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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3] 8.1남창봉기와 우리 겨레들
2017년 03월 01일 16시 25분  조회:1059  추천:0  작성자: 리함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3)

■ 리 함

1

2009년 7월 9일 여름방학 시간을 타서 대학에 다니는 쌍둥이 큰딸애 설이와 함께 강서 남창 도심의 8.1남창봉기기념관을 찾았다. 때는 오전 9시경. 8.1남창봉기기념관은 남창시 중산로 380번지에 위치하고있었다. 남창봉기기념관 정문에 들어서니 1983년 5월 처음 찾았을 때와 많이 다른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기념관 주체건물 전체가 참신한 모습으로 안겨들었다면 기념관 정문 오른쪽에 보이는 8.1남창봉기 군인형상 동상군체와 일대영웅호걸로 불리우는 주은래, 주덕, 하룡, 엽정 등 립체동상도 그지없이 돋보였다. 1983년 그 시절엔 볼수 없은 최근년간의 산물이였으니 근 30년 세월속 거대한 변화를 알것 같았다.

4층 주체건물(중심부 건물은 5층)을 이루는 웅위로운 기념관내에 들어서니 련속 펼쳐지는 봉기 관련 많은 력사사진 전시와 설명도 완연 달랐다. 동북의 연변사람인 나에겐 동북항일련군의 “8녀투강” 모습을 형상화한 왕성렬(王盛烈)의 1957년 작품-대형국화가 그토록 친근하게 안겨들었으니 동북사람의 감정은 속일수가 없었다. 8녀투강중의 주요인물인 안순복과 또 하나의 녀전사 리봉선은 조선족이여서 그 감정이 보다 짙은가부다.

남창봉기기념관에서 겨레의 북벌전쟁렬사 김준섭 관련 사진전시와 렬사의 유물을 선참 주의하여 살피였다. 그런데 기념관을 마지막까지 돌아보아도 김준섭 그림자도 찾아볼수 없었다. 이어 남창봉기 유적지들을 찾아보다가 강서혁명렬사기념당에서 김준섭렬사 사진 전시와 유물을 찾게 되여 감개가 무량하였다.

강서 남창에 있는“강서혁명렬사기념당” 정면 모습. 김준섭렬사의 사진자료와 유물이 이곳에 전시되여있다.

강서혁명렬사기념당은 남창 8.1대도(大道) 399번지에 위치하였다. 기념당의 한 자리에 조선인 북벌전쟁 렬사인 김준섭의 략력과 북벌군 추모대회 사진, 희생된 자리인 악화역(乐化车站)사진, 렬사의 회중시계(怀表)가 전시되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1983년 남창봉기기념관을 찾았을 땐 김준섭렬사 추도대회 사진과 회중시계 등이 8.1남창봉기기념관내에 진렬되였더니만 2009년 현재는 강서혁명렬사기념당내에 진렬되여있었다.

알고보면 김준섭은 양림 등과 더불어 황포군관학교 시절 중공당원들이였다. 김준섭은 함경북도 명청군 사람으로서 일명 강화일로 불리웠다. 그는 그 시절 쏘련의 한 군관학교 기관총전문과를 졸업하고 광주로 갔는데 국민혁명군에서는 그를 제6군 제55퇀 기관총련의 소좌교관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제6군에서는 광동성 혜양현에 기관총훈련반을 꾸리고 각 기관총련의 련장, 패장, 반장들을 훈련시켰는데 김준섭이 교관이였다.

2

1926년 5월 20일, 중국공산당은 국민정부를 통하여 우리 당의 직접적인 령도밑에 있는 국민혁명군 제4군 엽정독립퇀을 북벌군의 선견대로 삼아 우선 호남에 진격하게 함으로써 북벌전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7월 1일에 국민정부는 우리 당의 영향력과 추동밑에 “북벌선언”을 발표하였으니 7월 9일에 8개 군의 약 10만명이나 되는 국민혁명군은 서로, 중로, 동로 세갈래로 나뉘여 정식으로 북벌을 시작하였다. 그때 황포군관학교에는 200여명의 조선인 학생이 있었는데 각 군의 장령들은 저마다 조선인들을 자기 부대에 끌어들이려 하였다. 결국 대부분은 제4군에 편입되고 일부가 각기 주배덕의 제3군, 정잠의 제6군, 당생지의 제8군에 편입되였다.

