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중국 조선족상모춤을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린 주역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1월4일 10시15분    조회:265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국 조선족상모춤을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린 주역
—중국 조선족농악무(상모춤)의 대표성 전승인 김명춘
로인순
 
 


농악무 하면 상모를 떠날 수 없고 상모의 고향 왕청을 떠올리면 김명춘이란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 중심에 그가 서있다. 중국 조선족상모춤을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김명춘은 농악무, 상모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맺었고 그의 기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탄탄하다. 
김명춘, 그는 누구인가?
 
배움의 길 
 
김명춘은 1958년 12월 23일, 길림성 왕청현 배초구진 길상촌의 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1977년, 고중을 졸업한 김명춘은 길상촌에서 농사를 짓는 한편 짬짬이 시간을 짜내여 길상촌과외문예선전대와 공사과외문예선전대에서 민간예술인들과 함께 열심히 상모를 만들어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 해 겨울, 당시 배초구문화소 강병환 소장의 청을 받고 신흥향(지금의 하마탕향)문예선전대 대장 리명호는 배초구에 와서 여러 촌 문예선전대 대원들에게 농악무를 가르치게 되였다. 리명호는 일찍 1972년에 춘양진에 있는 고모집에 놀러 갔다가 고씨성을 가진 민간예술인으로부터 농악무를 배웠고 그후 서위자향 농악무강습반에서 농악무를 체계적으로 배웠다. 당시 리명호는 배초구에서 한달 가량 농악무를 가르쳤다. 리명호의 뒤를 이어 배초구문화소에서는 또 연변가무단 무용배우 최호수를 청해다 여러가지 무용 기본동작을 가르치게 했다. 모두들 열심히 상모돌리기 훈련에 몰입했다. 너무 돌리다보니 며칠후부터는 목이 뻣뻣해났고 머리를 제대로 돌리기조차 힘들었다. 김명춘, 량호범, 김만중 등은 열심히 상모춤을 배웠고 함께 배우고 있던 신정애는 재봉솜씨가 뛰여났는데 배초구에서 처음으로 상모를 만든 사람이였다. 당시 시중에는 상모를 파는 곳이 없었다. 농촌과외문예선전대는 농악무를 출 때면 대원들이 직접 만든 모조품을 사용하였다. 자체로 만든 상모는 팔각 혹은 륙각이였고 양은대야를 구부려서 벙거지를 만들고 종이상자를 오려 상모변을 만들었으며 자전거바퀴살로 물채를 만들고 주판알을 얻어다 장식했다. 상모띠는 문창지를 사용해 만들었다. 상모를 잘 만들기 위해 그들은 매번 연변가무단에서 공연을 올 때마다 몰래 무대 뒤에 가서 그들이 가지고 온 상모를 자세히 관찰하군 했다. 공연시 김만중이 대상모를 돌리고 량호범이 소상모를 돌렸으며 김명춘이 중상모를 돌렸다. 



1980년, 길상촌과외문예선전대 일동
 

 1982년, 길림성 과외문예콩쿠르를 마치고


1980년, 김명춘은 연변예술학교 최호욱선생한테서 조선무용의 기본동작을 배웠다. 최호욱선생은 조선에 류학 가서 조선무용을 체계적으로 배운 분이였다. 왕청현문화국의 초청으로 서위자에서 무용기본기능학습반을 개최하기도 했다. 김명춘은 부지런히 학습반을 다니면서 무용기교를 다졌다. 그리고 농악무 관련 도서란 도서는 죄다 찾아 읽다싶이 하면서 해면이 물 빨아들이듯 차곡차곡 지식을 쌓아가며 질적인 비약을 가져왔다. 하지만 김명춘 자신도 그 때는 미처 몰랐다, 그렇게 시작한 상모춤이 자신의 평생 직업으로 될 줄을. 그리고 상모와의 인연이 40여년이나 이어질 줄을…
 
진정한 농악인의 길
 
1982년, 왕청현문화관에서는 안무가 한동국선생을 배초구에 내려보내 상모춤을 창작하도록 했다. 창작작품은 〈위성이 하늘을 날다〉였다. 김명춘과 김만중, 량호범, 김춘근, 리종필 등이 출연했다. 이 작품은 왕청현문예콩쿠르에서 우수종목으로 선정되였다. 
 


