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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주-새시기 연변축구의 견증인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2월15일 09시33분    조회:7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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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시기 연변축구의 견증인 
연변축구팀 김광주감독을 만나다

김광주 프로필:

1968년 4월 길림성 화룡시  동성진 흥성촌 출생
1979년 화룡시 동성향 흥성소학교 3학년, 축구 시작
1980년 화룡시 건설소학교 축구팀 전학
1983년 연변체육학교 입학
1986년 연변체육공작대팀 길림성팀 합류
1988년―1992년 길림성팀 (을급팀)
1992년부터 길림성팀 주장 력임
1993년 제7기전국운동대회 참가, 5등, 력사최고기록
1994―1995 중국국가팀, 12기아세아운동회(일본)  2등
 1994―1997 중국 프로리그 갑A 참가, 길림삼성, 연변현대, 연변오동팀 주장으로 활약
2001년 자비로 일본 체육전문대학교 코치, 운동원, 연구생
2003년 연변체육학교 후비양성
2006년 아세아축구련맹A급 교련원증 수령
2008년 연변2팀 감독, 길림성 전국운동회팀 감독
2009년 연변팀 코치 겸 조리 감독
2009년 5월12일부터 현재 연변팀 집행감독
 

1968년 원숭이띠로 올해 마흔을 갓 넘긴 연변팀 현임감독 김광주는 감독이기전에 너그러운 성품과 뛰여난 축구기교로 일찍 축구팬들과 조선족들에게 널리 알려졌었다.

소학교 3학년부터 축구공을 만지기 시작하여 익히고 벼려온 축구기교와 축구의식은 그로 하여금 연변팀에서 제일 오랜 축구팀 주장으로 연변팀의 풍운을 겪게 했고 오늘엔 연변축구의 미래를 떠멘 감독으로 되게 했다. 

지난 10일 저녁 7시, 기자는 힘겹게 연변팀 감독 김광주와 단독인터뷰를 할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한국 제주도행 행장을 금방 풀었지만 김감독은 로독도 풀새없이 빽빽한 일정때문에 눈코뜰사이 없이 바삐 돌아치고있었다. 이번 제주도행으로 연변팀은 예기의 훈련목적을 이루고 팀에 존재하던 문제점과 부족점을 새롭게 다듬이질 할수 있어 좋았다는것이 김감독의 제주도평이다. 귀향한 연변팀은 현재 잠시 휴식을 취하고있으며 14일부터 재소집돼 본격 훈련에 들어가게 된다.

평강벌이 맺어준 축구인연

항상 축구장에서만 보아왔던 김광주를 마주하고보니 껑충한 키와 단단한 몸매에서 축구선수라는 느낌을 확 받을수 있었다. 눈길에는 날이 서있었고 적은 말수였지만 축구에 대한 통찰력을 읽을수 있었다.

1968년 4월 7일, 김광주는 화룡시 동성향신용사의 회계로 있던 부친 김동국의 세 아들중 둘째로 태여났는데 아버지가 소문난 《운동객》이였단다. 사실 김광주보다 그의 형이 뽈을 잘 찼는데 김광주가 소학교 3학년 후학기에 접어들 때 당시 흥성소학교 축구교원을 하고있던 강길복선생(많은 소년축구인재 양성)이 형이 아니라 생각밖으로 둘째 김광주를 지목하면서 축구를 배우게 하라고 김광주의 아버지에게 여러번 지청구를 했단다. 강길복선생에게 설복당한 아버지는 결국 김광주를 강길복선생에게 맡겼는데 김광주의 축구인생 또한 이렇게 우연하게 평강벌의 자그마한 소학교운동장에서 시작되게 되였단다.

당시 체구가 남보다 작았던 김광주였지만 강길복선생의 지도하에 열심히 축구를 익혔고 1년후인 1980년 스승을 따라 화룡시체육학교(건설소학교)로 전학을 했다. 오전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뽈을 차면서 점차 축구를 몸으로 익히기 시작하였다. 당시 김광주는 같은 또래보다 키가 작았지만 속도가 빨라 날렵했기에 팀에서 항상 오른쪽 날개로 뛰군 했다. 그때 화룡팀은 소학교팀에선 강팀으로 소문났었는데 전국 새싹컵경기에서 1등이라는 영예도 거두었다.

