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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룡-젊음을 정열의 무대서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3월4일 14시22분    조회:1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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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룡은 자신이 음악의 길을 걷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저절로 음악의 길을 포기하고 미술이라는 전업을 택했으니 말이다. 그때는 그 자신도 자기한테 풍부한 음악적재질이 있음을 몰랐을뿐더러 어린 나이에 매일 하는 손풍금련습이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꼭 신화같기만 하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었다.

1984년 왕청현 왕청진의 한 보통로동자가정에서 태여난 김군룡은 음악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6살부터 손풍금을 배웠다. 자습으로 손풍금과 바이올린을 배워낸 그의 아버지는 김군룡이 음을 틀리게 칠 때마다 손등을 때리군 하면서 련습시켰다. 날마다 아버지의 감독하에 손풍금련습을 견지한 덕분에 8살때에는 성손풍금콩클에서 2등을, 현손풍금콩클에서 1등을 수상하기도 하였지만 어린 군룡은 하루라도 손풍금련습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하였다.

그러다가 9살때 아버지가 에스빠냐에 가게 되면서 김군룡은 많은 자유를 얻었다. 더는 억지로 련습시키는 사람이 없게 되자 그는 지지리도 싫었던 손풍금련습을 하지 않겠다고 어머니한테 간청하였다.

어린 아들이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는지라 마음이 약한 어머니는 동의하는수밖에 없었다. 비록 개인적으로 손풍금을 그만두었다고 하지만 그는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악단의 손풍금독주로 활약하였다. 2년후에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아들이 손풍금을 그만둔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더는 억지로 시킬 생각이 없어 아들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초중에 입학한후 김군룡은 공부를 잘해 학년에서 10등안에 꼽혔다. 당시 10등안에서 유일한 남학생이였던 그는 성수학경연이나 일어경연에 나가 1등을 따낸적도 여러번이나 되였다. 그때 그의 제일 큰 취미는 그림그리는것이였다. 아버지한테 혼나면서 손풍금련습을 한탓이였는지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손풍금을 만지기도 싫었다. 그래서 짬만 나면 그림그리기에 정신없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2학년때에는 성미술콩클에서 1등상을 수상했다. 그러면서 차츰 앞으로 화가가 되려는 꿈을 키웠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김군룡은 보통고중학교보다 연길시직업고중 미술반을 지망했다. 고중에 붙은해 학교에서 조직한 《12.9》활동에서 독창을 하여 인기를 끈 김군룡은 노래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고 새로운 취미로 음악을 많이 들었다. 고중졸업을 앞두고 그는 주청년노래콩클에 참가하였는데 생각밖으로 1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래도 미술에 대한 꿈은 여전하여 연변예술학원 유화전업에 지망을 두고 대학입시를 보았는데 생각대로 입학하였다. 예술학원에 붙은지 얼마 안되여 교내노래콩클이 있었는데 거기서 1등을 한 김군룡은 연변TV방송 《청춘스타트》에 출연하며 가수로 데뷔하였다.

그후에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도 여러번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던 김군룡은 《사랑으로 가는 길》에 특별한 감정이 있었다. 작년 가을에는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 《사랑의 손길》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서 불러 많은 호평을 받았다.

이렇게 자기의 전업보다 노래에 푹 빠진 김군룡은 낮에는 학교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저녁이면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절로 생활비며 학비를 마련하였다.
김군룡이 학업보다 노래에 더욱 열을 올렸기에 선생님들이 아예 그보고 미술을 때려치우라고  한적도 많았다. 그래서 고민에 빠진 그는 몇달 학교에 나가지 않은적도 있었다. 그러나 타국에서 고생하는 부모한테 부끄럽지 밀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다시 학원에 열심히 다녔다.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안되여 북경에 있는 친구가 《너만한 노래실력이면 북경에 와서 발전하는것이 좋으니 우선 북경에 오라》고 조언을 주었다.

마침 전국청년가수노래콩클이 북경에서 열리게 되여 김군룡은 무용수 4명을 데리고 북경으로 갔다. 있을 곳도 없이 떠난 그는 친구의 숙소에서 일주일간 비집고 지내다가 해정구에서 겨우1200원짜리 세집을 맡고 무용하는 친구와 둘이서 힘든 외지생활을 시작하였다. 차마 부모한테 손내밀수 없었던 경제적으로 힘든 나날에 큰 힘이 된것은 그번 전국청년가수노래콩클 1단계에서 류행가곡조 1등을 한 일이였다. 콩클이 끝난후 평심위원이였던 백첩문화회사 리성철회장이 김군룡을 찾아 《다음 단계에서도 좋은 성적을 발휘해보라》고 고무해주었다. 결과 김군룡은 2단계 전체조에서 2등을 했다. 그날 시상식이 끝난후 리성철회장이 김군룡더러 시간내서 회사로 와보라고 하였다. 며칠후 김군룡은 백첩문화회사를 찾아갔고 리성철회장은 면접시험도 보지 않고 직접 5년 전속계약을 맺었다.

