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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산- 중국우주연구에 한 획을 긋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2월29일 10시33분    조회:5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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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기획보도(18)

우주연구서 획기적 돌파 가져온 조선족과학자

중국달탐사공정 부총설계사, 중국과학원  유일한 조선족원사 강경산 만나본다

길림조선문보 장춘영기자/인민넷 김홍화기자



■세계항천과학령역 및 언론계의 진동
■”미크로파 달”은 앞으로 인류가 달 우주를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의의
■전학삼은 편지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 독창적인 성과”라고 높이 평

강경산(姜景山):

1936년2월8일 길림성 룡정시에서 출생
1962년 구쏘련레닌그라드 우리아노브 전공학원 졸업
1981년-1983년 미국에서 미크로파원격기술을 연구
현재 중국공정원 원사
중국과학원 공간과학과 응용연구중심 연구원, 총공정사, 학위위원회 주석
학술위원회 주임
국제구아과학원 원사
국제COSPAR중국위원회 위원
중국달탐사공정 부총설계사
중국과학원 달 탐사공정응용총체부 총설계사
863항천령역 전문가위원회 고문


"미크로파 달” 인류 달연구에서 획기적 돌파

근일 중국의 cctv중앙방송은 뉴스프로에서 장장 십몇분의 시간으로 강경산원사의 “미크로파 달”을 소개하였다. cctv뿐만 아니라 해내외 각 주요메체는 거의 동시에 이 중대한 사건을 보도하였고 이는 강경산 원사 새 연구성과의 중대성을 족히 보아낼수 있다.

근일 중국달탐사공정 부총설계사, 중국과학원 달탐사공정응용총체부 총설계사, 국가863항천령역 전문가위원회 고문이며 중국조선족가운데 유일한 원사인 강경산의 “미크로파 달”(微波月亮)이 세계항천과학령역 및 언론계의 진동을 일으켰다.

강경산은 우리 나라 달 탐사공정중 국제상에서 제일 먼저 미크로파탐측기술을 응용하여 달의 궤도우에서 달표면에 대하여 감측하는 방법을 제기, 사용하였고 이 항목의 수석전문가를 담임하였다. 강경산과 그가 령도한 과학소조는 이 계통의 감측결과에 근거하여 세계적으로 제일 먼저 “미크로파 달”을 구축하였고 일련의 리정비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원시창신성과를 획득하였다.

“2009년 달탐사 및 지학과학세미나”에서 강경산은 그가 그려낸 “미크로파 달”을 처음으로 세인에게 과시하였다. “상아1호”위성에 탑재한 미크로파 탐측의기가 전송한 수치에 근거하여 그려낸 “미크로파 달”은 지금까지 우리 인류에게는 미지세계였던 달의 뒷면 지질정황을 반영하였고 실제탐측수치에 근거하여 달 토양층의 평균뚜께가 5-6메터이고 헬륨3의 함량이 100만톤 가까이에 있다고 추정하였다. 이는 미국 ‘아폴로’우주비행선이 달에서 가져온 견본품에 근거하여 달표면의 헬륨3 저장량이 100만톤 내지 500만톤사이라는 추정보다 더 명확하였다. 강경산의 “미크로파 달”은 앞으로 인류가 달을 연구하고 우주를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중국항천 원격탐측기술의 창도자, 개척자

강경산은 우리나라 항천원격탐측기술 창도자의 한사람이고 미크로파원격탐측기술(微波遙感)의 주요개척자이며 우리나라 미크로파원격기술 및 리론체계에 대하여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1973년에 강경산은 처음으로 미크로파원격탐측계획을 제기하였고 1975년 중국원격탐측기획회의를 소집하고 전학삼의 지도하 미크로파원격탐측을 추진하였다.

강경산은 우리 나라 75, 85 국가과학기술공관에서 원격공정전문항목을 합작주체하였고 원격기술기초시설을 건립하였으며 그 응용을 추동하였다. 강경산은 미크로파원격탐측을 처음으로 신주4호에 탑재하였고 이는 중국위성미크로파원격탐측 령의 돌파를 가져왔다. 2008년 5월 강경산은 미크로파원격탐측기를 성공적으로 기상위성에도 탑재하였다고 이제 2년후에 발사하게되는 해양위성2호에도 미크로파원격탐측기술을 적용하게 된다.

