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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풍금 한대로 연변을 매료시킨 허춘화씨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10월14일 09시22분    조회: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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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춘화전자풍금양성쎈터 원장 허춘화.

1980년대초, 전국적으로 방송예술단 이름을 가진 단체가 북경, 상해, 연변 세곳 밖에 없었는데 그시절 연변방송예술단에서는 1978년까지 전국에 한대밖에 없었다는 립체식 전자풍금 한대를 어렵사리 장만했다. 그런데 그때까지 국내 한다하는 예술학교들에 전자풍금 전업이 없다보니 연주원을 구할 수 있는가. 그래서 전자풍금과 ‘비슷한 악기’인 손풍금연주원 가운데서 우수한 녀연주원을 인입하고 자체 련습과 연수를 통해 양성하기로 하였는데 그때 연변에 있는 몇명의 녀손풍금수 가운데서 방송예술단의 시야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 글의 주인공 허춘화였다.

손풍금수로부터 전자풍금 연주원으로

어려서부터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는 그녀에게 악기를 배우라고 인도한 사람은 연변예술학교에서 문화교원으로 사업하시던 그녀의 아버지였다. 초중 2학년을 다니던 1972년 마침 연변예술학교에서 문화대혁명이후 처음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였고 그녀는 손풍금전업에 입학하였다.

1972년도 연변예술학교 입학식 공연에서 손풍금 타는 허춘화.

“열대여섯살 때라 손풍금이 어찌나 무거운지 한참 련습하면 땀벌창이 되군 하였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견지한 보람으로 손풍금을 소화했고 남보다 더 잘 칠 수 있게 되였다.” 올해 66세인 허춘화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그때를 회억한다. 1975년도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연변연극단에 배치받아 손풍금수로 활약했다. 순회공연을 갈 때면 무거운 악기 때문에 항상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6년간의 연극단생활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추억들을 남겨주었고 행복한 가정과 귀여운 아들을 안겨주었다.

밭머리에서 진행된 연변연극단의 순회공연 한 장면.

밭머리공연을 끝내고 멀리 모아산을 배경으로.

“1982년 어느 따스한 봄날, 1978년에 설립된 연변방송예술단의 김태종 단장이 동부인하여 우리집에 왔다. 그때 우리 부부는 모두 손풍금수였는데 선생은 나더러 예술단에 와서 립체식 전자풍금으로 전업을 바꾸는게 어떠냐고 묻는 것이였다.” 그때까지 립체식 전자풍금은 전자악기라고 음악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더욱 큰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앞에서 그녀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기실 손풍금수에게 26세는 황금시기나 다름없었고 전업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였다. 그해 5월, 그녀는 결연히 연변방송예술단으로 전근하여 연변의 첫 립체식 전자풍금연주원으로 되였다.

힘들었지만 보람찬 배움의 나날들

말이 전자풍금연주원이지 텔레비죤에서나 보아오던 립체식 전자풍금앞에서 그녀는 유치원생이나 다름없이 처음부터 배워야 했는데 사용설명서가 유일한 선생님이였다.

“립체식 전자풍금은 건반만 손풍금과 같을 뿐 기타 부분은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수십개나 되는 조절단추와 생소한 왼발건반, 오른 발로 음량 조절과 감정처리 절주스위치 조절과 변주스위치 조절을, 무릎으로는 울림소리를 조절해야 하며 오른 손으로 선률, 왼손으로 반주부분을 연주하는 동시에 음색과 절주 등 조절단추를 눌러주어야 하고 단번에 세줄짜리 악보를 보아야 했으니 매일마다 설명서와 씨름하면서 자습하고 연구하고 련습하였다.” 그녀의 말처럼 “립체식 전자풍금은 한대의 악기가 아니라 하나의 악단이였으며 음악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하루하루 전자풍금과 ‘친’해지고 그속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연변방송예술단시절 무대공연을 앞두고(오른쪽 허춘화).

전자풍금을 연주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땀동이를 쏟는 그녀의 어려움을 헤아린 예술단에서는 그녀를 장춘영화촬영소에 단기연수를 보냈다. “정말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열심히 배웠다.” 그녀는 자기절로 련습하면서 부딛친 많은 난제들을 장춘에서 하나하나 풀었다. 그러나 장춘영화촬영소 악단에 전자풍금 한대밖에 없었기에 틈틈히 비여있는 시간이나 남이 잠든 밤에 련습할 수 밖에 없었다.