지금도 조선족농악무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옛 배초구 길상대대 배우들

그 해 가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주년 기념 공연시 김명춘은 오성빈, 김만중 등과 함께 농악무 〈명절의 밤〉에 주요배우로 출연하였다. 이 작품은 길림성 과외문예콩쿠르에서 표현 1등상을 수상했다. 그 때로부터 김명춘의 상모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1986년 2월, 김명춘이 주연한 삼인무 〈환락〉(한동국 창작)이 선후로 연변문예콩쿠르에서 우수상을, 동북3성 조선족문예콩쿠르에서 특등상을, 전국민간음악무용콩쿠르에서 표현 2등상을 따냈다. 〈환락〉에서 김명춘은 홀로 소상모, 중상모, 대상모를 소화해냈다. 〈환락〉의 공연회수가 늘어남에 따라, 특히 전국적인 민간음악무용콩쿠르에서 선 보인 뒤로 전국 무용계에서는 농악무라는 이 독특한 풍격의 조선족무용을 료해하게 되였고 따라서 김명춘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농민일보》에서는 김명춘을 ‘상모대왕’이라 지칭했고 중앙TV방송국 등 많은 보도매체에서 김명춘을 인터뷰했다. 1987년에 중앙TV방송국 새해맞이야회에서 〈환락〉을 재방송하면서 김명춘은 ‘상모춤왕’이란 별호를 얻으며 일약 명인으로 떠올랐다. 
 


1988년, 곤명에서 열린 중국 제1차 광장무용콩쿠르에 참가하고서


그 때로부터 김명춘은 정식으로 농악무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왕청현인민정부에서는 김명춘의 재능을 긍정하고 정식으로 그를 왕청현문공단 무용배우로 받아들였다. 농촌과외문예선전대의 아마츄어배우에서 직업무용배우로 도약한 김명춘은 자신에게 농악무를 가르친 스승들인 리명호, 최호수, 최호욱, 한동국 등을 잊지 않았다. 너무나 감사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그는 민족무용의 기본기능에 대해 장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성장과정에는 그들의 계몽과 인도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다짐했다, 중국 조선족농악무 계주봉을 높이 추켜들고 상모춤의 전승과 발전을 위해 혼신을 다 바치는 진정한 농악인이 되리라고. 또한 그 때부터 그의 화려한 예술생애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1989년, 제2차 중국 예술절 페막식 공연에 출연, 특별상 수상.
1991년, 길림성 제1차 광장무용콩쿠르에 참가, 1등상 수상.
1993년, 길림성문화청에서 김명춘에게 ‘상모춤대왕’ 칭호를 수여.
1995년, 제1차 중국민속관광절 예술활동에 출연, 우수상 수상.
1996년, 전국 제6차 군성컵 광장무용콩쿠르에 참가, 은상 수상.
1997년, 김명춘의 첫 창작작품 〈환희〉가 전국세무총국문예콩쿠르에서 최우수상 수상.
2003년, 전국 제7차 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대회 소수민족문예콩쿠르에서 무용조 개인 2등상 수상.
2005년, 중국민족문화박람회 및 중국소수민족절기예술표현활동에 참가, 특별공헌상 수상.
 



2005년, 국가문화부에서 전국적인 범위에서 대규모의 무형문화유산 발굴 및 신청 사업을 펼쳤다. 왕청현문화국 지도부에서는 이에 깊은 중시를 돌리고 적극적으로 농악무를 국가급 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할 데 대한 일련의 사업을 추진했다. 김명춘은 조직의 기대를 지니고 민간에 내려가 대대적인 조사를 벌렸다. 70여명의 로예술인들을 만나 하마탕농악, 서위자농악, 연변농악 등에 대한 자료를 대량으로 수집했다. 그리고 당시 어느 고장에서는 어떤 복장을 입고 어떤 상모를 쓰고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상모춤을 추었는가 등에 대해 상세하게 수집하고 정리했다. 뒤이어 김명춘이 상모춤을 추는 동영상과 상모춤에 관한 설명을 곁들인 자료가 상급에 전해졌고 2006년, 조선족농악무가 드디여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대표성 종목으로 선정되였다. 김명춘은 중국 조선족농악무를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한 행보에 박차를 가했다.
 


