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량성춘-그는 원래 일본어교사였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1월6일 10시24분    조회:930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일본어교사였다
ㅡ태강(TAIKO심수)전자유한회사 제조부 부장 량성춘씨를 만나
 
10년전 화룡시 투도광흥중학교에서 일본어교원으로 사업하다가 일본어반급이 취소되자 관내진출을 선택한 30대의 젊은이가 있었다.
 
독특한 일본어 과당교수로 화룡시는 물론 연변주에서도 소문이 높았던 량성춘씨는 배운 전업지식 대신 다른 학과를 선택해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장시간의 고민을 거쳤다.
 
어디로 갈것인가를 궁리하다가 선택한곳이 바로 1979년에 자그마한 진으로부터 경제특구로 된 나어린 심수시였다.
 
하지만 심수역에 내리는 순간부터 그는 생계때문에 전전긍긍해야 하였다. 친구나 친척은 물론 풋면목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대륙남단의 개방도시에 1500원을 지니고 온 량성춘(41)씨는 일자리를 얻기 위하여 인재시장이며 부근의 외국기업들을 수없이 방문했다. 그때까지만도 연변에는 핸드폰을 사용하는 사람이 헤아릴 정도로 적었지만 심수는 길가는 사람 모두가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었다. 나에게도 핸드폰이 있을 날이 오겠지하는것이 그의 처음의 꿈이였다.
 
기실 련락전화가 없는것이 그렇듯 힘든 줄을 그때에야 실감했다. 심수역 부근의 인재시장에서 꾸린 허술한 려관의 전화번호를 개인서류에 련락주소로 남기고 매일같이 전화오기만 기다린다것은 그냥 고달픈 일이 아니였다.
 
왜소한 키에 가냘픈 몸집, 서생티가 다분한 량성춘씨는 한달동안을 발바닥이 닳도록 면접을 다녔지만 일자리를 구할수 없었다. 심수에 오면 자기의 일본어, 한국어, 한어 등 3개국어 우세로 쉽게 일자리를 구할것이라고 굳게 믿어온 아름다운 생각이 여지없이 허물지는 순간순간을 수십번 감내하였다.
 
생계때문에 막무가내로 대만기업과 한국기업에 취직하였으나 모두 석달을 넘기지 못하고 퇴사하고 만다. 각박하고 사람을 바쁘게 구는 대만기업이나 사장이란 사람이 시도때도 없이 팔을 걷고 일하여 직원들을 안절부절 못하게 하는 한국기업은 도저히 있을 방법이 없었다.
 
술과 담배를 모르는 량성춘씨는 1500원씩 되는 로임을 아꼈다가 다시 일자리를 찾으려고 심수역 인재시장을 찾았다. 이번에는 기업관리가 째이고 로임도 다른 기업에 비해 높은 일본기업을 찾으리라 작심하였다.
 
개인서류를 제출하고 한달동안 기다렸으나 일자리는 나지지 않고 자기처럼 집을 떠났지만 일자리는 구하지 못하고 돈만 거덜나 고생하는 안도, 왕청에서 온 조선족청년 둘을 만나게 된다. 마음씨가 착한 량성춘씨는 년하의 청년들을 숙박료가 10원인 자기 려관에 데려다 합숙하면서 다시 한달동안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셋이 쓰다보니 수중의 돈이 바닥날 지경에 이른다. 그들의 손에 돈 150원이 남았을 때 지금의 태강전자(TAIKO심수)회사에서 일본어 통역 겸 관리일군을 초빙하게 되여 면접을 보게 되였고 탄탄한 일어실력으로 면접에 무난히 통과된 량성춘씨는 함께 있던 두 청년에게 돈 백원을 남겨주고는 50원을 들고 보안구 사정에 위치한 회사를 찾아간다.
 