1985년 예술단에서는 야마하표 최신식 전자풍금을 광주를 거쳐 들여오기로 하였는데 마지막 악기험수를 연주자 본인이 해야 했기에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광주에 날아갔다. 그때 광동말을 한마디도 알아 듣지 못하는데다 광주의 치안도 썩 좋지 않아 군인이 보초 서는 방송국초대소에 가서야 마음을 안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광주시교의 물류창고에 가서 악기포장을 뜯고 전기를 넣는 순간 세줄의 건반우에 반짝이는 별무리가 쏟아지는 듯 조명이 눈부셨고 건반을 누르는 순간 아름다운 멜로디가 우렁차게 어두운 창고안에 울려퍼졌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꼭 내손으로 연변사람들에게 선물할 것이다!) 당시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가장 좋은 하이야 한대 가격이 3만 6천원이고 그녀의 한달 로임이 76원이던 때였는데 야마하 전자풍금 가격은 무려 4만 2천원이였다고 한다.

연변방송예술단시절 문예프로 록음을 하고 있다.

그녀는 큰 돈을 들여 이렇게 좋은 악기를 샀는데 잘 연주하지 못하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번 걸음에 연수를 받고 가는게 좋겠다고 단위에 제기하였다. 예술단에서는 그녀의 말에 선뜻 동의하면서 상해방송예술단에 련계를 달아주었다.

상해행 기차표를 끊었는데 침대차가 없어서 39시간동안 일반석을 리용하다보니 두발이 퉁퉁 부어 걷기 힘들었지만 그녀는 그길로 상해방송예술단 진유문 선생을 찾아갔다. 상해방송예술단에도 립체식 전자풍금이 한대밖에 없어서 악기가 비여있는 시간에만 수업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6개월 간 밥먹고 잠자는 시간외에는 련습에만 몰두하였는데 전자풍금 숙제를 피아노로 대체하여 악기로 인한 시간 랑비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상해는 여름이면 습도가 높고 겨울이면 난방시설이 없어서 힘들 때가 많았지만 그보다도 집에 두고 온 6살 짜리 아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 혼자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다.” 아들을 키워본 어머니들은 그녀의 심정을 리해하리라. 하지만 아들은 집에 돌아가면 볼 수 있지만 전자풍금은 이제 다시 배울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곤난을 극복하면서 열심히 배워갔다. 그번 연수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일본 전문가의 특강을 듣고 연주회에도 갈 수 있었는데 립체식 전자풍금에 대한 지식을 많이 배웠고 연주기교도 전에 없이 제고되였다.

연변무대를 놀래운 첫 전자풍금 독주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니 해야 할 일들이 태산같이 쌓여있었다. 악대에서는 합주에서 부족한 성부를 대신해주어야 했고 라지오방송 음악부, 소년아동부, 텔레비죤방송 각 문예부서의 음악프로들인 우리네동산, 청춘스타트, 아리랑극장, 주말무대, 한어문예부 경극프로까지 독립적으로 완수해야 할 절목이 너무나 많았다. (전자풍금의 거대한 위력을 남김없이 발휘할 무대가 활짝 열렸다!)고 생각한 그녀는 휴식일까지 희생하면서 밀리고 쌓인 일들을 해나갔다.

1985년산 야마하 전자풍금으로 연주하고 있는 허춘화.

드디어 1986년 연변텔레비죤방송 음력설야회에 그녀의 전자풍금 독주 <태양섬에서>가 선을 보였는데 이는 연변 연주원이 무대에 올린 첫 전자풍금 독주이다. 분명 한 사람이 악기 한대로 연주하는데 현악, 목관, 동관, 타악기소리에 파도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대합창소리까지 어울린 황홀한 전자음악은 한꺼번에 연변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후에도 그녀는 우리 민요를 개편한 전자풍금 독주 <양산도>, <반달>, <바다의 노래> 등을 연변인민들에게 선물하였다.