1986년부터 우리 나라 원격감측자연재해기술계통을 연구하였고 자연재해실시감측의 원격정보를 건립하여 우리 나라 돌발성재해감측의 정확성을 대대적으로 제고하였다.우리 나라의 저명한 과학자 전학삼은 강경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연구성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독창적인 성과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중국의 첫 인공위성연구발사에서 골간 역할

1957년 쏘련이 세계에서 첫 번째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였고 미국은 뒤이어 1958년에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 세계는 우주공간연구시대에 진입하였다. 당중앙과 모주석께서는 우리 나라에서도 인공위성을 발사하여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인공위성연구는 공백이나 다름없었고 쏘, 미의 봉쇄로 참고할수있는 자료도 없었다. 그리고 경제가 락후하고 공업기초가 박약하였다. “조건이 없으면 창조하여야 한다. 우리 힘으로 만들자. “상급은 강경산을 공정조 조장으로 임명하고 인공위성발사준비로 되는 공간탐측로케트발사에 관한 중대한 과업을 맡겼다.강경산은 연구소조를 이끌고 밤낮으로 자료를 찾고 실험을 하였다. 수많은 실패를 격고나서 끝내 받아온 과제를 해결하고 중국 첫 인공위성발사를 위해 큰 공헌을 했다.

중국공간과학 연구령역에서 혁혁 전공

우리나라 첫 인공위성의 연구제작으로부터 시작하여 강경산은 선후로 여러개 응용위성탐측계통의 연구제작에 참가하였고 우리 나라 위성, 재인항천, 달탐사공정 3대 리정비적의의를 가지고 있는 령역에서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연구성과는 국가과학기술진보 특등, 1등, 2등상을 수여받았고 부위급 특등, 1등, 2등상 등 여러 가지 상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국가재인항천돌출공헌”상장과 “재인항천 증헌재기금돌출공헌상”, “863계획돌출공헌상”, “863계획 15주년 선진개인상”, “첫 달탐사공정돌출공헌자상” 등을 획득하였다. 그는 많은 석사연구생, 박사연구생과 과학기술골간을 배양하였고 론문 200여편을 발표하였으며 전문저작을 발표하였다.

“이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성공이...”
전학삼 모르교수 그리고 달 이야기를 해주신 어머님

강경산은 “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혼자만이 아닌 여러사람들과 여러 방면의 도움이 아주 컷다”고 말한다. 전학삼은 처음부터 강경산의 연구과제에 대하여 많은 지지를 해온 분이고 여러모로 도와주시고 서신왕래하며 그의 사업을 지지하였다.

1981년 강경산은 “중국에 조건이 없으니 미국에 가서 공부하라”는 전학삼의 제의로 미국에 가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강경산은 미국 캔싸스대학에 가서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과학자이며 미크로파원격측적기술의 창시인인 모르교수와 함께 연구사업을 하게 되었다. 강경산은 오늘의 성과가 있기에는 모르교수의 도움이 아주 컷다고 하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2년남짓한 사이에 강경산은 선후로 16편의 론문을 발표하였고 미국의 유명업체로부터 고급연구원으로 특별초빙까지 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1981년-1983년까지 미국에서 연구하고 돌아운 강경산은 미크로파원격탐측기술계통, 리론계통을 건립하였다.

“과학기술은 1인이 완성할수 있는것이 아니다.”강경산은 또 전체 연구단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단체의 힘이 아주 컸다고 하였다.

강경산은 또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가정의 지지가 아주 중요하였다고 하였다. “연구사업을 하자면 정신을 고도로 집중하고 모든 정력을 몰두하여야 한다. 만일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면 사업의 성공이란 있을수 없다. 어머님으로부터 나의 형제, 처자에 이르기까지 나에 대한 도움은 무한한것이다.”

1936년2월8일, 강경산은 길림성룡정시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다섯살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혼자서 5남매를 키우셨다. 어머니는 강직하고 근로하며 지식이 있는 녀성이였다. 강경산원사는 지금도 어릴적 어머니가 해준 달나라의 이야기가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어릴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달이 무엇인가? 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고 달나라에 대한 환상에 빠진곤 한다고 하였다.현재 어릴적의 환상이 현실로 변해가고 강경산은 달에 대한 연구령역에서 정상급의 령역에 이르렀다. 현재 강경산원사는 핸드폰소리도 “반달”노래로 설치하였는데 원사의 달사랑을 족히 알수 있다.

강경산원사는 또 북경대학제1병원에서 부원장으로 계시는 부인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고 하였다.아들 , 딸을 혼자 키우다싶이 하였고 말할수 없이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문화대혁명때 조선 ,쏘련특무로 투쟁을 받아 로동개조를 내려갔다. 그 어려운 시기 부인은 시종 강경산의 옆에서 묵묵히 그를 지지하였고 정신적으로 아주 큰 지지를 주었다.당시 어떤 과학자들은 이런 시련과 모욕에 못이겨 자살의 길을 택한자도 있었다.

