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황종원-중국 첫 로인협회 초대회장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8월17일 08시40분    조회:622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가장 모범적인 단체로 불리는 조선족로인협회 
중국 첫 로인협회 초대회장 황종원로인을 만나

황종원 프로필:
84세, 룡정시 동성용진에서 출생
1956년도 입당
동불사 소학교교원, 동성용정부 문화, 교육, 위생 조리원 겸 동성용농업중학교 교장, 동성용인민공사 당위 선전위원, 조직위원,  동성용인민공사 농기관리소 소장 등 직을 력임
1981년부터 동성용향 리퇴직인원관리를 하면서 60세 정령퇴직때까지   동성용인민공사  로인협회 제1임 회장을 겸직.

조선족로인협회는 조선족 특유의 민간조직으로서  전국의 모범사회단체로 장기간  사회주의건설과 민족사회 건강한 발전에 큰 역할을 해왔다.  지금은 조선족사회 보존과 발전에 더욱 크고 대체할수 없는 역할을 하면서 《조선족사회의 파수군》, 《조선족농촌의 파수군》, 《대도시 조선족사회 구심점》 등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당과 조국에 대한 사랑, 민족의 보존과 발전에 대한 사명감, 높은 기여정신과 집단정신...그야말로 조선족로인협회는 모두들 두손 들어 찬성하는 모범단체라고 할수 있다.

지금 연변에는 향진, 촌급에 100%로,  도시 사회구역, 기업사업단위 할것없이 로인협회가 설립되여있다. 당면 연변에는 1663개의 로인협회가 있고 로인협회마다 기본상 자체의 활동실을   보유한 상황, 회원이13만명 (실제 60세이상 로인대오는 26만명)에 달한다. 로인협회사업의 중심은 조직건설, 경험모색이라고 할수 있다. 《기층로인협회사업조례》도 제정, 실시하여왔다.

불완전한 집계에 따르면  연변을 중심으로 촌,  사회구역, 구 , 시급 조선족로인협회가 2000여개 된다고 한다. 조선족로인협회는 길림성외 북에서부터 보면 크게 수하, 가목사,할빈, 계서, 계동, 밀산, 목릉, 해림, 녕안, 라북 등 지역에, 료녕성에는 심양, 대련, 영구, 철령, 단동, 개원에, 멀리로는 심수, 상해, 교주, 청도, 위해, 연태, 천진 등지에 조선족로인협회가 시급, 구급 혹은 사회구역별로 설립되여있다.

따라서 조선족로인협회는 광의적인 의미에서 현재 중국의 최대 조선족단체라고 할수 있다.

어떻게 로인협회와 로인절이 나오게 되였는가?  공화국 창건 60년, 로인절 27돐을 맞으면서 기자는 로인협회 설립에 주요한 역할을 한 분들을 만나보았다.

첫 로인협회 초대회장 황종원로인 《그때의 감격의 순간 잊을수 없수다》

1981년 룡정시 동성용인민공사(당시는 인민공사, 오늘의 향 혹은 진에 해당)서  중국의 첫 로인협회가 설립되였다.

당시 초대회장이 아직 건재하신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고 달려갔다.  84세, 아직 사유가 명석하고 시청각이  밝은 정정하신 분이셨다. 동성용진  평안촌에 사시다가 지금은 연길시  남산기슭의 재천아빠트구역에 사시는데 매일 집남쪽 야산길 따라 등산까지 하신다고 한다.  

60세이상이여야 로인협회에 가담할수 있었지만 첫 회장직이라 당시 다방면을 고려하여 수년간 당위 ,정부 기관에서 사업하시다 금방 2선에 물러나  동성용인민공사의 리퇴직인원관리를 맡게 된 54세의 《젊은》 자신이  《조직의 배치대로》 로인협회 회장직을 맡게 되였다고 한다. 《조직의 배치니까 맡아한거지요.. 특별히 한것도 없는데…》라며 로인은  기자의 취재에 황송해 하신다.