체육학교때 전국청년컵경기서 김광주는 처음으로 수비를 담당했는데 수비수의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해 연변청소년팀은 전국5등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건설소학교에서 축구 어섯눈을 뗀 김광주는 소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당시 방근섭, 박문호, 최광일 등과 같이 주체육학교에 입학하였고 연변체육계의 유명한 원로인 정종섭에게서 축구를 배우게 되였다. 연변체육학교 3학년이 되자 김광주는 키가 부쩍 크기 시작하고 체력이 늘기 시작하면서 점차 팀의 주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김광주가 체육학교를 졸업할 무렵 전국도시운동회가 열렸는데 그에 대비해 체육학교팀, 장춘팀, 체공팀을 합류하여 젊은 선수들로 팀을 무었는데 김광주도 그 팀에 합류했다. 그후 김광주는 방근섭, 최광일, 한종국(문지기) 등과 같이 길림성팀에 합류해 6기전국운동회에 참가했는데 이때로부터 김광주는 직업축구인의 인생에 완전 들어섰고 길림성축구팀에서 정식 활약했다. 그당시 길림성팀은 거의 다 조선족들로 이루어졌는데 역시 연변팀이기도 했다.

《장백호랑이》 다시 산에서 내려오다

전국이 놀랐다―연변팀은 진짜 장백호랑이란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김광주는 6기와 7기 전국운동회에 다 참가했다. 1993년 전국제7기운동회때 연변팀은 중국축구무대에서 크나큰 돌풍을 일으켰다. 그때의 정경을 회억하는 김광주는 저으기 흥분돼 있었다.

《그때 길림성팀은 소조경기에서 대련, 북경, 천진 팀을 몽땅 이겨버렸다. 강팀들도 공격형전술을 쓰는 길림성팀과 맞붙으면 어쩔줄 몰라했다.》 김광주의 말이다. 당시 길림팀의 사령탑을 잡았던 리호은감독이 중국축구에서는 처음으로 3―5―2 공격형전술을 구사했던것이다. 하여 길림팀만큼 사람들의 주목을 끈 팀은 없었고 제일 큰 화제였다.

《운동회 5등이라는 결과에 전문가, 감독, 축구선수, 축구팬 모두가 불만족했다.》 허나 길림팀이 보여준 전면진공, 전면방어, 끊길줄 모르는 체력…등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겨주었고 중국축구가 나갈 앞날을 암시해주기도 했다. 길림팀이 중국축구계에 몰고 온 새로운 축구사유는 5등이라는 팀의 성적을 훨씬 초월했다고 당시 매스컴들에서는 길림팀과 팀을 이끈 리호은감독에게 높게 점수를 주었다.

김광주는 당시 료녕팀과의 준결승전에서 부상, 주력수비였던 그는 팅팅 부은 다리때문에 주사를 맞아가며 경기를 치렀다 한다. 김광주를 비롯한 주력선수들이 줄줄이 부상을 입어나가고 상대팀들에서 전문 길림팀 기전술을 연구해 해법을 찾아 맞선데서 끝없이 나가던 연변팀은 아쉽게도 5등선에서 발길을 접어야 했다. 김광주와 같은 팀선수들의 결사정신과 리호은감독의 앞선 기전술은 7기운동회를 통해 연변팀으로 하여금 장백호랑이에 걸맞는 이름을 가지게 하였다.

60년대 중국축구무대를 흽쓸어 장백호랑이라 불리던 연변팀이 다시 한번 전국을 흔들면서 《장백호랑이가 다시 내려왔다》고 중국축구계가 들썽했다.

국가팀의 3총사와 연변팀의 최장 주장

1955년에 설립된 길림성팀은 성팀이자 곧 연변팀이였다. 연변축구는 항상 길림성의 기타 지구보다 앞섰고 성팀선수 거의 다가 연변조선족들이였기 때문이였다. 길림성팀은 설립된 이래 고종훈, 김광주, 리홍군 등 40여명을 국가팀선수로 양성해냈다.

