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선희-민족창법 통속창법의 조화를 위해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4월1일 11시50분    조회:1011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민족창법과 통속창법의 조화를 위해
―연변가무단 김선희가수의 이야기

우리 민족의 전통민요며 판소리는 물론 통속가요도 잘 불러 중국조선족청년가수들가운데서 전도유망한 인기가수의 한사람으로 각광받고있는 연변가무단의 김선희가수가 소띠해의 행복한 엄마로 되였다. 지난 2월 12일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2009년도 《3.8국제로동부녀절기념야회》촬영에 참가한후 4일후인 2월 16일에 제왕절개수술을 거쳐 달덩이같은 아들을 낳은 김선희가수 지난 3월 8일 저녁에 방송된 야회에서 시청자들에게 출산후의 부석부석한 모습을 보여준 김선희가수를 댁에서 만나본다.

한우물만 파며

1981년 룡정시의 한 로동자가정에서 태여난 김선희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무던히 좋아했다. 그런데 악기며 노래에 두루 다 흥취가 있었으나 여러가지 여건때문에 어느 한가지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한 아버지와 “욕심”많은 어머니는 딸애가 무엇이나 다 배우는것이 소원이였다. 그래서 선희는 겨우 다섯살밖에 안되는 유치원시절에 노래, 무용, 전자풍금, 미술 이렇게 네가지 써클에 참가하느라 매일마다 허둥댔다. 

어린 나이에 초부하로 뛰여다니는 선희가 안스러웠는지 유치원 원장선생님이 어느날 선희의 어머니를 찾아 써클이라는것은 특장에 따라 어느 한가지를 선택해야 성공할수 있다고 하면서 한꺼번에 네가지나 다 시키느라 정력을 분산시킬 대신 진짜 소질을 갖고있고 장차 성공할수 있는 항목을 선택하는것이 좋겠다고 제의를 했다.                          

이렇게 부모님들은 선희의 우세가 노래인것 같다는 원장선생님의 조언을 존중해서 딸애를 가수로 키우려고 결심, 8살때부터는 연변예술학교(지금의 연변대학 예술학원)  음악학부의 강신자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우리 민요를 배우도록 했다.

그런데 로동자로 일하는 아버지나 시장에서 매대를 경영하는 어머니나 일주일에 한번(방학기간에는 일주일에 두번)씩 딸애를 연길로 데리고 다닐수 없는것이 문제였다. 생각던 끝에 아버지는 서너번만 데리고 다니면서 길을 익혀준후 돌아올 차비를 호주머니에 넣어주면서 혼자서 다니도록 했다. 

고맙게도 강신자선생님이 매번 강의가 끝난후면 점심을 먹여주고 또 자신의 딸애들을 시켜 선희를 뻐스정류소까지 보내여 룡정행뻐스에 앉혀주도록 했다. 덕분에 선희는 별로 고생하지 않고 노래실력을 키울수 있었고 4년후인 12살때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예술학교 소학반에 입학, 강신자선생님의 문하에서 성악이라는 한우물만 팔수 있게 되였다.

최려나, 박연, 현성해 등과 어깨나란히 연변예술학교 소학반에 입학한 선희는 물을 만난 고기마냥 드넓은 성악의 세계에서 마음껏 자맥질하면서 우리 민요와 판소리를 열심히 배웠다. 그 보람으로 노래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제고를 가져왔고 14살때에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의 《청춘스타트》프로에 출연, 민요련창중 혼자서 《성주풀이》를 부르며 장끼를 자랑할수 있게 되였다. 

이를 계기로 노래실력을 인정받은 선희는 친구들과 더불어 《음력설야회》,《주말극장》, 《토요무대》 등 성인프로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3인창, 독창 등으로 여러 급별의 콩클에 참가하여 묵직한 상을 타기도 하면서 우리 민족 가요계에서 반짝이는 새별중의 하나로 주목을 받게 되였다.

