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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음악사업에 혼신 불태우는 김성삼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5월5일 10시45분    조회:7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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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 학부장이고 교수이며 석사생 도사인 김성삼선생은 연변대학 예술학원 조선족민족악단 단장,연변대학 예술학원 민족악기연구제작쎈터 주임 등 직무까지 맡고 우리 민족 음악사업의 진흥을 위해 모든것을 다 바쳐가고있다.
           
가야금과 맺은 인연

어려서부터 악기에 흥취가 있어 피리를 갖고 장난하기 좋아하던 김성삼씨(1955년생)는 화룡1중에 진학한후 학교관현악대에 들어가 색스폰을 불면서부터 악기와 인연을 맺게 되였다.

1970년의 어느날,영화관람을 통해 교향악연주장면을 신나게 흔상하던 그는 불현듯 악대석의 그렇게 많은 악기가운데서 유독 색스폰이 없는것을 발견하였다.

(무대에도 오르지 못하는 악기를 다루어서야 무슨 전도가 있을가?) 그날  트럼봉연주장면을 제일 멋있게 보아둔 그는 이튿날로 당시의 음악교원이였던 류영섭선생님을 찾아가 트럼봉(스라이)를 불게 해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다.   

이렇게 10여명 동학들과 함께 트럼봉을 열심히 불며 기량을 닦은 그는 1973년에 끝내 트럼봉으로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학교에 오고보니 생각밖으로 전공이 트럼봉이 아니라 가야금으로 되여있었다.알고보니 《문화대혁명》후 처음으로 민족악기전공을 회복하면서 신입생들에게 민족악기를 가르치기로 했는데 김성삼씨에게 가야금이 차례졌던것이다.

그때까지 가야금이라곤 구경도 못해본 김성삼씨는 녀자들이 많이 연주하는 악기라는 말을 듣고 남자가 어떻게 그런 악기를 배우는가고 펄쩍 뛰면서 아예 집으로 돌아갈 타산까지 했다.당시 차례진 전공에 대해 달통되지 않아하는 학생들이 많아 학교에서는 보름간 학습반을 꾸리고 사상교육을 들이댔는데 김성삼씨는 가야금교원인 조순희선생님의 내심한 설복을 거쳐서야 마지못해 시험삼아 해보겠다고 대답을 했다.

령으로부터 시작한 가야금공부는 퍼그나 재미가 있어 배울수록 애착심이 생겨났다.그래서 녀자들의 악기라고 감추어가지고 다니기도 했지만 공부만은 열심히 해서 2학년에 가서는 무대에 올라 독주를 할수 있을 정도로 기술을 련마해냈고 1976년 졸업시에는 가야금교원으로 학교에 배치받게 되였다.

가야금독주으로 이름을 날리기까지

1년 3개월간 룡정시 지신향에 공작대로 내려가 있다가 학교에 돌아온 후 조순희선생님과 함께 12현 5성음계 전통가야금을23현 7성음계가야금으로 개량 제작한 김성삼씨는1979년 봄 화룡시문공단 배우들과 더불어 상해 순회공연 향발,거기에서  50여차의 공연에 참가하면서 우리 민족 전통악기의 하나인 가야금을 널리 선전할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상해시 소극장에서 매차 공연마다 수차에 앵콜를 받으며 소문을 놓은 어느 하루 공연을 마치고 퇴장하는 순간 생면부지의 손님 두분이 찾아와 래일 오전에 상해음악학원에 와서 교류공연을 해줄수 없느냐는 제의를 내놓았다. 그분들이 바로 상해음악학원의 고쟁교수 하보천선생님과 역시 상해음악학원 교수인 부인 손문연선생님이였다.

그 다음날 아침 주숙지에 하이야까지 보내준 하보천선생님은 상해음악 소극장에서 김성삼씨의 독주음악회를 관람하고나서 연주종목들을 록음해서 상해음악학원 자료로 남기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화룡시문공단이 귀향한후 록음때문에 상해음악학원에 며칠간 남아있게 된 김성삼씨는 록음여가에 상해음악학원 악기연구제작실을 구경하면서 악기선들이 욕심나 《군침》을 삼켰다. 그 악기선으로 가야금을 개조하고싶었던 그는 가야금독주곡을 록음한 대가로 현금 3000원을 건네주자 대신 가야금선 한틀을 연구제작해달라고 청들었다…

그 시기 고쟁개량에 한창이던 하보천교수는 김성삼씨에게 상해음악학원에 와서 공부하는 한편 고쟁개량에 동조해달라고 요구했고 김성삼씨 또한 거기서 직접 시험에 참가, 연수와 연구를 위해 상해음악학원에 들어가게 되였다. 

상해음악학원에서는 1980년 5월 《상해의 봄》음악회에 참가하여 우수상을 타고 그해 10월의 전국민족악기개량 평가회에서 《접식쟁(蝶式 )》개혁이 《중대성과상》을 따낼 때 시험연주원으로 활약한 김성삼씨를 학교에 남기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런데 연변에서도 김성삼씨를 놓치려 하지 않으면서 주문화국과 연변예술학교 해당일군들이 상해로 찾아오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까지 내세웠다.

