋으로 기대여놓은 장대석이 아니라 1600여년의 세월을 버티여주게 한 기둥석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고구려사람들의 건축공예에 다시 한번 혀가 차졌다. 다섯번째 층에 묘실까지 통하는 구명이 나있는데 일찍 도굴당할 때 낸 구멍자리라고 한다. 거대의 암석을 어떻게 깨고 들어갔는지가 의문이다. 서늘한 기운이 풍기는 묘실에 들어서니 길이와 너비가 5메터쯤 되고 높이가 그보다 좀 더 높아보이는 널방에 장방형 석관좌가 두개조로 나뉘여져있는것이 보였다. 왕과 왕후의 관을 놓았던 자릴일것이라고 한다. 이 무덤의 서남쪽 1킬로메터쯤 되는 지점에 관개토왕비가 서있어 이 무덤이 가능하게 광개토왕릉묘라고 하는 일설도 있으나 아직 고증이 확실치 않아 어느 왕의 릉묘인지 모르나 확실히 왕의 릉묘인것만은 사실인것 같았다. 고구려벽화무덤의 기원을 3세기무렵까지 밀고올라갈수 있다고 하니 이 적석총은 그 이전의 무덤이 아닐가 생각된다. 빤빤한 묘실벽에 한점 벽화도 그려저있지 않은건 묘주의 신분이 낮아서가 아니라 아직 그러한 문화가 도래되지 않았기때문일것이다. 탄성이 나오는 암괴 묘실의 정상부는 한개의 통 암괴로 덮였는데 60평방메터의 50톤 되는 돌판이라고 한다. 저런 암괴를 어떻게 얹었을가. 탄성이 나오지 않을수 없다. 그 돌판을 버티게 쌓은 묘실벽은 가쯘히 다듬은 석재로 6층되게 쌓아올렸는데 귀가 딱맞고 틈서리가 조금도 없이 맞물려있었다. 묘실을 나와 무덤꼭대기에 오르면 회색무늬의 기와쪼각 같은것을 손쉽게 주을수 있었다. 네면 가장자리의 돌에 인공으로 다듬은 기둥구멍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있게 많이 뚫려있는데 보아하니 전각을 세웠던 자리인것 같았다. 고구려의 대형적석묘 웃부분에는 건축물이 축조되여 있었다는 기재도 있으니 전각이 세워졌댔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장군총뒤의 북쪽 50메터쯤 떨어진 곳에 순장무덤 한자리가 있는것이 보였다. 그 형태는 돌기초우에 세운 돌막이였다. 이런 무덤이 원래 다섯자리 있었다고 하나 지금에 남아있는것이 이것 하나뿐이다. 역시 도굴당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빤히 내다보일만큼 구멍이 펑 뚫려있고 한모서리가 허무러져내리기까지 했다. 태양이 면바로 직하하고있는 점심때쯤이라 장군총꼭대기에 름름히 서서 허리에 손을 찌르고 사위를 둘러봄이 사뭇 위무당당한 기분이였다. 무덤의 방향은 정면이 서남이 되도록 되여있고 네 모서리가 각각 동서남북을 가리키고있었다. 북쪽으로 룡산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니 비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촌락들과 조선의 군산이 눈에 잡혀온다. 이 땅에 살면서 위대한 문화를 창조한 고구려사람들의 뜨거운 숨결이 금방 피부에 닿는것만 같았다. 연변일보 1999년 2월 22일.
46    동북아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환도산성 댓글:  조회:393  추천:0  2023-07-01
기행문]동북아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환도산성 환도산성전경 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2 환도산성은 국내성에서 2.5킬로메터 떨어진 환도산에 위치해 있다. 삼국사기에《유리왕 22년(기원 3년) 수도를 졸본ㅡ오년산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는데 위나암이 바로 환도산성이다. 환도산성은 동북쪽에서 서남으로 이어져내려 압록강북안의 여러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있는 장백산계 로령산맥의 산악에 위치해 있다. 웅장한 암산(岩山)을 타고 축조되여 남향개면(南向開面)하였고 고구려산성의 특징인 포곡형(包谷形)으로 골짜기를 끌어안은 모양이 보기에도 마음이 무거워나면서 걸음마저 들떠졌다. 여기가 바로 만주땅을 호령하고 중원까지 힘줄을 뻗치면서 동북아의 호랑이로 틀고앉았던 고구려제국의 발전기지였단 말인가. 옹성을 가진 성문이 있었다는 남문유적지를 쑥 꿰면서 곧바로 성내로 걸어들어가는 마음이 자꾸만 설레이였다. 발부리에 걸채이는 허무러진 성벽의 돌들, 여기저기 널려있는 기와파편을 바라보노라니 탄성이 절로 터졌다. 환도산성은 국내성의 외각에 있던 군사수비성으로 국내성과 거의 동시에 쌓은것으로 판단되고있다. 고구려는 수도근처에 반드시 일종의 대피하거나 장기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수비성을 두고 때로는 수도로 쓰기도 하였다. 환도(丸都)는《알맹이》라는 뜻이다. 즉 중핵도시란 의미와 함께 수도를 가리킨다. 그러니 우리가 한창 밟고있는 이 땅이 거의 2천년전부터 400여년을 고구려문화를 형성하고 그 빛발을 만방에 뽐냈던 황성옛터인것이다. 남문을 금방 통과한후 곧추 바라보니 옹성북쪽에 산 같아보이는 둔덕이 눈에 띄였다. 전투지휘소로 알려지는 점장대라는것이다. 바로 그 둔덕의 동남쪽에 50평방메터쯤 되여보이는 작은 늪이 멀리서도 파란 물기를 반뜩이고있는데 유명짜한《음마지(飮馬池)》라고 한다. 고구려 제3대 임금 대무신왕(재위 기원 18년ㅡ44년) 11년 7월, 한나라 료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대전방안을 짜는데 좌보(左輔) 을두지가 맞서싸우자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접어놓으면서 수적으로 렬세이기에 꾀로 물리쳐야 한다고간했다. 왕은 을두지의 계략에 머리를 끄덕인후 성문을 굳게 닫고 적들의 군사가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 수십일을 굳게 지켰으나 적들이 도무지 포위를 풀려고 않자 급해난 왕이 다시 을두지에게 계략을 물었다. 이에 을두지는 한나라군사들은 오래동안 포위함으로써 우리들이 견뎌내지 못하기를 기다리고있으니 못속에 잉어를 잡아서 술을 곁들여 한나라 군사들에게 보내는것이 좋겠다고 했다. 한나라 군사들은 과연 잉어와 술을 받고는 곱다라니 포위를 푼후 퇴각해버렸다. 성안에 물과 고기, 량식이 충족한줄로 여겼던것이다. 이런 유명한 사화의 산지인 음마지를 바라고 금방 가을밭갈이를 마친 밭사이를 꿰지르는 걸음이 급하기만 했다. 마른 풀에 둘레를 가리우고있는 작은 늪은 대군의 식수원으로는 천만 부족했다. 잉어인것이 아니라 미꾸라지도 기르기엔 지금엔 힘든 늪이였다. 그러나 늪가에 앉아 맑은 물에 손을 잠그고 지략이 넘치였던 고구려장군의 충혼을 빌기에는 마음이 넉넉하기만 했다 음마지에서 자리를 떠 높이 11ㅡ12메터쯤 되여보이는 점장대에 올라서니 압록강으로 흘러가는 통구하와 집안시의 한모퉁이가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산성의 지형이 더욱 눈에 잘 안겨왔다. 자연이 만든 봉우리들의 등성이를 리용하여 석축된 산성은 동, 서, 북의 3면은 거의 반원형을 이룬 험준한 암산릉선을 돌아가기때문에 성외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이고 안으로는 넓다란 언덕을 이루며 남벽만이 지세가 낮아진 강안절벽우에 있어서 천연적으로 키모양을 이루고있었다. 10만명을 능히 주둔할만큼의 장소였다. 성벽 총둘레가 길이가 6951메터,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 676메터이다. 성안에는 4ㅡ5세기에 만든것으로 보이는 36기의 무덤이 남아있고 주추돌이 줄지어놓여있는 3개의 건물터가 있는데 아직도 고구려의 기와와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고있다고 한다. 동쪽 그닥 높지 않은 릉선우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니《산성하고분군》이 한눈에 잡혀왔다. 아름다웠다. 아니, 웅위로웠다. 세계에서 가장 큰 고분군의 하나인 산성하고분군은 한폭의 거대한 화폭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이 환도산성주변에만 무려 4700여기의 고분이 있으며 집안지역 전체에는 1만2000여기가 있다고 한다. 작은 고분도 있지만 직경이 60메터 넘는 엄청난 크기의 고분도 적지 않다는것이다. 이같이 거대한 고분군은 고구려의 문화수준과 함께 경제력도 뛰여났음을 시사해준다. 고구려를 위대한 나라로 만든 강한 힘은 과연 무엇이였을가. 700여년 강국으로 존속할수 있은 그 위대한 힘의 뿌리는 어디에 있었을가.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으로 대외팽창을 강행했으며 특히 광개토왕과 장수왕시기는 동북아세아의 력학관계가 급변하면서 다중방사상(多重放射狀)외교라는 복잡한 신질서가 구축됐다. 이 틀속에서 고구려는 지리적리점과 황해의 해양활동권을 활용해서 중핵조정자로서의 역활을 했다. 5ㅡ6세기경의 고구려령토에는 동만주와 연해주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동몽골과 북방방면의 유목문화, 화북에서 올라오는 한족의 농경문화, 해양을 통해서 들어오는 해양남방문화 그리고 조선반도 남부의 문화 등이 하나로 모였다. 그러니 고구려가 동북아세아에서 가장 다양한 문화가 집결된 중심지였다는 얘기다. 이러한 문화가 군사력과 경제력을 우쩍 키워 고구려제국의 찬란한 력사를 이룩했을것이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28일
