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스타였던 윤여정 리혼 후 생계 위해 단역도 안 가려
1971년 '화녀'로 데뷔...2016년 '박카스 할머니' 연기
백인 남성 위주의 오스카서 두번째 아시아인 배우상
25일(현지 시각) 아카데미 녀우조연상을 거머쥔 배우 윤여정의 삶은 '미나리'같이 억척스러웠다. 영화 미나리 속 순자(윤여정)의 대사처럼 미나리는 습하고 그늘진 곳이라면 어디서든 잘 자란다. 해충에도 강하다. 밥이나 국에 곁들이는 재료로 음식에 맛과 향을 더한다. 윤여정은 한때 톱스타였지만 리혼 후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조연은 물론 단역까지 닥치는대로 맡았다. 그늘에서 쌓은 연기력과 다양한 작품 경험은 윤여정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기회가 됐고, 한국 영화사 102년만에 오스카 트로피를 품에 안는 쾌거를 이뤘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한국 배우 최초로 녀우조연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이 트로피를 들고 영화 '미나리'의 제작사 '플랜B'의 설립자이자 할리우드 스타인 브래드 피트와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66년 열아홉의 나이로 TBC 3기 공채 탤런트가 된 그의 영화 데뷔작은 1971년 김기영 감독의 '화녀'였다. 단란한 중산층 가정을 파괴하는 하녀를 연기했다. 이듬해 곧바로 김기영의 '충녀'에 또다시 출연했다. 20대 신인 배우였던 윤여정이 한국영화의 거장과 영화 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윤여정은 데뷔작 '화녀'로 제4회 시체스 국제영화제 녀우주연상을 차지했다. 이날 윤여정은 수상 소감에서 "제 첫 영화의 감독이신 김기영 감독께서 살아계셨다면 이 수상 소식을 기뻐해주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배우 윤여정.
1974년 가수 조영남과 결혼한 동시에 윤여정은 배우 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결혼 생활 13년만에 맞은 파경은 그의 복귀에 큰 걸림돌이 됐다. 당시 리혼이 많지 않았던 데다 특히 '리혼한 녀성'은 TV에 나올 수 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는 귀국 후 박철수 감독의 '어미'(1985)로 스크린에 복귀했다. 인신매매단에 랍치된 뒤 돌아온 딸이 트라우마로 자살하자 범인에게 직접 복수하는 어머니 역을 맡았다. 면도칼과 가위 등 잔혹한 방법의 복수를 선보인 윤여정의 연기는 "지독하게 건조하면서도 특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90년대까지 주로 TV드라마에 출연했던 윤여정은 2000년대 들어 다시 영화에 출연했다. 2003년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은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굳힌 작품이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남편이 죽자마자 남자친구와 재혼을 선언하고 '나이든 엄마'가 아닌 한 녀성으로서 성적 즐거움과 주체성을 되찾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하녀'(2010), '돈의 맛'(2012) 등에 연달아 출연했다. 두 영화 모두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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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은 그외 '하하하'(2010), '다른 나라에서'(2011), '자유의 언덕'(2014),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2015) 등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다. 특히 2016년 리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녀자'는 윤여정의 연기 리력 중 가장 주목받는 작품으로 꼽힌다. 이 영화에서는 종로 일대 로인들을 대상으로 성매매하는 녀성, 속칭 '박카스 할머니' 역을 맡았다. 연기 경력만 50년이 넘는 배우지만 윤여정은 한 인터뷰에서 "나이 칠순에 몰라도 되는 세상을 알게 됐다"며 이 역할이 무척 힘들었다고 토로했었다.
"나는 그냥 재래시장이나 지켜야지 뭐."
리재용 감독의 영화 '녀배우들'(2009) 속 윤여정은 함께 출연한 배우 최지우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최지우는 일본시장, 배우 송혜교는 중국시장에 진출해 톱스타 대접을 받는 것을 지켜보며 내뱉은 대사였다. 12년이 지나고 윤여정은 한국 영화사 최초 아카데미 녀우조연상 수상이라는 력사를 썼다. 1958년 제3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사요나라'의 우메키 미요시에 이어 63년만에 탄생한 두 번째 아시아인 녀우조연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당시 우메키 미요시는 해당 영화에서 대부분의 대사를 영어로 연기했다. 반면 윤여정은 '미나리'에서 "원더풀" "프리티 보이" "스트롱 보이" 등의 영어 단어 몇 개를 제외하고 90% 이상 한국어를 사용해 연기했다. 과거 '인생은 아름다워'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베니니, '라비앙 로즈'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랑스의 마리옹 꼬띠아르 등 유럽권 언어를 사용한 배우들이 오스카 트로피를 받은 적은 있지만, 비유럽권 언어를 쓴 배우가 연기상을 수상한 것은 전례가 없다.
통상 오스카는 백인과 남성 위주의 '그들만의 잔치'로 악명 높다. 최근 녀성과 유색인종 회원을 늘리면서 변화를 꾀하고 있긴 하지만, 주류는 여전히 백인 남성이다. 특히 아시아인 녀배우에게 연기상의 장벽은 유난히 높다. 아시아계 배우가 녀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은 5차례뿐이다. 그만큼 배우 윤여정이 받은 트로피의 의미는 남다르다.
한편 윤여정은 이날 수상소감에서 "제 이름은 '여정 윤'인데 유럽 사람들은 '여영'이나 '유정'이라고 하더라. 오늘은 모두 용서해드리겠다"고 말해 좌중을 폭소케 했다. 그는 "사실 경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글렌 클로즈 같은 대배우와 경쟁 하겠나. 너무나 훌륭한 그의 연기를 수없이 봐왔다"며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이 곳에서 경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냥 내가 조금 더 운이 좋았다. 미국인들이 한국 배우들을 굉장히 환대해주는 것 같아 감사드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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