서로 북벌군은 대부분 조선인들이 들어있는 제4군을 주력으로 삼고 엽정독립퇀을 선봉으로 하여 호남, 호북으로 진군하였다. 서로북벌군은 장사, 악양을 공략하고 8월 26일에는 정사교를 공격하였다.

정사교는 무한삼진의 남대문이다. 3면이 물에 둘러싸이고 한면은 험요한 산을 끼고있어 방어하기 좋고 진공하기 어려운 군사요새지였다. 정사교를 탈취하는것은 북벌군의 승리를 결정하는 관건적인 전역이였다. 오패부는 여기에다 2만여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북벌군은 련속 몇차례의 공격을 들이댔지만 살상자를 냈을뿐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서로군 총지휘부에서는 총예비대로 두었던 김준섭 소속부대를 엽정독립퇀과 함께 정사교를 공격하게 하였다.

김준섭은 기관총련을 지휘하여 밀집사격으로 적의 화구를 봉쇄하였다. 엽정독립퇀은 이 틈을 타서 우익공격을 맹렬히 들이댔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정사교는 마침내 북벌군에게 함락되였다. 이어 무한삼진도 함락되였다. 김준섭 기관총련이 엽정독립퇀과 배합작전을 잘한것으로 하여 김준섭은 부대의 표창을 받았다. 그후 김준섭 소속부대는 서로를 떠나 남창으로 진군하였다.

강서혁명렬사기념당내에 전시된 김준섭 등을 추모하는 대회의 사진

중로북벌군은 광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손전방세력을 소멸하는것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강서를 진공하였다. 이 북벌군에는 공산당원 리부춘, 림백거가 령도하는 제2군과 제6군이 있었는데 이 두 개 군도 역시 북벌군가운데서 전투력이 보다 강한 부대였다.

11월초에 북벌군은 치렬한 전투를 거쳐 구강을 점령하고 8일에는 남창을 공략하였다. 북벌군 제2군의 조선인 포병련장 강파는 남창보위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고 제6군의 조선인포병련장 리검운은 구강공격전에서 지휘를 잘했기에 포병영 영장으로 승급되였다. 이 영의 부영장 권준과 영부 부관 안동만도 조선인이였다.

제6군이 남창 악화역을 공격할 때 김준섭은 전우들과 함께 세정의 기관총으로 적의 화력을 제압하였다. 그는 진격로를 개척하려고 앞뒤로 뛰여다니며 지휘하다가 그만 복부에 중상을 입고 풀밭에 쓰러졌다.

“김교관! 김교관!”

전우들은 김준섭을 애타게 불렀다. 그 부름에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전우들을 둘러보며 “너무 슬퍼하지들 마오. 혁명은 피를 흘리기마련이요…”라고 말하고나서 영영 눈을 감았다.

제6군에서는 악화역을 함락하고 남창을 점령한후 김준섭의 추도회를 성대히 열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1983년까지만도 남창시 “8.1남창봉기기념관”에 김준섭렬사의 유물인 회중시계와 당년의 장례의식사진을 전시하였는데 후에는 조절을 거쳐 남창 8.1대도(大道) 399번지에 위치한 강서혁명렬사기념당에 옮겨져 우리 부녀간을 맞아주었다. 그러니 발걸음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3

2009년 7월 9일 그날, 필자는 딸애와 함께 8.1남창봉기관과 더불어 여러 전적지들인 8.1공원, 남창시제2중학교내 엽정지휘부 옛터, 남창시민족박물관에 자리한 하룡지휘부 옛터, 강서성가무극원내 전적지 옛터, 라가당로(罗家塘路) 82번지 천주교회당 전적지 옛터, 남호에 자리한 행화루(杏花楼) 전적지 옛터,주덕군관교육퇀 자리, 강서혁명렬사기념당을 차례로 현지답사하여 보았다. 현지답사의 중심은 의연히 8.1남창봉기기념관이였다.