45    고구려의 두번째 도읍 국내성 댓글:  조회:413  추천:0  2023-07-01
[기행문]고구려의 두번째 도읍 국내성 ㅡ집안시 고구려유적지답사.1 기원 3년부터 400여년간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 그 력사를 짙에 수놓았던 압록강중류지역 집안시, 고구려 제2대 유리왕때 졸본 또는 홀성골성에서 천도한 국내성(國內城)의 초로한 잔해는 집안시내 주택가의 아빠트단지에 포위되여있었다. 유적은 지상 2메터 정도까지 돌이 남아있을뿐 볼품없이 방치돼있어 마주선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장방형의 석재로 5메터 높이의 성벽을 거의 2700메터나 쌓았다는 웅기의 풍치는 어데로 가고 페허를 방불케 하는 돌각담으로 남았을가. 국내성은 동쪽의 룡산, 북쪽의 우산 그리고 서쪽으로 통구하를 건너 칠성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수상 전형적인 배산림수(背山臨水)의 지형, 지키기는 쉬우나 공격하기 어려운 천험의 요새요 천혜의 도읍이였다. 서쪽과 남쪽의 천연적인 해자(垓子)외에도 동쪽과 북쪽의 성벽을 따라 건해자(乾垓子)의 흔적이 있는데 폭이 10메터쯤에 이르렀으나 시가지로 형성되면서 흔적이 거의 없이 메워지기도 했다. 이러한 천혜의 땅을 도읍으로 정한 유리왕은 어떤 사람인가. 기원전 37년, 북부여의 기성세력의 등쌀에 배겨낼수 없었던 고구려시조 주몽은 단신으로 탈출, 졸본(卒本)에 고구려의 첫 도읍을 세우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 되였으나 아들 유리는 어머니 례씨와 함께 부여에 남아 남들로부터《애비없는 후례자식》이라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 아버지의 신상을 지꿎게 따지는 유리의 물음에 어머니는《일곱모진 바위돌우의 소나무아래에 유물을 묻어두었으니 그것을 찾아가지고 오면 아들로 인정하겠다》는 떠날 때 한 아버지의 말을 전한다. 유물을 찾아 산과 물을 샅샅이 뒤지다가 결국 자기 집 퇴마루밑에서 일곱모진 주출돌과 주추돌우에 세운 소나무기둥을 발견하고 거기서 부러진 칼토막을 찾아가지고 아버지를 찾아가 끝내 태자로 된후 왕업까지 이어받는다. 유리왕 21년 3월에 나라의 교제(郊祭)에 쓸 됒가 달아났다. 옛날 고구려사람들은 돼지를 신에게 바치는 례물임과 동시에 국도를 정해주거나 왕위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주는 신통력을 지닌 짐승으로 인정했다. 그러한 돼지가 달아났으니 큰일이 아닐수 없었다. 왕은 장생(掌生) 설지를 시켜 돼지를 쫓아가게 하였더니 국내 위나암(國內尉那岩)에 이르러 돼지를 붙잡아 국내 사람의 집에 가두어 기르게 한후 돌아와 아뢰기를 국내위나암은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땅은 오곡을 키우기에 마땅하며 또한 노루와 고라니와 자라와 물고기가 많이 나니 왕이 만약 도읍을 옮기면 백성의 리익이 무궁할뿐만아니라 또한 병혁(兵革)의 두려움도 면할수 있다고 하였다. 이해 9월 왕은 국내에 가서 지세를 살피고 온후 유리왕 22년(기원 3년) 국내에 천도하였다. 그러니 국내성은 돼지가 점지해준 수도인것이다. 성의 평면구조는 거의 네모꼴이며 산하(山河) 의 방향을 따르고있다고 할수 있어 동남향이다. 둘레는 2686메터, 성내의 도로는 남북을 관통하는 조양가와 동서를 가로지나는 승리로, 북쪽의 단결로로 이루어졌는데 옛 고구려시기에도 성중의 주요한 도로였다고 여겨지며 이들 도로가 통하는 6개의 문 역시 옛터일것이다. 40년대까지만 하여도 성문과 성벽이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국내성은 아빠트나 상가가 들어차고 그 사이로 길이 가로세로 뻗어 성문은 물론 성벽마저 거의 파괴되여가고있었다. 다만 북쪽의 아빠트단지 사이에 마치 뚝처럼 5ㅡ6단 정도가 남아 동서로 뻗어있다. 통구하옆 주택지안에 있는 서벽은 잡초가 우거진채 민가마다 헛간이나 측간의 벽으로 사용되고있었다. 집안시박물관마당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여있는 고구려석재유물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한숨을 톺았다. 그 하나하나가 비할데 없이 귀중한 유물이건만 마치 임자없는 물건마냥 사철 눈비를 맞으며 구석에 처박혀있으니 가슴아프지 않을수 없다. 박물관을 참관하면서 구겨졌던 마음이 조금 풀려지는것 같았다. 고구려건국전후의 각종 류형의 출토문물과 건축유적모형, 환도산성지형모형, 대형호태왕비탁본 및 사진, 국내외 학자들이 호태왕비를 연구한 저작, 자료, 고구려무덤의 연변관정을 보여주는 도편과 왕릉사진, 고분벽화사진…. 이러한것들이 체계적으로 잘 소개되고있었다. 기원 3년부터 기원 427년 장수왕때 평양에 천도하기전까지의 424년의 그 비운의 고구려력사가 금방 눈앞에 펼쳐지는것 같아 가슴이 뜨거워났다. 이제 다녀보아야 할 환도산성, 호태왕비, 장군총, 고분벽화 등을 눈앞에 그리면서 마음을 가까스로 달래여야 했다. 연변일보 1999년 1월 1일
44    白衣民族 朝鲜族 댓글:  조회:547  추천:0  2023-02-24
白衣民族---朝鲜族 发布时间:2017-07-21 来源:中国网 朝鲜族的源流 公元十四世纪,李氏朝鲜建立,这个民族复被称为朝鲜族。此后一个时期居住在朝鲜半岛东北部的女真人,部分北迁成为女真族枣满族的一部分,部分南徙加入于朝鲜民族之中。 朝鲜族是我国邻邦朝鲜的主体民族。但由于近代有不少朝鲜族迁居到我国东北地区,因此朝鲜族也是我国东北地区的民族之一。要讨论东北民族的源流,也就不能不讨论朝鲜族的源流。同时我国东北地区和朝鲜仅一水之隔,两国各族之间经常互相交往、融合。因此早在历史上,我国东北民族的源流就和朝鲜民族的源流有着千丝万缕的联系。正确认识朝鲜民族的源流,对促进我国各族人民的团结和中朝友谊都有积极作用。 朝鲜民族在其形成过程中,和世界其他民族一样曾经不断融合进许多民族和种族成分。 朝鲜民族的主源,或者说朝鲜半岛最早的居民是韩和秽。他们的先人早在旧石器时代就一直居住在朝鲜半岛。韩种族属于南方蒙古人种,居住朝鲜半岛的南部。秽种族属于北方蒙古人种,居住在朝鲜半岛的北部及我国东北地区。韩、秽两种族早就人口众多,并创造了灿烂文化。他们是朝鲜半岛旧石器以至新石器时代诸文化的主人。 在我国商、周之时(公元前十一世纪),原来居住在我国辽东地区的东夷人,开始迁徙到辽东半岛。商朝贵族箕子东走建朝鲜的记载,应当是这一迁徙在史籍上的反映。辽东式石棚及青铜短剑的分布于朝鲜半岛北部,也应当是东夷族进入朝鲜半岛的遗迹。据《后汉书·东夷传》载:“昔武王封箕子于朝鲜,箕子教以礼义、田 ,又制八条之教。”《三国志·东夷传》也有相同的记载。表明古朝鲜是由箕子所率领东走的商人(东夷人的一支)和朝鲜半岛土著的秽人结合而成。 中外史学家对箕子王朝鲜之说,颇有争议,存在两种不同的看法。朝鲜的多数学者否认“箕子东来说”,少数人则认为是历史事实。南朝鲜史学界有人认为箕子是存在的,并要求在“国史”中加以记述。有人则否认箕子朝鲜的存在,认为“华北文化”传入朝鲜,“并不和哪个特定人物--箕子的东来相关联”。我国史学界,有些认为箕子朝鲜说“未必完全可靠,可能是后人的牵强附会”。也有人认为此说是能够成立的。但不论分歧如何,双方都认为我国华北地区文化进入朝鲜半岛是无可置疑的,即使不把它和箕子联系起来,有一部汉族先人早在青铜时代及以前就迁居朝鲜半岛也应当是事实。其二,即使主张箕子建古朝鲜者,也不否认朝鲜半岛早有居民存在。这也是双方一致公认的。其三,对见于大量史籍记载的“箕子东走说”轻易否定还是不妥当的,至少从目前看,否定者还提不出强有力的根据。司马迁的《史记》综合了古代史籍中关于箕子的记载,在《宋微子世家》中作了系统的科学的论述。并在《朝鲜列传》中,明确地记载了当时朝鲜侯姓箕,照应了他们和箕子的承袭关系。还是可信的。 公元前三世纪左右,燕人占取辽东,并攻占了古朝鲜西部的土地,促使了居住在辽东的夷人和新牵来的燕人(华夏族的一支)融合成新的燕人,不久并入于秦,成为今汉族的一部分。而居住朝鲜半岛的夷人,则和当地的秽人融合成了古朝鲜族。 公元前二世纪,我国秦汉之交,中原战乱,“燕、齐、赵民避地朝鲜者数万口”4。汉初,燕人卫满东走出塞,“度贝水,居朝鲜之西界秦故空地上下障。满诱亡党(中国移民)众稍多,乃攻准,准逃亡。”卫满建立了卫氏朝鲜。卫氏朝鲜的建立,表明了燕人的进一步迁入朝鲜半岛北部。 与此同时,箕氏的后代箕准南走马韩为王。此外在秦代还有一部分汉人,为逃避秦的徭役,逃亡到朝鲜半岛的东南部,与当地土著韩族结合形成了汉代的辰韩。北方民族进入了朝鲜半岛的南部。 公元前一O八年,汉武帝灭卫氏朝鲜,于朝鲜半岛北部建立了乐浪等郡县,汉民更进一步迁居朝鲜半岛。 汉魏之时,在朝鲜半岛南部,居住着韩种的三支,马韩、辰韩、弁韩。史载马韩有五十四国总十余万户。辰韩、弁韩各有二十国。共七十八国。共计为二十万户,约近百万人。 公元一世纪开始,原居住在鸭绿江流域的高句丽人逐渐南下占有朝鲜半岛北部,公元四世纪攻占了乐浪郡。部分汉人如张统等迁居辽西、退出了朝鲜半岛。部分汉人留居朝鲜半岛和古朝鲜人、秽人一起在高句丽人统治下,逐渐融合成新的民族。同时,高句丽人有部分南下与朝鲜半岛南部的韩人相结合建立了百济国。辰韩(由南迁的秦人和当地的土著的韩人结合而成)的苗裔建立了新罗国家。朝鲜半岛初步形成了三个并列的小民族。 公元七世纪,新罗和唐联合,攻灭了高句丽和百济,不久唐兵被迫撤出朝鲜半岛。