그리운 고향진흥에 힘을 보태고 싶다


고향을 예기하노라면 강경산원사는 무한한 그리움에 잠긴다. 특수한 령역에서 사업하는 신분이 특수한 분으로서 강경산원사는 어디로 가나 호위가 배동하였고 또 어디를 함부로 다닐수가 없다.

지금까지 강경산은 연변에 두번 가본적이 있다. 2000년 금방 원사로 된후 당시 연변자치주 주장인 남상복주장의 초청으로 한번 갔고 2002년 연변자치주성립 50주년에도 간적 있다. 강경산은 “상아1호 발사후 연변조선족자치주 등개서기, 리룡희주장이 련명으로 축하서신을 보내온 이야기를 하면서 언제든지 힘과 조건이 된다면 고향건설사업에 이바지하고싶다”고 하면서 앞으로 자주 련락을 가지기를 바랬다.

강경산원사는 연변지역의 인재류실문제가 아주 심각하다고 인정하시면서 고향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여 항목을 인입하고 정책적으로 부축하여 경제를 발전시칸다면 자연히 인재를 흡인할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연, 룡,도 경제일체화진전을 가속화하고 훈춘지역개발을 가속화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과학으로 빈곤을 부축하는 력도를 가강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언제든지 기회가 있으면 고향건설을 추진하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하였다.

더 많은 조선족 항천인재가 나오길 기대

강경산은 “항천령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선족이 적지 않다.”고 하면서 이상영, 우병희등 조선족 과학자들을 렬거하기도 했다.

강경산 원사는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고도평가하면서 “국가의 이런 민족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민감하고 기밀적인 령역에서 조선족인재들이 활약껏 발전 할수 있고 오늘의 원사가 나올수 있었다”는것이였다. 그는 또 “현재 중국에는 우주항공령역에 종사하고있는 조선족이 적지 않은데 나이도 비교적 젊은 편”이라고 하면서도 40대-60대사이의 조선족 항천인재 단층현상에 대하여 아주 가석하게 생각하면서 많은 조선족 젊은 인재들이 조국의 항천사업에서 용솟음쳐 나올것을 희망하였다.

젊은 세대들에 대한 조언

기자가 젊은 조선족 세대들에게 부탁의 말씀을 해달라고 청구하자 강경산 원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일하는것은 국가와 인류의 수요를 위해 일하는것이다.사회수요를 자기의 연구목적으로 하고 사회수요를 탈리한다면 필경 일사무성한다.”

“한 사람은 반드시 리상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 리상이 없으면 송장과 다름없다. 특히 젊은이는 꼭 자기의 리상을 수립하여야 하며 그 목표를 향하여 분투하여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근면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나는 선천적으로 총명한 사람이 아니다. 남보다 배로 노력하고 간고분투하여 이루어진것이다. 나의 일생경력을 볼때 항상 불순과 역경이 순리로움, 순경과 동행하였다고 본다".

“우리는 반드시 사회의 수요를 자기의 수요로 하고 노력하여야만 성공할수 있다. 개인의 인격소질을 제고하는데 공을 들이고 항상 남을 많이 생각하고 배려해주어야 한다. 매개인은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사회수요를 탈리한다면 일생 성과를 거둘수 없다”(인민넷 김홍화 기자, 길림신문 장춘영 기자).

