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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주정뱅이》라는 제 별명이 좋습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7월1일 15시27분    조회:1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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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동현

연극배우 김동현씨의 30여년 연기인생 읽어본다

 항상 소박하고 편안한 농촌아저씨 같은 연극배우 김동현씨

30~40대는 그를 《방귀도》라고 부른다. 50대는 그를 《주정뱅이》이라고 부른다. 년세 있는 로인들은 그를 이《지현장》이라고 부른다. 세대별 부르는 호칭이 다른 사람, 다양한 별명을 가졌다는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 있다는 증명일것이다. 그가 바로 연변연극단의 연극배우 김동현(60세)씨이다. 김동현씨의 다양한 별명들은 그가 30여년 연극인생에서 쌓아올린 연기인생에 대한 충분한 대중적 긍정이다. 김동현씨는 기자에게 《저는 사람들이 제 이름을 불러주기보다는 <주정뱅이>라는 제 별명을 불러줄 때 더 좋습니다》라고 솔직하게 터놓았다.

《방귀도》와 《지현장》 그리고 《주정뱅이》

김동현씨가 《방귀도》라는 칠칠치 못한 별명을 얻게 된것은 인기소품인 《사위감 점고》에서 비롯된다. 연변연극계의 대부인 리영근선생이 직접 연출하고 출연까지 해 한때 큰 인기를 모았던 소품인데 이 소품에서 김동현씨는 《방귀도》(方贵道)라는 이름으로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방귀도라는 이름이 음감은 듣기 거북하지만 이름의 원뜻을 따질 우때는 귀할 귀자에 길 도자로 제법 학식 있는 이름이라고 주장한다. 소품에서 방귀도는 《마반산 높은 봉에…》로 시작하는 《농민인 노래》를 엉터리로 불러 이 소품후 김동현씨는 《방귀도》에 이어 《마반산》이라는 별명까지 더 얻었다.

 

소품 《사위감 점고》의 한장면

김동현씨에 따르면 이 소품에서 김동현씨가 맡았던 소품인물의 이름은 원래 방귀도가 아니였다. 이젠 오래돼서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철자가 들어있는 평범하고 식상한 이름이였던것으로 기억되는데 리영근선생이 이름을 방귀도로 고쳐부르는게 좋겠다는 제언을 했다는것, 처음에는 냄새 나고 칠칠치 못한 이름때문에 거부감도 있어 불만이였지만 리영근선생이 다 도리가 있어 이름을 고친것이니 그리 알고 두고보라면서 주장했다는것이다. 결국 방귀도로 소품이 전파를 타면서 일약 연변사람들이 지금도 배꼽 잡게 하는 명소품이 되여 오래오래 불후의 명작이 되였다. 이 소품에 등장한 인물들중 연길총각 《최나발》 같은 별명들도 당시 참으로 많은 인기를 모으면서 항간에서 떠돌기도 했다.

김동현씨가 소품에서 창조한 인물형상가운데서 환영받는 별명으로는 또 소품 《세배》에서의 외팔쟁이 《지현장》이라는 인물이 있다. 설이 당금이라고 현장사무실에 찾아왔다가 현장이 잠간 자리를 비운 사이에 현장의자에 앉아 《로동자들의 로임을 10배로 올려주겠다》고 연설을 발표하는 《지현장》, 정리실업로동자들의 맘속말을 시원하게 대변하는 《지현장》의 형상이 너무 인상 깊어 년세 많은 로인들은 지금도 김동현씨를 보면 이름보다는 dㅣ《지현장》이라고 부르면서 그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군 한다.

사람들은 또 김동현씨를 《주정뱅이》라고도 부른다.

인기소품 《사위감점고》에서의 방귀도로부터 TV련속극 《사랑의 품》에서의 철학에 이르기까지, 연극 《요란한 사랑》으로부터 연변TV 토요무대 《모아산의 여름》에 이르기까지 전문 주정뱅이역만 맡아 소문을 놓고 무대에서의 주정뱅이형상으로 전 연변주 전업단체소품콩클에서 최수우연기상을 수상한 김동현씨를 《주정뱅이전문호》로 불러도 무방할것이다.

주급 연기 1등상을 받은 소품 《주정뱅이사위》의 한장면

1988년, 연극 《요란한 사랑》에서 처음으로 주정뱅이역을 맡은 김동현씨는 식당에 가서 술을 마시면서도 술에 취한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관찰하였고 일부러 병원에 가서 알콜중독환자들과 생활체험도 하면서 생동한 주정뱅이형상 창조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그 보람으로 주정뱅이 특점을 무대에서 실감있게 표현하여 제3차 연변예술제 표현1등상을 따냈으며 1990년에는 음력설야회에서 선 보인 소품 《사위감점고》에서 주정뱅이 방귀도의 형상을 창조한 뒤를 이어 소품 《주정뱅이사위》에서 또 주정뱅이역을 맡고 주급 연기 1등상을 받았다. 따라서 김동현씨는 무대에서의 주정뱅이형상을 운운할 때면 항상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대중들에게 익숙해졌다.

