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주덕해-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월8일 15시14분    조회:885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연변의 아들 
조선족혁명선구자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

주덕해는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우수한 민족간부이다. 걸출한 조선족정치활동가인 그는 당과 인민에 충직한 공산주의전사이다. 이는 1982년 9월 연변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30주년을 경축할 당시 중공중앙총서기인 호요방이 연변력사에서 일으킨 주덕해의 역할에 대한 평가였다.

  주덕해의 원명은 오기섭이며 1911년 3월 5일 로씨야의 쌍성자 도별하촌의 한 조선족 빈농가정에서 태여났다. 1920년 그는 식구들과 함께 동북으로 건너와 길림성 화룡현 지신향 승지촌에 정착하였다. 주덕해는 7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온 식구들의 생계를 어머니에게 의지하였다. 온 식구가 다 떨어진 삿자리를 편 구들에서 헌 누더기이불을 덮고 가난하게 지내야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잘하는 습관을 길렀고 가난한 이웃을 동정할줄 아는 선한 사람으로 자랐다. 1927년 그가 살던 승지촌에는 김광진이라는 소학교 교장이 혁명자였는데 그는 자신의 합법적지위를 리용하여 대중들에게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인민의 해방을 쟁취하며 낡은 사회를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리치를 선전하였다. 주덕해는 그 선생님을 존경하며 늘 그의 혁명도리를 듣군 하였는데 이는 그가 후에 혁명의 길을 걷는데 아주 큰 영향을 끼쳤다.

  1930년 김광진은 당의 지시에 따라 골간분자들을 이끌고 북만으로 가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세우게 되였다. 당시 19세인 주덕해는 결혼을 앞둔 혼사를 미루고 결연히 김광진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는 승지촌에서 출발해 한달간의 도보행군으로 녕안현 화렴구에 가 먼저 도착한 김광진 및 일행과 함께 혁명활동에 참가했다. 1931년 5월 주덕해는 고험을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동북에서 “9.18”사변을 일으켰다. 주덕해는 당의 지시에 좇아 반일선전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1932년 1월 그는 녕안현 동경성 우가툰 공청단특별지부서기를 맡았다. 사업수요에 따라 1933년 3월 이인반에 발을 붙이고 새로 건립된 당지부 서기를 담임했다. 그는 대중을 발동하여 친일세력이 만든 소위 “조선인민회”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8월말 주덕해는 백포자구위의 지시에 따라 서대림자에 가 당지부서기를 맡았다. 간고한 투쟁과 세밀한 사업을 거쳐 서대림자의 반일회는 재빨리 회복발전되였다. 간고한 생활환경에서 장기적으로 있으면서 적들의 엄밀한 봉쇄속에 소금이 떨어지고 식량도 없어져 주덕해는 엄중한 부종에 걸리게 되였다. 동북항일련군 제4군 당위에서는 주덕해를 제4군 제2퇀 후방류수처 당지부서기를 담임하게 하였고 후에는 벌리현 소서참 수전촌에 가 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러나 주덕해는 병을 단채 다른 동지들과 함께 계속 당조직을 건립하고 유격대활동을 견지하였다.

  1936년 4월 당에서는 주덕해를 쏘련 모스크바 동방로동대학에 보내여 공부하게 하였다. 1939년 그는 연안에 돌아와 정풍운동에 참가했다.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 투항을 선언한후 주덕해는 16명의 동지를 거느리고 11월 할빈에 도착하여 의용군 제3지대의 건군, 확군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제3지대 정치위원을 담임했다. 제3지대는 토비숙청, 토지개혁과 정치선전 등 여러 면에서 많은 성과적인 일을 하였다. 주덕해는 부대의 정치사상사업을 매우 중시하였으므로 전투력이 강할뿐아니라 정치자질도 매우 훌륭했다.

  연변이라는 민족지역의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1949년 3월 주덕해는 연변에 파견되여 중공연변지위 서기 겸 연변공서 전원을 담임하게 되였다. 6월, 그는 연변 여러 민족 인민을 대표하여 전국정치협상회의 예비회의에 출석하였으며 9월에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국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0월 1일 그는 영광스럽게 중화인민공화국 개국경축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연변에서 사업한 17년간 주덕해는 당의 민족구역자치정책을 정확히 집행하고 여러 민족들지간의 단결을 강화하였으며 민족경제를 번영시키고 민족문화교육사업을 발전시켰다.