농악무 표현 장면


2007년, 김명춘이 창작한 농악무 〈희열〉이 제2차 전국종업원예술절에서 은상을 수상.
2008년, 김명춘이 창작한 〈풍년을 경축하다〉가 제1차 중국농민문예콩쿠르에서 금이삭상(金穗奖)을 수상.
2008년 2월, 국가문화부에서 김명춘을 중국 조선족농악무(상모춤) 대표성 전승인으로 명명.
2008년 5월, 중앙음악학원 음악학부 겸임교수로 초빙.
2008년 8월, 길림성문화청의 추천으로 다른 두명의 무용배우와 함께 북경에 가서 올림픽개막식 의식전 공연에 참가하여 화려한 상모춤 표현을 펼쳐 절찬을 받았다.
 
2008년, 국가문화부는 유네스코에 중국 조선족농악무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하기로 결정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문화국 지도부에서는 즉시 세계무형문화유산신청전문가소조를 뭇고 일련의 준비사업을 일사불란하게 진행했다. 왕청현 하마탕향에서 아직 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은 논밭을 촬영장소로 빌렸다. 김명춘을 위주로 왕청현상모춤예술단과 왕청현 석양홍예술단 배우들, 왕청제2소학교 학생들로 배우진영이 무어지고 연길시조선족예술단 사물놀이악대가 반주를 맡았다. 농부들이 일밭에서 성수나게 가을걷이를 하는 장면, 밭머리에서 흥겹게 농악무를 추면서 풍작을 경축하는 장면, 저녁에 널직한 마당에서 우등불을 피워놓고 즐거운 농악소리 속에서 춤을 추며 하루의 피로를 해소하는 장면… 이는 무대화한 농악무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이민사가 깃들어있는, 소박하면서도 향토풍이 짙은 농악무였다. 질병과 굶주림을 피해 이민 온 우리 선조들은 밭머리에서 감주를 마시며 잠간 바쁜 일손을 놓고 허리쉼을 하였고 그러다가 흥이 나면 감주를 마시던 바가지를 저가락으로 두드리며 바가지장단에 맞추어 곱새춤을 추었고 저녁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춤을 추면서 로동으로 쌓인 피로를 풀었다. 이것이 중국 조선족농악무에 고스란히 반영되였고 드디여 2009년 9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대표작명부에 등재되였다. 민족예술의 바탕으로서 농악무 고유의 가치가 인정되여 국내에서 무용으로는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명부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게 된 것이다.
 


2020년 6월, 왕청현 문화와 자연유산일계렬활동에서 상모춤을 전수하고 있는 김명춘


중국 조선족의 저명한 ‘상모대왕’, ‘상모춤대왕’ 김명춘, 중국 조선족농악무(상모춤) 대표성 전승인 김명춘의 활약은 나날이 돋보이였고 독보적이였다.
 