근일 중국의 cctv중앙방송은 뉴스프로에서 장장 십몇분의 시간으로 강경산원사의 “미크로파 달”을 소개하였다. cctv뿐만 아니라 해내외 각 주요메체는 거의 동시에 이 중대한 사건을 보도하였고 이는 강경산 원사 새 연구성과의 중대성을 족히 보아낼수 있다.근일 중국달탐사공정 부총설계사, 중국과학원 달탐사공정응용총체부 총설계사, 국가863항천령역 전문가위원회 고문이며 중국조선족가운데 유일한 원사인 강경산의 “미크로파 달”(微波月亮)이 세계항천과학령역 및 언론계의 진동을 일으켰다. 강경산은 우리 나라 달 탐사공정중 국제상에서 제일 먼저 미크로파탐측기술을 응용하여 달의 궤도우에서 달표면에 대하여 감측하는 방법을 제기, 사용하였고 이 항목의 수석전문가를 담임하였다. 강경산과 그가 령도한 과학소조는 이 계통의 감측결과에 근거하여 세계적으로 제일 먼저 “미크로파 달”을 구축하였고 일련의 리정비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원시창신성과를 획득하였다. “2009년 달탐사 및 지학과학세미나”에서 강경산은 그가 그려낸 “미크로파 달”을 처음으로 세인에게 과시하였다. “상아1호”위성에 탑재한 미크로파 탐측의기가 전송한 수치에 근거하여 그려낸 “미크로파 달”은 지금까지 우리 인류에게는 미지세계였던 달의 뒷면 지질정황을 반영하였고 실제탐측수치에 근거하여 달 토양층의 평균뚜께가 5-6메터이고 헬륨3의 함량이 100만톤 가까이에 있다고 추정하였다. 이는 미국 ‘아폴로’우주비행선이 달에서 가져온 견본품에 근거하여 달표면의 헬륨3 저장량이 100만톤 내지 500만톤사이라는 추정보다 더 명확하였다. 강경산의 “미크로파 달”은 앞으로 인류가 달을 연구하고 우주를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강경산은 우리나라 항천원격탐측기술 창도자의 한사람이고 미크로파원격탐측기술(微波遙感)의 주요개척자이며 우리나라 미크로파원격기술 및 리론체계에 대하여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1973년에 강경산은 처음으로 미크로파원격탐측계획을 제기하였고 1975년 중국원격탐측기획회의를 소집하고 전학삼의 지도하 미크로파원격탐측을 추진하였다. 강경산은 우리 나라 75, 85 국가과학기술공관에서 원격공정전문항목을 합작주체하였고 원격기술기초시설을 건립하였으며 그 응용을 추동하였다. 강경산은 미크로파원격탐측을 처음으로 신주4호에 탑재하였고 이는 중국위성미크로파원격탐측 령의 돌파를 가져왔다. 2008년 5월 강경산은 미크로파원격탐측기를 성공적으로 기상위성에도 탑재하였다고 이제 2년후에 발사하게되는 해양위성2호에도 미크로파원격탐측기술을 적용하게 된다. 1986년부터 우리 나라 원격감측자연재해기술계통을 연구하였고 자연재해실시감측의 원격정보를 건립하여 우리 나라 돌발성재해감측의 정확성을 대대적으로 제고하였다.우리 나라의 저명한 과학자 전학삼은 강경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연구성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독창적인 성과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1957년 쏘련이 세계에서 첫 번째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였고 미국은 뒤이어 1958년에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 세계는 우주공간연구시대에 진입하였다. 당중앙과 모주석께서는 우리 나라에서도 인공위성을 발사하여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인공위성연구는 공백이나 다름없었고 쏘, 미의 봉쇄로 참고할수있는 자료도 없었다. 그리고 경제가 락후하고 공업기초가 박약하였다. “조건이 없으면 창조하여야 한다. 우리 힘으로 만들자. “상급은 강경산을 공정조 조장으로 임명하고 인공위성발사준비로 되는 공간탐측로케트발사에 관한 중대한 과업을 맡겼다.강경산은 연구소조를 이끌고 밤낮으로 자료를 찾고 실험을 하였다. 수많은 실패를 격고나서 끝내 받아온 과제를 해결하고 중국 첫 인공위성발사를 위해 큰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 첫 인공위성의 연구제작으로부터 시작하여 강경산은 선후로 여러개 응용위성탐측계통의 연구제작에 참가하였고 우리 나라 위성, 재인항천, 달탐사공정 3대 리정비적의의를 가지고 있는 령역에서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연구성과는 국가과학기술진보 특등, 1등, 2등상을 수여받았고 부위급 특등, 1등, 2등상 등 여러 가지 상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국가재인항천돌출공헌”상장과 “재인항천 증헌재기금돌출공헌상”, “863계획돌출공헌상”, “863계획 15주년 선진개인상”, “첫 달탐사공정돌출공헌자상” 등을 획득하였다. 그는 많은 석사연구생, 박사연구생과 과학기술골간을 배양하였고 론문 200여편을 발표하였으며 전문저작을 발표하였다. 강경산은 “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혼자만이 아닌 여러사람들과 여러 방면의 도움이 아주 컷다”고 말한다. 전학삼은 처음부터 강경산의 연구과제에 대하여 많은 지지를 해온 분이고 여러모로 도와주시고 서신왕래하며 그의 사업을 지지하였다. 1981년 강경산은 “중국에 조건이 없으니 미국에 가서 공부하라”는 전학삼의 제의로 미국에 가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강경산은 미국 캔싸스대학에 가서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과학자이며 미크로파원격측적기술의 창시인인 모르교수와 함께 연구사업을 하게 되었다. 강경산은 오늘의 성과가 있기에는 모르교수의 도움이 아주 컷다고 하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2년남짓한 사이에 강경산은 선후로 16편의 론문을 발표하였고 미국의 유명업체로부터 고급연구원으로 특별초빙까지 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1981년-1983년까지 미국에서 연구하고 돌아운 강경산은 미크로파원격탐측기술계통, 리론계통을 건립하였다. “과학기술은 1인이 완성할수 있는것이 아니다.”