행복한 고민

노래를 너무 좋아한 까닭일가 시간이 지나면서 선희는 민요와 판소리에 국한되지 말고 통속가요도 제법 잘 부르는 다면수로 되고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그래서 짬만 있으면 통속창법을 익히는데 신경을 쓰고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2005년에 와서는 대담하게 무대에 나섰는데 예상외로 평판이 괜찮았다. 이때로부터 선희는 노래콩클에 참가해도 통속조에 참가해 도전했고 2006년 조선 《4월의 봄》예술축전에 참가해서는 대중가요를 불러 은상을 타고 《할빈의 여름》노래콩클에서는 통속조의 2등을 따냈다.

그즈음 북경의 이름난 음악제작인 추철부(  夫)선생이 선희의 창법을 인정해주면서 광동백락영상문화전매공사와의 합작으로 제작하게 되는 CD에 출연해줄것을 제의해왔다. 이리하여 선희는 2006년에 《라음(裸音 수식을 첨가하지 않은 순수한 음악) 제1인》이라는 호칭으로 2집 CD에 출연하게 되였다.

 CD제작을 위해 뛰여다니던 나날을 뒤돌아보며 선희는 그때 고생도 퍼그나 했지만 크게 단련을 받고 주위의 사람들한테서 많은것을 배울수 있어 너무 좋았다고 감개무량해했다. 

그번에 선택된 노래는 한국가요 《꽃》을 제외하고는 전부가 한어로 된 류행가요 또는 서정적인 음악이였는데 연변에서 조선말로 된 노래를 부르는데 습관된 선희는 처음에 한어말발음이 요구에 도달되지 못해 애를 먹었다. 게다가 최고급설비로 무장한 록음실의 음향효과가 연변과 완전히 다르다보니 실력발휘를 제대로 할수 없었다. 몇번이고 다시 불러도 조선족맛이 난다고 하는 제작인의 평가에 선희는 아예 귀에 레시바를 걸고 살면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듣고 노래의 원맛을 살리기에 왼심을 썼다.

그 보람으로  《검은오리그룹이 방창을 하고 반주를 몽땅 생음악으로 한 CD는 광주, 심수 등 남방의 대도시들과 향항 등지에서 잘 팔리고있으며 제작인 추철부선생은 한국가요와 연변가요를 한어로 번역하여 제3집을 내놓을 타산으로 기획추진에 한창이다.

우리 민족의 민요와 판소리로 노래인생을 시작한 선희의 욕심은 민족창법과 통속창법을 병행시키는 가수로 되는것이다. 최근에 와서 민요보다는 통속가요를 부를 기회가 더 많이 차례진다는 그는 민족창법에 치우치면 통속가요가 생각대로 되지 않고 통속창법에 치우치면 민요나 판소리를 제대로 부를수 없는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하면서 량자를 조화시킬수 있는 비법을 모색해볼 의향을 내비치였다.

신세대주부

소녀시절에 집을 떠나 기숙사생활을 한 선희가 한 남자의 안해로, 가정주부로 된 지금에 와서 아침밥상이나 제대로 챙길가 하고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기실 그녀는 8살때부터 쌀을 앉히고 집안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당시 시장에서 매대를 경영하는 어머니는 물건구입을 자주 나갔는데 한번 가면 3~4일이 걸리기가 일쑤였다. 그때마다 선희는 부엌에 내려가 불을 때면서 밥을 짓는 아버지를 도와 쌀을 앉히고 잔심부름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제시간에 퇴근하지 못할 때면 이모가 사다놓은 남새로 반찬을 만들어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는 남동생을 달래기도 했다.

예술학교에 붙은후에도 선희는 집에 가면 자각적으로 부모님들의 일손을 거들었고 어머니가 한국으로 떠나고 남동생이 백산학교에 다니면서 연길로 이사오게 되자 여러가지 김치까지 담그면서 아버지의 부담을 최대한 덜어주었다. 

