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재한조선족 성공시대> ④ 꿈을 노래하는 가수 백청강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7월11일 09시23분    조회:830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13년 만에 이룬 '한국 가수'의 꿈…밑천은 의지·성실함
암투병 2년 공백 딛고 컴백 "간절한 꿈 있다면 도전하라"

(서울=연합뉴스) 신유리 기자 = 중국 연변에서 태어난 9살 소년은 단 하나의 꿈이 있었다. 한국에 가서 가수가 되는 것.

노래를 부를 때 가장 행복했기에 연변의 야간 업소를 돌며 밤무대에 오르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소년의 꿈은 22살 청년이 돼서야 이뤄졌다. 올해로 데뷔 5년 차 가수인 백청강 얘기다.

오묘한 회색빛으로 염색한 머리와 검정 셔츠 차림으로 카페에 등장한 그는 말 그대로 '아이돌 스타일'이었지만 특유의 순박한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다.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가수 백청강(27)이 지난 8일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7.11 ryousanta@yna.co.kr

 

가수 백청강이 걸어온 길에는 시련과 기적이 반복해서 펼쳐졌다. 뛰어난 재능과 타고난 성실함이 있었지만 주변 여건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9년 연변 훈춘시에서 태어난 조선족 3세인 그는 유년 시절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하지만 노래 실력 하나만큼은 소학교(초등학교)에서부터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학교에서 노래를 부르면 고학년 형들까지 찾아와서 '너 노래 잘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제야 '아 내가 노래를 잘하는 거구나' 깨달았죠.(웃음) 그러다 9살 때 TV에서 HOT가 '위 아 더 퓨처'를 부르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멋있어서. 한국에 가서 저런 가수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백청강은 쉬지 않고 도전했다. 음악학원에 다니며 밤새도록 노래와 춤을 연습했고 연변에서 열리는 오디션과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다.

그래도 한국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스무 살이 되기까지 그에게 주어진 무대는 연변의 야간 업소가 전부였다.

"무대에 너무 서고 싶은데 기회가 없더라고요. 일단 경험을 쌓자는 생각에 밤무대에 서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내가 왜 노래하는 거지' '생계 때문에 노래하는 건가' 하는 의문이 커졌죠. 그래서 마음가짐을 바꿨어요. '이게 다 가수가 되기 위한 거다' 하고요."

기적은 마지막 순간에 찾아왔다. 연변에서 청도로 가는 기차표 한 장. MBC '위대한 탄생'의 중국 오디션에 참가하려고 30시간이 넘게 걸리는 기찻길에 올랐다. 2010년 11월 백청강이 21살이던 때다.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었죠.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서 가수가 되는 걸 포기하기 직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청도 오디션을 통과하고 한국에 가게 되고, 우승까지 하게 됐어요. 무대를 즐기면서 최선을 다하려 했습니다. 도와주신 분들 덕택이죠."

백청강은 "운이 좋았다"고 겸손하게 회고했지만 2011년 한국에서는 백청강 신드롬이 일었다. 22살 조선족 청년이 진심을 담아 부르는 노래에 시청자도 함께 울고 웃었다.

특히 백청강이 등장하면서부터 국내에서는 중국 동포를 향한 시선이 한결 달라졌다. 그의 소탈한 겉모습, 투박한 조선어 말투가 오히려 신선한 호감을 일으켰다.

백청강 팬클럽이 줄줄이 결성됐고, '아십니까'라는 뜻의 '앙까'라는 조선어 표현은 유행어가 됐다. 중국 동포라고 하면 무턱대고 뒷골목 범죄자를 떠올리던 편견이 조금은 옅어지고 백청강처럼 '성실한 이웃집 청년'도 많다는 긍정적 인식이 퍼졌다.

