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리병인 -조선족 특등 전투영웅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3월23일 09시23분    조회:2092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특등 전투영웅 리병인(1995년)

[길신 2011-03-22 리영춘 글] 조선족 특등 전투영웅 리병인은 1922년 5월 24일에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에서 태여났다. 2004년 4월 26일 도문시에서 82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리병인은 해방전쟁시기 이름난 특등 전투영웅이다. 하지만 그 자신이 지방에 돌아온후 자신의 사적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기에 세상 사람들은 그에 대하여 별반 아는것이 없고 조선족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리병인의 아버지 일가는 원래 조선 함경남도 리원군 리원리에서 살다가 20세기 초기에 두만강을 건너 중국 길림성 화룡현 서성향 장항촌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지었다. 그때 장항촌 촌민 대다수가 조선에서 건너온 리씨성을 가진 사람들이였기에 그곳 이름을 리원촌이라 불렀다 한다. 리병인은 바로 이 리원촌에서 태여 났다.

14세 되는해에 그는 부모를 따라 지금의 화룡시 투도진 룡원촌에 이사 하여왔다. 그가 14세 되는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16세 되는 해에 어머니도 세상을 하직하였다. 고아로 된 그는 한동안 형님의 집에서 살았다.

1945년 10월 6일 리병인은 룡원촌에서 동북민주련군에 참군하여 6퇀3영9련에서 선후로 전사, 패장, 대리련장직을 담임하였다. 그는 선후로 부대를 따라 화전자 쟈피거우(桦甸夹皮沟)전투 삼도만 토비숙청 전투, 사평 2차전역 등 여러차례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어느 한차례의 전투에서 리병인은 첨도패(尖刀排) 패장을 담임하고 부대의 제일 앞에서서 적들을 진공하였는데 수십명의 적들을 소멸하여 전반 전투의 승리를 위하여 관건적인 앞길을 헤쳤다. 하지만 그는 그번 전투에서 적들의 폭탄파편에 왼쪽 팔을 잃었고 눈도 부상을 당하였다. 당시 《길동보》신문은 리병인의 사진과 더불어 그의 영웅사적을 소개하였으며 부대의 간보도 그의 사적을 올렸다.

1947년 5월 1일, 길림성 돈화현에서 《동북민주련군제1차영웅모범표창대회》가 열렸는데 그번 대회에서 리병인은 동북민주련군 총사령부 총정치부로부터 《특등전투영웅》 영예를 수여받았다. 그번 대회에 친히 참석한 당시 길림성 성장이며 동북민주련군 부총사령인 주보중장군이 직접 리병인에게 영웅훈장과 영예증서를 발급하였으며 붉은 꽃도 달아 주었다.

1947년 5월 1일, 돈화에서 거행한 《동북민주련군 제1차영웅모범표창대회》시 소속부대에서 파견한 호송인원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왼쪽으로부터 두번째 사람이 리병인임.

그후 리병인은 비록 한쪽팔을 잃었고 눈도 상하였지만 부대를 떠나지 않고 계속 부대를 따라 전투에 참가 하였다.

1948년 10월 12일 리병인은 부상된 상처때문에 부대에서 지방에 전업하였으며 그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지방에 돌아온후 그는 민정부문으로부터 일등잔페전업군인으로 인정받았으며 여러번 《우수공산당원》영예칭호를 수여 받았다. 리병인은 지방에 전업하여 온후 주요하게 림업계통에서 사업하다가 1983년 1월 5일에 리직휴양(离休)하였다.

리병인은 부대에서 지방에 돌아온후 항상 전우들을 잊지 않았는데 특히 함께 전투하다 희생된 렬사들을 더욱 잊지 못하였다.

그는 항상 《전쟁마당에서 희생된 렬사들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운이고 행복한가》라고 말한다. 전쟁의 나날은 리병인으로 하여금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수없는 기억을 남기게 하였다.

1981년 60세 생일에 남긴 사진

부대가 사평전역에 참가한후 연통산에 돌아와 휴정(休整)할때다. 남태봉이라고 하는 어린 통신원이 임무를 집행하다가 불행이 적들의 폭탄에 맞아 부대 병원에서 치료받는 과정에 또 파상풍에 걸려 죽었다. 리병인이 소식을 듣고 다급히 병원에 찾아 갔을때는 이미 새벽 2시가 되였는데 어린 통신원은 이미 숨을 거두었다. 어린 통신원은 화룡현 복동향에서 참군하였는데 고아이며 희생될때 20살도 되지 않았다. 그때 리병인도 상한 몸이였지만 전우들과 함께 희생된 어린전사를 반석(磐石)의 한 철도다리옆에 묻었다.

해방후 리병인은 여러모로 렬사의 친척을 찾았는데 끝내 렬사의 녀동생을 찾아 렬사가 희생된 경과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정부에 적극적으로 이 사실을 반영하였는데 그의 노력으로 렬사가 희생된 30여년후인 1978년도에 화룡현정부는 렬사의 녀동생에게 《혁명렬사》증서를 발급하였다.

1950년초 리병인은 한 부대에서 희생된 렬사 박창준의 두 남동생이 어렵게 살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알아보니 하나는 소학교에서 잡일을 하고 다른 하나는 거리에서 밥을 빌어 먹는 거지가 된것이다. 리병인은 즉시로 거지가 된 렬사의 동생을 자기집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했다.