2009년 6월, ‘전국무형문화유산보호 선진개인’의 영예를 획득.
2009년, 김명춘이 창작한 농악무 〈풍년의 기쁨〉이 제9차 ‘원중컵’ 전국북왕초청경연에서 최우수 북왕상(最佳鼓王奖) 수상.
2017년, 농악무 〈풍년의 기쁨〉이 일대일로 국제민족전통무용전시공연에 참가, 북경시철학사회과학민족무용문화연구기지 ‘중국민족무용학원자원고’에 수록.
2010년 9월, 전국 제8차 중국민간예술절활동에 참가, 금상을 수상.
2010년 11월, 제2차 향촌문화예술절 및 제1차 중국농민예술절 전국향촌가수콩쿠르에 출연.
2011년 1월, 〈CCTV—농민공(农民工)문예야회〉프로에 출연.
2011년 1월, 〈CCTV—1 음력설대묘회(大庙会) 특별종목〉프로에 출연.
2011년 6월, 국가문화부와 중국예술연구원에서 주최한 ‘뿌리와 넋(根与魂)’무형문화유산공연(홍콩)에 참가.
2011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제9차 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 소수민족문예콩쿠르에서 〈장백의 북운〉을 표현하여 2등상 수상.
2012년 6월, 국가문화부에서 주최한 제1회 ‘중화무형문화유산전승인 신전상(薪传奖)’ 수상. 
2012년 12월, CCTV 〈기네스 중국의 밤〉프로의 요청을 받고 32메터 되는 상모줄을 30초에 41번 뛰여넘는 데 성공하여 새로운 기네스 세계기록을 창조.
2014년 7월, 기네스총부의 요청으로 이딸리아에 가서 재차 32메터 되는 상모줄을 30초에 44번 뛰여넘는 데 성공하여 본인이 창조한 원 기네스 세계기록을 경신.
2016년 8월, 9명의 제자들과 함께 북경인민대회당에서 중앙지도자들을 모시고 제5차 전국소수민족문예합동공연 개막식공연에 참가.
2017년 3월, 왕청현상모춤예술단의 30여명 단원들과 함께 북경인민대회당에서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 회의 문예공연에 참가.
2018년 10월, 길림성 ‘덕예기준병’칭호를 획득.
2019년, 국가예술기금항목지원프로젝트의 하나인 특별예술인재양성기금프로젝트 ‘농악무예술인재양성’ 특별초빙전문가로 선정.
2021년, 길림공정기술사범학원 ‘동북지역 무형문화유산 문화관광 창의제품디자인인재양성’프로젝트 외부초빙전문가로 선정.
그리고 수차례 로씨야 크레믈리궁, 이딸리아, 미국, 한국 등 세계무대에서도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중국 조선족농악무 력사이래 성과를 제일 크게 따내고 영예를 제일 많이 빛낸 현실적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40여년간 그가 따낸 영예와 명예는 너무 많아 일일이 렬거할 수 없다. 김명춘의 말을 빈다면 “영예는 지나간 과거일 뿐”, 그는 무형문화유산을 보호, 전승, 발전시킬 불타는 투혼으로 중국 조선족농악무의 대표성 전승인으로서의 사명감을 꾸준히 발휘해오고 있다.
 


2020년 11월, 중국조선족농악무(상모춤) 문예골간강습을 마치고

보호와 전승 그리고 혁신과 발전
 
목전 왕청현의 전승체계는 아주 정규화되여있다. 왕청현로인농악무예술단의 원생태(原生态)농악무(전승과 보호용 위주), 혁신과 발전을 가져온 왕청현상모춤예술단의 농악무(선전용 위주), 어린이상모춤강습기지의 농악무, 이렇게 제대형(梯队型) 전승체계를 이루었다. 그리고 지난 6월 18일, 왕청현중국조선족농악무전시관 및 농악무전승보호쎈터 현판식이 왕청현에서 있었다. 3천여만원을 들여 건설한 이 전시관은 부지면적이 3,117평방메터, 건축면적이 3,200평방메터에 달한다. 전시관 내부에는 무형문화유산 전승 및 전수, 훈련교수, 전시공연 등이 일체화된 시설들이 잘 갖추어져있어 조선족농악무의 보호와 계승, 발전을 위해 견고한 진지로 되고 있다. 전시관에는 김명춘이 20여년간 피타는 노력을 들여 수집해놓은 수십년전의 상모와 상모 제작도구들, 농악무의 발전과 혁신 과정을 보여주는 눈부신 성과물들이 아주 상세하게, 일목료연하게 전시되여있다. 이 모든 것마다에 김명춘의 피와 땀이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발굴과 발견이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후세에 와서 어떻게 보존하고 전승하고 계승, 발전시키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이 면에서 김명춘을 왕청농악무의 공신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김명춘은 상모춤 연구와 발전을 인생의 최고리상으로 삼고 상모춤을 조선족민간무용중의 특색 있는 한떨기 아름다운 꽃으로 가꾸어왔다. 관련 부문의 지지하에 2007년에 왕청현상모춤예술단을, 2009년에 왕청현로인상모춤예술단을 설립하여 대외공연을 전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기초에서 전 현적으로 농악무보급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왕청현 각 중소학교, 8개 사회구역, 9개 향진 및 일부 사업단위 등에 31개의 상모춤양성기지를 세워 농악무 연구와 보급 및 인재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2012년, 원 왕청현로인농악무예술단 장문일 단장(오른쪽 두번째)과 함께 하마탕농악무 관련 조사를 하고 있는 김명춘(왼쪽 첫번째)