려관에 두고온 젊은이들이 늘 생각나 밤잠을 잘수 없었던 량성춘씨가 일본인 동료로부터 돈을 꾸어가지고 세집을 맡은후 려관에 찾아가보니 그들은 어데로 갔는지 없었다. 그때에는 모두 핸드폰이 없던터라 려관을 나가면 다시 찾을 길이 없었다.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어떻게 변했을가 하고 생각할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정밀한 생산기술력과 빈틈없는 관리체계를 자랑하는 TAIKO-DEVICE는 1958년에 설립된 전자회사로 도꾜에 본사를 두고 나고야와 구라파에 각각 영업소와 련락사무소를 둔 중소형기업이지만 지난세기말부터 한국 경상남도에 영진전기주식회사, 향항과 심수에 태강전자유한회사를 앉히면서 국제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한다. 이 회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동차 PC판 전용계전기를 생산하는 전문업체로 1997년에 개발하고 판매하기 시작한 TA, TB계전기가 7억개를 초과하였는데 동류제품중에서 최고의 품질로 평가받는다고 한다. 
 

 
1000명의 직원들이 제조부에서 일하고 있다.
 
이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소형화, 정밀화, 무소음화로 이름이 높은데 개발, 설계, 선진기술, 제조가 일체화된 생산모식으로 세계최고수준의 품질을 보장한다. 하기에 일본의 자동차회사와 구라파의 자동차회사들에만 공급하고 국내나 대만의 자동차회사들의 주문은 아예 받지도 않는다. 리유는 판매량이 많고 적고를 떠나 남의 제품에 을 잘 대는 중국사람들이 제품을 개량생산하거나 되넘기기를 하여 회사의 지명도를 떨굴가봐 우려하기 때문이다.
 
회사의 말단 직원이나 다름없는 통역으로 일하면서 홀로 일본사람과 한족직원들사이에 다리를 놓아야 했다. 일본에서 온 기술일군들이 일본어로 기술요령을 가르치고 생산요구를 말하면 한어로 차근차근 설명해주어야 하는데 교육년령이 짧은 한족들을 리해시키기란 정말 쉽지 않았다. 만분의 5이내로 불량품을 공제하는 정밀한 작업을 초중문화수준의 한족직원들에게 요구하는 일본인의 경영방식때문에 머리를 많이 굴려야 했다.
 
그래도 학교에서 담임교원으로 몇년간 사업한 경력이 은을 냈다. 알기 어려운 리론이나 과정을 직원들이 쉽게 리해할수 있도록 방법을 강구했으며 그들과 같이 작업을 하면서 난제를 풀기도 하였다. 회사가 차츰 틀이 잡히고 관리체계가 잡히면서 직원들로부터 위망이 있는 중국적직원을 중층간부로 발탁하기 시작하였다.
 
6명의 일본인과 1250여명의 직원을 가지고 있는 회사에서 량성춘씨는 첫사람으로 과장으로 되였고 지난해에는 파격적으로 생산제조부 부장에 발탁되였다. 로임도 원래의 1500원으로부터 5천, 8천을 지나 만원선을 넘었다.
 
현재 량성춘씨는 4명의 반장과 60여명의 조장들을 관리하고 있으며 그 수하에는 천여명의 직원들이 생산작업을 하고있다.
 
《일본어나 영어, 한국어 하나만 가지고 밥먹는 세월은 지나갔습니다. 일하는 태도, 일하는 방법을 강조할때가 왔습니다. 한족애들이 일본어를 배우러 계서나 가목사 등지로 가는것을 보고 연변에서는 왜서 일본어전업을 버렸을가하고 안타까워 한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통역으로 일하면서 얼마 안되는 로임으로 만족하는 일부 조선족친구들을 보면 또 그런 안일함에 안타까울때가 많았습니다.》
 
량성춘씨는 조선족들이 쉽게 배울수 있는 일본어를 버린 연변의 교육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본기업에서 얻은 체험을 들려준다. 머리로 일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일속에 흠뻑 빠져들면 일본인들도 손을 들더란다. 남이 시키는 일만 하고 회사의 다른 일을 관계하지 않으면 그냥 거기서 거기일뿐이란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하고 더 잘하겠는가를 많이 생각하다보면 일에 미립이 트고 관리도 빈틈없이 되는데 그가운데서 수하직원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일본인간부들의 앞에서 그들의 말이나 번역해주고 큰 소리만 뻥뻥 치면 다인줄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면 그의 앞날은 길지 못하다고 짤라 말한다.

