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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화술거장 서방흥선생의 실적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9월4일 08시55분    조회:8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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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언어예술을 전파하는 한길에서

“말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며 품위입니다”고 입버릇처럼 외우는이가 있다. 바로 조선족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익숙한 원 연변인민방송국 아나운서실 실장이며 화술전문가인 서방흥선생이다.

근 36년의 아나운서경력에 아나운서실장으로도 18년간 근무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있는 방송풍격을 창조한 서방흥교수는 이렇게 말하고있다.

“우리 사회는 말을 표준적으로 하려 하고 또 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로 되여야 한다. 비록 아직은 말의 흠집을 지적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지어 반감까지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얼굴에 묻은 오물을 닦아주는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듯이 언젠가는 크게 깨닫게 되는 날이 올것이다.

우리 모두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가 하는 매 한마디 말을 진정 우리 말의 규범에 맞고 자연스럽고 친절하게 표현하기에 힘다함으로써 아름다운 우리 말을 빛내가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말은 더욱 품위있게 되여 교제의 수단만이 아닌 우리 민족의 위용을 과시하는데 이바지하게 될것이고 따라서 우리 민족은 인격적으로 존중받는 민족으로 될것이다.”

뜻밖의 기회에 본 아나운서시험

서방흥은 1947년 2월 7일에 훈춘시 양포만족향 포자연촌에서 태여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슬하에서 네 누나와 함께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책보기를 특별히 즐겼다.현소재지에서 공부한 넷째누나가 주말마다 그림책이나 이야기책을 한권씩 사다준 덕분에 랑독은 물론 이야기도 곧잘 했고 소학교 6학년때에는 자기절로 만화책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작가의 꿈을 키우던 그가 후에 아나운서로 될수 있는 기량을 닦은것도 넷째누나의 덕이 컸다.

1966년, 서방흥이 고중을 막 졸업하던 해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그는 대학에 진학할 기회를 잃게 되였다.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짓게 된 그는 얼마 안되여 촌에서 당지부서기사업을 하다가 1969년말에 향농촌신용사 회계로 일하게 되였고 후에는향정부 선전간사로 되였다. 

1970년초에 연변인민방송국에서는 사람을 파견해 각 지방마다 돌면서 아나운서를 물색하게 되였다. 당시 선전간사였던 서방흥은 본향의 10여명 청년들을 모아놓고 아나운서시험을 보게 하였다. 그런데 하루 면접시험을 본 시험관들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 향에는 아나운서로 될분이 없다”며 머리를 저었다.  그때 서방흥이 “제가 한번 시험을 볼가요?”하며 선뜻 나섰다.  뜻하지 않게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점을 받았고 다음날 훈춘시방송국에 가서 록음을 하였다.

두달후 초심에 뽑혔으니 연변인민방송국에 와서 두주일동안 강습을 받으라는 통지가 왔다. 서방흥은 두주일간의 아나운서강습을 받은후 다시 향에 돌아와 사업하다 1971년 4월 25일에 정식발령을 받고 연변인민방송국의 아나운서로 되였다. 방송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와닿던 아나운서의 친근한 목소리, 그렇게 부러웠던 아나운서사업을 자신이 할수 있게 되였다는 현실에 격동되여 그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첫시작부터 잘해야지…”하며 마음속으로 다지고 또 다졌다.

중국조선족화술의 자아풍격을 구축

늘 자신의 랑독에 자신감으로 넘쳤던 서방흥이였지만 방송국에 와보니 자신이 너무나 작아보였다.  특히 많은 동료들이 대학생이였는지라 고중졸업생인 그로서는 언제나 남한테 뒤져가는 느낌이였다.  그래서 그는 백배의 노력으로 실무수준을 높이는 한편 연변대학 통신학부 중문전업을 다녔다. 

또한 평양과 서울에 다니며 연수받고 표준말의 기본규률과 표준어방송의 표현풍격을 찾아냈는바 그의 개성있는 방송풍격은 조선족화술계에서의 새로운 리정표로 되였다.  서방흥은 연변은 물론 중국조선족화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성아나운서콩클에서 련속 5년 특등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성 10대아나운서로 평의됐고 발표된 30여편의 론문중 일부 론문이 국가, 성, 주급상을 받는 등 조선족아나운서계의 큰상은 거의 독차지하였다. 

지난세기 70년대초부터 본세기초까지 장장 36년이란 세월을 하루같이 라지오방송의 전파를 타고 청취자들한테 친근하게 다가온 서방흥은 《뉴스방송》, 《라지오잡지》, 《아동방송》, 《옛이야기》 등 많은 프로그램을 방송하였다.

특히 텔레비죤이 없고 기타 문화시설도 락후하던 1970~1980년대에는 라지오청취자들중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서방흥은 너무나 친근한 아나운서였다.  그만큼 방송차수가 잦았고 청취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하였기때문이다. 

한번은 룡정시의 70고령의 할아버지가 방송국을 찾아왔다. “근 30년동안 서방흥의 방송을 애청하였는데 생전에 얼굴을 꼭 한번 보고싶어서 왔다”는 그 할아버지는 서방흥의 손을 잡고 놓을줄 몰랐다.