그때를 회상하면서 로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우리 민속에 60돐에 회갑을 쇤다  했었지만도 셈평도 좋지 못하고 또 문화대혁명의 미열도 크고 해서  당시  회갑을 못쇠는 로인들이 많았어요 . 그때까지만 해도 집집마다 식솔이  많은 때라 2대, 3대가 같이 사는  집들이 푸술했는데 로동력을  상실한 로인들이 집에서나 밖에서나 대우를 받기가 쉽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로인협회가 서고 8월15일이  로인들의 명절로까지 정해지자  로인들이  반가와하시던 일이 어제  일인듯 잊어지지 않지요…》

《1981년 8월15일이였는데 그날 동성용인민공사에서 로인협회 설립  및 매년 그날을 로인들의 명절-로인절로 정한다고 선포하고 로인협회 가입년령을  남성은 60세이상,  녀성은 55세이상으로 정했으며 촌, 집체기업, 정부에서 힘을 합쳐 60세이상 로인들에게 단체로 회갑상을 차려드리고 촌마다에서 축수문예종목까지 만들어 정말로 처음으로  로인들이 명절다운 명절을 쇴지요. …》

《󰡐로인들 모두 치마저고리 입으시게  하고 모시고 오시오.󰡑 참 그 때 엄령이면서도 기다렸던 반가운 지시였지요. 어떤 로인들은 수십년간 궤짝밑에 깔려만 있던 그제날의 치마저고리를  다시 손질하여 입고 나오셨는가 하면 조건이  되는 집들에선  비단을 사서 새 치마저고리를  해서  입고 나왔고 자식들이 뒤질세라 하는  효도에 로인님들은 저마다  명절의 분위기에 빠졌댔지요…》

《감히  못입었고  없어  못입었으며 입기  쑥스러워하던 치마저고리를  그렇게  자랑스럽게 명절옷으로 입어보기는  난생  처음이였지…》

우물 판 첫사람 ― 림송엽 《로인회 설립관련 회의만 70차》

당시 동성용인민공사의 당위 부서기였던 림송엽

황종원로인은 로인협회와 로인절이 있게 된데서 제일 고생하고 잊지 말아야 사람들을 말하면서 《그중에서도 당시 동성용인민공사의 당위 부서기였던 림송엽과 당시 연변주당위 서기였던 조남기장군이 가장 큰 공로자다》고 한다.

당년의 동성용인민공사 당위 부서기 림송엽은 36세의 청년간부였다. 그후 동성용향 첫 향장으로, 덕신향 당위서기로…나중에 연길시 밀가루공장 간부로 퇴직한 림송엽(65세)서기를  기자가 연길에서 만날수 있어 또한 반가웠다.   《로인협회를 만든 사람》, 《로인절을 만든사람》이라는  자신에  대한 칭호에 그는  《만든 사람》이라기보다는 견증인이고 집행자라함이 더 적절하다면서 그때  《생애에 가장 잊을수 없었던 사업경력을 쌓았다》면서 자신의 자식들도  이를  잘 모르고있다고 한다.

로인협회, 로인절을 내오느라 자신이 소집하고 또 요청받고 다닌 인민공사급, 촌급회의만 해도 70여차란 생각이 새삼스럽다며 감회에 젖는  림송엽서기, 로인협회를 세우게 된데는 3중전회란 정치환경, 기존의 로인독보조 조직, 생산, 생활에서의 로인들의 여유로움 등 여건들이 주요한 기초로 된것이 사실이지만 한 부정된 사례가 오히려 로인협회설립의 직접적인 계기로 되였다고 한다.

옛날 촌에서 촌장, 서기로 고생하셨던 분들이  년로해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고 《성쌓고 남은 돌》격이라며  고독해하는것이 제일 마음에 걸리는 일이였다는 림송엽서기, 집체기업도 운영이 괜찮고하니 정부에서 1979년부터 《퇴직》한 촌장, 서기들한테 특별생활보조금을 달마다 발급하였다. 이는 기타 《퇴직》 촌간부들의 불평을 불러 결국 2년만에 중지할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6.1절, 청년들은 5.4절, 부녀들은 3.8절, 제대군인은 8.1절, 로동할수 있는 장년들은 5.1절…혁명과 생산, 건설에 한생을 바친 로인들이 유독 명절도 없다는 로인들의 서러움을 들어오던차라 로인들의 명절을 만들어 로인 누구라 할것없이 즐겁게 보내게 하는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모든 일을 정부에 의지하는 경향이 심했을 때였지만도 정부에 의지해서 로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것도 어려웠고 로인독보조조직으로 늘어나는 로인대오의 학습생활, 건강운동, 오락교류 등 요구를 충족시킬수 없는것도 확연해졌다. 