2005년, 상모춤을 무형문화유산종목으로 신청할 때 왕청진, 배초구진, 서위자촌 등지에서 개체호, 교원 등 상모춤 골간 32명을 겨우 물색해서 상모춤 표현을 하던 일, 2006년, 제1회 문화유산일을 맞아 왕청현제1직업기술고등학교 학생들을 조직해 한달 반 훈련시킨 후 연길 시대광장에서 농악무 표현을 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32명이 아니라 3천명, 5천명도 조직해서 표현할 수 있다고 김명춘은 자신한다.
 
2012년, 1,050명의 왕청현농악무전승기지의 배우들이 표현한 상모춤이 기네스 세계기록에 오르는 장거를 이뤄냈다. 최년소 배우가 4살, 최고령 배우가 83세, 이들은 우리 민족의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보호하고 전승해야 한다는 열정으로 똘똘 뭉쳤기에 그러한 쾌거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관객들은 열광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바로 전승의 힘, 노력의 힘, 열정의 힘이 아닐가.
 
무형문화유산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것으로서 그 깊은 내면에는 한개 민족, 한개 국가의 전통적인 문화가 녹아있다. 그 전통적인 문화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면서 대대로 전승, 발전해나가는 것이 전승인의 몫이다. 현대문화에 빠져있는 어린 세대들을 전통문화 속으로 흡인해들이고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어 즐기도록 하게 하려면 전통과 현대를 결부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동안 김명춘이 모색하고 실천해온 전승경험이다. 물론 그 어떤 형식의 농악무든지 기본전통을 떠나서는 안된다.
 


. 2012년 10월, 최호욱(오른쪽 첫번째)선생과 함께 영벽촌에 내려가 농악무 관련 조사를 하고 있는 김명춘(왼쪽 첫번째)

왕청현의 상모춤에는 곱새춤이 등장한다. 예술적 형상에 손상을 준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김명춘은 자신의 주견을 고집했다. 생활환경의 영향으로 옛날에는 50대에 들어서면 벌써 허리가 굽은 사람이 많았다. 무형문화유산이라고 할 때 그 당시에는 어떤 무용도구를 사용했고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가락으로, 어떤 형식으로 놀았다는 등 옛날의 문화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미적, 예술적으로만 론할 것이 아니라 무대화가 안된 것, 무대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가견이다. 그리고 상모춤에는 우리 조선족의 막춤도 등장한다. 특히 로인들이 추는 상모춤 동작에 막춤을 넣었다. 막춤이란 스스로 즐기면서 막 추는 춤을 말한다. 우리 민족은 밭머리에서, 마당에서 막춤을 추면서 휴식의 한때를 즐겨왔다. 이런 세부적인 과정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을 전승인으로서의 사명감, 책임감이라고 여겼다. 
 
김명춘은 조선족 상모춤에 과감히 무술동작, 흑인 힙합댄스(街舞)동작, 발레동작을 도입하는 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모줄을 3겹, 4겹의 원형으로 만들어 앞으로 들어갔다 다시 뒤로 빠져나오는 동작을 연구하고 부단히 새로운 동작들을 개발해왔다. 또한 끊임없이 표현기능을 향상시켜 조선족 민간농악무를 동작으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대담히 혁신하여 시대적 미감을 뚜렷이 하였다.
 


주급 전승인 태영춘, 전권일에게 전통상모 제작을 가르치고 있는 김명춘

그래서 그들의 상모춤은 현란하다. 소상모(小象帽, 상모줄 길이 110센치메터) 표현에는 오리발 평상돌리기(鸭步转), 꼭두상(点头象), 번개상(闪电象), 자반 뛰며 평상돌리기(躺身转), 재주놀이(狂甩), 벌려 뛰며 평상돌기(双飞转)가 있다. 중상모(中象帽, 상모줄 길이 5~6메터) 표현에는 돌풍차돌리기(转风车), 뒤풍차돌리기(后风车), 마당쓸기(扫圈子),멍석말이(卷席子), 석마돌기(石磨转), 앞풍차돌리기(前风车), 상모짓뚫기(穿圈技法), 평돌개(旋风转), 가위접기(剪腿转)가 있다. 장상모(长象帽, 상모줄 길이 20메터 이상) 표현에는 상모짓타기(跨彩圈), 올방자놀이(盘腿圈), 상모짓빼기(抽彩圈), 상모짓풀기(放飞带) 그리고 열두발상모(十二庹象帽) 두가지가 있다. 다채롭고 다양한 상모춤 표현에 관객들은 눈을 뗄 틈이 없다. 관객석에서는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는다. 
 