"제가 조금은 벽을 깼다고 생각해요. 조선족을 향한 선입견이 없진 않았죠. 문화 차이 때문이라고 봐요. 저도 데뷔 초기엔 허리를 깊이 숙여서 인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버릇없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억울했죠. 연변에서는 그렇게 인사하는 문화가 아예 없었거든요. 지금은 한국 문화에 다 적응했습니다.(웃음)"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가수 백청강(27)이 지난 8일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7.11 ryousanta@yna.co.kr

 

2012년 미니앨범 '올 나이트'로 정식 데뷔하고 방송가를 누비던 그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련이 또 찾아왔다. 그해 9월 직장암 초기 진단을 받은 것. 23살의 젊은 나이였다.

몇 차례 수술 끝에 완치했지만 공백이 컸다. 2년여 동안 무대에서, 대중에게서 멀어졌다. 백청강에겐 그게 암보다도 무서웠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오히려 덤덤했어요. 치료만 잘 받으면 완쾌하리란 믿음이 있었죠. 부모님은 무척 걱정하셨지만요. 암보다도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다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더 컸어요. 그때 깨달았죠. '난 죽을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못하겠구나' 하고요."

병을 딛고 일어선 컴백 무대도 그의 삶 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지난해 MBC '복면가왕'에서 성별까지 바꾸는 반전을 선보인 것.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고 가녀린 목소리로 노래하던 가수가 가면을 벗자 판정단은 '경악'했다. 가면 뒤에 남자의 얼굴이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여장을 처음 해봤어요. 재밌기도 했고, 관객과 호흡하면서 다시 힘을 얻기도 했죠. 이 길이 내 운명인가 봐요. 근데 힐 신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도대체 걸그룹은 어떻게 힐을 신고 댄스까지 소화하는 걸까요? 모든 여성분을 존경합니다.(웃음)"

때로는 백청강을 향한 환호가 하루아침에 질타로 돌아섰다. '위대하게 탄생한 가수'로 추켜세웠다가도 근거 없는 루머가 돌면 수백 개 악플이 달리곤 했다. 조선족의 흉악 범죄가 뉴스에 나오면 그를 향한 시선도 금세 차가워졌다.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담담하게 말할 만큼 내공이 쌓였지만 아쉬움도 영 없지는 않다.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오원춘 사건 때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났어요. 순식간이었죠. 방송국에서 섭외 요청을 할 때도 이런 분위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범죄는 처벌받아야죠. 한국에 왔으면 한국법을 따라야 합니다. 다만 한 명의 잘못을 조선족 전체의 잘못으로 바라보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조선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지는 않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연변에는 '제2의 백청강'을 꿈꾸는 가수 지망생이 여전히 많다. 백청강은 그들에 대해 어떤 생각일까.

"간절한 꿈이 있다면 도전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한국은 기회가 많은 곳입니다. 좌절할 때가 많을 거에요.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새로운 생각을 떠올려보길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정답이 나와요. 제가 겪어봐서 알게 됐죠."

백청강은 특유의 감미로운 음색으로 발라드부터 댄스곡까지 여러 음악을 선보였다. 요즘은 김경호 콘서트 등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하고 지역 축제에서 초청 공연도 하고 있다.

정규 앨범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모든 곡이 맘에 들 때까지 고치고 바꾸는" 완벽주의 때문이다. 특히 요즘은 자작곡을 쓰느라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그는 가장 아끼는 자작곡으로 컨템퍼러리 발라드인 'In Time'을 꼽았다. 노래는 백청강이 걸어온 길을 담담히 들려주는 듯하다.

"하루가 내겐 더 너무 어두웠던 시간 속/ 가슴이 너무도 차가워진 기억 속// 하지만 멈출 수 없었어/ 어떻게든 난 널 위해서 일어날 거야"

