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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등가 교환' 얻으려면 뭔가 해야죠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6월8일 08시03분    조회:1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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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박돈규 기자의 2사만루]
배우 김혜자가 말하는 인생·연기
봉준호가 놀랐다 "소녀같아… 공주는 아니지만"

김혜자는 ‘그래 이 맛이야’로 기억되는 조미료 광고 모델을 27년 했다. “요리에는 취미가 없다”는 이 배우는 “이뻐지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고 몸만 늙어간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김혜자는 ‘그래 이 맛이야’로 기억되는 조미료 광고 모델을 27년 했다. “요리에는 취미가 없다”는 이 배우는 “이뻐지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고 몸만 늙어간다”고 말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봉준호 감독에게 물었다. 김혜자(78)는 어떤 배우냐고.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기생충’이 상영되기 전 일이다. 영화 ‘마더’(2009)에서 김혜자의 숨겨진 모습을 끄집어낸 봉 감독은 출국 전에 음성 녹음 파일을 보내왔다. 5분 45초 길이였다. 그녀와 작업하면서 세 가지에 놀랐다고 했다.

김혜자를 인터뷰하기로 마음먹은 건 반향이 큰 수상 소감 때문이었다. 알츠하이머(치매)를 앓는 노인을 연기한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지난달 1일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을 받았다. 무대에 오른 ‘국민 엄마’는 “우리는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외우려고 해도 자꾸 까먹어서 대본을 찢어 왔어요”라며 소녀처럼 웃었다. 곧이어 최종회에 나온 내레이션을 들려주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긴 한숨) 잊어버렸어요. 어떡하면 좋아. (접힌 대본을 펼친다. 청중 박수)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는 노인과 청춘이 한 몸에 공존하는 인물이었다(70대의 혜자는 김혜자, 20대의 혜자는 한지민이 연기). 치매 노인 눈에 비친 세상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젊음이 훈장이 아니듯 늙음도 형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노인은 서글프고 청춘은 막막하다. 시상식 며칠 뒤에 만난 김혜자는 “용서와 화해를 말하고 싶었다”며 “과거에 붙잡히지 말고 미래를 불안해 말고 손을 맞잡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댓글 보고 공부한다

이 배우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가끔 자기 이름을 쳐본다. “요새 뭐가 있나, 내가 뭐 잘못한 건 없나 궁금해서”란다. “드라마나 김혜자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곤 한다”고 했다.

―댓글을 다 읽는다고요?

"말도 안 되는 글도 있지만 배울 때가 많아요. 시청자에게도 치매는 남의 일 같지 않았겠지요. 댓글을 읽다가 미처 모르던 것도 알게 돼요. ‘아, 이렇게 표현해야겠구나.’ 댓글에서 연기 방법도 깨닫고 격려도 많이 받았지요. 주인공 이름도 혜자라서 실제 내 인생을 사는 것 같았어요."

―치매 노인 안에 세들어 살아본 셈인데.

"밥 안 준다고 애먼 소리 하고 며느리 때리고, 그런 종류였잖아요. 저도 참 궁금했어요. 무슨 생각을 할까, 치매 노인은. 그런데 이런 댓글이 있어요. ‘김혜자가 한 치매는 예쁘고 낭만적인 치매다. 진짜 이상한 치매 환자가 집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냐’고. 정말 가슴 깊이 느껴요. 도저히 못 견디면 요양원으로 보내잖아요. 내버릴 수도 없으니까. 레이건(전 미국 대통령)도 걸렸으니 치매가 누굴 덮칠지 몰라요."

―이번 상은 특별한가요.

"시상식장엔 안 가려고 했어요. (상을) 타고 싶잖아요. 조마조마하게 앉아 있는 게 싫었는데 누가 ‘사랑해준 시청자에게 감사 표시는 하셔야 한다’고 그래요. 최우수상에 호명되지 않길래 난 아닌가 보다 했는데."

―대상 수상 소감에 감동했다고들 합니다.

"내레이션이라 드라마에서는 읽기만 했는데 외우려니까 그렇게 안 외워져요. 종영해서 그런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게 몇 줄이나 된다고. 대본을 찢어 갔어요. 그러고도 까먹어 별소릴 다 했잖아요. 실수조차 좋았다고들 하시니 감사했어요. ‘아, 그 실수는 내가 한 게 아니야.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거였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웃음)."

―무슨 뜻인지요.

"김혜자도 평범하다고 느끼게요. 특히 젊을 땐 에러(error·실수)가 좀 나도 돼요."

―'디어 마이 프렌즈'에 이어 치매 전문 배우가 되신 겁니까.

"(정색하며) 타이틀을 그걸로 뽑는 건 아니죠? 그 작품 하면서 ‘치매도 사랑이 구원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치매 걸렸어도 누군가 옆에서 자고 싫은 소리 안 하고 사랑해주면 순해질 것 같았어요. 치매 노인 역할은 이제 고만해야죠. 익숙한 건 쉽고 편하지만 또 하고 싶진 않아요."
 