김명춘은 무형문화유산 전승 및 발전 방면에서 자신만의 뚜렷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중국땅에 이민 오면서 조선반도에서 가져온 민족문화를 중국문화에 맞게 변화, 발전시킨 것이 우리 왕청현 중국 조선족농악무(상모춤)의 특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약 무형문화유산 전시공연을 한다고 하면 아주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내용들을 전달해야 하는데 여기서는 원생태라고 하는 표현형식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흰색 복장을 차려입고 상모는 검은 바탕에 흰 변을 두르고 흰 꽃을 달아야 한다. 그리고 량회(两会)의 승리적인 페막을 경축하는 무대에서는 경사스러움을 표현해야 하기에 화려한 무대복을 떨쳐입고 중국문화에 맞게 빨간색 상모에 노란색 변으로 변화를 주고 흰 꽃 대신 연변을 상징하는 붉은 진달래꽃을 달아야 하며 음악 역시 경쾌하고 심금을 울리는 장단이여야 한다. 그리고 민간무용콩쿠르에 참가할 경우, 기교적인 것, 저마끔 재주를 부리는 등 농악놀이를 곁들인 농악무를 표현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 중국 조선족농악무는 장소와 환경에 따라 표현형식상 조절과 변화가 가능하다.”
 
“무형문화유산을 아래 세대에 제대로 전승하려면 웃세대의 노력이 필요하다. 전통적인 것을 홍보하려면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야 한다. 어린이들의 상모춤 표현에 힙합댄스동작을 도입한 것은 아이들의 심리에 맞춘 과감한 시도였다. 아이들에게 전통적인 복장을 입히고 전통춤을 추게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본다. 힙합댄스를 즐기는 아이들 심리에 맞게 우리 상모춤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본다. 일단 아이들이 상모춤을 좋아하게 만들고 천천히 그것에 깃든 깊은 문화적인 의미를 터득하도록 해야 한다.”
 
“농악무애호가 여러분 모두 전승인이다. 나는 다만 대표성 전승인일 뿐이다. 전승은 어느 개인의 힘에만 의거해서는 안된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수십년간 농악무를 발굴하고 전승시킨 로일대예술인들을 떠나서는 오늘과 같은 기꺼운 성과를 따낼 수 없었을 것이다. 최호욱선생은 병세가 위중함에도 생명이 다하는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 영벽촌에 내려가 농악무 관련 조사를 펼쳤다. 예술의 목적은 필경 관상성을 높여 정신적 에너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민간문화예술의 하나인 농악무 역시 인류의 무형문화유산으로서 더욱 관상성을 높여 민족과 성별의 제한 없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 모두 즐길 수 있는, 무궁무진한 정신적 에너지를 안겨줄 수 있는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본다.” 
 
중국 조선족농악무(상모춤)의 대표성 전승인으로서의 김명춘은 자신의 소임을 넘쳐나게 해오고 있다. 농악무와 상모와 연을 맺고 전승과 변화, 발전에 혼신을 불 살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흑인이 만들어낸 힙합댄스가 전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다짐한다. ‘이제 흑인이 상모를 돌리면서 힙합댄스를 추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쉼없이 상모를 돌리리라.’  
 