자원적으로 가담하고 자체적으로 봉사하며 스스로 관리할수 있는, 진정 로인들을 대변하고  로인들의 문제와 건의들을 집중하여 당위나 정부에 반영해주고 당위, 정부에 참모조언해주며  심신이 건강하게 즐겁게 보내는 조건을 스스로 창조하기도 하는 민간단체― 로인협회조직을 내와 로인관리문제도 해결하고 협회설립일을 계기로 로인명절도 만들면 좋지 않을가? ... 림송엽서기를 비롯한 당위, 정부 지도부의 생각이 독보조 어르신들의 생각과 일치하였다.

막후의 산파 ― 조남기서기

이 방안은 당시 연변주당위 조남기서기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조남기서기의 하향련결점이 동성용인민공사였고 전국에서도 앞장서간 동성용의 로인독보조활동에 대해서도 워낙  관심을 많이 돌리고있던 중이였다.

1981년 봄의 어느날 저녁 마침 림송엽서기가 주최한 로인협회 및로인명절을 창설할데 관한 토론회의에 참가한 조남기서기는  《참 좋은 일입니다. 잘해서 본보기를 보이시오…》하면서 제꺽 찬성을 표했다고 한다. 이는  동성용 당위나 정부, 그리고 독보조에 협회를 설립하는데  큰 뒤심이 아닐수 없었다.

이 일은 조남기서기의 그 시기 관심사로 걸려 그후도 진척상황에 대하여 차문해왔고  명절날자에 대하여서까지 음력 8월 15로 하면 어떤가 추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다 7월 9일 왕청 배초구향에서 있었던 연변주 정신문명건설회의에서 조남기서기는 어느새 회의에 참석한 림송엽서기를 발견했는지 잠간 시간을 내여 《림송엽서기, 당신네 로인협회의 명절을 어떻게 정했소? 》 하며  물어  림송엽서기가  거수경례를 붙이며 음력8월 15일보다 양력 8월15일로 하는것이 더 적절하다는 설명과 함께 준비진척상황을 보고하였단다.

《양력 8월15일!》  당장에서 조남기서기는  찬성을 표했고 뿐만 아니라 이는  당면 정신문명건설에서 나타난 선전보급할만한 좋은 일이라며 선전부, 민정 등 부문에서도 관심과 중시를 돌리게 하였다. 그러다나니  동성용의 로인협회설립일은 대회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고 한다.

예정대로 동성용인민공사에서는 8월 15일에 로인협회를 설립하고 매년 이날을 로인절로 정함을 선포하고  경축행사를 가졌던것이다.

전국에 유명해진 연변의 로인절

1982년 동성용인민공사 로인절 일주년 기념대회장

연변은 물론 이는 국내 첫 로인협회 및 로인절로 알려지기 시작하던무렵, 1982년의 로인절행사를 동성용인민공사 당위나 정부에서는 특별히 중시를 돌렸다.  마침 연길시에 전국소수민족문화사업회의 일정이 배치됐는데 동성용의 로인절행사참관이 중요한 종목으로 되였었다.  당시 국가문화부 , 중앙선전부 ,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국가라지오방송총국 및 우리 성 지도간부들의 직무, 이름을 림송엽서기는 또렷이 기억해내면서 감회에 젖는다. 그때  중앙TV  아나운서 조충상이 와서 보도하였다고 한다.