김동현씨가 창조한 주정뱅이형상가운데서 비교적 인상이 깊은것으로는 또 TV련속극 《사랑의 품》에서의 철학이 역도 있다.

연변TV문화예술중심에서 연극 《사랑의 품》을 TV련속극으로 개편할 때였다. 연극에서 용우라는 극정인물의 배역을 맡고 인기몰이를 한 김동현씨는 계속 그 배역을 맡을 준비를 하고 제작조에 불리워갔다. 그런데 연출이 김동현씨를 보자마자 주정뱅이역의 적임자라고 하면서 기어이 백설의 친아버지 철학의 역을 맡아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댈줄이야?! 김동현씨가 극중인물 철학이가 백설이를 잃어버리고 혼자 세집에서 강술을 마시는 장면을 시험적으로 연기하자 대번에 《OK!》라고 환성을 질러버린 연출, 이렇게 김동현은 한가지 내용으로 된 연극과 TV련속극에서 완전히 부동한 두가지 형상으로 대중들과 대면하게 되였다. 그만큼 그는 다양한 연극캐릭터들을 모두 잘 소화할수 있는 탄탄한 연기내공이 있는 연극배우였다.

나 자신의 허울을 벗고 연극속인물로 재탄생

1977년도에 연변연극단의 배우모집시험에 합격되면서 연극배우의 삶을 시작했으니 김동현씨가 연극무대에 나선지도 어언 30여년 세월이 흘렀다.

연변연극단의 단장사업을 해온 아버지 김수룡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김동현씨는 어린시절부터 문예방면에 소질이 있었고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갔을 때는 대대과외문예선전대에서 무용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동현씨는 연극에 대해 진정 눈을 뜰수 있게 된데는 저명한 연출가인 허동활선생님의 도움이 컸다고 말한다.

연극무대에 발을 들여놓은후 첫 출연작인 《장백의 아들》에서 극중인물 출연에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표현상을 따낸 김동현씨는 맡겨진 배역의 대사만 제대로 암송해서 실수 없이 공연을 마무리하면 만사대길인걸로 착각하고 새로운 작품에 출연할 때마다 대사를 빨리 외우는데만 신경 썼다. 그런데 점점 어려운 배역이 차례지면서 시련에 부딪치게 될줄이야?!

1980년대초, 연변연극단에서 조선고전명작 《성황당》을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한후의 일이다. 련습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여 돌쇠의 역을 맡은 김동현씨는 돌쇠가 비자루로 마당을 쓸면서 처량하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의 연기가 잘되지 않아 애를 먹었다. 몇번이나 되풀이해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자 연출인 원주삼선생이 화를 냈고 연출의 책망을 고깝게 여긴 그는 참다 못해 비자루를 연출에게 던져버린채 연극을 더는 못해먹겠다고 문을 박차고 뛰쳐나와버렸다.

지난세기 80년대초 연변의 연극무대에서 늘 모습을 보였던 김동현씨

연변연극단이 1956년도에 창건된이래 연출에게 비자루를 던져버리고 《항의》해나선 무모한《기록》을 창조한 김동현씨는 잘못을 빌고 검토서까지 써야 했다. 그번 일로 의기소침해있는 김동현씨를 허동활선생이 불렀다. 허동활선생은 도대체 어느 장면이 그렇게 안되는가고 넌지시 물었다. 돌쇠가 비자루로 마당을 쓸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잘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허동활선생은 연극의 사회배경, 돌쇠의 처지와 성격 등을 깊이있게 분석해주면서 그 장면에서 돌쇠가 어떤 표현을 해야 할지에 대한 내심세계를 제시해주었다. 허동활선생은 연극배우는 연기에 앞서 극정과 인물을 파악해야 하며 인물속에서 살고 인물과 고락을 함께 할수 있을 때에야 제대로 된 연기를 펼칠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허동활선생의 가르침에서 계발을 받은 김동현씨는 이튿날 련습장에서 전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 연출과 기타 배우들을 놀래웠다. 오죽하면 첫번에 무릎을 탁 치면서 《그래, 바로 그렇게 하라는거야!》라고 환성을 올리며 원주삼연출이 기뻐하더라면서 지금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감개무량하다고 김동현씨는 추억했다.

연변연극단의 연극 《털없는 개》의 한장면

김동현씨는 그후부터는 새로운 배역을 맡으면 자기가 맡은 대사를 외우는데 급급해하는것이 아니라 극본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전반 작품의 내용을 리해하고 해당 배역의 인물성격을 파악하는데 정력을 기울였다. 그 보람으로 김동현씨는 그 어떤 배역이 차례져도 연기를 잘 소화해낼수 있는 기량을 련마해내고 성숙된 연극배우로 성장하게 되였다.