 
《예술세계》 2021년 6호
 
사진 제공 | 왕청현농악무전승보호중심


파일 [ 1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44
  • -우리 민족이 낳은 우수한 음악가 최삼명선생 그리고 작품들 위대한 시인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이 감동을 전해주는 시라면 위대한 음악가들이 이 세상에 남긴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선보를 그려주는 아름다운 선률이다. 사람들속에 익숙히 알려져있는 《논물관리원》이나 《내고향 오솔길》은 문화부 대상, 전국소수민족...
  • 2013-08-06
  • 최근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신옥분부교수가 《합창예술》 교재를 새로 출간했다. 이는 1958년 연변대학 예술학원이 설립되여 지금까지 처음으로 공개출판된 교재로 더한층 주목받고있다. 1987년, 연변대학 예술학원을 졸업하고 연변군중예술관에 배치받아 성악지도원으로 있으면서 중소학교와 기관, 단위의 합창을 많이 가르...
  • 2013-08-05
  • 작곡생애에 대중들이 익히 알고 즐겨 부르는 가요 한두수만 창작해도 유능한 작곡가로 대중들의 애대를 받게 된다. 그런데 작곡가 최연숙선생(79세)은 반세기 남짓한 작곡생애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타향의 달밤”, “두만강천리”, “진달래고향” 등 중국조선족이라면...
  • 2013-08-02
  • -중국 조선족의 이름난 안무가 《탁월한 무용가》 최옥주   1990년 10월, 연변가무단의 중량급 대형무용극《춘향전》이 북경아시안게임 예술축제에서 국내외 관중들로부터 높은 평판을 받았다. 중국의 문예계의 권위인사는 심지어 《춘향전》을 우리 나라 《7대 민족무용극》의 하나라고 극찬하면서 사람들을 도취시키...
  • 2013-07-29
  • 만화가 김봉관선생(76세)의 저택 작업실 한쪽벽에는 최근에 창작한 만화(漫畵) 40여폭이 가쯘하게 걸려있었다. 풍자만화, 시사만화가 주를 이루고있었는데 만화마다 착상이 교묘하고 예리한 붓끝이 정곡을 찔러 “옳지, 그렇지”라고 저절로 수긍이 가고 무릎을 치게 된다. “하루의 일과를 만화로 시작하여...
  • 2013-07-12
  • 절강위성TV 대형전문음악평론프로그램 “중국의 목소리” 시즌2에서 프로그램의 새로운 기록을 창조한 김윤길씨가 주목받고있다. 어려서부터 흑인음악을 좋아한 김윤길씨는 현장에서 허스키한 독특한 목소리로 마이클 볼튼의 명곡을 열창해 현장의 관중과 네멘토를 놀래웠다. 노래가 시작된지 불과 5초도 안되여...
  • 2013-07-12
  • 건축업으로 번 50만원 예술단 창단과 운영에 투입   진달래예술단 총감독 채규억 《저분이 예술에 투자하는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라오. 정말 보통사람이 아니라니깐…》 훈춘사람들은 채규억(62세)씨를 놓고 이렇게 찬사를 아끼지 않고있다. 채규억씨가 바로 2010년 10월에 훈춘시진달래예술단을 창단하고...
  • 2013-06-27
  • 한국로사가야금앙상블예술단 정미화단장의 남다른 중국정 중한문화교류음악회서 25현가야금연주를 하고있는 정미화단장. 중국의 조선족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한국연예인이 있다. 바로 한국 로사가야금앙상블예술단 정미화단장이다. 정미화단장은 《로사가야금앙상블예술단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지원을 받...
  • 2013-06-13
  • [인물기사] 무용인 리령의 흰색의 살풀이 글/김 호 림 춤사위를 선보이고 있는 리령 자의든 타의든 그가 맨 처음 재간이라고 배운 게 바로 춤이었다고 한다. 그때 “문화대혁명”의 폭풍은 룡정이라는 작은 시골에도 세차게 불어치고 있었다. 곳곳에 붉은 기가 나부끼고 “홍가(紅歌)”가 울려 퍼졌다....
  • 2013-06-08
  • 지난 5월 14일 북경성광영사원에서 펼쳐진 CCTV 2013 소수민족가왕선발전 결승전에서 연변가무단의 가수 김선희씨가 “조선족가왕”으로 선정됐다. 29일, 록음사 친구가 운영하는 편한 곳이라고 해서 공신의 한 커피숍에서 김선희씨를 만났다. 그녀의 가수꿈은 어찌 보면 무가내로 시작됐다. 가수가 꿈이지만 가...
  • 2013-06-03
‹처음  이전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