김혜자는 2013년 서울 남부교도소에서 “감사노트에 감사할 일 1000개를 쓰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수형자들은 이렇게 응답했다. “오늘은 내 국에 고기가 큰 게 들었다. 감사하다” “오늘 밤에는 내 쇠창살로 달이 보인다. 감사하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드라마는 3년 만인데.

"저한텐 기다림도 공부예요. 그런데 이런 댓글을 봤어요. ‘김혜자 선생님, 시간이 없으니 좀 자주 해주세요.’ 내가 죽을 것 같은가보다, 그랬어요(웃음). 좋은 배우가 죽으면 어쩌나 싶어 쓴 것 같아. 78세이니 옛날 같으면 지금 죽어도 호상(好喪)이에요. 그런데 누구는 79세로 쓰더라. 미워 죽겠어. 하하하. 아무튼 ‘오래 사셨네요. 잘 돌아가셨어요’ 그럴 나이지요."

―김형석 교수님보다 스무 살 넘게 젊으신데요 뭘.

“우리 골목에 사세요. 책 쓰시면 신문처럼 대문 안으로 쓱 넣어주십니다. 제가 어느 날 ‘건강하시죠?’ 여쭈니 웃으셨어요. 100세에 너무 건강하신 게 무안한 건가(웃음). 근데 봉준호 감독이 저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어요?”

죽기 살기로 외운다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김혜자는 아들, 강아지들과 함께 산다. “늘 외로운데 연기하는 동안에는 안 외롭다”고 했다. 소설가 박완서는 이 배우가 쓴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 추천사를 이렇게 적었다. ‘김혜자는 연기를 하는 시간 외에는 널브러져 있을 거다.’

―정말 그런가요?

“외출을 거의 안 해요. 눈에 안 띄면 꼬투리 잡힐 게 없잖아(웃음). 집에서 강아지들 보고 꽃 보고 하는 게 훨씬 재밌어요. 강아지가 어제 새끼 두 마리를 낳아서 ‘살구’ ‘5월’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잠을 못 자 피곤하네요.”

―오늘 미용실에 다녀오셨나요.

“메이크업도 받았어요. 유명한 분인데 ‘선생님, 나는 있잖아, 화장을 너무 곱게 하면 내 진심이 안 나와’ 그랬어요. 내가 직접 하는 화장이라야 편하지. 메이크업 받은 걸 차 안에서 조금 지우고 왔어요.”

―주름 펴준다는 ‘필러’ 맞으시나요?

“저는 그런 거 안 해요. 늙을 때는 늙는 게 좋아요. 다들 젊어지면 노인 역할은 누가 하나, 그런 생각을 해요. 저는 신의 섭리대로 살고 싶어요.”

―혜자(惠子)라는 이름, 좋아하시나요.

“어렸을 때부터 혜자였으니까. 친근해요. 아빠(김용택·한국 경제학 박사 2호로 미군정 때 재무장관을 지냈다)는 늦둥이인 나를 ‘우리 양념딸, 양념딸’ 하셨어요.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엄마와 언니들은 ‘미쳤다’ 했지만 아빠는 ‘좋은 배우의 연기는 정치인의 백 마디 말보다 낫다’고 하시고. 저는 늘 사람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희망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 캄캄한데(입이 마르는지 용각산 사탕을 꺼내며 먹어보라고 권했다).”

―바보 같은 질문인데 대본을 어떻게 외우시나요.

“죽기 살기로요. 깜빡깜빡할 나이지요. 근데요, 안 되는 건 없어요. 옛날에 열 번 보던 걸 백 번 보면 돼요.”

―선생님 얼굴에 한국 여성이 살면서 겪을 만한 일이 다 담겨 있다고 누가 그러대요. 큰일을 당해도 가면을 써야 하는 게 이 직업인데.

“그게요, 감추는 것도 얼굴에서 연기를 해요. 세상에 배우에게 필요하지 않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 기가 막히는데 웃어야 하는 것도. 연기를 직업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저한테 ‘연기하지 마라’는 ‘살지 마라’는 말과 똑같아요.”

―그 좋은 걸 왜 뜸하게 하시는지.

“견디는 것도 공부라고 저는 생각해요. 내가 감당할 수 있고, 요만큼이라도 희망을 주고 위로가 되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런 게 맨날 있나. 없으면 안 해야죠.”

―살면서 후회해본 적 있나요.

“너무 많죠. 왜 엄마·아빠한테 더 잘하지 못했을까. 시상식장에서 수상 소감도 그렇고. 하지만 후회만 하고 있으면 뭐해요. 기도처럼 말하죠. ‘아부지, 오늘 후회하지 않게 해주세요. 오늘 인터뷰에서 헛소리하지 않게 해주세요(웃음).’”