新罗基本上统一了朝鲜半岛,在朝鲜半岛上第一次形成了一个统一的民族枣新罗民族。 但当时朝鲜的东北部还为渤海国所占,渤海族是以粟末摸和及高丽遗民为主融合其他秽百人形成的一个民族。高句丽民族一部分迁居我国中原地区加入于汉族之中,一部分加入渤海族之中,一部分加入新罗民族之中。 公元十世纪,辽灭渤海,将渤海人西迁,部分渤海人南投新罗,加入新罗族中。而同时,原居牡丹江流域的女真人南下,占有了朝鲜半岛的东北部。 也在公元十世纪初,王建创立了高丽王朝,新罗人改称高丽人。高丽人与新罗人不同是前者吸收了十余万渤海人,但主体是一样的。高丽人和高句丽人却根本不同。高句丽人是横跨中朝两国国土,但又不包括朝鲜半岛南部的一个古民族。而高丽人则是纯属朝鲜半岛上的一个民族。 公元十四世纪,李氏朝鲜建立,这个民族复被称为朝鲜族。此后一个时期居住在朝鲜半岛东北部的女真人,部分北迁成为女真族枣满族的一部分,部分南徙加入于朝鲜民族之中。 朝鲜民族虽在长期发展过程中吸收了许多民族,但它的主体是秽和韩,以后又加入了大量汉人(东夷也是汉人先人的一支)和高句丽人。 朝鲜民族迁居我国东北地区是清代以来的事。清朝为了统治全国各族把满族人大批迁移到全国各地,使东北很多地区荒芜,朝鲜人开始北度图们江进入我国东北地区。成为今天我国东北的一个民族。但他们并不是长期居住东北的土著民族。过去学术界有一种错误认识,认为我国古代东北地区的夫余人、高句丽人都是今天朝鲜族的祖先。我国古代东北地区的夫余人和高句丽人是有相当一部分加入了今天的朝鲜族,但更多的是加入于我国的汉族之中。现在居住在我国东北的朝鲜族并不是古代居住在我国东北地区的高句丽人的直接后裔。如果说他们含有高句丽人的血统,也只能说他们中包含了部分居住在朝鲜半岛的高句丽人的血液。 弄清这些,就可正确认识中朝各族既有同源,又有区别的关系;认清中国各族(特别是东北诸族)和朝鲜民族血肉相连的关系。就没有必要再为东北地区世上一些民族的归属,进行一些过分的影响中朝友谊的争论。即使对历史上一些古民族的源流,学者间还有一些分歧的看法、但任何人都不能否定中朝各族人民血肉不可分的关系。在这一基本事实上,学者们可以求同存异,继续争论,这种争论的目的应该是求同,是促进团结。(作者 孙进己) 孙进己:民族史学家 据《中国文物报 》2006.7.21的报道称,孙进己先生是辽宁省社会科学院历史所专门研究东北民族史的研究员。时年75岁,仍然笔耕不已,仍以每天写3000字的进度在从事写作,进行民族史的研究。 孙先生著作等身,著有《东北民族史稿》、《东北民族源流》、《东北各民族文化交流史》、《东北民族史论研究》、《东北民族史研究》(一)、《北方民族史研究》(一)等书,发表论文一百余篇。 但很少有人知道,这位民族史学家、原中国辽金契丹女真史研究会会长的前半生是相当坎坷的。1957年整风反右时,正是他在东北人大历史系(现吉大)即将毕业之际,却被补定为右派。20年后才知当时并非正式审批。其间,他曾在长春搪瓷厂劳动改造;在海龙师范任教,“文革”中以走“白专道路”受到批判,被关入“牛棚”;尽管命运如此不幸,可是他始终没有放弃对民族史的学习与研究。此间,他通读了二十四史的大部分,写出了《海龙女真摩崖》、《柳河上游新石器遗址调查》、《东北民族史》两卷约20万字,并将史稿刻印本寄谭其骧、陈述、李文信等先生征求意见。1978年党的十一届三中全会召开,同年9月孙进己先生被调到辽宁省社会科学院历史所,专门研究东北民族史。1979年以后是他在学术上取得成就最多最快的时期。 理清东北民族源流,他认为单靠文献是解决不了的,必须掌握有关考古学、历史地理学、民族学、民俗学、人类学、语言学等相关学科的有关问题。 孙进己在四十多年从事东北民族史的研究中,他的主要体会是,我们决不能囿于成说,要分清假设和定论,往往前人提出的许多观点都仅是一种假说,还要经过检验;也不可以为自己提出的观点就都是定论,其中有的也可能还是假说。因此就要不断用新的事实来反复检验、更新,只有反复检验被证实的,才能说是定论。 朝鲜族民族乐器 朝鲜族民间乐器原有40多种,流传至今的只有伽倻琴、唢呐、洞箫、长鼓、片鼓、横笛、短箫、筚篥等十余种。 长鼓:打击乐器,亦称“扙鼓”。流行于吉林、黑龙江、辽宁的朝鲜族地区。长约70厘米,鼓身木质呈圆筒形,鼓的两端粗空,鼓面蒙皮,鼓腰细小而中实。以铁圈为框,系皮条或绳索,可以调整鼓的音高。演奏时,右手执细竹条敲击,左手敲击鼓的另一面。两手节奏交错,技法丰富。在乐队中,将鼓放在演奏者前面的鼓架上,在歌舞中一般将鼓挂在身前。常用于声乐和舞蹈的演奏。 细筚篥(Xie Pi Li):朝鲜族吹奏乐器。流行于朝鲜族聚居地区。用细竹管制成,长约25厘米,开有8个按音孔(前7后1),哨长4厘米,双簧。用于独奏和民间歌舞的伴奏。它的装饰性颤音很具有朝鲜族音乐的特色。 伽倻琴:为朝鲜族传统弦乐器之首,是民族色彩很浓的弹拔乐器。它的形状近似于汉族民乐器古筝。伽倻琴由共鸣箱、琴弦、琴码三部分组成。共鸣箱长150厘米,宽25厘米、中间厚5厘米。质料分别用梧桐树板和桦木板制作。琴线用蚕丝制作。共13根弦,琴弦的两头各固定在琴头和琴尾,在琴头有弦枕。13根琴弦用码子支柱,琴头可以左右移动,调节音阶。伽倻琴富有表演力,是善于表达民族柔和情感的民间乐器。因此,伽倻琴弹唱是各族人民喜闻乐见的一种表演形式。 短萧:朝鲜族吹奏乐器。朝鲜语称“单扫”。流行于延边朝鲜族自治州。形制如汉族洞箫,短细,长约35厘米,传统短萧,上端开一吹孔,管身开五个按音孔,可吹奏五声音阶的曲调。解放后改革的短萧,开七个按音孔,有的加键,并在吹孔与按音孔间加镶铜插口,可演奏七声音阶的乐曲。音色柔和高亮。 朝鲜族民间习俗——捣衣 朝鲜族民间习俗——捣衣   朝鲜族民间习俗——捣衣 捣衣是朝鲜族特有的风俗之一,每年的仲秋时节,朝鲜族妇女都要拆洗衣服被褥,进行浆洗晾晒,待衣物半干后,将其叠成长方形放在砧板上棰打,这就是捣衣。捣衣有两点好处,一是捣后的衣物平整、光洁;二是再洗时易于清除衣物表面的污垢,因为衣物带浆进行捶打后,一般的油垢多浮在衣物的表面,渗不进纤维里。 捣衣用的砧板是用约 50 厘米长、 22 厘米宽、 17 厘米厚的硬木或石头做成。砧面磨得光滑洁净,为了减轻重量而在砧底横竖挖出宽槽。捶打用的棒槌类似洗衣棒,用硬木制作而成,磨得十分光滑。 捣衣的形式多样,可以对坐交叉捶打,也可以一人拿一棒或双手各拿一棒捶打。每当少妇、少女对坐捶打时,通常表现出捶打的艺术和劳作的乐趣,或慢或快,或轻或重,如鼓手击鼓,棒槌声和清脆的笑声此起彼伏,宛如一首清新明快的协奏曲。 朝鲜族服装特点 朝鲜族人民不仅能歌善舞,喜爱音乐,而且注重衣着打扮,讲究仪表。 白色是朝鲜族最喜欢的服装颜色,象征着纯洁、善良、高尚、神圣,故朝鲜族自古有"白衣民族"之称,自称"白衣同胞"。随着纺织工业的发展,如今妇女们穿用的衣料颜色更是绚丽多彩、不拘一格,但短衣长裙这一传统民族风格久久不变,因为它符合朝鲜族妇女的审美心理,充分反映了她们温顺、善良和勤劳淳朴的美德。朝鲜民族服装的结构自成一格,上衣自肩至袖头的笔直线条同领子、下摆、袖肚的曲线,构成曲线与直线的组合,没有多余的装饰,体现了"白衣民族"的古老袍服的特点。 朝鲜族传统女装 朝鲜族民族服装根据穿着者的年龄和场合,选用各种质地、颜色的面料制作。女子婚前穿鲜红的裙子和黄色的上衣,衣袖上有色彩缤纷的条纹 ;婚后则穿红裙子和绿上衣。年龄较大的妇女,可在很多颜色鲜明、花样不同的面料中选择。 朝鲜族妇女的短衣长裙,是朝鲜族服饰中最具传统的服装,这也是朝鲜族妇女服装的一大特色。短衣在朝鲜语中叫"则高利",是朝鲜族最喜欢的上衣,以直线构成肩、袖、袖头,以曲线构成领条领子,下摆与袖笼呈弧形,斜领、无扣、用布带打结,在袖口、衣襟、腋下镶有色彩鲜艳的绸缎边,只遮盖到胸部,颜色以黄、白、粉红等浅颜色为主,女性穿起来潇洒、美丽、大方;长裙,朝鲜语也叫做"契玛",是朝鲜族女子的主要服饰,腰间有长皱褶,宽松飘逸。这种衣服大多用丝绸缝制而成,色彩鲜艳,分为缠裙、筒裙、长裙、短裙、围裙。年轻女子和少女多爱穿背心式的带褶筒裙,裙长过膝盖的短裙,便于劳动。中老年妇女多穿缠裙、长裙,冬天在上衣外加穿棉(皮)坎肩。缠裙为一幅未经缝合的裙料,由裙腰、裙摆、裙带组成。上窄下宽,裙长及脚面,裙摆较宽,裙上端有许多细褶,穿时缠腰一圈后系结在右腰一侧,穿这种裙子时,里面必须加穿素白色的衬裙。 此外朝鲜族服饰中还有一种七彩上衣,用七彩缎做成,象征幸福和光明,一般是在集会和喜庆活动时穿戴。 朝鲜族传统男装 朝鲜族男子一般穿素色短上衣,外加坎肩,下穿裤腿宽大的裤子。外出时,多穿以布带打结的长袍。男子短衣朝鲜语也叫"则高利";成年男子的上衣衣长较短,斜襟、宽袖、左衽、无纽扣,前襟两侧各钉有一飘带,穿衣时系结在右襟上方。他们还喜欢黑色外套或其它颜色的带纽扣的"背褂"即“坎肩”,"坎肩"朝鲜语叫"古克", 一般套在"则高利"上衣的外面,多用绸缎作面,毛皮或布料做里,有三个口袋,五个扣,穿上显得特别精神。 朝鲜男子爱穿"灯笼裤",这种裤子裤长腰宽,而且白色居多。"巴基"是指传统的朝鲜族服饰"裤子",其裤裆、裤腿肥大。由于朝鲜族传统房屋都有火炕供暖系统,人们常常是坐卧在地面的垫子或席子上,穿这种裤子便于在炕上盘腿而坐,随便轻松,裤腿系有丝带,外出时可以防寒保暖。 朝鲜族传统儿童装 朝鲜族儿童服装主要是七彩衣,是用七色绸缎给儿童做的衣服,好像彩虹在身。朝鲜族认为彩虹是光明和美丽的象征,或出于审美心理,或出于避邪的目的,意在让儿童美丽幸福,使孩子们显得更加聪慧、活泼可爱。还有的认为是过去朝鲜妇女善于保存各种颜色的布块,用来给孩子做衣服等等。 朝鲜官服 过去朝鲜族的官服,随官职、身份而异,但基本式样大体上是冕服,用黑色绸缎做团领,受中国冕服十二章纹饰的影响,肩部亦有带色之龙,袖口画有火、华虫、宗彝等图案。裳用红绸缎缝制,裳前有藻、粉米的纹饰图案。 朝鲜泡菜 制作泡菜 制作泡菜 泡菜是朝鲜族具有代表性的传统发酵食品。朝鲜族泡菜做工精细,享有盛誉,是入冬后至第二年春天的常备菜肴。泡菜味道的好坏,也是主妇烹调手艺高低的标志。 辣白菜是泡菜的一种,泡菜是朝鲜族具有代表性的传统发酵食品,是以米饭为主的朝鲜族饮食生活中最重要的副食之一。相传的哪怕一日无泡菜,都难以吃下饭啦。 泡菜的酱汁,可以补充米饭中缺乏的蛋白质。另外,在泡菜酵的过程中,虾酱、凤尾鱼酱、黄石鱼酱等含有的蛋白质分解为氨基酸。 蔬菜中含有钙、铜、磷、铁、盐等丰富的无机物,促进维生素C和对以米饭主食的人尤为重要的维生素B的吸收。 韩国研究人员认为,泡菜在发酵过程中,乳酸菌不仅令泡菜味道鲜美,而且还可以抑制肠内有害细菌的繁殖。 泡菜随着发酵的成熟产生酸味的乳酸菌,不仅使泡菜更加美味,食用后还能抑制肠内的其他有害菌哦。 朝鲜泡菜是朝鲜半岛人民日常生活中最普通的食品,也是朝鲜半岛的第一美食,从古代起就是每餐必备的食品。由于朝鲜半岛山地较多,油和食物运输比较困难,而泡菜制作方法简单,易于保存,一年四季皆可食用。朝鲜半岛的妇女是制作泡菜的能手,尽管使用材料一样,可每家做出的泡菜味道却各不相同。朝鲜泡菜是以白菜、萝卜为主要原料,以芥菜、水芹菜、葱、生姜、大蒜为辅料,用盐、辣椒面、酱油和各种虾酱、鱼酱等进行调味后,再经过发酵而成。