전국에서 빛뿌리는 아나운서제자들

언제부터인가 조선족화술계에서는 서방흥이란 이름 석자가 깊이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나날이 향상하는 시대인만큼 꼭 자신을 초월하는 아나운서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후계자양성에 많은 정력을 기울였다. 수십년간 8개 현시 아나운서교육을 전담당하였고 1999년부터는 연변대학의 객원교수로 초빙을 받고 예술학원 방송아나운서전문과를 가르치게 되였다.  당시 대학의 조선어화술교재는 공백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강의고를 알심들여 썼고 이 교수대강을 3년간 축적하여 2002년에는 마침내 《현대화술론》(공저)이란 방송저서를 발표하였는데 지금은 대학교의 훌륭한 교재로 널리 쓰이고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아나운서나 사회자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활약하고있다. 그중에는 연변 8개 현시 아나운서는 물론 중앙방송국, 국제방송국을 비롯한 중앙급 아나운서들도 많다.  이렇게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내여 여간 기쁘지 않다는 서방흥은 안타까운 점도 있다고 말했다.

“제자들이 나를 초과하기 바란다. 그런데 많은 학생들이 어느 정도 배우고 만족을 느끼는데 너무 안타깝다.  분발해서 스승을 릉가하려고 노력해야 할텐데 본인이 다 배웠다고 생각하는것이 서운하다. 나는 누구나 연변TV방송국의 김광호, 김춘희, 연변방송국의 윤일, 신금철 등 아나운서들처럼 강의를 쫓아다니면서 듣고 내가 소유하고있는 화술지식들을 애써 배워내려 한다면 기꺼이 모든것을 배워주련다.”

그는 또한 《방송원입문》,  《현대화술론》(공저) 등 방송저서를 출판함으로써 조선족화술을 지향하는 젊은 세대들한테 좋은 교과서를 안겨주었고 대중들의 표준적인 언어생활보급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가 새롭게 집필한 《화술교본》(상,하)은 래년에 출판될 예정이다.

화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

자신의 방송사업과 아나운서양성에 모든 정력을 기울이던 서방흥의 화술사상은 신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화술을 배워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비록 연변말이 지금은 많이 다듬어졌지만 아직도 표준말과는 거리가 있다.  표준어를 기준으로 우리말을 다듬을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특히 사회에 진출하여 언어로 남의 중용을 받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지식은 속에 있지만 말은 겉으로 드러난다.  아무리 지식보물고를 안고있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전수하기 어렵고 또한 생동하고도 형상적으로 전해주지 못하면 전수받는 사람이 리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세상의 모든 교류에서 언어예술이 매우 중요하다.”

서방흥은 직업화술보다는 전반조선족사회의 화술교육에 중심을 두었다. 우선 사회의 기둥인 어린이들을 위하여 방학때마다 중소학교 조선어문교원들의 말하기와 읽기교육을 진행하였고 10기가 넘는 화술강습반을 조직하여 우리말교육을 끊임없이 해왔다.  지금 그는 언어학원을 경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문방송일군지망생들이나 우리말을 표준적으로 하려는 사람들, 대학생, 중학생, 소학생들의 입말교육과 읽기교육을 진행하고있다.

현재 연변화술연구회 회장,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프로고문을 맡고있는 서방흥은 대형화술콩클만해도 9차 조직하였고 사회 각 계층인사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하여 조선족화술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있다.

가정에서 오누이의 본보기로

서방흥은 화술계에서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늘 “나의 사업은 안해의 적극적인 내조가 없이는 불가능했을것이다”고 외운다.

1971년에 서방흥과 결혼한 채옥금녀사는 오누이를 키우면서 집안일을 도맡아했고 시어머니를 잘 공경하는 현모량처였다.  엄마의 영향을 받아서 자녀들도 할머니를 잘 공대하였다. 아들 서만승은 중학교에 다닐 때 점심시간이 되면 할머니한테 점심상을 차려드리러 집에 달려왔다. 어떤땐 자신은 점심을 먹지 못하면서도 할머니점심만은 잊지 않았다.  며느리의 지극한 효성에 82세의 로모는 세상을 뜨면서 “며느리의 처사에 고맙다”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특히 1980년말부터 개인사업을 한 채옥금녀사는 매우 힘들었지만 남편이 마음놓고 사업하도록 적극 후원했고 지지했다. 

서방흥은 비록 집안일에는 손을 대지 않았지만 자녀교양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애들이 학교에 붙어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18년동안이나 학부모조장사업을 하면서 극성을 보인 서방흥은 자녀교양비결에 대해 이렇게 총화지었다.

“자녀의 자존심을 키워주는것이 제일 중요하다. 절대 자극적인 말로 자녀를 욕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본보기로 되여야 한다.  그러면 애들이 스스로 따라한다.”
애들한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서방흥은 집에 좋은 서재를 갖추어놓고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참답게 사업하는 의젓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하여 오누이 모두 부모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훌륭한 사업을 하고있어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주고있다.

후 기

지금도 매일 4~8시간의 강의를 견지하고있는 서방흥은 앞으로 타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건강이 닿는한 아직도 한 10년간 우리 후대들에게 말하기, 읽기를 배워주어 우리 말을 조금이라도 표준적으로 할수 있게 도와주고싶다.  또한 우리 민족 모두가 자신의 생각, 주장, 의도, 요구를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우리말로 표현할수 있는 인격적으로 존중받는 민족으로 되는데 있는 힘을 다 바칠것이다.”

서방흥의 좌우명처럼 “말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며 품위”인만큼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화술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다 자연스럽게 다가오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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