  항미원조전쟁이 발발한후 그는 늘 조선족, 한족 가정에 내려가 마음을 나눔으로써 연변지역 여러 민족 인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 싸우면서 항미원조전선을 적극 지원하도록 고무격려하였다.

  1952년 8월 29일 연변에서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 성립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주덕해는 연변조선족자치구 주석을 담임했다.

  1958년의 “민족정풍운동”  및 이후의 3년 자연재해는 부분 조선족간부의 사상감정을 손상시켰다. 일부 사람들이 나가려고 했을 때 주덕해는 그들을 찾아 담화하면서 맑스주의 민족관과 조국관으로 교육을 하였으며 일부 지식분자의 생활상황을 깊이있게 료해하고 그들의 실제적인 생활곤난을 적절하게 해결해주었다.

  주덕해는 민족간부양성문제를 매우 중시하였다. 50년대중반에 연변에서는 이미 간부의 민족화를 실현하였다. 주덕해의 창의로 1954년 8월 중공연변지위에서는 매년 9월을 “민족단결 선전의 달”로 규정하였다. 그후 연변지역에서는 해마다 9월에는 민족단결선전활동을 전개하여 여러 민족들간의 단결을 강화하였다.

  주덕해는 민족경제를 번영시키기 위해 연변의 농촌들마다 거의 돌면서 정황을 료해하고 부단한 조사연구를 한 기초상에서 당지 실정에 알맞는 중요한 조치들을 생각해내였다. 이를테면 단위당 수확고를 높이는것으로 높은 생산량을 추구하는 동시에 계획적으로 수원을 개척하고 수전면적을 늘이는 등이였다. 이를 위해 그는 관계부문의 일군들과 함께 현지에서 측량한후 대담하게 “서쪽의 물을 동쪽으로 끌어들이는” 구상을 제출하였다. 그 일환으로 먼저 제2 송화강의 지류인 고동하(뮴떪붉)의 물을 해란강에 끌어들였다. 그후 아동(€{?{1)저수지와 연변지역에서 가장 큰 안도저수지를 축조함으로써 연변 각지의 용수부족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였다. 주덕해는 또 과학실험이 농업생산기술을 개진하고 농업생산을 촉진시키는데서 일으키는 중대한 의의라고 여기고 연변지역에서 과학실험소조 건립을 일반화했다.

  조선족군중들의 문화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주덕해의 직접적인 인솔과 관심하에 각급 학교를 개설하여 1952년에 소학교육을 보급시켰고 1958년에 초중교육을 보급시킨 동시에 청장년들에 대한 문맹퇴치를 틀어잡아 수천수만의 조선족지식인을 양성해내였다.

  주덕해는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생활상에서 소박하였으며 종래로 특수화를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훌륭한 당원이며 훌륭한 간부인 주덕해도 “문화대혁명”의 액운을 피하지 못했으며 림표, 강청 반혁명집단의 잔혹한 박해와 타격을 당했다. 당중앙과 주은래는 “문혁”기간 줄곧 주덕해에 대해 관심하고 보호하였다. 그렇지만 림표, 강청 일당과 그 앞잡이들은 여전히 각종 악렬한 수단을 다해 억지로 주덕해에게 여러가지 죄명을 들씌우면서 “죄”를 인정할것을 강요함으로써 주덕해의 암이 더욱 악화되게 하였다.

  1972년 주덕해는 주은래에게 친필편지를 보내여 자신의 질병상황과 개인력사를 보고하는 한편 당중앙에서 하루빨리 자신에 대해 결론을 내려줄것을 박절히 요구하였다. 주은래는 편지를 받은후 즉시 중앙조직부에 지시하여 연변에 사람을 파견해 주덕해의 존안서류를 가져오게 하는 한편 아래와 같은 회시를 내렸다. “만약 (그가) 쓴 상황에 대해 조사해보아 사실이라면 마땅히 사건을 마무리하고 주덕해가 당생활을 회복하도록 하라.”

  6월 20일 주은래는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주덕해의 생명을 연장시키라고 호북성당위에 지시를 내렸다. 이때 주덕해의 질환은 더욱 악화되였다. 1972년 7월 3일 주덕해는 61세를 일기로 원한을 품고 세상을 하직했다.