泡菜的发酵过程非常重要,直接决定着泡菜的味道。在通常情况下,夏天腌渍的泡菜一般只需要两天的时间就可以发酵成熟。 朝鲜医书《东医宝鉴》 《东医宝鉴》对日本“汉方医学”也产生了一定的影响 《东医宝鉴》对日本“汉方医学”产生了一定的影响(图片来源于光明网) 《东医宝鉴》:《东医宝鉴》是朝鲜医学家许浚所著。公元1596年(李王朝宣祖二十九年),宣祖王命许浚编纂一本医书,许浚与太医杨寿礼、金应铎、李命源、郑礼男等一同设编辑局,着手编辑医书,不幸于翌年遇上“丁酉再乱”(“丁酉再乱”是指日本侵略朝鲜的战争),使参与编纂工作的诸医分散,编辑局拆散。乱后,宣祖王改命许浚一人独自编纂。许浚经过十几年坚持不懈的努力,到了光海君二年(公元1610年)终于完成编撰任务。于公元1613年(光海君五年),用内医院训练都监之活字上梓开刊。 此书共25卷,包括目录2卷、内景篇4卷、外形篇4卷、杂病篇11卷、汤液篇3卷、针灸篇1卷。此书主要参考中国医书如《素问》、《灵枢》、《伤寒论》、《证类本草》、《圣济总录》、《直指方》、《世医得效方》、《医学正传》、《古今医鉴》、《医学入门》、《万病回春》、《医学纲目》等71种和高丽医学古有的医书《乡药济生集成方》、《御医撮要方》等撰集而成,确立高丽医学理论体系的朝鲜传统医学一“高丽医学”的最高峰之作,不仅对“高丽医学”的发展起了极大作用,而且对整个东方传统医学的发展起了很大作用。因此,朝鲜李王朝光海君称《东医宝鉴》为“医学的统合,高度评价许浚说:"东垣为北医,丹溪为南医,刘宗厚为(陕)西医,许浚则朝鲜之医,亦可谓之‘东医’”。又说:“鉴者明照万物。元朝罗谦甫著《卫生宝鉴》,本朝龚信著《古今医鉴》”,故许浚之著作,“亦可名为《东医宝》”。此医书已有36种不同版本。 该书明末清初传入我国,乾隆丙戍年(1766)由顺德人左翰文在广东刻版,嘉庆丙辰年(1796)又在江宁重刻,于1955年人民卫生出版社根据朝鲜重刊本影印发行。该书在朝鲜和中国医学的发展中有积极的影响。 朝鲜族秋千(图) 荡秋千 朝鲜族是爱好体育运动的民族,压跳板和荡秋千是朝鲜族妇女最喜爱的传统民间体育运动。秋千和跳板具有悠久的历史,从文献上来看,朝鲜人荡秋千和跳跳板最晚也起源于十三世纪,是朝鲜族妇女喜爱的运动项目,它们的特征是具有朝鲜族独特的运动形式,表现了朝鲜族人民热爱生活,富于创造和活泼大方的民族气质,是朝鲜族代表性的体育运动形式,它们对丰富和完善中国民族体育竞技形式具有重要的意义。 荡秋千:也叫“打秋千”,是朝鲜族传统体育项目,多在元宵、端午和中秋节举行。尤其受到妇女们的喜爱,并经常进行该项目的比赛。比赛时评定优胜者有几种方法:一种是以秋千架前方高树上的树叶或花朵为目标,用脚碰着或咬掉树叶(花朵)者为胜;一种是在踏板底下挂一根长绳,测量秋千荡起的高度,高者为胜;还有一种是在秋千架前方竖两根树杆,杆上横拉一根系有铃铛的绳子,荡秋千者以碰铃次数多少决定胜负。 秋千活动具有高、飘、悠、巧、柔、美的特点。秋千绳一般拴在高大的树木结实的横枝上,在秋千的前方上空悬有彩带或铃当,秋千板要触及这个标志才能获得欢呼与赞扬。常常是一人荡起,众人瞩目,场边喝彩连连。大型荡秋千竞技比赛更为迷人,比赛中常常可见到空中悬挂着一面皮鼓,荡秋千的姑娘们在观众的助威声中高高荡起,在空中用力踢鼓,谁踢响的次数最多,谁就将成为冠军。 朝鲜族说唱艺术传承人申玉花 居住在沈阳市苏家屯区民主街道的申玉花是朝鲜族说唱艺术的代表性传承人,虽然年事已高,但申玉花仍然能够表演《春香传》等朝鲜族说唱艺术的经典作品。据了解,作为朝鲜族说唱艺术的保护单位,苏家屯区文化馆多年来为传承和保护这一非物质文化遗产项目做出了许多努力。 朝鲜族说唱艺术是一种叙事性说唱艺术,历史悠久。表演中大多一人饰演多个角色,以说唱为主,用长鼓伴奏,伴以舞蹈形式来叙述一个长篇故事。名叫“板唆哩”,是朝鲜族音乐中一个重要的组成部分,流行于东北三省朝鲜族聚居地。朝鲜族说唱艺术的代表作品共有12种,内容均取自民间传说和古典小说,如《春香传》、《沈清传》等。说唱艺术中“说”的部分又叫“叙唱”,没有固定的节奏,可以随词意自由变化;“唱”的部分则节奏感强,以民歌曲调为主,风格明快流畅。一个曲目大多以“短歌”,即一种抒情叙事歌开头。 被评为苏家屯区优秀民间艺人的申玉花是苏家屯区朝鲜族说唱艺术最具代表性的传承人,她曾在延边歌舞团担任演员、在延边艺校任教,退休后居住在沈阳苏家屯区从事朝鲜族说唱艺术的教学、演出和研究活动,并于1990年、1995年、2000年分别获得国家级、省级表演艺术奖项。除了89岁的申玉花不遗余力地传承朝鲜族说唱艺术,还有48岁的金春玉积极传承这一宝贵的非物质文化遗产。据金春玉介绍,在不同时期,朝鲜族说唱艺术有着不同的艺术特征,对朝鲜族说唱艺术进行深入的挖掘整理,对于研究朝鲜族音乐以及民俗具有重要价值。 朝鲜族说唱艺术是在民间产生,在民间流传的一种独特的艺术形式,具有曲调优美,说唱结合的特征,富有艺术感染力和表现力,表达了朝鲜族人民对生活的热爱,是传承民族历史文化的重要载体。朝鲜族说唱艺术是朝鲜族传统艺术,其发声方式、表演技巧难度较高,并且受到现代音乐的冲击,因此,朝鲜族说唱艺术的传承人寥寥无几。朝鲜族说唱艺术濒危的状况引起了苏家屯区有关部门的重视。据了解,苏家屯区文化体育广播电视新闻出版局非物质文化遗产调查组曾对朝鲜族说唱艺术进行了一次全面调查,对其历史价值、传承谱系等有了一个基本的认识和了解。朝鲜族说唱艺术不仅被列为苏家屯区非物质文化遗产名录,而且于日前被列为沈阳市第三批非物质文化遗产名录。 沈阳市苏家屯区文化馆将对朝鲜族说唱艺术进行进一步的挖掘和整理,继续收集相关资料,保存音像资料。下个阶段需要做的工作就是要进行一次全面细致的普查工作,彻底摸清朝鲜族说唱艺术的发展历史沿革,充分掌握传承人及道具、服装、现存作品及其价值等全部状况,然后将普查所掌握的文字、音像资料全部进行分类整理和存档。 沈阳市非物质文化遗产保护中心重点保护传承人,促进其传承发展,给予培训和经费方面的资助,进行活性保护传承;建立相关档案,将申玉花演出过程录像保存。保护和传承朝鲜族说唱艺术的重中之重就是大力培养传承人,以及定期举办朝鲜族说唱艺术专场演出。加强对朝鲜族说唱艺术的保护和传承对增进民族团结,推动文化建设将起到积极的作用。
43    朝鲜族 댓글:  조회:644  추천:0  2023-02-15
朝鲜族 朝鲜族,是东亚主要民族之一。朝鲜族主要分布在朝鲜半岛及临近的中国东北和俄罗斯远东地区等地区,是朝鲜和韩国的主体民族,两国共有七千多万人口的朝鲜族人;朝鲜族人口过百万的国家有中华人民共和国和美国,人口均在两百万以上。 在中华人民共和国境内的朝鲜族是中国官方认定的一个少数民族,也被称为中国朝鲜族。在美国境内的朝鲜族属于美国亚裔少数民族,被称为韩裔美国人,根据2006年美国社区人口调查,韩裔美国人约有152万人。 朝鲜族 起源 朝鲜族是古亚洲人和新亚洲人在新石器时代到青铜器时代之间陆续从欧亚大陆迁徙到朝鲜半岛后形成的。 朝鲜族是多起源民族,虽然今天的朝鲜族早已成为血缘高度统一的单一民族,但在历史上确是从石器时代开始就在东北亚繁衍生息的原住民和陆续从西伯利亚迁徒到朝鲜半岛的各部落和民族融合形成的民族。早在石器时代,朝鲜半岛就有人类居住遗迹,朝鲜半岛也是除欧洲大陆以外,青铜器时代人类遗迹支石墓被发现最多的地区。老亚洲人在旧石器时代,最先到达朝鲜半岛,之后一直到青铜器时代,以阿尔泰人为主的新亚洲人陆续从欧亚大陆迁徙到朝鲜半岛,形成了今天的朝鲜族。 朝鲜半岛第一个国家,古朝鲜在遭受汉的侵略后灭亡,之后在朝鲜半岛出现了无数个大大小小的国家,有扶余,沃沮,东濊,三韩,耽罗等,而三韩细分的话,总共有76国 辰韩12国,马韩54国,弁韩12国。其中斯卢国统一了辰韩成为新罗,伯济国统一马韩成为百济,弁韩统一后成为了伽倻。在北部,扶余贵族解慕漱带领族人离开扶余,建立了高句丽,在灭掉沃沮,东濊的残部后,最终朝鲜半岛形成了高句丽、百济、新罗并存的三国局面,迎来了原三国时代。 朝鲜半岛在原三国时代,时而联合,时而争战,互相牵制,保持了相当长久的三国割据状态,这其中高句丽的势力在广开土太王时代,不断壮大,致使新罗和百济改变策略,引外部势力,与之对抗,百济与倭国合作,新罗与唐合作,先后使百济和高句丽灭亡,之后新罗和唐又互相争战,这样持续了几十年,最终唐势力又逐渐退出了朝鲜半岛。 朝鲜族舞蹈 朝鲜族舞蹈 高句丽在灭亡时,有69万户,近350万人口,灭亡时,大部分高句丽人居住于朝鲜半岛中北部,即首都平壤周围,史书记载,高句丽有60万户,即大约300万高句丽人被唐迁移到了唐,因此可以得到的结论是,高句丽的大部遗民都去了唐朝,这也成为朝鲜族来源的一部分。 新罗灭后,三国遗民曾经一度恢复各自的国家,分别出现了后高句丽、后百济、后新罗,但很快就被后高句丽统一,成为了朝鲜族第一个统一的国家高丽。 蒙古曾经一度对高丽用兵无果,此期间大量女真和契丹人遗留在此。 元帝国出现内乱时,高丽曾派兵协助蒙古平叛,不料高丽派出去的将军李成桂发动政变,推翻了高丽,建立朝鲜。 当代的朝鲜族在16世纪基本形成。在这个形成过程中,朝鲜半岛北部的夫余、沃沮、东濊、鲜卑、高句丽人、渤海人、女真、契丹及汉族等东北亚民族也有一部分融合进朝鲜族中。与他们最近的民族是尼夫赫人及科里亚克族。经过基因、文化、民俗证明,扶余、高句丽、百济、新罗是朝鲜族的直系祖先. 文化 朝鲜半岛最初的原始宗教是巫教。随着当地与中国的交往,佛教和儒教后来由中国传入朝鲜半岛。佛教在高丽时期曾红极一时。但在李氏朝鲜时期,佛教曾受到限制,佛教寺院和佛教徒只能在乡村存在,不许在城市出现,取而代之的是儒教。儒家思想一度成为朝鲜的国家理念。直到现在儒家思想对朝鲜还有着很深的影响,尊敬长辈的儒家思想依然是朝鲜家庭的重要部分。但在当今的韩国,天主教和基督新教等基督宗派有着更大的影响力。
42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댓글:  조회:1369  추천:0  2021-09-10