강경산은 또 전체 연구단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단체의 힘이 아주 컸다고 하였다. 강경산은 또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가정의 지지가 아주 중요하였다고 하였다. “연구사업을 하자면 정신을 고도로 집중하고 모든 정력을 몰두하여야 한다. 만일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면 사업의 성공이란 있을수 없다. 어머님으로부터 나의 형제, 처자에 이르기까지 나에 대한 도움은 무한한것이다.” 1936년2월8일, 강경산은 길림성룡정시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다섯살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혼자서 5남매를 키우셨다. 어머니는 강직하고 근로하며 지식이 있는 녀성이였다. 강경산원사는 지금도 어릴적 어머니가 해준 달나라의 이야기가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어릴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달이 무엇인가? 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고 달나라에 대한 환상에 빠진곤 한다고 하였다.현재 어릴적의 환상이 현실로 변해가고 강경산은 달에 대한 연구령역에서 정상급의 령역에 이르렀다. 현재 강경산원사는 핸드폰소리도 “반달”노래로 설치하였는데 원사의 달사랑을 족히 알수 있다. 강경산원사는 또 북경대학제1병원에서 부원장으로 계시는 부인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고 하였다.아들 , 딸을 혼자 키우다싶이 하였고 말할수 없이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문화대혁명때 조선 ,쏘련특무로 투쟁을 받아 로동개조를 내려갔다. 그 어려운 시기 부인은 시종 강경산의 옆에서 묵묵히 그를 지지하였고 정신적으로 아주 큰 지지를 주었다.당시 어떤 과학자들은 이런 시련과 모욕에 못이겨 자살의 길을 택한자도 있었다. 고향을 예기하노라면 강경산원사는 무한한 그리움에 잠긴다. 특수한 령역에서 사업하는 신분이 특수한 분으로서 강경산원사는 어디로 가나 호위가 배동하였고 또 어디를 함부로 다닐수가 없다. 지금까지 강경산은 연변에 두번 가본적이 있다. 2000년 금방 원사로 된후 당시 연변자치주 주장인 남상복주장의 초청으로 한번 갔고 2002년 연변자치주성립 50주년에도 간적 있다. 강경산은 “상아1호 발사후 연변조선족자치주 등개서기, 리룡희주장이 련명으로 축하서신을 보내온 이야기를 하면서 언제든지 힘과 조건이 된다면 고향건설사업에 이바지하고싶다”고 하면서 앞으로 자주 련락을 가지기를 바랬다. 강경산원사는 연변지역의 인재류실문제가 아주 심각하다고 인정하시면서 고향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여 항목을 인입하고 정책적으로 부축하여 경제를 발전시칸다면 자연히 인재를 흡인할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연, 룡,도 경제일체화진전을 가속화하고 훈춘지역개발을 가속화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과학으로 빈곤을 부축하는 력도를 가강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언제든지 기회가 있으면 고향건설을 추진하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하였다. 강경산은 “항천령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선족이 적지 않다.”고 하면서 이상영, 우병희등 조선족 과학자들을 렬거하기도 했다. 강경산 원사는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고도평가하면서 “국가의 이런 민족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민감하고 기밀적인 령역에서 조선족인재들이 활약껏 발전 할수 있고 오늘의 원사가 나올수 있었다”는것이였다. 그는 또 “현재 중국에는 우주항공령역에 종사하고있는 조선족이 적지 않은데 나이도 비교적 젊은 편”이라고 하면서도 40대-60대사이의 조선족 항천인재 단층현상에 대하여 아주 가석하게 생각하면서 많은 조선족 젊은 인재들이 조국의 항천사업에서 용솟음쳐 나올것을 희망하였다. 기자가 젊은 조선족 세대들에게 부탁의 말씀을 해달라고 청구하자 강경산 원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일하는것은 국가와 인류의 수요를 위해 일하는것이다.사회수요를 자기의 연구목적으로 하고 사회수요를 탈리한다면 필경 일사무성한다.” “한 사람은 반드시 리상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 리상이 없으면 송장과 다름없다. 특히 젊은이는 꼭 자기의 리상을 수립하여야 하며 그 목표를 향하여 분투하여야 한다“.“젊은이들에게 근면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나는 선천적으로 총명한 사람이 아니다. 남보다 배로 노력하고 간고분투하여 이루어진것이다. 나의 일생경력을 볼때 항상 불순과 역경이 순리로움, 순경과 동행하였다고 본다". “우리는 반드시 사회의 수요를 자기의 수요로 하고 노력하여야만 성공할수 있다. 개인의 인격소질을 제고하는데 공을 들이고 항상 남을 많이 생각하고 배려해주어야 한다. 매개인은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사회수요를 탈리한다면 일생 성과를 거둘수 없다”(인민넷 김홍화 기자, 길림신문 장춘영 기자).