기념관의 한 구간에 이르니 8.1남창봉기 참가자 명단 소개가 기념관내 길다란 한면을 차지하고있었다. 긴장과 흥분속에서 숨을 죽이며 명단 하나하나를 살펴가는데 어느 순간인가 양림(필사제)의 이름이 나타난다. 우리 겨레 양림이 남창봉기에 참가했다는 력사적 사실이 현실로 펼쳐지는 순간이여서 만세라도 부르고싶었다. 나와 딸애는 필사제로 나타나는 양림의 이름을 보며 이윽토록 떠날줄 몰랐다.

강서혁명렬사기념당내 김준섭렬사 관련 사진 전시앞에서

양림의 남창봉기 참가는 8.1남창봉기기념관에서 산 《남창봉기사화》에서도 증실되였다. 남창봉기사화는 력사편, 인물편, 기념편으로 엮어지면서 인물편 “남창봉기를 거쳐온이들”(他们从南昌起义走来)에서 남창봉기 참가자 2만여명중 현재 이름을 아는 참가자가 858명이라면서 그중 한 사람으로 필사제(양림)를 밝히고있었다. 《남창봉기사화》를 집필한 편집진이 남창봉기기념관 연구일군들이고 책도 2년전인 2007년 6월 출판으로 된 최신연구판이여서 믿음이 갔다. 일찍 1964년 중공길림성위 지방당사자료연구실에서 작성한 관련 연구자료에서도 양림(필사제)이 북벌전쟁과 남창봉기에 참가했다고 지적하고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연구와 연구물들을 통털어도 남창봉기에서의 양림의 모습을 알리는 그 어떤 자료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남창봉기에 참가한 조선동지들의 자료는 가담가담 보이여 위안을 주기도 한다.

흘러간 력사를 거스르면 1926년 7월에 정식으로 시작된 기세 드높은 북벌전쟁은 중국의 혁명세력을 주강류역으로부터 장강류역에로 발전시키지 않았던가. 혁명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고 전국이 희열과 흥분에 잠기였다. 바로 이러한 때 국민당내의 장개석과 왕정위집단은 1927년 4월 12일과 7월 15일에 선후로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원과 혁명군중에 대해 피비린 체포와 도살을 감행하였다. 중국의 절반땅을 휩쓴 북벌전쟁은 중도에서 실패되고말았다.

4

중국혁명은 칠성판에 올랐다. 중국공산당은 혁명을 만구하기 위하여 우리 당의 영향과 장악하에 있는 부분적 국민혁명군, 즉 북벌군으로 남창에서 무장봉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엽정이 지휘하는 제2방면군 제11군의 24사, 섭영진, 주사제 등이 지휘한 제4군 제25사, 하룡이 지휘하는 제20군은 우리 당이 장악한 무장력량이였다. 주덕이 령도한 제3군 군관교육퇀, 무창국민정부 경위퇀, 중앙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도 우리 당의 지도를 받았다. 상술한 병력은 3만여명으로 헤아려졌다. 그중 조선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들 모두가 북벌에 참가한 동지들이였다.

1927년 8월 1일 새벽 2시, 세방의 총소리가 이른새벽의 대기를 썰며 남창시를 들깨웠다. 몇발의 붉은 신호탄이 새벽하늘을 헤갈랐다. 엄밀히 대기하고있던 우리 봉기군은 주은래를 서기로 하는 중공전적위원회와 하룡, 엽정, 주덕, 류백승 등의 령도하에서 비호같이 적진으로 육박하였다. 엽정부대 제11군 24사는 적의 중요거점인 천주교회당과 광려중학교를 맹공격하였다. 이 부대 제 72퇀의 박인, 김철강 등 조선인전사들은 전우들과 함께 적 제3군 23퇀과 24퇀을 답새겼다.

8.1남창봉기기념관 정문 오른쪽에 세워진 “일대 영웅호걸” 동상.

여기 두 개 퇀은 적군 주력이였다. 헌데 간밤에 23퇀 퇀장과 24퇀 정, 부 퇀장 셋이 주덕이 베푼 “연회”에 끌려들었기에 지휘자를 잃었다. 적들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몽땅 들리였다. 화룡현 개산툰 정동학교 출신인 박인은 이 전투에서 무비의 용맹을 떨치였다. 적 제6군 57퇀이 봉기군의 진격로를 막아 나서자 봉기군 제24사 71퇀 3영은 인차 돌격대를 무어가지고 천주교회당의 대문을 짓부시며 들어갔다. 돌격대의 조선인 방월성은 전우들과 더불어 정면공격을 들이댔다. 다른 봉기군부대가 배후공격을 들이대자 적들은 투항하는수 밖에 없었다.