7기운동회가 끝난 후 김광주는 고종훈, 리홍군과 함께 국가팀에 뽑히웠다. 연변팀의 중앙수비수였고 수비핵심이였던 김광주는 척무생의 국가팀에 합류된 후에도 서홍, 범지의와 같이 국가팀의 수비를 맡았다. 국가팀에 들어간 조선족 3총사는 항상 훈련도 열심히 하고 경기도 최선을 다했기에 척무생의 총애도 받았다고 한다. 1994년 김광주는 국가팀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있은 제12회아세아운동회에서 은메달을 따냈다. 김광주는 국가팀 주력수비로 결승전에까지 뛰였으며 고종훈은 첫 경기와  이란팀과의 관건경기에서 관건적인 두꼴을 넣는 등 큰 공을 세웠다.

1994년부터 중국직업축구가 시작되자 연변팀은 중국 갑A리그에서 길림삼성, 연변현대와 길림오동으로 세번 이름을 바꾸면서 7년간 갑A리그를 지켰었다. 갑A리그때 김광주는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연변팀의 주장을 맡고 운동장을 누볐는데 연변팀 사상 제일 오랜 주장경력이라 할수 있다. 오래동안 주장을 맡으면서 김광주는 넓은 시야로 운동장흐름을 느끼고 파악하는 통찰력을 키울수 있었고 정체성있는 팀으로 움직이게 조직력을 키울수 있었으며 넓은 흉금과 너그러운 인품으로 팀의 단합을 이끌수 있는 인성을 갖추게 되였다.

1997년 새로운 시즌, 연변팀은 한국의 최은택감독을 청해다 연변팀의 지휘봉을 맡겼다. 최은택감독의 지휘봉밑에서 저조기에 처해있던 연변팀은 또 한번 중국축구시즌에 강한 돌풍을 일으켰다.

《최은택감독은 중국축구에선 볼수 없었던 새로운 축구사상을 가르쳤다. 훈련만 보아도 그때 수준에선 상상도 할수 없었던 전술을 기용했고 가르쳤다. 최은택감독은 어린 선수를 과감히 기용했는데 그때 떠오른 선수가 바로 황동춘, 정동칠, 김청 등이다. 이들은 최은택감독의 눈에서 발견된 축구인재들이다. 최은택은 중국축구에 새로운 의식과 정신을 가져다주었고 중국축구가 한걸음 발전하게 하였다.》 최은택감독에 대한 김광주의 평이고 그해 시즌 연변팀이 시즌 4위를 거둘수 있었던 원인에 대한 분석이기도 했다.

연변팀이 최은택감독의 밑에서 돌풍을 일으키고있을 때 김광주는 아쉽게도 3륜 경기이후 병때문에 퇴역할수 밖에 없었다.

2001년 김광주는 자비로 일본에 건너가 모 체육대학에 가 코치 겸 운동원으로 일본 대학리그전에 참여하다가 일본 학예대학에서 연구생으로 축구리론을 배웠다. 2003년 김광주는 연변체육학교에 돌아와 코치로 부임하며 축구팀 후비양성에 몸을 담기 시작했다. 그때 양성한 배육문, 한청송, 김경도(현 국가청년팀 주장) 등 선수들은 현재 연변팀의 주력으로 부상했다. 2007년 10월, 김광주는 연변2팀 감독으로 부임해 11기전국운동회준비와 저조기에 처한 연변팀의 후비력양성에 정력을 쏟아부었다.

연변팀의 반전―김광주 운좋은 감독인가?

2009년시즌 연변팀은 6륜까지 3점밖에 득점못해 팬들의 원성이 커졌고 연변팀은 강급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일전 한푼의 후원도 없은 연변팀은 선수들의 정서파동이 심했고 사처에 깔려있는 여러 가지 곤경에서 헤여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를 봐도 문제투성이인 연변팀의 운명이 제7륜결속후부터 조리감독으로 있던 김광주에게로 돌아왔다.