근일 중국의 cctv중앙방송은 뉴스프로에서 장장 십몇분의 시간으로 강경산원사의 “미크로파 달”을 소개하였다. cctv뿐만 아니라 해내외 각 주요메체는 거의 동시에 이 중대한 사건을 보도하였고 이는 강경산 원사 새 연구성과의 중대성을 족히 보아낼수 있다.근일 중국달탐사공정 부총설계사, 중국과학원 달탐사공정응용총체부 총설계사, 국가863항천령역 전문가위원회 고문이며 중국조선족가운데 유일한 원사인 강경산의 “미크로파 달”(微波月亮)이 세계항천과학령역 및 언론계의 진동을 일으켰다. 강경산은 우리 나라 달 탐사공정중 국제상에서 제일 먼저 미크로파탐측기술을 응용하여 달의 궤도우에서 달표면에 대하여 감측하는 방법을 제기, 사용하였고 이 항목의 수석전문가를 담임하였다. 강경산과 그가 령도한 과학소조는 이 계통의 감측결과에 근거하여 세계적으로 제일 먼저 “미크로파 달”을 구축하였고 일련의 리정비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원시창신성과를 획득하였다. “2009년 달탐사 및 지학과학세미나”에서 강경산은 그가 그려낸 “미크로파 달”을 처음으로 세인에게 과시하였다. “상아1호”위성에 탑재한 미크로파 탐측의기가 전송한 수치에 근거하여 그려낸 “미크로파 달”은 지금까지 우리 인류에게는 미지세계였던 달의 뒷면 지질정황을 반영하였고 실제탐측수치에 근거하여 달 토양층의 평균뚜께가 5-6메터이고 헬륨3의 함량이 100만톤 가까이에 있다고 추정하였다. 이는 미국 ‘아폴로’우주비행선이 달에서 가져온 견본품에 근거하여 달표면의 헬륨3 저장량이 100만톤 내지 500만톤사이라는 추정보다 더 명확하였다. 강경산의 “미크로파 달”은 앞으로 인류가 달을 연구하고 우주를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강경산은 우리나라 항천원격탐측기술 창도자의 한사람이고 미크로파원격탐측기술(微波遙感)의 주요개척자이며 우리나라 미크로파원격기술 및 리론체계에 대하여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1973년에 강경산은 처음으로 미크로파원격탐측계획을 제기하였고 1975년 중국원격탐측기획회의를 소집하고 전학삼의 지도하 미크로파원격탐측을 추진하였다. 강경산은 우리 나라 75, 85 국가과학기술공관에서 원격공정전문항목을 합작주체하였고 원격기술기초시설을 건립하였으며 그 응용을 추동하였다. 강경산은 미크로파원격탐측을 처음으로 신주4호에 탑재하였고 이는 중국위성미크로파원격탐측 령의 돌파를 가져왔다. 2008년 5월 강경산은 미크로파원격탐측기를 성공적으로 기상위성에도 탑재하였다고 이제 2년후에 발사하게되는 해양위성2호에도 미크로파원격탐측기술을 적용하게 된다. 1986년부터 우리 나라 원격감측자연재해기술계통을 연구하였고 자연재해실시감측의 원격정보를 건립하여 우리 나라 돌발성재해감측의 정확성을 대대적으로 제고하였다.우리 나라의 저명한 과학자 전학삼은 강경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연구성과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 독창적인 성과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1957년 쏘련이 세계에서 첫 번째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였고 미국은 뒤이어 1958년에 인공위성을 발사하였다. 세계는 우주공간연구시대에 진입하였다. 당중앙과 모주석께서는 우리 나라에서도 인공위성을 발사하여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의 인공위성연구는 공백이나 다름없었고 쏘, 미의 봉쇄로 참고할수있는 자료도 없었다. 그리고 경제가 락후하고 공업기초가 박약하였다. “조건이 없으면 창조하여야 한다. 우리 힘으로 만들자. “상급은 강경산을 공정조 조장으로 임명하고 인공위성발사준비로 되는 공간탐측로케트발사에 관한 중대한 과업을 맡겼다.강경산은 연구소조를 이끌고 밤낮으로 자료를 찾고 실험을 하였다. 수많은 실패를 격고나서 끝내 받아온 과제를 해결하고 중국 첫 인공위성발사를 위해 큰 공헌을 했다. 우리나라 첫 인공위성의 연구제작으로부터 시작하여 강경산은 선후로 여러개 응용위성탐측계통의 연구제작에 참가하였고 우리 나라 위성, 재인항천, 달탐사공정 3대 리정비적의의를 가지고 있는 령역에서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의 연구성과는 국가과학기술진보 특등, 1등, 2등상을 수여받았고 부위급 특등, 1등, 2등상 등 여러 가지 상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국가재인항천돌출공헌”상장과 “재인항천 증헌재기금돌출공헌상”, “863계획돌출공헌상”, “863계획 15주년 선진개인상”, “첫 달탐사공정돌출공헌자상” 등을 획득하였다. 그는 많은 석사연구생, 박사연구생과 과학기술골간을 배양하였고 론문 200여편을 발표하였으며 전문저작을 발표하였다. 강경산은 “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혼자만이 아닌 여러사람들과 여러 방면의 도움이 아주 컷다”고 말한다. 전학삼은 처음부터 강경산의 연구과제에 대하여 많은 지지를 해온 분이고 여러모로 도와주시고 서신왕래하며 그의 사업을 지지하였다. 1981년 강경산은 “중국에 조건이 없으니 미국에 가서 공부하라”는 전학삼의 제의로 미국에 가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강경산은 미국 캔싸스대학에 가서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과학자이며 미크로파원격측적기술의 창시인인 모르교수와 함께 연구사업을 하게 되었다. 강경산은 오늘의 성과가 있기에는 모르교수의 도움이 아주 컷다고 하였다. 