전자풍금양성쎈터와 풍성한 성과

“라지오와 텔레비를 통해 나의 이름이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자 전자풍금을 배우려는 학생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하였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자 방송예술단에서는 단위의 명의로 전자풍금양성쎈터를 설립했다. 이로부터 그녀의 연주원생활과 전자풍금 지도교원생활이 병행되기 시작하였고 2006년에 퇴직했지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애고사리같은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연주생활만 하던 허춘화에게 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학원들에게 남김없이 배워주고 싶었다. 지식이나 기술은 다 배워주어도 넉넉히 남는 재산이기 때문이다.” 이미 수백명의 학원을 졸업시킨 그녀는 전자풍금이 어린이들의 음악교육 특히는 계몽교육에 독특한 효과가 있다고 늘 말한다.

허춘화원장 유치원생 학원을 가르치고 있다.

5살 되는 김문빈(金文彬)을 2년동안 가르치다가 그의 남다른 음악재능을 발견한 그녀는 지인을 통해 중앙음악학원 부속소학교에 추천하였는데 후날 김문빈은 미국예일대학 석사,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북경정석학교 표현예술중심 부총감, 소주대학음악학원 피아노 객좌교수로 활약, 아직도 음악의 길로 이끌어준 그녀를 잊지 않고 있다. 6살때부터 그녀의 학원에서 전자풍금을 배운 김정연이는 전국전자풍금대회 3등을 시작으로 여러번 대형시합에서 금상을 탔으며 일본에서 개최된 아세아 립체식 전자풍금콩클에서 2등을 따내기도 하였다. 일본국립음악대학을 졸업한 김정연이는 조선족으로는 립체식 전자풍금 첫 연구생이다.

전자풍금은 건반이 가벼워서 3살 때부터 시작할 수 있고 풍부한 음색과 절주 그리고 자동반주 부분은 어린이들을 쉽게 음악에 접근시키며 전업으로 발전하지 않더라도 인생을 따라가는 즐거움이 된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다.

춘화전자풍금양성쎈터가 소문을 놓기 시작한 건 1990년 송경령기금회의 주최로 북경에서 열린 <전국어린이전자풍금콩클>에서 그녀의 학생이 일등상을 안아올 때부터였다. 그후에도 전국대회에서 여러번 금상을 수상하였고 2008년 상해에서 개최된 <야마하립체식전자풍금시합>에서는 그의 학생 3명이 2, 3등을 하였는데 일본과 중국의 평심위원들은 연변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3명이나 결승전에 진출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2015년 <전국야마하전자풍금길림성선발대회>가 장춘에서 열렸는데 그녀의 학생들은 유아조와 아동조에서 모두 1등을 차지하였다. 길림성음악가협회 주석 허민은 대회가 끝난후 성문련의 일행과 함께 춘화전자풍금양성쎈터를 찾아 <길림성문예지원자음악교학기지>라는 간판을 걸어주기까지 하였다.

그와중에도 1999년부터 중국음악가협회에서 전자풍금 급별시험제도를 실시하자 허춘화는 연변의 첫사람으로 전자풍금 급별시험관 자격을 따냈고 2006년부터 춘화전자풍금양성쎈터는 전국전자풍금급별시험점, 국제예술가련합회 대중화구급별위원회 연길시급별시험중심으로 명명되여 연변지역 전자풍금 급별시험을 주최하고 전주 각 현, 시 지도교원을 양성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허춘화원장이 성인반학원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외에도 춘화전자풍금양성쎈터에서는 로령화시대 갈수록 늘어가는 성인들의 수요에 만족을 주고저 지난해부터는 성인반을 모집하였는데 생각밖으로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배우고 있다. 성인들의 음악에 대한 욕구는 절대 어린이들 못지 않다. 전자풍금과 손풍금을 함께 배우고 있는 어느 한 병원의 원장은 “사람들의 몸을 치료하는 두손으로 마음을 치유하는 음악을 배우니 몸과 마음이 젊어진다.”고 하면서 어렸을 때 하고 싶었던 음악을 하면서 동심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표시하였다.

성인반학원에게 손풍금을 가르치고 있는 허춘화원장.

기실 기회는 누구에게나 다 주어지는 법, 그러나 그 어떤 곤난이 막아서든지 과감하게 도전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에게만 비로서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소중한 기회로 남게 된다. 전자풍금 한대로 연변인민들에게 아름다운 멜로디를 선물하고 연변의 아이들이 전국무대와 국제무대에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이끌어준 국가1급 전자풍금 연주원이며 연변춘화전자풍금양성쎈터 원장인 허춘화가 바로 그 기회를 놓지지 않은 멋진 연주가이자 지휘가이며 음악교육가이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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