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던 작품, 하성란의 <곰팡이꽃>에는 쓰레기로 타인을 인식하는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단 한 동뿐인, 모두 90세대가 들어선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주기별로 이웃들이 버린 쓰레기 봉투를 주워와 자신의 욕조 안에서 뜯어본다. 남자는 생각한다. ‘버린 쓰레기봉투가 다시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그러나 이 남자는 봉투를 풀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정보를 찾아내는 중이다. 쓰레기 속에 고무장갑 한 짝이 있으면 색깔과 상표, 그리고 왼쪽인지 오른쪽인지까지 상세하게 기록하는 식이다. 얼마 후에 다른 쓰레기봉투에서 똑같은 색상과 상표의 다른 한 짝이 발견된다면 두 봉투가 한 집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옆집 여자가 궁금하다면 현관문의 우유투입구로 손을 넣어 겨자색 슬리퍼 한 짝을 빼내면 된다. 그 집에 한 짝만 남은 슬리퍼는 불필요할 테니, 언젠가 겨자색 슬리퍼의 다른 한 짝이 담긴 쓰레기봉투가 배출될 것이다. 그 겨자색 슬리퍼가 담긴 봉투는 물론 저 옆집 여자의 것이겠지. 그리고 그 쓰레기봉투 속에는 여자의 다른 정보들도 들어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는 타인에게 접근하는 기괴한 동선이 담겨 있어서 충격적이었다. 이 남자가 누군가를 알아가는 방법이 겨우 쓰레기였다는 사실이 슬펐고, 누군가의 흔적을 집요하게 수집하고 기록하고 그것으로 추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섬뜩했다. 그것이 설령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고, 거기서 얻은 정보가 꼭 진실이 아닐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최악의 경우 살인을 부르는 중대범죄
명확히 따져보면 이 남자는 스토커가 아니다. 어떤 행위를 스토킹으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판단이 기준이 되는데, 누가 자신의 쓰레기를 뒤진다는 사실을 이웃들은 몰랐으니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셈이다. 만약 그가 쓰레기를 통해 얻은 정보로 이웃 중 한 사람의 동선을 파악해서 계속 따라 다닌다든지 했다면 스토킹에 해당된다. 그래서 누군가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남자에게 두려움을 느낀다면 말이다. 아니면 이 남자가 쓰레기봉투 속에서 얻은 개인정보로 누군가에게 협박전화나 문자, 이메일을 보내는 경우도 스토킹에 해당된다.
애꿎은 소설 속 남자를 의심하는 건 그만하기로 하자. 그는 어떤 행동도 취한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도 왜 나는 그 남자를 스토커처럼 느끼는가? 그건 이웃들은 그의 행동을 모르지만 독자인 나는 그의 행동을 낱낱이 읽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버린 쓰레기봉투를 주운 남자가 내용물을 꼼꼼히 분석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래서 나에 대해 하나씩 알아간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소설 속 인물을 스토커로 고발하는 독자가 있던가? 결론은 이 작품이 15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섬뜩할 만큼 멋지다는 것뿐이다. 다만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자꾸 그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상상하게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그와는 별개의 상상으로 치자. 스토킹 말이다.
스토킹은 상대방이 싫다고 하는데도 정신적·신체적으로 집요하게 괴롭히는 행위를 뜻한다. 잦은 전화나 문자, 메일, 따라다니기 등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그것만으로 그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체로 스토킹은 협박·갈취·폭언·폭행·납치·강간 등을 동반하고 최악의 경우 살해를 부르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남자친구나 남편에게 살해되는 여성의 90%가 살해되기 전에 스토킹을 당했다는 보고도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한 해 동안 3일에 1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남자친구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건 단지 스토킹이 데이트관계일 경우만 집계한 것이니, 다른 유형까지 포함한다면 피해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지난해 5월, 서울의 20대 여성이 전 남자친구에게 스토킹을 당하다가 결국 그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 있었다. 이별 후 2년간 계속된 스토킹은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루에 200통의 전화나 문자를 하고, 따라다니거나, 빈집에 불쑥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결국 그녀는 스토킹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애인 사이의 단순한 말다툼이라 생각해 가해자를 돌려보냈고, 사건은 피해자의 죽음으로 끝났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가건물의 엘리베이터 통로로 밀어 추락사시켰다.