미국에 거주하는 2년남짓한 사이에 강경산은 선후로 16편의 론문을 발표하였고 미국의 유명업체로부터 고급연구원으로 특별초빙까지 받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1981년-1983년까지 미국에서 연구하고 돌아운 강경산은 미크로파원격탐측기술계통, 리론계통을 건립하였다. “과학기술은 1인이 완성할수 있는것이 아니다.”강경산은 또 전체 연구단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단체의 힘이 아주 컸다고 하였다. 강경산은 또 오늘의 성과가 있기까지에는 가정의 지지가 아주 중요하였다고 하였다. “연구사업을 하자면 정신을 고도로 집중하고 모든 정력을 몰두하여야 한다. 만일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다면 사업의 성공이란 있을수 없다. 어머님으로부터 나의 형제, 처자에 이르기까지 나에 대한 도움은 무한한것이다.” 1936년2월8일, 강경산은 길림성룡정시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다섯살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혼자서 5남매를 키우셨다. 어머니는 강직하고 근로하며 지식이 있는 녀성이였다. 강경산원사는 지금도 어릴적 어머니가 해준 달나라의 이야기가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어릴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는 달이 무엇인가? 달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고 달나라에 대한 환상에 빠진곤 한다고 하였다.현재 어릴적의 환상이 현실로 변해가고 강경산은 달에 대한 연구령역에서 정상급의 령역에 이르렀다. 현재 강경산원사는 핸드폰소리도 “반달”노래로 설치하였는데 원사의 달사랑을 족히 알수 있다. 강경산원사는 또 북경대학제1병원에서 부원장으로 계시는 부인에게 특별히 감사를 드린다고 하였다.아들 , 딸을 혼자 키우다싶이 하였고 말할수 없이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문화대혁명때 조선 ,쏘련특무로 투쟁을 받아 로동개조를 내려갔다. 그 어려운 시기 부인은 시종 강경산의 옆에서 묵묵히 그를 지지하였고 정신적으로 아주 큰 지지를 주었다.당시 어떤 과학자들은 이런 시련과 모욕에 못이겨 자살의 길을 택한자도 있었다. 고향을 예기하노라면 강경산원사는 무한한 그리움에 잠긴다. 특수한 령역에서 사업하는 신분이 특수한 분으로서 강경산원사는 어디로 가나 호위가 배동하였고 또 어디를 함부로 다닐수가 없다. 지금까지 강경산은 연변에 두번 가본적이 있다. 2000년 금방 원사로 된후 당시 연변자치주 주장인 남상복주장의 초청으로 한번 갔고 2002년 연변자치주성립 50주년에도 간적 있다. 강경산은 “상아1호 발사후 연변조선족자치주 등개서기, 리룡희주장이 련명으로 축하서신을 보내온 이야기를 하면서 언제든지 힘과 조건이 된다면 고향건설사업에 이바지하고싶다”고 하면서 앞으로 자주 련락을 가지기를 바랬다. 강경산원사는 연변지역의 인재류실문제가 아주 심각하다고 인정하시면서 고향의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여 항목을 인입하고 정책적으로 부축하여 경제를 발전시칸다면 자연히 인재를 흡인할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연, 룡,도 경제일체화진전을 가속화하고 훈춘지역개발을 가속화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과학으로 빈곤을 부축하는 력도를 가강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언제든지 기회가 있으면 고향건설을 추진하는데 기여하고 싶다고 하였다. 강경산은 “항천령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선족이 적지 않다.”고 하면서 이상영, 우병희등 조선족 과학자들을 렬거하기도 했다. 강경산 원사는 당과 국가의 민족정책을 고도평가하면서 “국가의 이런 민족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민감하고 기밀적인 령역에서 조선족인재들이 활약껏 발전 할수 있고 오늘의 원사가 나올수 있었다”는것이였다. 그는 또 “현재 중국에는 우주항공령역에 종사하고있는 조선족이 적지 않은데 나이도 비교적 젊은 편”이라고 하면서도 40대-60대사이의 조선족 항천인재 단층현상에 대하여 아주 가석하게 생각하면서 많은 조선족 젊은 인재들이 조국의 항천사업에서 용솟음쳐 나올것을 희망하였다. 기자가 젊은 조선족 세대들에게 부탁의 말씀을 해달라고 청구하자 강경산 원사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일하는것은 국가와 인류의 수요를 위해 일하는것이다.사회수요를 자기의 연구목적으로 하고 사회수요를 탈리한다면 필경 일사무성한다.” “한 사람은 반드시 리상과 신념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이 리상이 없으면 송장과 다름없다. 특히 젊은이는 꼭 자기의 리상을 수립하여야 하며 그 목표를 향하여 분투하여야 한다“.“젊은이들에게 근면하고 노력하여야 한다. 나는 선천적으로 총명한 사람이 아니다. 남보다 배로 노력하고 간고분투하여 이루어진것이다. 나의 일생경력을 볼때 항상 불순과 역경이 순리로움, 순경과 동행하였다고 본다". “우리는 반드시 사회의 수요를 자기의 수요로 하고 노력하여야만 성공할수 있다. 개인의 인격소질을 제고하는데 공을 들이고 항상 남을 많이 생각하고 배려해주어야 한다. 매개인은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사회수요를 탈리한다면 일생 성과를 거둘수 없다”(인민넷 김홍화 기자, 길림신문 장춘영 기자).

