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년에 이런 책을 서너권 읽으면 되오”
103세 할머니의 인생 스토리
필자는 올 3.8절을 맞아 100세 시대의 실존인물로 103세 고령의 할머니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하여 기획하고 부탁했던 “李南祚 어머님百岁上寿宴”록화테프를 일전에 연변대학 김화림교수를 만나 교대받고 시청한후 3월의 첫날에 연길에 가서 리남조할머니를 방문 하였다.
리남조할머니는 지난 60년대에 도문서 나의 큰 누님(오계옥)과 길을 사이두고 가깝게 지낸 이웃이고 할머니의 둘째 딸과 나는 도문중학교 동반동창이며 또 할머니는 나의 글을 빼놓지 않는다는 독자팬이다..
그런데 어제밤에 만난 동영상에서 백세 할머니가 가슴팍을 쭉 펴고 두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다시 허리를 굽혀 두손으로 땅을 짚는 운동을 련속하던 씩씩한 할머니가 8개월전에 “
락상(落傷)”사고로 다리뼈가 절골되여 대수술을 받았다니 실로 “병이 눈섭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맞는 말이였다.
오전 10시경, 나를 만난 할머니는 그렇게도 기뻐하였다.
나의 손을 잡고 “오기자가 온다더니 정말 왔구만...” 을 시작으로 “오계옥이 무사하오?”, “지금 하는 일은 잘 되오?”, “올해에 몇살이던가, 이른 여섯이라, 한참 젊은 나이니 얼마 좋소”...며 서로간 무릎말을 련속주고 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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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간의 수인사를 끝낸후 내가 “ 3.8절 기념으로 103세 리할머니에게 100세 할아버지를 소개합니다”며 연변농학원 김수철교수의 자서전을 드렸더니 책을 받자마자 책장을 펼쳐보며 “일년에 이런책을 서너권만 읽으면 되오” 하며 김교수의 최근의 건강상황을 물으시며 그렇게도 기뻐하셨다.
리남조할머니의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는 유명한 반일독립투사이다.
연변대학 인문학원 손춘일 교수에 따르면 리남조의 할아버지 리수원은 1874년 12월 30일에 한국경상북도 려천군 무아리에서 리동락의 독자로 태여나 1913년 까지 동네 서당에서 훈장으로 지내면서 반일시(反日诗)를 썼다는 리유로 일본 경찰서의 체포령이 내리자 바로 이튿날에 가족을 데리고 조선으 떠나 당년에 조선인 반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불리는 중국 통화시 삼원포(지금의 류하현)에 정착하였다.
리수원은 1914년부터 1924년까지 사이에 사비를 팔아 길림성류하현, 흑롱강성 녕안현 밀강촌과 동경성진에 각각 학교를 꾸리고 직접 교장직을 맡았다.
그가 꾸린 3개 학교는 중국에 이주온 조선인 자녀들의 문화교육을 목적으로 반일 독립운동 후비인재 양성을 하였다.
리수원은 이 학교를 발판으로 독립군 전문양성기지인 “신흥무관학교”에 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추천하였다.
한국 대종교 교주이며 독립운동가인 윤세복이 1911년에 중국에 와서 학교, 교당, 독립단, 포수단을 설립하고 반일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리수원도 그를 협조해 녕안현 동경성의 “협창학교”와 녕안현의 “대종교”를 합병해 중국 반일단체인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반일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그때 리남조가 몇년간 대종학원에 다녔다).
그리고 리남조의 아버지 리대성(李大成)은 중국공산당 목단강지역의 지하조직 무장병워원으로 1913년에 부친과 함께 중국에 오자부터 반일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리대성은 중국공산당 지하당조직인 “녕안현 무장병위원”을 맡고 동북항일련군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다가 1945년 8월 8일에 동경성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여 갖은 고문을 당하고 8월 19일에 총살되였다.
리남조의 언니 리근숙(李根淑)은 어려서부터 혁명가문의 영향으로 혁명에 참가하여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2년부터 동북항일련군의 선전부장 겸 부녀주임사업을 맡았고 1936년에 쏘련에 파견되여 모스크바대학에서 3년간 공부하고 1939년에 귀국한후 녕안형 동경성에서 지하공작을 하다가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되여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1941년 4월에 녕안현 사랄진에서 일분군에게 총살되였다.