이어서 10월, 인천에서 50대 여성이 스토커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가해자는 동네 이웃이었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차량에 붙어있던 전화번호로 두 달간 집요하게 연락을 했다. 그러다 피해자가 자신을 스토커로 신고하자 살해했다. 화해, 협의하라고 주어진 3개월의 형사조정 기간 중에 벌어진 일이다. 11월에는 이별을 요구한 여자친구에게 유흥업소에서 일한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겠다고 협박하고 가족까지 위협하던 가해자가 결국 피해자를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이 사건들이 전부는 아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연간 18만 명 이상이 스토킹 피해를 경험한다. 여성가족부의 조사에서는 여성인구 1천 명당 21.4명이 113.1건의 피해(1명 당 4.71건)를 당했다고 한다. 삼성생명 사회정신건강연구소에서는 20∼30대 여성 1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여성 3명 중 1명이 스토킹 피해를 경험했다는 답이 나왔다.
조사기관이 어디인지, 누구를 대상으로 조사했는지에 따라 스토킹에 관한 응답은 다양하게 나오는데 어떤 결과를 보더라도(외국의 사례를 봐도) 공통적인 것은 남성피해자보다 여성피해자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박근영 심리학 박사는 그것이 단지 스토킹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스토킹은 폭력적 범죄의 한 형태이며, 폭력적 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여성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힘의 불균형 때문이지요. 가해와 피해는 힘의 관계를 반영하니까요.”
지금은 전국에 지부를 두고 있고 전화뿐 아니라 이메일이나 면접으로도 상담을 한다. 이곳에서 스토킹에 주목하게 된 건 2006년 부터다.
데이트폭력을 다루면서 그중에 스토킹피해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인데,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전화 성폭력상담소의 총 스토킹 상담은 611건이었다. 그건 매년 전체 상담 건수의 20%에 해당하는 수치다. 물론 실제수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3년 전 서울대 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스토킹 피해를 경험한 사람 중 경찰에 신고(5.4%)하거나 상담지원(2%)을 받은 경우는 합쳐서 10%도 되지 않았다. 신고하면 불이익을 당할까 두렵거나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그랬다는 답도 있었지만, 그게 스토킹인지 잘 몰랐다는 답도 적지 않았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 등 주변에 사실 알려야
연인이나 부부 등 데이트관계에서 발생한 스토킹의 경우 스토킹 사실을 인식하기란 더욱 어렵다. 가해자는 구애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여성의 전화에서 집계한 상담 사례를 보면 스토킹 피해 중에서는 데이트관계에서 시작된 것이 70% 정도로 가장 많았다. 이쯤 되니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이별이면 아름다운 이별이란 말이 나올 법도 하지 않은가. 물론 뉴스에 실리는 범죄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지만.
한때는 ‘안전한 이별’ 에 관한 지침이 떠돌기도 했다. 이별할 때 상대를 덜 자극하는 방법이 현명한 이별의 매뉴얼처럼 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이별’이란 노래 제목도 있건만, 이 지침이 말하는 건 단지 ‘안전한 이별’이었다. 그러나 이건 스토킹의 원인을 이별에서 찾는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 스토킹은 피해자가 통보한 이별 때문에 시작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데이트폭력과 연계된 스토킹이 발생할 때,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이 구애의 과정, 연애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스토킹은 연애의 일부분이 아니라 폭력의 형태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건 피해자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해요. 피해자가 단호한 태도로 대처해야 합니다.”