하룡부대 제20군은 적의 제5방면군 총지휘부를 들이쳤다. 적의 총지휘부는 봉기군 제20군 지휘부와 거리 하나를 사이두었는데 거리 서쪽에는 옛 성루가 솟아있었다.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 화력으로 성문을 봉쇄한데서 봉기군은 쉽사리 뚫고 나갈수 없었다. 하룡과 류백승은 몸소 전투를 지휘하였다. 20군의 조선인 전사 강석필, 홍범기, 김래준 등은 탄우속을 헤치며 성루에 뛰여올랐다. 높은 지세는 싸움에 유리했다. 분노의 총탄은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다. 적들은 더 배겨내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5

봉기군 제20군 교도퇀과 제6퇀은 적군 제9군 79퇀, 80퇀을 소멸할 과업을 맡았다. 8월 1일 새벽 이들은 적과 벽 하나를 사이두고 대기하고있다가 불의습격을 들이댔다. 적의 군영은 수라장을 이루었다. 적의 군영에 뛰여든 조선인 김래준 등은 적들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79퇀의 적들은 거개가 옷도 바로 입지 못하고 손을 들어야 했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 불과 4, 5시간만에 적 3000여명을 섬멸하고 남창시를 통제하였다. 봉기에 참가한 실제부대는 2만여명인데 그중 밝혀지는 조선인 전사가 수십명으로 헤아려진다. 제4군 교도퇀의 박영, 리용 등 200여명 조선인 전사들은 국민당 신군벌 장발규의 강박하에 부대와 함께 남하하였다가 광주봉기의 주력으로 되였다. 8월 2일 남창시 5만여명 군중들은 새로 창립된 혁명위원회의 지도밑에 성대한 집회를 가지고 남창봉기의 위대한 승리를 열광적으로 경축하였다.

8월 3일부터 6일까지 기간에 봉기군은 남창에서 물러나 광주로 남하하였다. 봉기군은 남하하는 도중 우세한 적들에게 포위되여 큰 손실을 당했다. 남창봉기에서 용맹을 떨쳤던 연길현 동불사사람 김철강, 훈춘현 대황구사람이고 룡정 은진중학교출신인 강석필, 왕청현 라자구사람 리범홍, 밀산현 사람 홍범기 등 조선인 전사들은 해륙풍지구전투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8.1남창봉기기념관 정면의 한 모습   /이상 사진 2009년 7월 9일 현지촬영

남창봉기는 국민당반동파에게 첫 총을 쏘았다. 남창봉기는 우리 당이 무장투쟁을 독립적으로 령도하기 시작하였다는것을 세상에 장엄히 선포하였다. 주덕, 진의가 거느린 일부 부대는 1928년 4월 정강산에 이르러 모택동이 령도하는 추수봉기부대와 합치여 로농홍군 제4군으로 편성되였다. 8월 1일은 후에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절로 되였다.

중국혁명사에 길이 빛날 남창봉기—이 봉기에는 양림-리추악 부부와 더불어 박인(화룡현), 김약산, 성준용, 김철강(연길현), 방월성, 강석필(훈춘현), 홍범기(밀산현), 김래준, 리범홍(왕청현), 김영준(동녕현), 방국성(녕안현), 김강(녕안현), 권상선(녕안현), 전승익(화룡현), 최관일(훈춘현) 등 수십명 조선인전사들이 참가하였으매 마음은 한없는 감격으로 높뛰기만 한다. 8.1남창봉기기념관측 자료부족으로 남창봉기 참가자 명단에 그들 이름이 보이지 않아도 좋았다. 양림 등은 8.1남창봉기에 참가한 조선민족의 영웅 아들들이 아니던가.

8.1남창봉기와 우리 겨레, 남창시 “8.1남창봉기기념관”과 강서혁명렬사기념당에 모셔진 양림과 김준섭렬사의 회중시계와 당년의 장례의식사진은 중국대륙에 일어선 또 하나의 남다른 조선동지 “기념비”였다.

2017년 2월 11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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