8월15일, 상둘레가 200메터 넘는 단체환갑상을 사상 처음으로 만들었는가 하면 해방표 자동차 100여대가 동원되여 로인님들을 모셔오고 모셔갔으며 2000명 래빈에 2만여명 군중이 모인 대축제로 900명의 집단무출연을 선보였고 사상 파격적으로 현성의 방송을 2일간 정지하고 방송시설을 대회장으로 옮겨오는 지원을 받기도 한 동성용의 로인절.  로인을 공경하고 례의호객하며 근로하고 지혜로운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과 회갑례, 음식문화, 복장문화, 민속운동에 가무 등  우리 민속문화를 온 천하에 마음껏 자랑한  민족의 대축제로 력사에 남겼다. 그 잔치서 모범 시아버지, 시어머니, 무던한 아들, 며느리, 사위, 《5호가정》도 선출, 표창하여 가정마다 촌마다 화목을 돈독히 하는 기점으로 되였고 문명한 가정, 문명한 촌, 마을,  문명한 사회를 건설하는 기초로 되였다는데 그 의의가 깊다.

정부로부터 대접받고 전국이 따라배우는 단체로

로인협회 설립 및 로인절문제는 연변자치주 력대 지도자의 관심사였다. 동성용 로인절후 당시 연변주당위서기 조남기와 주장 조룡호는 각지서 동성용의 경험을 따라배울데 대하여 지시하였는가 하면 1984년년초 조남기서기가 연변을 떠난 후 부임된 연변주당위 리덕수서기의 관심사이기도 하였다. 그때 이미 각 현시서 로인협회를 설립하였다. 그해로 바로 1984년 8월 4일, 연변주당위 상무위원회서 연변주로인협회를 설립할데 대하여 결정함과 동시에 연변주인대 상무위원회서 8월15일을 로인절로 비준하였던것이다.

민간단체이지만 연변주 당위와 정부에서는 처음부터 이에 특별히 중시를 돌려왔다.

이를테면 처음부터 주로인협회에 비서, 운전기사 편제를 고정해주었고 일상 사무비용을 주, 현급에서 재정예산으로 보장해왔다. 향진 로인협회 회장보조금도 80%는 현시정부서 해결하고 사회구역이나 촌로인협회 회장보조금도 40%는 재정에서 해결하고있다.  《연변주로인협회장정》에 밝혀진 로인협회 경비3가지 래원중 첫번째가 《지방재정 자금 조달》인데 연변주로인협회 리종렬(제3임 연변주로인협회 회장과 동성명)부회장의 소개에 따르면 현재 70%이상의 로인협회서 재정경비보조를 받고있다고 한다.

4임기의 연변주로인협회 회장을 보면 연변주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퇴직한 리영준이 초대회장,  연변주정부 전임 주장 조룡호가 제2임 회장,  연변주인대 상무위원회 리종렬 전임 부주임이 제3임 회장, 연변주정부 전임 부주장 전평선이 현임 회장이고 각 현시 로인협회 회장도 모두 부현급이상 전임 위망간부들이다. 

재정보조나 간부위임에서 보더라도  전국적으로도  그 파워가 사회단체로서는 연변주로인협회가 최상이라고 한다.  그만큼 제반 로인협회사업도 전국적으로 앞서고있어  연변의 경험이  전국에 많이 소개되고 보급된것도 적지 않다. 2005년도 국무원에서 주최한 로령사업표창대회서 연변주로인협회는 《전국선진단위》영예를 안아오기도 했다고 전평선회장은 소개한다. 

전국 로인협회에 발행되는 잡지 《로인세계》로  정보를 나누고 교류를 진행하는가 하면 직접적인 만남의 장도 만들어 지역별 우의와 교류를 증진하고있다는 평이다. 《로인세계》를 뉴대로 사실상 각지 로인협회 회장단의 련의활동이 전개되고있으며 앞으로 꾸준히 전개될 전망이라고 연변주로인협회 전평선회장은 소개한다.

[이번 취재에 림해주고 또 협력을 아끼지 않은 연변주로년사업위원회, 연변주로인협회, 룡정시 동성용진정부 , 동성용진 편안촌 등 관련부문 및 관련 책임자에 감사를 표시한다.] 