월구의를 설명하고있는 강경산원사. 강경산원사의 달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35여년 지속되였다. 앞으로 계속 연구를 멈추지 않을것이라 한다.
도사 모르교수와 함께.
길림조선문보 장춘영기자(왼쪽 위치)와 인민넷 김홍화기자(오른쪽 위치)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다.
인민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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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8-29
  • 해외를 다니는 상선에서 핏자국만 남긴 채 종적이 사라진 중국동포 선원 노동자의 가족들이 피의 호소를 해 왔다. 회사측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책임이 없다고 발뺌을 하였다.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은 눈치만 보며 입을 닫았다. 그런데 죽은 자는 말이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시신도 찾지도 못했지만 증거가 없으니 보상...
  • 2011-08-29
  • 최경선선생은1987년 2월부터 길림성 룡정시 지신중학교에서 교수생애를 시작하여서부터 지금까지 24년간 줄곧 영어과교수로 활약했으며17년간이나 학급담임교사로 혼신을 다 바쳐온 우수공산당원이다.   1991년에 교사대오가 부족한 지신중학교에서 최선생은 초중1, 3학년의 영어과교수와 초중3학년 담임을 맡게 되였...
  • 2011-08-26
  • [인터넷료녕신문 2011-08-23 박경상, 리덕권 기자] 기자는 일전 대련에서 젊음의 패기와 혈기로 넘치는 30대초반의 엘리트 조선족기업인 김성호씨(1978년생)를 만났다. 대형선박생산장비와 자동화용접라인설비로 무장된 대련가성공업유한회사외 무역회사 등 4개의 탄탄한 기업을 둔 그는 창업 10년만에 자수성가로 대련에 탄...
  • 2011-08-23
  • [료녕조선문보 2011-08-23 김창영 기자] 참다운 인맥으로 쌓아올린 성공의 금자탑 료녕성 철령방정종이박스유한책임회사 오광훈리사장을 만나본다 오광훈리사장 오광훈(吴光勋) 프로필 1969년 1월 13일 철령시 출생 1987년 9월-1991년 7월 대련리공대학 1991년 10월-1996년 8월 철령시 은주구민정국 1996년 8월-1997년 4월 ...
  • 2011-08-23
  • [길림신문 2011-08-22 전춘봉 특파기자] 이화녀자대학교 녀성학과 리해응박사를 만나 리해응박사 한국 이화녀자대학교에 녀성학이라는 학과가 있다. 녀성의 인간화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으로 대학에서 열점 학과로 인정받아 국내외의 학자들이 적지 않게 모여들고있다. 마침 이 학과에 박사과정 수료중인 리해응(조선족...
  • 2011-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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