어쩔수 없이 귀향을 선택한 김성삼씨는 1982년 9월 제남에서 펼쳐진 제1차 전국민족악기독주콩클에 참가하여 최고상인 우수표현상을 따내였고 전국10명 최우수청년연주가의 한사람으로 선발, 세계각지에 가서 예술교류에 참가하고 중국의 민족예술을  널리 전파할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김성삼씨는1983년에 독주작품 《심청조곡(안국민 작곡)》을 연주하여 전국민족악기작품콩클에서 작품3등상을 타고,  1984년 5월에 중국음악가대표단의 일원으로 프랑스,마로끄,뜌니지에 방문독주공연을 다녀왔다. 그해 10월에 있은 정주년회에서 그는 또 《장백에 봄이 왔네》,《도라지변주곡》으로 우수종목상을 획득하였는데 이 두 작품은 전국텔레비죤문예교류회에 참가하고 중앙방송국에서 방송되기도 했다.
 
이때로부터 가야금독주로 국내외에 소문을 놓은 김성삼씨는 선후로 미국,일본,조선,한국 등 나라들을 돌며 수십차의 개인독주음악회를 펼치였고 여러 급별의 콩클에 참가하여 묵직한 영예들을 따내였다.그의 독주작품들은 또 중국국제방송,《해협의 소리》방송 및 상해,료녕,흑룡강 등 60여개 라지오방송국과 텔레비죤방송국을 통해 전국의 방방곡곡에 전해졌다.

1985년에 전 주 예술단체중청년악기콩클에서 1등상을 따내고 연변예술학교 예술단을 따라 미국방문공연을 다녀온 김성삼씨는 1987년에 연변가무단을 따라 조선방문공연에 참가하였고 1989년에는 중국조선족예술단의 일원으로 일본,한국에 가서 공연에 참가함과 동시에 한국MBC교향악단의 협연으로 가야금독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들어와 김성삼씨는 중국조선족민간음악무용콩클에서 《특별초청표현상》 을 따내고 1991년에는 연변예술학원 《장백산예술단》을 따라 일본,한국방문공연에 참가하였으며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정대예술》프로에 2차나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에게 가야금독주를 선물하였다. 그의 독주작품은 또 광주시시대음향공사에서 10돐생일을 맞으며 만든 음반에 취입되였다.  

음악교육사업에 몰부은 심혈

음악교육사업일군으로서의  김성삼선생은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낸 우수한 스승이기도 하다.

지난 30여년래 줄곧 가야금교수를 맡아온 선생은 한해연,한영,최미선,김영(현재 연변가무단 가야금독주배우)  등 제자들을 양성해내면서 원예사사업에 정성을 다하여 1992년에는 부교수직함을,2000년에는 교수직함을 따내였다.

1995년 한국에 가서 6개월간 교류 및 연구활동에 종사하게 된 선생은 부분적 대학에 가서 교수 및 연주활동을 진행함과 동시에 초청을 받고 한국국립관현악단의 12명 가야금연주원들을 상대로 23현 개량가야금의 현대연주기법을 가르쳤다.이밖에 선생은 또 한국 천안시 《배꽃문화원》의 초청으로 개인독주음악회를 펼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선생은 가야금독주로 소문이 나서 한국 등 나라에서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다.이런 학생들에 대해 선생은 가르침에 게을리 하지 않고 보다 많은 지식을 전수하기에 최선을 다한다.

교육연구일군으로서의 선생은 또 민족음악에 관한 많은 론문을 집필하여 우리 민족의 음악교육사업에 기여해왔다. 선생이 집필한 《중국조선족악기개혁에 대한 사고》,《민속유희와 관광산업을 결부시킬데 대한 연구》,《조선족예술교육체계 및 양성모식연구》,《개량가야금연주법탐색》,《중국조선족민족음악의 현상태 및 대책연구》 등 무게있는 론문들은 국내외의 책자와 간행물들에 실리여 해당 전문가들의 긍정을 받았다.

사회적으로 중국음악협회 회원,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부회장,연변음악협회 부주석직을 맡고있는 선생은 최근년에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의 학부장직을 맡고 일상사무로 분주히 보낼 때가 더 많다.성악,악기,음악교육,작곡 등 음악에 관한 모든 전업의 크고작은 일들을 처리하고 800여명 학생들의 학습과 생활,근 90명 교직원들의 교수와 사업등을 관리하느라 팽이처럼 돌아치면서도 석사연구생 양성만은 계속 견지해오고있다.

한국예술대학교들과의 상호교류에도 중시를 돌리면서 조직사업을 깐지게 해오고있는 선생은 2000년에 북경에 가서 중앙TV 제3채널의 60분짜리 《조선족민족음악》프로그램의 제작에 참여하였고 2002년에는 또 《연변대학 예술학원 조선족민족악단》의 연주작품으로 된 60분짜리 《국악의 향기》 프로그램의 조직 및 제작 사업에 참여하고 편곡한 민족관현악합주곡 《도라지》를 선보였다. 

선생은 최근 몇년간은 연변대학의 《211》공정건설과 국가본과교수우수평가통과 때문에 더구나 바삐 보냈다고 하면서 금년 5월 18일에 연변대학이 우수평가에 통과 되였으니 이제부터는 교수와 연구에 조금이라도 정력을 더 투입할수 있게 되였다고 기뻐하는 눈치를 보였다.

김성삼선생 그리고 선생이 이끄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우리 민족의 음악예술을 위해 보다 많은 사업들을 하고 더욱 많은 우리음악인재들을 양성해내면서 민족예술진흥사업에서 한몫을 감당하기를 기원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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