이렇게 3대가 반일독립혁명렬사가정에서 자란 리남조는 일곱 남자오빠들이 반일운동으로 밖에서 돌다보니 10살부터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였다.
결혼후 리남조는 중년에 남편을 잃고 혼자서 2남 6녀자식들의 뒤바라지를 담당하여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교수를 5명을 산출한 위대한 어머니며 자랑스러운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기억력이 좋고 한글(汉字)과 한어에 거의 막힘이 없는 “현대식할머니”로 딸집에 놀려 다녀도 당신이 읽을 책과 신문잡지를 꼭 챙긴다고 한다.
지금 그의 가족은 5대에 53명이 중국, 한국, 미국, 오스트랄리아 등 5개 국에서 살고 있다.
이날 할머니와의 2시간 남짓한 무릎마중에서 필자는 103세 고령할머니의 기억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저 지난번에 올렸던 화제를 재문하였는데 화답이 그렇게도 여전하고 확실하였다.
이하는 간추린 인터뷰채록이다.
언제 중국에 왔습두?
증조할아버지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에서 백년 전에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단동, 심양, 해림에서 살다가 흑룡강성 동경성에 정착했다.
나는 1920년 9월 3일 심양서 출생했다.
문화정도는?
할아버지게서 한글(韓文)과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꾸린 6년제학교에서 4년간 공부했다.
결혼은?
혼령이 되자 아버지의 주선으로 당시 목당강 동경성에서 행정대서(行政代书)로 지내는 김석주의 큰아들인 김병훈씨와 결혼하고 2남6녀를 낳았다. 남편은 당년에 심양동문상업학교(奉天同文商业学校)를 졸업하고 목당강 경박호(镜泊湖)발전회사에서 근하였다.
건강비결은?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준다. 40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건강운동을 만들어 지금까지 견지했다.
이제도 몇년을 자신함두?
운동원마냥 건강하지는 않지만 제대로 먹으니 아직도 몇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잘한 일이 있다면?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반성되는 일이 있다면?
. 늘 “예, 예”하면서 살았기에 마음으로 가책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아쉬운 일이 있다면?
그렇게도 가난하게 살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나도 간고하게 산 것이 지금 생각하면 좀 후회된다. 그밖에 내가 글을 쓸만할 때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정말 아싑다.
자식들게 요구가 있다면?
아무런 요구도 없다.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 ...
인터뷰는 할머니의 “아리랑”노래로 마무리를 하였다.
인터뷰시 할머니는 " 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언니 (이근숙)가 시키는 대로 어디에 가서 누구에게 글쪽지도 전달했고 또 마을의 소년들을 데리고 일본경찰서 부근에 가서 말이 몇필이 있는가를 알아 보라는 등 여러가지 심부름도 탈없이 잘했다"며 가끔씩 김좌진, 윤세복, 주보중, 김창렬(김좌진의 아들),... 리정문...의 이름을 곁들면서 손시늉까지 하었다.
이밖에도 할머니는 스스로 “백세수연례”사진첩을 찾아내 필자에게 보이면서 “아이들이 돈을 팔았지만 참 잘했다.”며 “돈은 쓸줄을 알아야 한다”며 기뻐 하였다.
이날 자리를 함께한 네째 딸(김설희)의 말참견이다.
ㅡ “자식으로 후회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 집에서 건강이 제일 좋다며 늘 자랑하던 엄마가 사고를 당하니 큰죄를 졌다는 마음입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엄마가 돌아갈가봐 운 것이 아니라 돌이켜 생각할수록 잘못이 많아서 울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걷게 해 달라”고 말씀할 때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2 일 전에 엄마가 종래로 안하시던 말씀을 하는데... 엄마는 나와 사위를 곁들면서 “너희들이 가족을 이끌고 친척간의 화목을 도모했고 또 자식교양을 잘해서 정말 감사하다...”고.
나는 엄마가 돌아가기 전에 남기는 말인가고 두럽고 잡생각이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엄마이 이한 말씀에 내가 네째 딸로 아무런 대가도 없이 20 여년을 엄마를 모시며 쌓였던 유감들이 몽땅 풀렸습니다...”
***
리남조네 가족사는 중국 조선족 100년 이주사의 축소판으로 리남조 할머니는 조선족100년 사의 당당한 견증인으로 손색이 업었다.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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