발해국의 종말과 국가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인민은 예로부터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원쑤앞에 굴할줄 모르는 용감하고 슬기로운 인민이다.》 조선인민의 강의한 애국심은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발해인민들의 투쟁과정에서도 높이 발현되였다.    거란의 침입을 반대한 발해인민들의 투쟁 발해는 근 200년간 강대한 나라로 존속하여왔으나 9세기 말~1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약화되였다. 이 시기 발해의 중앙 및 지방의 봉건세력들은 인민들의 토지를 대대적으로 략탈하고 착취와 억압을 전례없이 강화하였다. 한편 통치배들속에서는 상무의 기풍이 점차 없어지고 나약한 풍조가 휩쓸었으며 더 많은 재부와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한 싸움만 계속 벌리였다. 발해귀족들 내부에 극히 나약한 풍조가 휩쓸었는데 당나라의 과거시험에 합격되는것을 《영예》로까지 생각하는 형편이였다. 그리하여 나라의 국력은 걷잡을수 없이 약화되게 되였다.       거란은 원래 서료하상류일대에 살고있던 유목종족이였다. 10세기 초에 급격히 강대한 세력으로 자라난 거란은 916년에 거란국가를 선포하였다. 이때 황제 야률아보기가 발해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뻗치였다. 발해는 거란의 침입에 대처하여 924년 5월에 거란이 차지하였던 료주(심양 서쪽)를 쳐서 큰 타격을 주었으나 그 성과를 공고히 하지 못하였다.       ㅡ 925~926년전쟁 이미 10세기 초부터 발해에 대한 침략을 꿈꾸어오던 거란침략자들은 925년 12월 말부터 거란왕 야률아보기가 직접 수만명의 침략군을 거느리고 대규모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야률아보기가 거느린 거란침략군은 발해 서쪽의 주요성이였던 부여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성의 군인들은 력량상 대비가 안되는 적과 용감히 싸웠으나 926년 1월 초에 성을 강점당하고말았다. 부여성을 강점한 적들은 동쪽으로 계속 밀려들었다. 적장 안단이 거느린 거란군의 선봉 1만명(기병)은 발해수도 서쪽가까이까지 침공하여왔다. 이때 발해의 대신 로상이 수도방위군을 이끌고나가 싸웠으나 우세한 적들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발해의 수도 상경룡천부의 홀한성은 거란침략자들의 포위에 들었다. 성안에 있던 전체 군민들은 거란침략군의 공격을 여러차례 물리치고 무리죽음을 주었다. 그러나 국왕 대인선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은 싸우는 발해군민들을 배반하고 인민들의 전투행동을 중지시키는 반역행위를 저질렀다. 인민들의 투쟁은 비록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발해군민들의 불굴의 투지와 용감성, 애국심을 다시금 시위하였다.       ㅡ 각지 인민들의 항전 거란침략자들은 인민들의 반항심을 무마시키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적들은 동단국을 조작하고 거란왕의 아들 야률배를 왕으로 임명하였으며 실권없는 벼슬자리에 투항한 일부 발해귀족들을 끼워넣었다. 이것은 인민들의 큰 분격을 자아냈다.       인민들은 도처에서 들고일어나 거란침략자들과 반역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926년 3월 장령부,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의 군민들이 결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통일적지휘밑에 전개되지 못하였기때문에 각개격파당하였다.       결국 발해는 926년에 자기의 존재를 마치였다. 925~926년전쟁과정은 봉건통치배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침략자들을 물리치지 못하였으나 광범한 인민들의 높은 애국심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발해말기의 력사는 아무리 강대한 나라라도 자만도취하고 안일해져 국력을 강화하는 사업을 게을리하면 망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국토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 발해는 비록 존재를 마쳤으나 그 유민들은 거란에 의하여 나라가 무너진 다음에도 굴함없이 국토회복을 위해 줄기차게 싸웠다. 이 투쟁은 여러 지역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오래동안 줄기차게 벌어졌다. 발해유민들은 발해의 옛 땅에 정안국과 오사성발해국을 비롯한 소독립국들을 세우고 강점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정안국(定安國)은 오씨가 부여부의 동쪽 혼돈강(송화강), 압록강의 중상류일대에 세운 발해유민들의 소국이였으며 독자적인 년호까지 사용하였다.       정안국은 안으로 국력을 강화하는 한편 거란의 침략에 반거란동맹으로 대처하기 위한 대외활동을 적극 벌리였다. 970년에 제2대왕 오렬만화, 981년에 제3대왕 오현명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여 반거란동맹을 무을것을 제기하였으나 송나라의 나약한 태도로 하여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안국은 부단히 침입하는 거란침략군을 물리쳤고 때로는 적강점지역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정안국은 동족의 나라 고려와도 련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정안국이 언제까지 존재하였는지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기록에 의하더라도 할빈지방에서 80~90년간은 거란에 항거하면서 국권을 지켜왔다. 오사성발해국은 부여부를 중심으로 오씨가 세운 소국이였다. 수십만의 발해사람들이 동족의 나라인 고려로 이주하여 고려사람들과 함께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특히 료동지방에서 치렬하게 벌어졌다.       오사성발해국도 송나라와 반거란동맹을 맺기 위한 대외활동을 벌리였다. 그러나 어부지리를 얻으려는 송나라의 태도로 하여 오사성발해국은 단독으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995년 오사성발해국의 군민들은 오소경(오소도)의 지휘밑에 거란의 침략대군을 격퇴하였다. 그후에도 오사성발해국의 인민들은 끊임없이 달려드는 거란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워 물리쳤다.       《료사》의 기록에 의하면 1114년경에 녀진족이 거란을 공격할 때 오사성발해국이 참가한것으로 되여있다. 이것은 12세기 초경까지도 오사성발해국이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해왔다는것을 보여준다.   국토회복을 위한 발해유민들의 투쟁은 끊임없이 계속되였다. 1029년 8월 초 동경도(거란관할하의 도, 직할현 9개, 소속 주, 부, 군, 성 87개)의 전체 발해유민들은 대연림의 지휘밑에 거란강점자들의 통치를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였다. 대연림은 당시 발해군상은(동경도관하 발해군의 사령관격)이였다. 폭동군은 거란의 동경류수 부마도위 소효선과 그의 처 남양공주 최팔을 동경성(료양성)안에 잡아가두고 거란관리들을 처단하였으며 새로 발해유민들의 국가인 《흥료국》을 세웠다. 당시 대연림이 흥료국왕으로 되고 년호를 《천경》으로 정하였다. 흥료국은 료동지방의 전체 인민들을 반거란투쟁에로 일떠세우는 동시에 한인, 녀진인들이 이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해나가도록 하였다. 또한 보주성의 장군 하행미로 하여금 투쟁에 합세하도록 련락을 보냈으나 배신당하였다. 흥료국의 군민들은 한결같이 거란침략군과 싸웠지만 대오안에 나타난 투항분자들에 의하여 실패하게 되였다.   발해유민들은 1116년 1월 동경료양부를 중심으로 거란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다. 1116년 고영창은 《대발해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였으며 년호를 《륭기》라고 제정하였다. 대발해국은 산하 각 주들에 부대들을 파견하여 광범한 발해유민들을 집결하는 한편 거란인관리들을 처단하였다. 대발해국의 급속한 장성에 위협을 느낀 거란통치배들은 남부재상 장림에게 대병력을 주어 공격하도록 하였다. 대발해국의 군민들은 장림의 거란군과 30여차례의 격전을 벌려 큰 타격을 주었으며 항전 4~5개월동안 중첩되는 애로와 난관을 극복하면서 투쟁성과를 확대해나갔다. 그러나 대발해국의 국토회복을 위한 투쟁은 금(녀진)나라의 배신행위로 하여 5월에 실패하고말았다. 발해유민들은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끊임없이 벌리였으나 통일성을 보장하지 못하였으며 간교한 적들의 책동으로 최후승리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그후에도 발해유민들의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은 근 200년간 계속되였다. 발해유민들의 완강한 투쟁은 비록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조선인민의 높은 애국심과 강한 투지를 다시한번 뚜렷이 시위하였다.