한국여성의전화 성폭력상담소 조재연 상담사의 말이다.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중요하다. 이별한 상대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요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법도 있지만(단둘이 만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전화번호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의사를 표시할 수 있다.
이 정도 행동을 취했을 때 상황이 정리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가해자의 가족이나 친구, 동료 등 주변인에게 이 사실을 알려 더 이상 우리 관계가 사적인 영역의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가해자에게 내용증명 등을 보내 서면상으로 의견을 전하는 경우도 많다.
전화상담 단계에서 상황이 종료되는 경우도 있지만 상황이 심각한 경우에는 면접상담과 법정대응 지원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전 남자친구가 성관계 영상을 갖고 있으니 다시 만나자고 협박을 하는 사례도 많은데, 이 경우 가해자가 성관계 영상을 어딘가에 유포하는 경우 법률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피해자가 원하는 것은 사건이 벌어진 후의 처벌이 아니지 않겠는가.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미리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이 미비한 것이 안타깝다.
20∼30대 여성의 피해실태와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50∼60대 여성의 피해율도 높다고 한다. 이혼·사별 혹은 여러 이유로 다른 남성과 교제 혹은 단순만남 이후 이별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남편이 스토킹 가해자가 되는 경우는 이혼 후, 혹은 가정폭력으로 인한 피신이나 협의이혼 과정에서 대다수 발견되는데 자녀가 스토킹의 핑계가 되는 경우도 많다. 가족이기 때문에 스‘ 토킹’이라는 용어조차 사용되지 않고 있다. 가해자가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증거가 충분해야만 ‘가정폭력사건’으로 처리된다.
디자이너 베르사체도 면식 없는 스토커에 살해돼
왜 가까운 사이에서 스토킹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는가. 박근영 박사는 세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가까울수록 가해자가 피해자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많고 접근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둘째, 친밀한 사이일수록 피해자는 가해자의 행위를 스토킹으로 판단하기 쉽지 않다. 셋째, 이미 그 관계 안에서 스토킹이 만성화되어 있어 피해자가 무력해졌기 때문이다.
이별 후에 스토킹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별 이전에도 스토킹 행동을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조재연 상담사 역시 “스토킹은 이미 연인이나 부부 등 데이트 관계 안에서 전조를 갖게 마련”이라고 한다. 통제하려고 하고, 폭력성향을 보인다든지, 감시하려 하는 경향 등이다. 피해자가 헤어지려고 시도하는 과정 중에 이것이 크게 드러나는 것뿐이다.
이혼소송을 준비하는 여성의 3분의 1이 미리 상대의 스토킹을 걱정한다는 보고도 있다. 8년째 이혼전문소송을 맡고 있는 김유주 변호사는 스토킹 가해자가 전 배우자라는 점 때문에 초기대응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쯤에서 그치겠지, 그만두겠지, 깨닫겠지 하다가 피해자는 더 피폐해진다. 물론 여성피해자뿐 아니라 남성피해자도 많다.
성별보다는 스토커 성향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의 성향에서 스토킹이 시작되고 피해 역시 성별보다는 대처방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잦은 전화연락과 따라다니기 그리고 전 배우자의 직장으로 찾아와 소동을 일으키는 등의 사례도 있다. 이 경우 이혼소송이 끝난 후에도 접근금지 가처분을 신청해서 안전망을 구축하고 있지만, 이미 받은 심리적 고통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여성가족부의 2010년 조사결과에 따르면 데이트관계보다 아는 사람(직장, 학교, 동호회, 이웃, 지인의 지인 등)에 의한 스토킹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경우 역시 호감 표현, 선물 보내기, 따라다니기, SNS를 통한 거짓소문 퍼뜨리기, 사실 여부와 달리 연애 중이라고 알리기 등의 형태로 시작되다가 그것이 거절되었을 경우 폭력적인 형태로 번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통계상 가장 비중은 낮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에 의한 스토킹도 있다. 비틀스의 존 레논이나 디자이너 베르사체는 스토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외에도 많은 유명인사가 스토커에 의해 살해되거나 위협을 느꼈다. 한국에서도 많은 스타가 스토킹 피해를 입은 가운데, 최근에는 EXO 멤버들이 흔히 ‘사생팬’으로 불리는 스토커 때문에 가족의 결혼식에 피해를 입거나, 화장실을 갈 때도 교대로 간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다.