  력사는 공정하였다. 1978년 6월 10일 중공연변주위에서는 주덕해의 명예를 회복할데 대한 결정을 내렸으며 6월 20일 성대한 대회를 소집해 주덕해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었다.

 ( 이 자료는 장춘출판사에서 1998년 12월 출판한 《자고로 우리 성(聾)씨 호걸이 많았더라》에서 발취한것이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강유진 군은 2005년 재학시 앤아버 시의원직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3년만에 의원보다 더 나은 대통령 특별보좌관이라는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강 군은 지난해 11월 10일 비행기에 오르면서 오바마 후보가 강유진 군의 등을 치며 격려하는 사진과 12월 21일 하와이에서 대통령 당선자와 골프...
  • 2009-05-26
  • 1흔히 기자들을 일컬어서 발로 뛰는 사람들이라 칭한다. 견문이 많아야 현장감이 있는 신문기사를 많이 써낼수 있다느 말로 풀이된다.  하지만 음악가가 발로 뛴다면 보편적인 통념을 거부할수도 있다. 그런데 이 통념을 깨친 음악가가 있는데 그가 바로 《중국조선족민 간음악집》(이하 음악집으로 략함)을 펴낸...
  • 2009-05-22
  • “성공자의 과거가 비참할수록 행복하다.” 한국련속극에 나오는 이 대사를 좌우명처럼 여기는 예술인이 있다. 가요 “모두다 갔다”, “인생살이”, “금이야”, “마음부자 제일부자” 등 노래를 불러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아안은 대중가수 최승화, 신물나는 가난...
  • 2009-05-22
  • “동포연구 ‘한우물 파기’ 올해로 20년 맞았다”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 다음달 1일 연구소 창립 20주년 기념식 개최 동포문제가 주목받지 못하던 1989년부터 중국과 CIS지역 동포들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펼쳐온 해외한민족연구소(소장 이윤기·사진)가 다음달 1일로 창립 20주년을 맞...
  • 2009-05-21
  • 지난 12일, 금융위기와 조선족기업경제발전 포럼에 참석한 장춘(长春)의 대화호텔 이규광 동사장이 포럼을 통해 '건전한 기업과 충실한 경영가가 되는 길'이라는 주제로 연설을 했다. 이규광 동사장은 "창춘은 정치와 문화가 함께 발달한 도시로써 창춘의 기업인들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경제활동에서 치밀한 ...
  • 2009-05-18
  • "평범속의 휘황" -조선예술품소장애호가 위배평 취재기 중조수교 60주년을 맞으며 가동된 "중조친선의 해"를 계기로 조선예술품 소장가 위배평씨를 취재하기위해 그의 사업터를 찾은 것은 해빛도 따사로운 5월의 하루였다. 위배평씨의 사업터인 베이징시 공상행정관리국 해전분국 자죽원 공상소를...
  • 2009-05-16
  • 연변에서 코리아복장 유한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손향 동사장이 지난 13일, 금융위기와 중국조선족기업발전 포럼에 참석했다. "기업인들이 한대 모여 정보를 교환하고 문제점을 상호 보완해주는 자리라 생각돼 바쁜 일정에도 참석하게 됐다"고 포럼참석 계기를 밝혔다.손향 동사장은 "작년보다 참석 인원이 많...
  • 2009-05-15
  • 색스폰으로 엮는 연주와 전수의 인생—음악학원 군악학교 등에 18명의 제자 수송우리 연변은 해방전에 이미 규모를 갖춘 관악대가 여럿 있었고 해방후엔 학교를 위주로 각 현, 시마다 관악대가 활약했다. 또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관악연주가들을 양성해 국내 큰 악단은 물론 해방군 각 군악대에도 대량 수송했다. 오...
  • 2009-05-14
  • 20여년간 한 일터에서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 현재 연변대학부속병원 영상1과 주임으로 활약하고있는 조지매는 대학입시를 회복한뒤의 첫 패 대학생으로 1982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의학원 의료전업을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근무했다. 20여년간 그는 라사마냥 연변대학부속병원이라는 이 기계에서 착실하게 사업하면서 그...
  • 2009-05-14
  • 20여수의 히트곡을 만들어낸 대중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작곡가 고창모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모든것이 운명적이였다. 음악의 길을 선택하게 된것도,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게 된것도, 연변에서 작곡생활을 하게 된것도… 청춘을 문화대혁명이란 특별한 시대에 보내게 되여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는 결코 불행...
  • 2009-05-1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