41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댓글:  조회:1314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을 군사적으로 담보한 발해군대 고구려멸망후 대중상과 대조영휘하의 고구려군사들을 골간으로 하여 진국의 성립과 발해건국과정을 거쳐 발전강화된 발해군대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해동성국》의 토대를 닦아놓았으며 국력의 발전을 군사적으로 담보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어떠한 국가를 물론하고 자주독립국가는 반드시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는것입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고 봉건제도를 유지강화하며 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있었다. 고구려재건투쟁을 벌리던 고구려유민들의 항전부대들을 모체로 하여 편성된 발해의 군대는 건국초기부터 봉건지배계급의 계급적리익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복무하였으며 발해의 높은 대외적지위와 강한 국력에 어울리게 방대한 규모에서 유지강화되였다.    발해군대의 병력수 발해 건국직전 대조영휘하의 군사는 40만이였다. 실학자 홍석주는 《발해세가》에서 우리 나라에서 전해오던 사료들뿐아니라 《오대회요》를 비롯한 중국측 기록들도 널리 참고하여 발해 초기 군사가 40만이라고 하였다. 발해가 건국과정에 료동지역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의 적지 않은 지역과 우리 나라 북부의 넓은 령토를 차지할수 있었던것은 바로 40만의 대병력으로 위세를 떨쳤기때문이였다. 발해건국을 전후하여 대조영의 휘하에 모여든 40만의 대군은 모두 정규군인이 아니라 고구려회복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지향하여나섰던 고구려유민들과 일부 말갈인들이였다. 건국이후 발해봉건정부는 고구려이래의 군대편성원칙과 조성된 정세에 맞게 군사제도를 새롭게 편성하고 군대를 질, 량적으로 강화하여나갔다.       《책부원귀》나 《구당서》 등 력사기록들에서는 발해의 병력수에 대하여 승병 수만이라고 밝히고있다. 그러나 이 수자는 발해의 병력수전체를 가리킨것이 아니라 금군의 수로 보이며 상비군전체를 가리킨 수자라고는 볼수 없다. 그것은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만 하여도 4만이나 되였으며 당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패배감에 물젖어 흑수말갈을 징벌할데 대한 무왕의 명령을 거부한 대문예가 발해의 군사력을 심히 과소평가하면서도 군대수를 10만이라고 하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대문예의 말대로 군대수를 단순히 10만으로 볼수도 없다.       《료사》 병위지 상에는 발해의 군대수가 수십만이라고 기록되여있는데 이것이 발해의 총병력수를 가리킨 비교적 정확한 수자라고 볼수 있다.    발해군대의 군종 발해의 군대는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은 8위와 금군이였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좌맹분위, 우맹분위, 좌웅위, 우웅위, 좌비위, 우비위, 남좌우위, 북좌우위의 8개 위가 있었다. 8위에는 각각 대장군과 장군이 한명씩 배치되여있었으며 그 밑에 도장, 소장 등 여러 무관직이 있었다. 8위에는 부병의 한개 단위를 이루던 절충부가 소속되여있었다. 중앙군에 소속된 부병은 수도와 그 부근의 수비를 맡아보았으며 동시에 전국에 배치되여있던 8위소속의 절충부들에 가서 복역하면서 지방군과 결합된 중견력량으로 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군에는 또한 금군이 있었다. 금군은 궁성수비를 위주로 하면서 직접 군주를 호위하는 시위군이였다. 발해의 지방군은 건국초기부터 중앙군과 함께 발해군사력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있었다. 고구려멸망후 각지에서 반침략투쟁을 벌리던 여러 항전세력들은 발해건국을 위한 투쟁에 합세하여나섰으며 그후에는 지방군으로 편성되였다. 발해봉건정부는 초기부터 지방군을 거느린 지방장관들에게 중앙의 관직을 겸임시킴으로써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고 봉건정부에 더 잘 복무하도록 하면서 지방군강화에 특별한 관심을 돌리였다. 지방군은 지방행정단위인 부, 주, 현을 단위로 하여 편성, 배치되여있었다. 지방행정단위의 장관인 도독(절도사), 자사, 현승은 민사행정뿐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틀어쥐고 지방군을 통솔하였다. 그리고 특별히 중요한 부들에는 도독이 아니라 절도사들이 파견되여 그 지역의 군사를 거느리고있었으며 후국과 속령들에 배치된 군대는 지방군의 구성부분으로 후국왕이나 번장들의 통솔하에 있었다. 지방군의 편성은 중앙군과 달리 병농칠치의 원칙에서 조직된 고구려인평민들이 기본을 이루고있었으며 말갈족출신의 군사들도 들어있었다. 이처럼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구성된 발해의 군대는 봉건왕권을 보호하고 지배계급의 계급적지배와 리익을 군사적으로 옹호하고 담보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220여년간 나라의 안전을 지켜냈다.    발해군대의 병종 발해군대의 병종구성을 놓고보면 강력한 지상군과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발해의 지상군은 기본전투력량으로서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들에서 용맹을 떨쳤다. 발해에서는 기병을 위주로 한 지상군의 위력이 대단히 강하였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란이 일어났을 때 평로류후사 서귀도는 발해에 기병 4만을 보내여 도와줄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서귀도가 발해에 요청한 기병 4만은 결코 적은 수자가 아니였다. 서귀도가 그렇게 많은 수의 기병을 요청할수 있은것은 발해의 기병력이 량적으로 또 질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다고 보았기때문이며 설사 이만한 수의 기병을 동원시킨다고 하여도 국가방위를 위한 전반적무력균형에서는 큰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때문이였다. 다시말하면 그들은 군사력 특히 기병이 강한 발해로서는 이만한 수의 기병을 얼마든지 동원시킬수 있다고 보았던것이다.         이것은 당시 고구려후국관내였던 오늘의 평안남도 녕원군에 발해성과 말을 사육하던 양마성이 있는것을 놓고서도 잘 알수 있다. 양마성에서는 말굴레와 말안장, 금속제활촉들이 많이 발굴되였는데 이것은 발해에서 말사육이 그 어떤 개별적인 지역에 국한된 사업이 아니라 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일로서 전국의 여러 곳에서 활발히 진행되였으며 사육된 말들은 발해의 강력한 기병력을 끊임없이 보충하고 강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는 강력한 수군도 가지고있었다. 발해가 수군을 가지게 된것은 나라의 지리적위치와 관련된다. 발해는 령역의 적지 않은 부분이 해안을 끼고있었는데 동쪽에는 조선동해, 서남쪽에는 조선서해가 있었다. 발해는 건국초기부터 당나라와 군사적으로 견제하는 립장에 있었기때문에 당나라와의 대립이 격화되고 그것이 언제 전쟁으로 번져질지 모르는 조건에서 수군력량을 강화하였다. 발해에서는 수군의 중요한 전투력인 함선을 건조할수 있는 배무이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       발해에서는 각이한 크기의 배를 건조하였는데 큰 배는 물동량을 고려하지 않고 한척에 100여명이 탈수 있었고 중형배는 40~70여명, 작은 배는 10여명가량 탈수 있었다. 발해사신들이 모진 풍랑을 무릅쓰고 일본에 자주 왕래할수 있었던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발해사람들의 진취성과 함께 견고한 배가 마련되여있었기때문이였다.       일본측문헌기록들에 의하여 발해사신들이 타고 갔던 배를 상상해볼수 있는데 그중에는 키, 돛대, 노, 닻, 끌어당기는 바 등 여러가지 설비를 갖춘 조종인원이 28명이나 되는 큰 배도 있었다. 수군은 바로 이러한 배에 여러가지 무기를 설치하고 바다를 믿음직하게 지켰다. 대형배와 중형배는 기본전투함선의 역할을 하였고 소형배는 해안을 감시하고 해적행위를 하는 배들을 추적,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처럼 발해군대는 기병위주의 강력한 지상군과 발전된 전투함선으로 장비된 수군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이와 같이 발해는 건국이후 수십만의 군사를 상비군으로 가지고있었기때문에 령토확장도 성과적으로 진행할수 있었고 이웃 나라와의 군사적대결과 외교분쟁에서도 우세를 차지할수 있었던 동방의 강국이였다.