노래로 돈을 벌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후 그는 또 외국에서 육체로동을 하면서 고생하는 어머니를 돕는 차원에서 남동생의 소비를 자기가 부담, 남동생이 장춘에 가서 대학공부를 하는 몇년간은 학비를 제외한 모든 비용을 전담하였다. 그것도 한꺼번에 많이 주면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가봐 일주일에 400원씩 한달에 4차씩 부쳐주었다니 얼마나 명심해야 했을가?!

결혼을 한 지금에 와서 시댁도, 친정도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 선희는 출근을 하면서 세간살이를 하느라 별로 한가할 사이가 없지만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일들이여서 별로 힘든줄을 모르고있다. 

해산을 앞두고 선희는 50대 한족아줌마를 청해다 산후조리를 부탁했다. 그동안 친정어머니생각을 많이 했다는 선희는 이제 출근도 해야 하고 애도 키워야 하고 자기보다 2살 년상인 시동생을 위해 형수노릇도 해야 하고… 어깨가 무거워지는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고백했다.

아기자기한 결혼생활

9살 년상의 남자와 백년가약을 맺은 선희는 결혼생활에 대해 퍼그나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신랑 김원혁은 1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3형제가 홀어머니슬하에서 힘들게 자라다가 일본에 가서 7년간 숱한 고생을 했고 암병에 걸린 어머니때문에 귀국한후에는 병구완에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세상뜬후 총각 셋이 힘들게 살아와서일가 결혼후 김원혁은 가정을 중히 여기고 안해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모범남편으로 되였다. 총각시절에도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 돌아오면 제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부모님들의 산소에 다녀오군 했다는 신랑은 색시가 힘들세라 크고작은 일들을 다 배려해주고 주방일도 곧잘 거들어준다. 성격 또한 시원시원하고 유모아적이여서 색시가 어쩌다 불유쾌한 일이 있어 바가지를 긁거나 투정을 부려도 우스개로 마음을 풀어주기에 지금까지 얼굴을 붉혀본적이 단 한번도 없다고 한다.

개체업에 종사하는 신랑은 색시의 사업도 많이 지지해주고있다. 새로운 노래를 부르게 되면 먼저 록음해오게 해서는 자기가 반복적으로 들어보고 의견을 제기해주고 텔레비죤에서 색시가 출연하는 프로를 방송할 때면 재방송까지 빼놓지 않고 다 시청하고나서 종합적인 평가를 해주고 또 복장이 다른 배우들보다 짝지는것 같으면 당금 새로 한벌 장만하라는 부탁도 잊지 않는다.

전번에 《3.8》절 야회에 출연할 때 선희는 만삭의 몸으로 무대에 나서기가 쑥스러워 주저심이 들었다. 그때에도 신랑은 할수만 있다면 왜 사양하느냐고 하면서 힘을 안겨주었고 야회를 통해 자기까지 “인물자랑”을 하게 되자 가수색시덕분에 “명배우”로 되였다고 우스개를 했다.

예술을 무척 좋아하는 신랑은 아들을 꼭 예술가로 키우고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단 하나는 너무 적으니 적어도 둘을 낳아야 한다고 지금부터 은근히 색시한테 “부담”을 준다.