길림신문 김영자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허상림선생의 연변사랑 연변자랑 연변대학 공학원 제1임원장 허상림선생을 만나 지난 5월 1일, 기자는 연변대학공학원 제 1임원장을 지냈던 허상림선생을(78세)을 인터뷰하였다. 허상림선생은 말초신경염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보니 바깥세상과 담을 쌓고 집에서 컴퓨터와 마주하고 사이버공간에서 세계를 주유한단다. ...
  • 2012-05-13
  • 연변체육관 관장 연변체육복권관리센터 박성웅주임 인터뷰 연변체육복권관리센터 박성웅주임. 사람들은 체육복권에 대해 익숙하지만 연변의 체육복권 관리사업을 책임진 박성웅씨에 대해서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하고있을것이다. 연변에 첫 체육복권이 나타나고 이어 체육복권관리센터가 세워져 지금에 이르기까지 10여년간 ...
  • 2012-05-11
  •     연변제2인민병원 베테랑 간호장 한길숙씨 이야기 해맑은 미소, 상냥한 문안, 열정적인 봉사…사랑이 듬뿍 담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21년간 그녀는 고상한 의덕과 숙련된 업무, 앞선 사유로 매 한명의 환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왔다. 그녀의 간호를 받은 환자들치...
  • 2012-05-10
  • 야외 극한 도전자 “대지의 타향인”- 리근호   -   “중국오토바이려행 1인자” 를 적다     아리랑주간  취재사진 박군걸   글 륙삼   출중한 사람은 늘 평범하게 보인다. 그들은 항상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극도로 평범하게 살면서 출중하다는 성분...
  • 2012-05-09
  • 사 교육이 비교적 체계화되여 교육의 한부분으로 간주되는 한국이나 일본에 비해 우리 나라는 아직 사교육을 향한 시선이 그리 곱지만은 않 다. 이런 현황에서 학부모, 학생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주위의 삐딱한 시선을 돌려세운 한 경영인이 있다. 바로 연길시지능양성학 교 교장 최향란씨(36세)이다.   최향란 ...
  • 2012-05-08
  • 중앙민족대학 민족리론 및 민족정책 연구학자 지난 2월, 북경출장길에 우연히 대학시절의 스승이였던 김병호교수를 만나게 되여 옛 스승을 잠간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다.           흑룡강성 연수현태생인 김병호교수는 1974년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한 뒤 모교에 남아 오늘까지...
  • 2012-05-08
  •   최근 중국공산당탄생 90돐 맞이 기념선집《새시기 중국공산당인 우수격언선집》에 연변의 원로작곡가 동희철옹(85세)의 4수의 격언이 등재되였고 편집부로부터 우수격언증서와 메달이 전달되였다. 《명곡앞에서는 총을 든 적들도 무력해진다.》 《총탄은 사람의 육체는 해칠수 있어도 인간의 령혼은 정복할수 없다....
  • 2012-05-08
  •   조선족이 낳은 당대의 저명한 시인 김철선생이 문단에 발을 들여놓던 20세기 50년대 초반, 그가 조선전선에서 돌아와 신문기자로 일할 때였다.서정시 《앵두 네알》을 써서 문단과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고 단시 《지경돌》과 노래 《귀환병과 처녀》(동희철 작곡)가 신춘문예에 입선되여 한창 주목을 받고있을 때였...
  • 2012-05-08
  • 칭다오야베스상무회사 김대수 사장 이야기 신라원 아파트단지 정문에서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있는 김대수 사장.         (흑룡강신문=칭다오) 박영만기자= 칭다오시에서 6년동안 한국의 아파트문화보급을 위해 꾸준히 한 우물을 판 한국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주인공인 칭다오야베스상...
  • 2012-05-07
  • 성공 가도 달리는 조선족 3세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리수봉기자 = "재한조선족들의 생활실태를 비교적 전면적이고도 현실적으로 기록해 중국과 한국에 알리려는 목적에서 대림동,가리봉,안산 등 중국인(주로 조선족)집거지역을 답사하게 되였습니다.코리안드림이 시작되여서부터 오늘까지의 전반 과정 역시 우리 ...
  • 2012-05-0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