40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댓글:  조회:1054  추천:0  2021-09-10
새롭게 정비강화된 정치제도 발해는 건국후 국력을 계속 강화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십년동안에 벌써 그 령토가 남쪽은 대동강과 덕원(원산북쪽)에서 신라와 접하고 료하일대와 부여의 땅인 송화강류역, 흑룡강이남의 말갈족거주지역까지 포괄하게 되였다. 발해는 국력이 강화됨에 따라 대외적지위를 공고히 한 결과 《해동성국》(동방의 강성한 나라)으로 불리우며 위력을 널리 떨치였다. 발해는 강화된 나라의 국력에 어울리게 정치제도를 새롭게 정비강화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발해국의 최고권력자의 지위 봉건시대의 국가는 군주의 권력기구인것만큼 최고권력자의 지위는 국가의 지위를 규정짓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이다. 발해의 지위와 성격을 규정짓는데서 제일 처음으로 론의되는것이 바로 발해대왕의 지위에 관한 문제이다. 발해봉건국가의 국가주권은 지주, 관료 등 봉건통치계급에게 속하였고 국가우에 있는 국왕은 최고의 권력자이며 최대의 착취자였다.  국왕은 대씨가문에서 원칙상 맏아들이 대대로 물려받았고 자식이 없을 경우에는 형제 또는 가까운 왕족에 의해 계승되였다.       발해에서는 왕을 《가독부》 또는 《성왕》, 《대왕》, 《황상》, 《기하》라고 불렀고 왕의 명령은 《교》 또는 《조》로, 왕의 아버지는 《로왕》, 어머니는 《태비》, 처는 《귀비》, 맏아들은 《부왕》, 그 아래의 자식들은 《왕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독자적인 년호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며 왕위는 세습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많은 발해관계사료들은 발해대왕이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년호의 제정과 대왕, 황상, 성왕의 호칭, 3사3공제도의 존재 등은 국왕의 천자적지위와 발해가 천자국의 틀에 맞는 정치체제를 갖추고있던 대왕국이였다는것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ㅡ 독자적인 시호, 년호의 제정 발해에서는 군주가 즉위하거나 그 어떤 상서로운 사변 또는 재난 등이 있을 때에는 년호가 새롭게 제정실시되군 하였다. 일반적으로 봉건사회에서 년호는 황제국가들에서만 독자적으로 제정실시될수 있으며 제후국이나 속국들에서는 자체로 제정할수 없고 다만 황제국의 년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군주가 독자적인 년호를 제정하였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것은 최고통치자가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징표의 하나라고 말할수 있다. 발해에서는 대조영으로부터 마지막 군주 대인선 집권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독자적인 년호들이 제정실시되였다. 오늘까지 전해지는 《협계태씨족보》, 《신당서》 발해전,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와 같은 력사자료들과 금석문들에는 발해존립기간 제정실시된 각종 년호들이 기록되여있다.     력사기록들에 남아 전해지는 발해의 시호와 년호들은 발해가 존립 전기간 다른 나라의 년호를 쓴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년호를 제정하여 실시하였다는것, 그 최고통치자가 천자의 지위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근거로 된다. ㅡ 발해군주에 대한 호칭 대왕, 황상, 성왕 발해에는 천자적지위에 있던 군주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이 있었다. 성왕이라는 호칭과 여러 금석문들에 남아있는 대왕, 황상이라는 호칭은 발해군주의 천자적지위를 명백히 증명하여준다. 현존하는 사료들에서 발해군주를 대왕으로 표현한것은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 《일본후기》의 기록이다. 《정혜공주묘지병서》와 《정효공주묘지병서》는 발해인들이 직접 남긴 금석문이며 대행대왕이라는 표현도 발해국왕의 국서에 올라있는 문구였다고 볼 때 대왕이라는 표현은 발해봉건사회에서 널리 사용되던 왕에 대한 호칭의 하나였다는것을 잘 알수 있다. 발해때의 대왕이라는 호칭은 고구려시기의 최고군주에 대한 칭호를 그대로 이어받은것이였다. 발해군주도 고구려의 최고주권자와 마찬가지로 제후세력들의 우에 있는 한급 높은 대왕으로서 천자급의 틀을 갖추고 행세하였다. 발해의 최고통치자는 천자급의 대왕이였기때문에 대왕이라는 호칭외에 황상, 성왕이라고도 불리웠으며 군주의 딸도 공주라고 하였다. 발해에서는 국왕의 신성불가침을 절대화하기 위하여 고구려시기의 성왕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왕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771년 문왕이 일본왕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발해왕실이 천손 즉 천제의 자손이라고 하였다는것은 발해지배계급이 고구려시조 동명성왕때부터 시작된 천손사상으로 왕족혈통을 신성시하고 절대화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왕, 황상, 성왕 등으로 불리우던 발해군주는 전체 지배계급, 피지배계급우에 군림하고있던 최고통치자, 전제군주로서 발해의 통치체제는 천자국의 틀거리에 맞게 편성되여있었다.      발해의 중앙통치기구의 기본을 이룬 3성 6부 발해국가의 중앙정부기구에는 많은 관청들이 있었으나 기본을 이룬것은 3성 6부였다.       3성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이며 그 장관들인 대내상, 좌상, 우상을 3재상이라고 하였다. 6부는 충부, 인부, 의부, 지부, ​례부, 신부 등이였다.       발해국가의 행정은 기본적으로 이 3성 6부에 의하여 집행되였으며 봉건국왕의 《권위》를 보장하고 중앙집권적봉건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실제적 집행단위였다. 발해에서 3성 6부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기구는 대체로 8세기 후반기에 와서 기본적으로 고정되였다. 6부의 각 장관은 경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정당성의 관리인 좌, 우사정의 아래에서 그의 지시를 받았다. 경의 아래에는 소경과 여러명의 랑중, 원외랑들이 있었다. 발해에는 3성6부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치에 참가하는 《3사3공제도》도 있었다.       3사는 태사, 태부, 태보였는데 국왕은 이들을 신하로 대하지 않고 스승으로 대우하였다. 3공은 태위, 사도, 사공으로서 국왕을 도와 나라의 정치를 하며 어느 부서나 다 통관할수 있었다.       발해에는 3성 6부 아래에 많은 행정관청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청들로서는 중정대, 전중시, 종속시, 문적원, 태상시, 사빈시, 대농시, 사장시, 사선시, 주자감, 항백국, 화간원 등이 있었다. 이 기관들은 봉건관료기구의 내부조직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는것으로 되여있지만 실제적으로 인민들을 수탈하고 반항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폭압기구였다. 발해에서 이러한 기관들은 봉건귀족들 특히 왕실의 사치한 생활을 보장하는데 복무하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제도 발해의 지방행정기구도 다른 봉건국가와 마찬가지로 중앙정부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지방통치기구였다. 발해의 지방통치의 기본단위는 부, 주, 현이였고 그 아래에 일부 부곡과 촌 등이 있었으며 변방지역들에는 자치적성격을 띤 후국과 속령들이 있었다. 발해의 지방통치기구는 8세기 중엽에 5경 15부 62주로 정비되여있었고 각 주 밑에는 여러개의 현들이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5개부에 경(京)을 두었다. 상경룡천부는 발해의 수도(녕안현 발해진)였으며 중경현덕부는 화룡, 남경남해부는 북청, 서경압록부는 집안, 동경룡원부는 부거에 위치하고있었다. 부의 장관을 도독, 주의 장관을 자사, 현의 장관을 현승이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관할지역의 민사행정뿐아니라 재판권, 군사권까지도 그러쥐고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왕권의 대리자들이였다. 이처럼 발해의 중앙과 지방의 각급 관료들은 주로 고구려귀족들로 임명되였는데 그들은 그 지방의 군사권까지 모두 쥐고있은 권력자들이였다.
39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댓글:  조회:1287  추천:0  2021-09-10
건국초기 발해국의 주요정책들 발해는 동방의 강국으로 위력을 떨치던 《해동성국》이였다. 발해가 초기부터 정치군사적위력을 강화하고 나라의 대외적지위를 높이면서 《해동성국》의 위용을 떨칠수 있게 된것은 건국직후 실시된 주요정책들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정치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입니다.》 정치는 계급 또는 사회공동의 리익에 맞게 사람들의 활동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지휘하는 사회적기능으로서 여기에서 기본은 정책을 규정하고 집행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계급사회에서 정치를 한다는것은 일정한 계급이 자기의 요구와 리해관계에 맞게 정책을 작성하고 정치조직, 정치제도에 의거하여 그것을 집행해나가는 과정을 말한다. 정권을 쥔 계급이 어떤 정책을 작성하고 실시하는가 하는것은 그들의 계급적요구와 리해관계에 따르는것으로서 국가의 운영과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 발해국에서 중무정책의 실시 발해는 건국초기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중무정책을 실시하였다. 발해가 건국직후 실시한 중무정책은 무관을 중시하고 무예를 인재등용의 기본징표로 삼던 고구려의 상무적인 정치방식을 그대로 계승한것으로써 이 시기 정세발전의 요구에 맞게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을 강화할수 있게 한 긍정적인 정책이였다. 발해가 중무정책을 실시한 시기는 건국직후부터 8세기 전반기경까지였다. 발해 초기의 대외관계에서 문관보다 무관의 역할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일본으로 간 발해의 첫 사신단은 조선동해를 건너 일본 동북부의 에조족(오늘의 아이누족의 조상)거주지역에 도착하였는데 24명가운데서 고인의이하 16명이 죽고 두령 고재덕 등 8명만이 겨우 살아남아 이데와에 도착하였다. 이 사신단의 사두는 무관인 녕원장군 랑장 고인의였으며 그밖에 우장군 과의도위 덕주와 별장 사항 등이 사신단성원으로 되여있었다.       그후 발해국은 759년까지 5차례에 걸쳐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일본에 파견된 사신단의 사두, 사사 등 주요인물들은 모두 무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일본뿐아니라 당나라에 파견된 사신들도 대부분 무관벼슬을 가진 관리들이였다.       발해는 당나라에도 많은 사신들을 파견하였다. 당나라사신 장행급과 최혼이 705년, 713년에 각각 발해를 방문한 후 두 나라사이의 관계가 어느정도 완화되면서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가 빈번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8세기 중엽까지 여러가지 사명을 띤 발해사신들의 당나라왕래는 빈번하였지만 그들의 관직명을 정확히 전하는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시기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사신들가운데서 당나라의 명예벼슬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무관의 벼슬이였다.       일반적으로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으로서 매개 나라의 대외관계에는 그 나라가 실시하고있는 대내정책이 그대로 반영된다. 해당 나라들의 대외관계는 사신들의 호상 래왕을 통하여 맺어지며 발전한다. 사신들은 봉건국가의 권력을 틀어쥐고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국가의 공식적인 인물들인것만큼 사신단성원들이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여있는가 하는것을 통하여 국가권력을 틀어쥔 정치세력에 대하여 알수 있다. 사신단성원들이 대부분 무관들로 구성되여있다는것은 당시 발해에서 무관들이 국가정치의 주역을 담당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발해에서 군사를 중시하는 중무정책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되여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발해에서 중무정책은 8세기 50년대경까지 실시되였다. 그러면 발해가 건국 초기부터 중무정책을 실시한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것이다.       그 목적은 갓 창건된 봉건국가의 안전을 지키고 국력발전의 담보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으며 옛 고구려의 령토를 완전히 되찾고 강력한 봉건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고구려의 장수출신인 대조영이 발해건국을 위한 오랜 기간의 항전을 통하여 단련된 고구려군사들에 의거하여 국가정사를 운영하는것이 건국초기의 복잡한 정세하에서 권력지반을 공고히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데서도 매우 유리하기때문이였다.       이처럼 건국후 8세기 전반기경까지 실시된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는 나라의 자주권과 안정을 지키고 강한 국력을 마련할수 있었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출현할수 있었던 토대는 모두 중무정책에 의하여 마련되고 공고화되였으며 바로 여기에 발해정치사에서 중무정책의 실시가 가지는 의의가 있다.   중무정책에서 중문정책에로의 전환 중무정책에 의하여 발해의 국력이 강화되고 대외적지위가 높아진 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발해정치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제3대왕 대흠무(문왕)집권시기(737년~793년)이다.       제2대왕(대무예)의 둘째 아들이였던 대흠무는 737년에 왕위에 올라 집권초기에 고왕(대조영)과 무왕(대무예)시기의 정책들을 계승하여 그것을 완수하는데 기본힘을 돌렸다. 특히 문왕은 무왕통치시기의 령토확장정책을 완수하는데 큰 힘을 넣었다.       문왕집권초기에 추진된 령토확장의 결과 8세기 40년대에 북부의 여러 말갈족들이 종속되고 그 지역들에 지방행정단위들을 설치할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였다. 그리하여 발해건국직후부터 기본힘을 돌려온 발해변방의 여러 말갈족들에 대한 정복과 포섭이 기본적으로 일단락지어지고 나라의 령토는 훨씬 넓어지게 되였다. 당시 대외정세도 발해에 유리하게 변하고있었다.       732~733년 발해의 반침략전쟁이후에 발해에 대한 적대시정책의 실패와 저들에게 불리하게 변화된 대외적환경을 인정한 이웃나라들은 관계정상화를 지향하였으며 《안사의 란》을 전후하여 국내정세가 복잡하게 번져지자 발해와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여 정치, 군사적인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당시 발해주변 나라들가운데는 발해에 대하여 정치, 군사적으로 위험을 조성하는 종족이나 나라가 없었으며 이것은 발해의 발전에 있어서 유리한 대외적환경으로 되였다.       발해는 중무정책에 의하여 유리하게 조성된 대내외적환경과 조건에 맞게 국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8세기 50년대 말부터 정치방향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발해에서 실시된 기본정책은 종전의 중무정책과는 다른 중문정책이였다. 문왕통치시기의 정치를 중문이라고 하는것은 고왕과 무왕시기와 같이 주로 군사력에 의거하여 대내외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한것이 아니라 국가통치체제를 정비강화하고 그에 의거하여 경제, 문화발전에 힘을 넣으면서 정사를 운영하였기때문이다. 대흠무통치시기의 정치의 특징은 문왕이라는 왕의 시호에 명백히 나타나있다. 이런 의미에서 문왕통치중기이후 구체적으로 8세기 후반기를 발해정치에서 중문정책이 실시된 시기로 규정할수 있는것이다. 이처럼 발해에서 변화된 조건에 맞게 중무정책이 중문정책으로 이행되면서 중앙집권적봉건통치체제가 더욱 확대발전되였으며 국력도 더욱 강화되였다.