맺는말

3월 8일 텔레비죤에서의 모습보다 원기를 많이 회복한 김선희가수는 산후휴가가 끝나는대로 출근하여 무대에 오를 타산, 그전에도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고 또 앞으로 가수, 엄마, 안해의 직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겠다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원제:북한에 최초 합영회사 세운 천용수 코스트 그룹 회장 ] “프락치 몰리고, 400만달러 날렸어도 13년 대북사업은 무형의 흑자” -경쟁은 한국인끼리 했나요. “아닙니다. 그 사업은 주로 이탈리아 계 이민자들이 했습니다. 다만 이탈리아 출신 사장 밑에 한국인 영업사원이 한 분 있었는데 그분이 무척 고전했지요. 나중...
  • 2005-11-23
  • 연해주 고려인 중 최고 갑부 텐 알렉산드르 연해주 우수리스크시에서 건설업과 유통업 등 10여 개 기업을 운영해 고려인 중 최고 갑부로 이름난 텐 알렉산드르 하리또노비치(한국명 정일) 연해주 고려인 재생기금 회장. ⑥연해주 고려인 중 최고 갑부 텐 알렉산드르 (우수리스크=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텐 알렉산드르 하...
  • 2005-11-23
  • [원제: 힘들지만 보람있는 삶 엮는다] 1급지체장애인 리광수 고선옥부부 자식 위해 리광수(46살), 고선옥(38살) 부부는 1급지체장애인이라는 아픔속에서 남편은 안해의 눈이 되여 주고 안해는 남편의 다리가 되여주면서 자식을 밝게 키워 미담을 엮고있다. 멀리 흑룡강에서 혈혈단신으로 연변에 시집온 리의경학생(화룡시 3...
  • 2005-11-23
  • 미국의 국제교육연구소가 미국내 전 대학의 외국인학생과 미국출신으로 해외에서 공부하고있는 학생들 현황을 종합해 일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 류학중인 조선국적의 학생은 2004~2005학기에 총 219명을 기록, 2003~2004학기(174명)보다 25.6%가 증가됐다. 2001~2002학기에는 113명이였다. 조선국적의 미국류학...
  • 2005-11-22
  • 《인젠 손뗄수 없어요》 장백현에 거주하고있는 올해 57세나는 한족 퇴직로동자 장집림은 지난해부터 조선어를 자습하기 시작, 신문을 읽을수 있고 간단한 조선어를 한어로 번역할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장집림은 퇴직한후 마작놀이나 트럼프놀이보다는 뭔가 의의있는 일을 찾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끝에 그는 장백...
  • 2005-11-22
  • [원제:북한에 최초 합영회사 세운 천용수 코스트 그룹 회장 ] “프락치 몰리고, 400만달러 날렸어도 13년 대북사업은 무형의 흑자” 북한 ‘삼흥코스트 그룹’의 노동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천용수 회장. 그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1992년, 북한에서 만난 일본의 유력 일간지 기자와 대북사업에 관해 인터뷰했다가 ...
  • 2005-11-22
  • 우수리스크시 최연소 의원 발레리 강 지난해 26세의 나이로 우수리스크시 시의원에 당선된 발레리 강. 1978년생인  그는 고려인 중 최연소 시의원이고 25명의 시의원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다. 시의원으로 당선되기 전 미하일로프군 군수에 출마했다 낙선했던 강 의원은 "역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정치를 한...
  • 2005-11-22
  • 프랑스 유학을 떠나다 1929년 여름 한낙연은 몇 년 만에 상하이에 도착한다. 하지만 상하이는 예전의 활력에 넘치는 도시가 아니었다. 상하이에서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이미 지하로 숨어들어 은밀하게 활동하던 당의 재정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그로서는 더 막중한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만나기로...
  • 2005-11-22
  • [원제:북한에 최초 합영회사 세운 천용수 코스트 그룹 회장 ] “프락치 몰리고, 400만달러 날렸어도 13년 대북사업은 무형의 흑자” *1980년대 초, 제약회사 세일즈맨으로 승승장구하던 청년이 맨손으로 호주에 왔다. 챙겨주는 이 없는 남의 나라에서 23년 만에 12개 알짜 기업을 일궜다. 한순간도 조국을 잊지 못한 사내는...
  • 2005-11-21
  • 리완빈부자 도보로 홍군의 장정코스를 다녀와 제2차국내혁명전쟁시기 제5차반포위토벌전역에서 실패한 중국로농홍군은 1934년 10월부터 1936년 10월까지 남방근거지로부터 섬북근거지에로의 전략적 전이를 하게 된다. 당시 세상을 놀래웠던 이 장거가 바로 그 유명한 2만 5천리 장정이다. 새 중국이 창건된후 특히 개혁개방...
  • 2005-11-2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