이 회사의 최고 권력자인 키소오 총경리는 늘 량성춘씨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든다. 《머리로 일할줄 아는 아주 총명한 사람입니다. 회사의 상하 물론하고 인정하는 관리일군입니다.》 회사에 그 어떤 일이 발생해도 량성춘씨가 나서면 해결하기가 쉽기때문이다.
 
호북에서 온 리씨 직원은  이렇게 말한다. 《량부장은 진짜 우리를 많이 생각해주어요. 회사에 금방 왔을때에도 우리가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욕한적은 한번도 없었어요. 우리회사처럼 빈틈없는 일본회사에서 중국사람이 부장으로 승진한다는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죠.》
 
2004년에 10세 년하의 안해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딸을 슬하에 둔 량성춘씨는 다망한 회사일때문에 자식들의 교육을 소홀히 했다고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한살 차이인 세살, 네살되는 오누이가 우리말은 한마디도 모른다는것, 앞으로 자식들의 교육문제에 대해 많이 신경을 써야겠다고 말한다.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량성춘씨는 태강전자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면 고향에 돌아가 살가고도 생각하지만 자식들을 생각한다면 국제도시인 심수나 상해도 살만한 고장이 아닌가고 말한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 렴명(1986년생)은 학교내 소문난 '일개미'다. 고중시절 입당한 그는 심조1중에서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일이라면 정력과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2011년 동북사범대학 수학과 석사 과정을 마친 렴명은 심조1중에서 자신의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수학교사, 담임을 ...
  • 2021-08-13
  • 지난 시간 사는 내내 그는 자신의 일을 더없이 사랑했으며 어려운 이웃을 가족같이 보살펴 주위사람들의 애대를 한몸에 받았다. 연길시 조양천진 승리사회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최인숙 로인, 그는 평범한 일터에서 결코 평범치 않은 성과를 이룩하면서 일찍 1985년도에 전국로력모범의 영예를 따냈다. 퇴직 후 나날에도 당...
  • 2021-08-10
  • 일전 당창건 100돐을 맞으며 료녕성우수공산당원 영예를 지닌 김용(1961년생)은 사장에서 고향마을 서기로 변신하여 반금시 대와구 평안진 평안촌을 국가급 모범촌으로 탈바꿈시킨 공신이다.   젊은 시절 ...
  • 2021-08-09
  • “오빠의 편지”로 히트를 치고 “해바라기”, “보리차”, “부모”, “로년을 잘 보내시라” 등 대표곡들로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구련옥 가수가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졌다가 2015년 연변TV음력설야회 한국편 무대에서 “로년을 잘 보내시라” 노래를...
  • 2021-08-04
  • 김택룡(1955년생)은 30대 초반 젊음의 패기와 열정으로 국유기업의 책임자로 두각을 내밀었고 30대 후반부터는 강한 사명감과 헌신정신으로 사회단체 활동에 참가하고 14년간 단동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단동시조선족...
  • 2021-08-04
  • 길림성 훈춘시에는 총 면적이 80평방키로메터이고 조선족과 한족 외 기타 소수민족까지 총 74가구, 6008명 주민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룡원지역사회가 있다. 비록 훈춘시 상업구 중심에 위치해 있긴 하지만 아파트관리봉사도 없는 오랜 지역사회이다. 그런 지역사회에서 2011년부터 지금까지 열성껏 주민들을 위해 봉사해온...
  • 2021-08-04
  • 반가운 소식! 연변의 첫 청화대학 입학통지서, 송달! 7월 18일 이른 아침, 연변조선족자치주 첫 청화대학 입학통지서가 연길시에 도착했다. 9시 30분, 연길시 특급우편 북대 배달부가 한걸음으로 달려와 수험생 장정미(张桢美)와 가족에게 기쁨을 전했다.      장정미는 연변제1 중학교 3학년 1...
  • 2021-07-20
  •  팔순 '아마추어화가' 최봉순의 개인전이 7월 2일, 료녕성조선족미술촬영서예협회와 심양시조선족로교사협회의 공동 주최로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열렸다.     최봉순은 심양시조선족제6중학교 퇴직교사다. 1997년에...
  • 2021-07-06
‹처음  이전 3 4 5 6 7 8 9 10 11 12 1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