38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댓글:  조회:1284  추천:0  2021-09-10
《해동성국》 발해의 건국 고구려유민들은 신라통치배들이 또다시 적들과 결탁한 다음에도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계속 줄기차게 싸웠다.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676년이후 여러가지 어렵고 복잡한 정황이 조성되였으나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압록강이북지역을 중심으로 더욱 고조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7세기말부터 10세기초까지 200여년간 존재하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가 크게 발전하여 〈해동성국〉으로 이름을 떨치였습니다.》     △ 대중상과 대조영에 의한 진국의 성립 고구려유민들의 줄기찬 투쟁과정에 점차 고구려를 계승한 새 나라를 세울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여나갔으며 새로운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압록강류역과 그 부근일대의 고구려유민들에 의해 태백산(백두산)일대에서 《진국》이라는 고구려유민들의 소국이 출현하였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자료에 근거해보면 진국은 678년경에 처음으로 나타났으며 684년경에 자기 존재를 더욱 뚜렷이 하였다고 볼수 있다. 진국왕(진국공)은 대조영의 아버지 대(걸걸)중상이였다. 668년 9월 고구려왕조가 멸망한후에 침략자들은 전국 각지에 자기 군대를 파견하여 그곳을 강점하고 새로 저들의 지배체계를 세워보려고 획책하였다.       고구려멸망 당시 국가장부에 등록된 호구는 5부, 176개의 성에 69만여호였는데 침략자들은 그때 저들이 정복한 나라들에 대하여 실시한 상투적수법에 따라 초기에 계획하였던 9개의 《도독부》(도에 해당함), 42개의 《주》(군에 해당함), 100개의 《현》(작은 군에 해당함)가운데서 불과 도독부 4개와 주 10개밖에 설치하지 못하였다.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라는것을 설치하고 설인귀를 그 장관(《안동도호》)으로 임명하여 2만의 군대를 가지고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의 《도옥》, 《자사》, 《현령》 등의 자리에는 저들에게 투항한 반역자들을 앉히고 거기에 저들의 관리들을 끼워서 그들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고구려지역에 대한 침략자들의 강점책동은 고구려유민들을 강점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에로 적극 떨쳐나서게 하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강점자들은 저희들의 관리들을 통하여 실시하고있던 직접적통치방식을 철회하고 투항한 이전 고구려의 왕족들과 관리들을 통한 간접통치방식으로 그 방법을 변화시키게 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가 멸망한지 9년만인 677년에 강점자들에게 끌려가있던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고보장이 다시 료동지역에 나타나게 되였다.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는 《의봉2년(667년-인용자) 정축년 봄 2월에 투항한 왕을 료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책봉하였다. 료동에 돌아가서 남은 사람들을 안착시키도록 하였다. …왕이 료동에 이르러 반역을 꾀하면서 몰래 말갈과 내통하였다.》라고 기록되여있다.       강점자들은 보장왕을 조선국왕으로 임명하여 옛 고구려지역에 파견하면서도 그가 고구려유민들과 손을 잡고 저희들을 반대하여 나설것이 두려워 료동성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를 신성(료하서쪽 신민현부근, 후의 료빈탑으로 인정되고있음)으로 옮겨가 있게 하고 연남생을 《도호》로 임명하여 보장왕의 행동을 감시통제하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를 속령화하고 투항한 고구려의 관리들을 내세워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법으로 넘어갔다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옛 고구려지역에서는 고구려유민들이 고국회복투쟁을 줄기차게 벌리고있었다. 여기에서 주도적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였다. 대중상과 대조영은 말갈인 추장 걸사비우가 지휘하는 말갈인부대와 련합하여 수개월간 영주의 동쪽과 동남쪽의 여러 성들을 탈환하여 고국땅에서 강점자들을 소멸하고 9월에는 료서 고성에 옮겨와있던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여 이에 큰 타격을 주었다. 료동지역까지 세력범위를 확대하면서 고국회복투쟁을 벌리고있던 대중상과 대조영은 료동지역에 돌아온 보장왕을 리용하려고 그와 련계를 맺게 되였다. 빼앗긴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있던 보장왕도 대중상 등에게 의거하였다.       《협계태씨족보》 발해국왕세략사 태조 진국왕조에는 보장왕이 《료동에 이르러 중상(태조 진국왕 즉 대조영을 가리킴-인용자)과 서로 통하여 모반하려고 하였다.》고 씌여져있다. 즉 《삼국사기》에 기록된 보장왕이 내통한 《말갈》이란 바로 대중상과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세력을 비속화하여 가리킨 말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6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유민들의 고국회복투쟁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중심적역할을 놀던 이전 고씨왕족들이 더이상 고국회복투쟁에 관여할수 없게 된것이였다. 677년에 료동지역에 온 이후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그에 의거하여 왕권회복을 실현해보려던 보장왕은 그 내막이 탈로나 681년 강점자들에 의하여 다시 공주로 끌려갔다. 공주로 끌려간 보장왕은 그 다음해 682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더우기 683년에는 고구려의 고씨왕족이 세웠던 고구려국까지 사라짐으로써 옛 고구려령토에는 고구려왕족이 관여하는 고국회복투쟁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였으며 이것은 항전세력들에게 새로운 조건을 조성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대중상과 대조영은 이를 계기로 왕족을 내세우려던 종전의 방법을 바꾸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나설것을 결심하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제왕운기》 하권 동국군왕개국년대병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여있다. 《고구려의 옛 장수 대조영이 태백산 남쪽성에 의거하여 주나라 측천무후 원년 갑신(684년)에 나라를 세우고 이어 발해라고 이름을 삼았다.》       《제왕운기》의 기록과 제반사실들로 미루어보아 684년에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유민들이 발해대왕국의 전신국가로서 봉건소국 진국을 수립하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대중상과 대조영을 중심으로한 정치세력들이 봉건소국 진국을 세움으로써 고구려재건투쟁에서 자기의 지위를 더욱 높일수 있게 되였다. 684년이후 진국은 국력을 강화하면서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려나갔으며 이로하여 압록강류역이북지역에서 침략자들은 더는 배겨낼수 없게 되였다.   ❖ 력사이야기: 대중상과 진국​   △ 침략자들을 반대한 고구려유민들의 투쟁, 발해의 건국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구려유민들의 투쟁은 영주지방에서 힘차게 벌어졌다. 영주지방의 고구려유민들은 696년에 고구려의 옛 장수인 대조영의 지휘밑에 말갈인, 거란인들과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군은 침략자들의 아성인 영주성을 들이쳐 도독을 처단하고 이 일대의 강점세력을 격파한 다음 고구려땅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대조영이 거느린 고구려유민군사들이 동쪽으로 진격한 목적은 옛 고구려땅에서 침략자들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땅에 고구려사람들의 나라를 세우자는데 있었다.       침략자들은 영주지방에서 일어난 거란인들의 폭동을 진압한 다음 많은 무력을 동원하여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여왔다. 그리하여 698년에 천문령 (료녕성 창무서쪽의 령)에서 치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였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유민군사들은 강점군을 완전히 섬멸하여버렸다. 이 반격이 얼마나 드세찼는가 하는것은 적장 리해고가 겨우 목숨만 건져가지고 혼자서 도망친 사실만으로도 잘 알수 있다.         천문령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침략자들은 다시는 고구려유민군사들을 추격하지 못하였다. 천문령전투에서 결정적승리를 이룩한 대조영은 계속 동쪽으로 진격하여 동모산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전 고구려령역안의 광범한 인민들을 집결하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여 방어를 한층 강화하였다.   이처럼 침략자들과의 투쟁과정에 대조영을 중심으로 한 새 봉건세력집단이 형성강화되였는데 이들은 이미 이룩한 군사적승리와 정치적력량관계에 기초하여 698년에 소국인 진국을 확대발전시켜 발해국의 창건을 세상에 선포하였다. 발해국의 1대왕은 대조영이였고 초기수도는 동모산이였다.   ❖ 력사인물: 대조영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려던 침략자들의 기도는 완전히 파탄되게 되였으며 그후 거듭되는 외적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나갈수 있는 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세 나라 인민들 특히 고구려유민들의 완강하고도 줄기찬 투쟁에 의하여 침략자들이 우리 강토에서 종국적으로 쫓겨나고 발해가 성립됨으로써 신라통치배들의 외세의존정책에 의하여 빚어졌던 엄중한 민족적위기는 완전히 극복되고 우리 조국 력사상에는 이전의 세 나라를 대신하여 발해와 후기신라 두 나라가 존재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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