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로디안카[우크라이나]=연합뉴스) 현혜란 특파원 = 맨홀 뚜껑이 날아가 군데군데 난 도로의 구멍을 피해 지그재그로 달리던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탄내 섞인 악취 때문이었다. 초여름 날씨에도 창문을 열지 말라고 했던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3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진격하면서 휩쓸어버린 소도시 보로디안카는 처음 맡아보는 악취로 방문자를 맞았다.
석 달 전 도시를 휘감았을 화약냄새는 이제 가셨지만 폐허가 된 도시엔 악취가 진동했다. 도시로 진입하는 주 도로의 양쪽에 늘어선 건물 중 성한 것은 거의 없었다.
멀리서 봤을 땐 아파트 두 개 동이 서 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가까워지면서 원래는 한 동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석 달 전 러시아군의 미사일에 직격으로 맞아 두 동강 난 9층짜리 아파트는 곧 허물어질 듯한 몸체로 끔찍했던 전란의 악몽을 현실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아파트 근처에서 만난 알렉산드르(59) 씨도 이 아파트 7층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아파트가 폭격을 맞은 뒤 오갈 데가 없어져 현재 임시 시설에 사는 그는 인근 텃밭에 난 잡초를 뽑으러 왔다가 인터뷰에 응했다.
그가 거처하는 임시 시설은 '모듈 주택'이라고 부르는 데 밖에서 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했다.
아내, 아들과 함께 살던 아파트가 반쪽으로 쪼개진 것은 지난 3월 2일이었다.
알렉산드르 씨는 당시 50여㎞ 떨어진 수도 키이우시에 있는 직장에서 일하다가 폭격 소식을 들었다.
집에 있던 아내와 아들은 귀를 찢는 듯한 공습경보에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아파트를 황급히 빠져나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아내와 아들이 탈출하고 나서 5분 뒤 미사일이 아파트에 내리꽂혔다. 러시아군의 미사일은 표적이 민간인인지를 가리지 않았던 셈이다.
"우리 가족은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그날 폭격으로 같은 아파트에 15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미사일 한 방으로 파괴됐고 알렉산드르 씨의 평범한 일상도 폭격을 맞았다.
상대적으로 폭격 피해가 적었던 2층에서는 그나마 온전하게 남은 세간살이를 챙겨가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2층에 살았던 주민은 우크라이나군에 복무하는 군인이었다.
그는 "2020년 새롭게 리모델링을 하면서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했는데 이제 모두 물거품이 됐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쓸만한 살림을 챙겨갈 요량으로 집에 들렀으나, 남은 게 많지 않아 그가 가져온 1.5t 트럭은 거의 텅 빈 채로 돌아가야 했다.
그의 옆집은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창문 유리, 거울 파편과 그릇이 부서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당시 폭격과 폭발의 충격으로 냉장고에서 튀어나온 음식이 여기저기 흩어져 썩어가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파리떼만 제 세상을 만난 듯 들끓었다.
바닥에 쌓여있는 물건들은 분명 저마다 다른 색깔이 있었을 텐데 벽이 무너지면서 쏟아진 흙먼지 탓에 모든 것이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보로디안카에서는 철거 밖에는 도무지 답이 없는 아파트들 말고도 러시아군이 새긴 침략의 상흔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경찰서는 일부러 불을 지른 듯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부서진 구청 청사는 러시아군이 자신들을 상징하는 검은 '브이'(V)자를 사방에 써놨다.
주차장에는 창문이 모두 날아가고 차체가 몹시 찌그지고 타버려 더는 쓸 수 없는 차가 여러 대 버려져 있었다. 공원에 세워진 우크라이나 민족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시인 타라스 셰우첸코 흉상의 이마 부분엔 총탄이 박혀있었다. 러시아군은 분명히 이 흉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서 총알을 박았으리라.
키이우를 출발해 1시간을 달리면 도착하는 이 마을은 동서로 4㎞, 남북으로는 2㎞ 정도 넓이로 이 안에 거의 모든 시설이 모여 있다.
인구 1만3천명이 살던 자그마한 도시는 지난 3월 한 달가량 러시아군에 점령당하다가 이들이 퇴각한 4월 초 처참했던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다.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주민이 집단으로 살해된 인근 부차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집단 학살'이 벌어졌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 우크라이나 당국이 조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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