그때로부터 김군룡한테는 광활한 무대가 펼쳐졌다. 계약을 맺은 김군룡은 선후로 《신주6호》발사성공을 축하한 CCTV 3채널의 《신주6호》무대에서 독창을 하게 되였고 2005년 CCTV 1음력설야회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는 신인소수민족이 처음으로  CCTV 1음력설야회에 독창가수로 무대에 나섰다. 그외에도 그는 또 광동 불산에서 있은 《아시아예술절》에서 중국을 대표하여 노래 《신아리랑》과 《비상》을 불렀다. 사실 그는 여러 무대에서 노래 《신아리랑》을 불러 자신이 조선족임을 떳떳이 공개하였다. 또 《신아리랑》을 부르지 않더라도 꼭 무대에서 자신이 조선족임을 밝히면서 우리 민족을 홍보하기도 했다.

처음 큰 무대에 섰을 때에는 너무 긴장하여 실수를 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CCTV 3의 《즐거운 중국행》프로에서 노래에 열광적인 댄스를 곁들면서 몇바퀴 돈후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무대 한쪽켠의 카메라쪽으로 마주한 김군룡는 순간 위치파악이 안돼 긴장해서 심장이 튀여나올것 같았지만 정신을 바싹 추스리고 노래를 계속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무대중심으로 옮겨 관람석에서 눈치를 채지 못하게 하였다. CCTV 4의 《5대주와 기쁨을 함께》프로에서 첫곡으로 조선노래를 부른후 두번째 곡에서 너무 긴장해서인지 중간가사를 잊어버린 김군룡은 조선말을 넣어 겨우 마무리를 한적이 있었다. 관람석에서는 노래실력에 열렬한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후에 감독한테 톡톡히 욕을 먹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은 이런 실수가 없어지고 아주 뛰여나게 공연을 펼쳐 가창력을 인정받는 가수로 되였다.

여러차 《중한가요제》에 참가하며 한국가수들과 두터운 우정을 쌓아온 김군룡은 호남TV방송국에서 한국사극 《대장금》을 방송하기전 리영애자선기부활동무대에서 강타를 비롯한 여러 가수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외에도 대만련속극 《현령 황마괘》와 《마음속 사랑 변하지 않아》의 주제곡을 부른 김군룡은 한회사의 가수 리수와 함께 금년 할리우드와 CCTV에서 합작한 영화 《리소룡전기》의 주제곡도 불렀다. 이 주제곡을 우연히 듣게 된 장예모감독은 노래가 마음에 든다면서 김군룡을 올림픽개막식에서 신인가수로 초청하고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아직 최종결정을 내리지 않았지만 군룡은 가수로서의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게 되였다.

김군룡은 2월 7일 방송하게 될 연변TV음력설야회에서 자신이 작사, 작곡한 노래 《신아리랑 목동》과 올림픽주제곡선발에 뽑힌 노래 《멀지 않은 꿈》으로 고향인민들에게 멋진 모습을 선보이게 된다.

김군룡은 노래를 부르는데 그치지 않고 틈나는대로 작사, 작곡, 편곡도 하는데 이미 《다 함께 와요》 등 10여수의 노래를 작사, 작곡하였다.

중국뿐만아니라 한국, 일본에도 이름을 날린 김군룡의 앞으로 꿈은 무엇일가? 그의 꿈은 위대한 가수로 되는것도, 훌륭한 미술가로 되는것도 아닌 가족이 단란히 모여사는것이라고 한다.

그가 예술학원에 입학하는 해에 엄마가 일본으로 떠나고 아버지는 한국으로 갔다. 그런데 일본에 간 엄마는 돈도 벌기전에 불법입국이라는 리유로 경찰에 잡혀들어갔고 한국에 간 아버지는 건축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쳐서 번돈을 다 넣고 치료를 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마음고생을 한다면서 이런 일들을 김군룡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엄마가 경찰서에서 풀려나오고 아버지 병이 치료된후에야 그 사실들을 알게 되였다. 김군룡자신도 알면 부모도 자신도 고통스럽다고 생각되여 낱낱이 캐묻지 못하고있다. 지금도 그의 부모는 아들에게 쉬운 일을 찾아 하고있으니 걱정말라고 당부한다. 부모가 힘든줄 뻔히 알면서도 아직은 큰 힘이 되여줄수 없는 김군룡은 《언젠가는 꼭 성공하여 부모를 모셔와 함께 오붓하게 살리라》며 오늘도 노력을 아끼지 않고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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