(서울=연합뉴스) 류효림 기자 = 가수 백청강(27)이 지난 8일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16.7.11 ryousanta@yna.co.kr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조선족 트렌스젠더 김성 결혼 10년, 남편과 잘 살아 아시아투데이 홍순도 베이징 특파원=중국에서도 트렌스젠더로 사는 것이 간단치가 않다. 더구나 예술가라면 더욱 그렇다고 해야 한다. 주변의 눈길이 결코 고울 수가 없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조선족 트렌스젠더 무용가로 유명한 김성(金星·48) 역시 ...
  • 2015-04-23
  • 김치민족이라고 불려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우리 민족은 김치독을 보관하는 김치움을 무척이나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30년전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주택이나 아빠트 앞뒤에는 창고가 있었고 창고 한쪽에는 김치움이 있었다. 그러나 창고가 흉물스럽게 보였던지 아니면 오르는 땅값을 버틸수 없었던지 어느새 창고는 사라졌고...
  • 2015-04-21
  •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8] 연길 ‘그리나한복점’ 한선순사장의 한복 사랑     연길 ‘그리나한복점’ 한선순사장   지난 12월 13일,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펼쳐진 연변대학 녀성연구중심 직업녀성연구반 설립 15주년 기념행사에는 남다른 패션쇼가 열렸다. 40대~60대 녀성기업인들이...
  • 2015-04-14
  • 연변천흠계렬사 연장춘총재 창업 마인드 올해로 해외귀국 8년차를 맞고있는 연장춘(47세)씨의 명함장은 대표 타이틀인 연길해외귀국창업협회 상무부회장, 연변천흠(天鑫)계렬사 총재, 연길물업협회 상무부회장, 부비서장, 연변해외귀국창업그룹 총재 등 일부만 적어도 명함장이 찰 정도로 많다. 2007년 12월,해외에서 귀국...
  • 2015-04-14
  • (서울=연합뉴스) 전명훈 기자 = 서울대 약대에서 과학자의 꿈을 키우는 연변 조선족 출신 연구원이 세계 최고 권위의 암 학회에서 '젊은 과학자상(Scholar-in-Training)'을 받는다. 서울대 약대 종양 미세환경 연구센터에서 박사 과정을 밟는 박연옥(32) 연구원이 18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미국암학회...
  • 2015-04-13
  •         “제가 군중예술사업에 몸담아 온지도 어느듯 올해로 52년이 되였습니다. 반세기가 넘은 것이죠. 되돌아보면 그 동안 군중예술사업을 해오면서 얼마간의 크고 작은 성과를 거두었으니 마음은 기쁨니다.” 그동안 장새납독주 “풍년의 노래”, 목금독주 “딱따구리원...
  • 2015-04-13
  • - 북경동화원의료설비유한책임공사 남룡 리사장을 적는다     아인슈타인은 “천재”, 마더테라사는 “사랑”, 메릴린 먼 로는 “섹시”…그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바로 그들의 이미 지를 기억한다. 그렇다면 남룡의 이름만 들어도 떠오르는것 이 있다면 바로 “대중...
  • 2015-04-10
  •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요.” 단아한 용모에 선한 미소가 인상적인 나무잎사랑조학회 회장 장미란(56살)씨는 가정에서는 착한 효부이자 다정한 안해였고 사회에서는 당당한 사업가이자 헌신적인 봉사일군이였다. 그는 30년을 하루와 같이 시부모님을 마지막까지...
  • 2015-04-09
  •  [연변을 클릭하는 사람들-7] 대천상업무역유한회사 김성남사장 창업 아이템 “하늘이 큰 인물을 만들 때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히고 지방과 골수를 괴롭히고 기아에 허덕이게 하며 온 몸을 못살게 군다”는 맹자의 말과 같이 피타는 노력이 없이는 꿈이 이루어질수 없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
  • 2015-04-09
  • 90세 전사의 끝나지 않은 전쟁   88여단 전사 이민 고층건물에 에워 쌓인 단독주택이었다. 철문을 지나 뜰에 들어서자 금세 이색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주택을 두른 회색의 담에는 글귀를 새긴 대리석이 광고판처럼 줄느런히 걸려있었다. 읽어보니 전부 항일연군과 관련된 시구와 노래, 이야기였다. 동북의 산과...
  • 2015-04-09
‹처음  이전 83 84 85 86 87 88 89 90 91 92 9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