리병인은 결혼한 후에도 그 렬사의 동생을 자기 집에서 함께 있게 하였다. 또 렬사의 동생에게 직업을 찾아주었다. 그후 렬사의 동생은 조선에 가서 인민군에 가입하여 조선전쟁에서 공로를 세워 인민군 군관이 되였는데 한번은 경위원 두명과 함께 리병인을 찾아온 일도 있다.

1987년 렬사의 동생들과 함께. 앞줄 왼쪽으로부터 렬사의 큰 동생, 리병인, 렬사의 작은 동생.

이런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리병인은 자신의 사적을 별로 말한적이 없다. 다행히도 1981년도에 룡정 료양원에서 료양하던중 《연변일보》사의 한 부주필이 리병인의 사적을 알고 본인의 저술에 따라 몇만자에 달하는 회억록 《내가 걸어온 길》을 집필하여 주었다. 이 회억록이 리병인을 알아보는 유일한 재료로 되었다.

1987년 조선에서 온 렬사의 동생과 함께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중국 IT산업의 중심, 옌지시에 투자하세요"                         유대진 회장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옌지(延吉)시는 동북아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베이징과 연결되는 고속...
  • 2011-07-22
  •                 허형식(1909년~1942년 경상북도 선산군)동지는 1929년 조선에서 흑룡강성 빈현에 이주, 혁명사상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듬해 5월 1일 중공북만특위가 할빈에서 시위행진을 단행할 때 허형식은 10여명 공청단원을 이끌고 일...
  • 2011-07-20
  • 2001년 4월 중국미용외과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는 동창림선생은 홍콩에서 개최된 국제 미용성형외과 학술세미나에서 "중국 미용성형외과현황과 나의 체득","동씨융비술"이란 테마로 논문을 발표하여 대상을 수상한 적 있다.   그 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세계 유일한 미용성형외과 대가정"이란 칭호를 가지게 된 것이다...
  • 2011-07-20
  • 중국동포축구연합회 곽용호 사무총장 인터뷰 [흑신 07-19]     “흑룡강신문 한국지사의 후원으로 열린 상반기 경기는 규모나 영향력, 전문화 정도에 있어 예년을 훨씬 뛰어넘은 획기적인 발전모습을 보였다.” 중국동포축구연합회 곽용호 사무총장은 상반기 리그전을 끝낸 소감을 이렇게 말...
  • 2011-07-20
  • 46살, 중년 고종훈은 말한다 축구명장 고종훈 재능이 최고의 절정에 오를수 있는 가장 관건적이고 확실한 요인은 결코 기질이 아니라 마음 또는 정신이다. 그 일을 꼭 하고싶다는 강렬한 욕망, 어떤 어려움도 견디여내리라는 강한 의지, 꼭 어떤 경지에 도달하고야말리라는 드팀없는 신념, 이런 내적인 또는 심적인 자기완성...
  • 2011-07-18
  • 중국조선문 3대 언론사 특별기획―중국조선족 기업인(14) 다롄정흥석화유한공사 정만흥 총경리와의 대담   정만흥총경리 프로필   1956년 5월1일,출생   1973년 1월~1978년8월,하향지식청년,공청단서기,생산대장,농전건설병단 부단장(农田建设兵团副团长)   1978년 9월~1982년 7월,지린농업대학 학생회 부...
  • 2011-07-18
  •  ] ◎고향사람 찾아 수륙만리 싱가포르에 한식점 세 개를 세운 김경사장  [길림신문 2011-07-14 김성걸 전춘봉 기자] 인도양의 섬나라 싱가포르에 조선족이 경영하는 음식점이 있다는 소식은 마음의 고삐를 끈질기게 잡아끌었다. 고향이 길림인 김경사장은 어떻게 되여 수천만리 떨어진 이 낯선 고장에 정착...
  • 2011-07-14
  •   인터불고 그룹 권영호회장의 도전과 기부인생 조명   원양 어선 40여 척, 한국과 유럽, 아프리카 20 개 계열사   26년간 국가와 민족, 인종의 차별 없이150억 원 장학금   조선족 기관장, 선장, 항해사 등 수백 명 양성해 중견 역할   중국 교육사업, 중한우호협력 특별기여 2005년 정부 우의상 지난 6월 4일,...
  • 2011-07-14
  •   중국과학원 심양응용생태연구소 김영환부교수   (흑룡강신문=하얼 빈2011-07-13)산과 나무를 하늘처럼 떠받드는 사람, 나무의 “웃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무엇인지 깊은 산속의 작은 풀잎의 스치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관찰하고 연구하는 그는 중국과학원 심양응용생태연구소에서 삼림...
  • 2011-07-14
  • 멈추지 않는 녀지서의 새 도전   [인터넷료녕신문 2011-07-08 리덕권 기자]  심양시 심북신구 윤가향 서광촌 박인숙지서의 열망 지난 2000년, 우연히 심양시 심북신구 윤가향 서광촌의 지서로 당선된 박인숙(1960년생)씨를 알게 된 기자는 그녀의 들끓는 사업열에 매료돼 수년간 해마다 서광촌을 한두차례씩...
  • 2011-07-1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