박근영 박사는 <심야의 FM>이라는 영화를 예로 들었다. 심야 라디오방송을 진행하는 고선영(수애)와 연쇄살인범 한동수(유지태)의 관계에 주목해보자. 체포된 적이 있고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한동수는 DJ 고선영의 스토커다. 그의 일상은 고선영의 사진과 방송 녹화 테이프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고선영이 ‘연쇄살인범’ 에 관한 이야기는 방송에서조차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자 한동수는 분노한다. 게다가 고선영이 고별방송을 하게 되자 배신감을 느낀다. 결국 한동수는 마지막 방송시간에 고선영을 대상으로 한 범행을 저지른다.
“이 경우 역시 유명인 스토킹의 사례에 해당됩니다. 유명인 스토킹은 관계지향적 스토킹의 전형적인 예인데, 여기서 관계라는 건 실제가 아니라 착각이에요. 유명인을 스토킹함으로써 그들과 관계가 형성되었다고 믿는 것뿐이죠. 실제 관계는 가해와 피해라는 스토킹 과정이지요.”
유명인사가 아니더라도 전혀 모르는 이에 이한 스토킹은 발생한다. 애인 행세를 하며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거나, 타인이 가정사를 폭로하겠다며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지속적으로 전화하는 경우도 있다. 스토커가 상담을 받기 위해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스토커는 정신과로 오지 않고 경찰서로 (타의에 의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간혹 가해자 입장에서 심리 상담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주로 경로가 이메일인데, 스토킹과 성폭력에 관해서는 철저히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답변을 한다. 그 메일의 진정성을 파악하기 힘들고, 또 상담자의 2차 피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지난해 피해자의 요청에 의해 가해-피해 관계의 두 사람이 함께 상담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데이트관계였고 그런 요청을 한 것을 보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최대한 이해할 기회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좋은 결과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피해자는 혼란스러워했다.
스토킹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대화를 통해, 혹은 어떤 상담프로그램을 통해 스토킹 행위를 치료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많은 피해자가 초기에 가해자를 말로 설득해서 해결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게 정말 가능할까? 수많은 상담과 연구를 한 심리학자에게 묻고 싶었다. 누구나 다 스토커가 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그러니까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대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박근영 박사의 대답은 명확했다. 누구나 스토킹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스토킹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을 수는 있겠지요. 그렇지만 모두가 그걸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분노를 만나면 누군가를 때리거나 해하고 싶은 생각을 품을 수도 있지만 그걸 진짜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다른 문제예요. 스토커와 스토커가 아닌 사람 사이에는 정확한 차이의 임계점이 있습니다. 행동이죠.”
방치는 곧 허락하는 것과 마찬가지
그의 저서 『왜 나는 늘 눈치를 보는 걸까』에는 마음읽기 오류에 대한 언급이 있다. 스토커는 그 마음읽기 오류의 폭 넓은 스펙트럼으로 볼 때 가장 병적이고 악질적인 경우에 해당된다고 했다. 스토커는 상대를 사람이 아니라 자기 소유의 물체처럼 인식해서 조종하고 통제하려 하고, 상대의 고통에는 무감하다.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타인의 권리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침해하는데 어떤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간혹 스토킹을 경계성 성격장애로 규정하는 시선도 있지만, 박근영 박사는 스토킹은 경계성 성격장애와는 분명히 다르며, 망상장애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자기파괴적인 성격을 보인다면 망상장애는 타인에 공격적인 성격을 보인다. “만나주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고 말하거나, 이별을 통보받은 후 자해를 시도하는 것이 경계성 성격장애라면 “만나주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고 말하며 상대방을 파괴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망상장애다.