나쁜 기억을 잊는 기술

‘눈이 부시게’로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을 받은 배우 김혜자.
‘눈이 부시게’로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을 받은 배우 김혜자. /뉴시스
봉준호 감독은 술회했다. “김혜자 선생님에게 제일 놀란 건 소녀스러움. 천진난만한 미소와 커다랗게 반짝이는 두 눈. 천상 소녀지만 공주는 절대 아니었어요. 촬영지에서 숙소로 허름한 여관을 전전했는데 신경 쓰지 마라 하셨지요. 둘째, 연습을 의외로 많이 하세요. 그런데 막상 카메라 앞에선 몹시 직관적으로 연기합니다. 셋째, 현장에서 우신 적이 있어요. 아들(원빈)에게 침통을 주는 버스 터미널 장면이었는데 당신 연기가 성에 차질 않아서. 당혹스러웠습니다. 톨스토이가 자기 문장이 마음에 안 든다고 우는 것 같았어요.”

―마음에 드시나요.

“너무 멋있게 표현해줬다(웃음).”

―‘마더’에서 끔찍한 일, 나쁜 기억 싹 잊으라고 허벅지에 침을 놓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불쌍하죠. 내가 한 배역은 가만 보면 다 불쌍한 여자예요. 단순하고 행복하면 좋겠는데. (행복한 여자는 연기하기에 매력이 없다고 하자) 그건 그래요. ‘김혜자는 미친년 같고 애인 같고 할머니 같고 엄마 같다. 그런데 연기할 땐 서랍에서 끄집어내듯이 쓰더라’라는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나쁜 기억은 어떻게 관리하나요.

“애초에 원수 같은 일을 만들지 말아야죠. 이미 저질렀다면 고통을 견뎌야 하고요. 나쁜 기억이 떠오르면 좋은 기억으로 물리치려고 해요. 정말 힘들 땐 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내가 용서하기보다는 용서받을 일이 더 많은 것 같아요(웃음). 신나면 별 얘기를 다 하다가 실수를 많이 해요.”

―배우가 아니라면 뭘 하고 있을까요.

“현모양처요. 연기에 올인하듯이 남편한테 다 쏟아부어도 잘한다 소리 듣고. 사별한 남편이 붓글씨를 잘 썼어요. 나 혼자 남으면 불편할까 봐 ‘賻儀(부의)’ ‘祝 華婚(축 화혼)’ 봉투도 많이 써주고 가셨지요. 이젠 아들이 그걸 해요.”

―재혼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꿈에도 안 했죠. 드라마에서 맨날 남편이 있었고 과부는 해본 적이 없어요. 아들이 이혼하고 저랑 같이 살아요.”

―이혼이 흉은 아니죠.

“그런 세상이 됐더라고요. 쌈질하면서 사느니 헤어지는 게 나아요. 아들이 방에서 역기를 들어요. 자기가 세 번 들면 살짝 잡아달래요. 그냥 손만 댄 정도인데 그게 힘이 된대요. ‘누가 뒤에서 도와준다는 생각만으로도 가벼워지는구나’ 느꼈어요. 연기할 때 상대가 날 보는 눈빛만으로도 힘이 되듯이.”

며칠 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국민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식 들으셨지요.

“일요일 아침에 들었는데 얼마나 많은 축하를 받겠어요. 오후에 문자로 간단히 보냈지요. 그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앞에 있다면 어떻게 하실 건지 묻자) 글쎄요. 그냥 웃겠지요 아마도. 내가 진짜 재미없게 대답하나요?”

―아들 같은 감독이다 생각했는데 뜻밖에 재미없어서 흥미롭네요.

“저는 누구보고 아들 같다는 생각 안 해요. 장한 일이지만 어른한테 ‘장하다’ 할 수도 없고. 프랑스 가기 직전에 관객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만났는데 격려도 안 했어요. 마음으로 알겠지요.”

바로 그 관객과 나눈 대화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불확실한 10년 전 기억과 말실수, 과장과 왜곡으로 번진 ‘김혜자 미투 해프닝’이었다. 해명으로 논란은 수습됐지만 김혜자는 “몰아가는 세상과 사람들이 괴물 같았다”며 “언행을 더 조심하겠다”고 했다.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등가교환(等價交換). 뭘 얻고 싶다면 뭘 해야 해요. 날개는 누가 달아주는 게 아니라, 내 살을 뚫고 나와야지. 아무것도 열심히 안 하고 멋있어지길 바라면 안 돼요.”

―살아보니 인생이란 뭔가요.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는 돈이 제일 무서운 시대를 살았어요. 남편을 일찍 잃고 미용실로 겨우 밥은 안 굶게 생겼는데 치매에 걸렸고요. 그런 여자가 남편을 괴롭힌 남자를 덮어주잖아요. 그런 게 인생이에요. 용서와 화해, 위로가 필요해요. 맨날 싸우고 복수만 할 순 없잖아요.”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다. 김혜자는 “인간은 실수투성이지만 미워하며 사는 건 지옥”이라며 “오늘을 망치지 말자”고 했다. 요양 병원에서 일한다는 사람이 이런 글을 썼다. “치매에 걸린 분을 보고 불쌍하다고들 합니다. 저는 그들이 조금 다른 세상을 살 뿐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세계로 끌어오려는 이기심을 멈추고, 아이들 바라볼 때와 같은 시선으로 함께 세상을 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사소한 것에도 쉽게 기뻐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긴 여정을 잘 달려온 훌륭한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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