김광주가 될가? 대부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또한 별수 없는 선택이라 모두 숨을 죽이고 김광주감독을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 당시 팀과 팬들의 심정이였다.

헌데 김광주가 연변팀의 키를 잡자 연변팀은 역전을 거두기 시작했다. 첫 원정경기 승리로 시작한 감독생애, 참으로 운이 좋았을가?

《선수들과 진심어린 대화를 통해 서로 리해하고 믿고 단결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팀의 정체성이 관건이라 생각한다. 마지막까지 선수들이 큰 힘이 되여주었다. 전술상에서도 작은 구역에서의 짧은 패스와 다수로 소수를 압박하는 축구로 체질과 속도가 차한 팀의 약점을 보완했다. AC밀란과 같은 구라파팀의 전술을 많이 배우기도 했다.》

김광주감독이 운이 좋았는가 하는 기자의 물음에 주는 대답이였다. 감독교체후 결코 연변팀의 련승은 우연히 이뤄진것이 아니였다. 김광주는 부임후 팀의 단합으로 선수들에게서 잃어졌던 승부욕을 부활시켰고 연변팀에 맞는 기전술을 활용하기에 노력했으며 그 기전술에 따라 용병기용여부도 결정했다. 팀의 정신과 팀의 선수, 선수에 맞는 기전술, 대방팀에 따라 선택한 부동한 선수기용과 기전술 등 이 모든것이 김광주감독이 탈락의 벼랑에 섰던 팀을 6위까지 끌어올리고 시즌을 마무리시킨 리유가 아니겠는가?

기자: 경제력외에 연변팀에 가장 부족한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김광주감독: 올시즌 스폰서가 없이 뽈을 찬 유일한 축구팀이 연변팀이다. 경제문제도 아주 중요하지만 후비군양성도 아주 큰 문제로 대두했다. 각 현시에 있던 축구학교가 다 없어지고 인젠 연변체육학교 하나만 달랑 남았다. 학교의 학생모집도 학교에서 기층을 돌아다니며 《청하고 빌어야》 하는 형편이고 그것도 30명―40명 한개 팀을 만들자면 쉽지 않다. 몇년 지나면 몇명 남지 않는다. 후비양성에 정력을 넣지 않으면 대가 끊기는것은 시간문제이고 이것이 계속되면 우리 축구를 운운할 여지도 없게 된다.

기자: 새로운 시즌 어떤 대안이 있는가?

김광주감독: 팀의 관건은 선수이다. 대담히 선수교체를 이루어내여 팀의 분위기를 쇄신하며 전술도 연변선수들에게 맞는 전술을 연구하고 구사할것이다. 외적용병은 시합에서 아주 큰 작용을 노는데 심각히 연구할 과제다. 물론 관건은 경제력이고 후원이겠지만.

기자: 경제력이 따라가면 슈퍼팀으로 올라갈 신심 있는가?

김광주감독: 연변팀은 오랜 력사를 가진 팀으로서 결코 약한 팀이 아니다. 선수들 매개인들마다 서로의 특점과 우세가 있다. 이를 잘 살리면 연변팀은 약팀이 아니다. 경제력이 따라가 연변팀에 알맞는 수준이 높은 외적용병을 인입할수 있으면 슈퍼팀진출은 겨뤄볼만한 게임이라 생각한다.

기자: 축구팬에게 할 말은

김광주감독: 연변의 축구팬은 축구를 감상할줄 아는 수준높은 팬들로서 다른 지역과는 틀린다. 올시즌 연변의 홈장관중수는 9만 8000여명이였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세번째로 많은 관중수다. 올시즌 연변팀이 부진에서 헤여나올수 있었던것도 팬들의 응원과 갈라놓을수 없다. 새해에도 연변팀을 사랑하는 팬들이 경기장을 계속 찾아주어 힘이 되여주길 바란다. 연변팀은 영원히 자식과 같은 조선족축구팀이기에 성적이 좋으나 나쁘나 새해에도 자식처럼 사랑해주고 응원해주길 바란다.

길림신문 김룡 김태국 박금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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