망상장애는 망상의 영역만 빼고 나머지는 정상이다. 단지 현실과 망상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스토킹은 망상장애 중에서도 애정형(erotomanic type)에 속한다. 경계성 성격장애는 상담이 필요하지만 망상장애는 상담보다도 처벌과 교정이 필요한 경우다. 약물로 치료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그 효과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미 스토커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삶의 동선 안에서 피해가는 것만이 해결책일까? 스토커를 육안으로 판별하는 게 가 능하단 말인가?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예방과 교정의 힘이다. 어떤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모두 발현되고 표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터지고 말시한폭탄 같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범죄에 있어서 방치한다는 것은 곧 허락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회는 여전히 스토킹에 대해서 관대합니다. 사회에서 스토킹에 대해 강력하게 처벌하면 그것이 무서운 범죄라는 인식이 퍼지고, 스토커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길 가능성이 줄어들겠지요.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심지어 스토킹 피해자보다 가해자를 더 동정하는 경우도 있어요.”
박근영 박사는 몇 가지, 익숙하지만 위험한 말들을 예로 들었다.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따라다닐까, 어지간하면 잘해보지 그래,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그렇게 도도하게 구느냐, 두 사람간의 문제니 두 사람이 잘 해결해보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여자가 처신을 어떻게 했길래 그래… 이런 말들이 스토킹 행위를 애정공세로 넘겨 관대하게 만든다. 만 7세 이전의 어린아이들에게 하는 말도 조심해야 한다. 싫다는 여자아이를 계속 쫓아다니는 남자아이에게 남자답다거나 박력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이 사회에 잘못된 무의식을 자라게 한다.
여성폭력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이 필요
스토킹이 지나간 자리, 남은 것은 피해자의 황폐해진 삶뿐이다. 대인기피증, 우울증, 불면증 등과 마주해야 하며, 상담만으로는 힘들어 약물을 투여해야 할 경우도 있다. 피해자의 65%는 스토킹 가해자에게 보복할 생각을 가졌고 25%는 자살을 시도하려 했다. 피해자가 결국 스토킹 가해자를 살해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그럼 가해자에겐 무엇이 남는가. 현재 스토킹은 경범죄 처벌법의 ‘지속적 괴롭힘’으로 처벌이 가능한데, 피해자의 두려움과 공포에 비해 처벌은 벌금 8만 원에 불과하다. 암표매매에 따른 벌금이 16만 원, 노상방뇨나 쓰레기투기가 최대 5만원인 것과 비교해보면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일뿐더러 단지 벌금형으로 스토킹 처벌이 충분한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않을 수 없다. 물론 범죄 양태에 따라 협박죄, 폭행죄, 명예훼손죄, 주거침입죄, 통신매체이용음란죄 등의 법률을 적용해 볼 수 있으나, 증거가 없으면 적용하기 힘들다.
이에 한국여성의전화에서는 지난해 12월 19일에 스토킹범죄 처벌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국회에는 현재 이낙연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스토킹 처벌 및 피해자 보호에 관한 법률안’과 김제남 정의당 의원이 발의한 ‘스토킹방지법’이 계류 중이다. 스토킹 법안이 전무한 상황에서 큰 노력들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조차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계류 중인 법안은 처벌기능이 거의 무력화된 가정폭력 방지법을 모태로 하고 있어서 스토킹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기에는 역부족이기도 하다. 신상희 인권정책팀장은 “스토킹범죄 처벌법은 기존 법률들의 한계를 넘어 여성폭력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토킹은 원래 맹수류와 같은 포식자가 목표물을 사냥하기 위해 접근하는 행위를 의미했다. 어쩌면 스토커들은 여전히 그런 포식자의 입장에 머물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포식-피식 관계가 성립할 수 있겠는가. 망상일 뿐이다. 단지 방치하기에는 위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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