진실된 연기장면, 관중들의 눈물샘 자극

김동현씨가 연극배우로서의 최고인기를 누린 작품은 그래도 길림성1등상을 따낸 연극 《사랑의 품》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 작품에서 남주역 용우의 배역을 맡은 김동현씨는 팔을 하나 잃은 장애자의 연기를 제대로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몸은 비록 불구지만 마음만은 뜨거워 구두를 닦고 넝마를 주으면서 힘들게 살아가는 형편에서도 불쌍한 백설이를 친딸처럼 키워주는 용우의 형상이 잘 부각되여야만 전반 연극이 성공을 안아올수 있었다. 따라서 배역에 대한 요구가 높아서 연기를 해나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특히 외팔로 구두를 닦는 장면은 어떻게 해보아도 신통치 않아 연출은 걸레 한끝을 입에 물면 어떻겠는가는 제의를 내놓았다.

그렇게 하면 용우의 형상이 너무 비참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 김동현씨는 저녁에 집에 가서 사색을 거듭 하던중 내복을 꺼내 허리를 뭉청 자른후 그걸 한쪽 발에 걸고 구두닦는 동작을 해보았다. 별로 힘들지도 않고 곁에서 보기도 너무 민망스럽지 않아 안성맞춤일듯싶었다. 이튿날 련습장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 연기동작은 그후 공연때마다 관중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북경무대에서 공연할 때에는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텔레비죤드라마 《하얀꽃》에서 열연하고있는 김동현 

제일 비참한 장면에 박수갈채를 보낸다는것은 배우의 내심행위통일과 외부적인 행위통일의 일치로 창조되는 배우의 절정에 오른 연기에 대한 최고의 대우이고 긍정이지 않을수 없다. 공연이 끝나면 연기를 현실상황으로 착각하고 무대에 몰려온 관중들이 연극속인물이 불쌍하다고 너도나도 의연금을 내놓는 바람에 수만원이나 되는 의연금도 받았다고 한다. 후에 그렇게 받은 돈을 연변연극단에서 모두 고아원에 기부했다고 한다.

1990년대에 와서 소품의 전성기가 도래하게 되자 김동현씨는 《사위감 점고》, 《노랑각시》, 《갑속에 든 사람》, 《국제전화》, 《경계선》, 《시대련애》 등 많은 소품들에 출연해 출중한 연기력을 과시하면서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안타까운 연극현실 영원한 연극인생

모든 연기자들이 다 그러하듯 김동현씨도 현실의 무가내하고 저조한 연극문화에 대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과거에는 연변의 그 어느곳을 가도 극장이 있었고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갈수록 극장이 적어지고있으며 관중들의 날따라 높아지는 심미적수요에 따라 연극공연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연극무대가 없고 게다가 관중마저 줄어드는 현실에 대해 솔직히 대답이 궁하다는것이 김동현씨의 솔직한 고백이다. 개인적인 힘으로 해결할수 있는 그런 상황은 못되기때문이다.

김동현씨가 제일 마지막으로 농촌순회공연을 떠났던 때는 지난 2006년도, 흑룡강성의 조선족집거지역들을 돌면서 순회공연을 했는데 농촌로인협회조직에 의해 겨우 관중들이 모아졌고 모인 관중들도 로인과 어린 학생들이 다수였다. 더욱 안타까운것은 공연구경하러 온 학생들이 조선족들이지만 조선말을 잘 모르는 안타까운 실정이였다.

1977년도에 연극무대에 서서부터 지금까지 연극인생 외길만을 달려온 김동현씨는 연극배우는 항상 배가 고픈 삶의 련속이라고 말한다. 2000년도에 안해를 한국에 돈벌이로 보내놓고 어린 딸애와 함께 어려운 나날을 보내면서 남편의 《무능》을 자책도 해보았고 배고픈 연극인생의 길에서 갈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려운 생활형편속에서도 연극무대에 서기만 하면 모든 고민과 갈등들을 잊은채 연극에 몰두하군 했다. 

몸은 이미 퇴직했지만 김동현씨는 항상 새로운 연기인생의 꿈속에 묻혀산다

2006년도에 내부퇴직을 하고 나왔다. 김동현씨는 연기자에게 있어서 퇴직은 형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퇴직후에도 김동현씨는 소품 《가두주임》, 연극 《딸에게서 온 편지》 중앙텔레비죤방송국의 드라마 《산너머 강너머》 등 연기무대에 오르면서 사그라져가는 민족연극문화에 작게나마 힘이 되고 빛이 되려고 노력한다. 김동현씨는 연극을 맡아 관중들에게 기쁨과 웃음, 즐거움을 주었던 과거가 항상 뿌듯하고 자랑스러우며 그래서 연기인생 30여년이 행복했고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김동현씨는 올해 60세이다. 옛날같으면 환갑나이면 로인대접을 받았지만 지금은 시대가 좋아 나이는 수자일뿐이라고 김동현씨는 말한다. 연기자에게는 퇴직도 없다고 말한다. 좋은 작품이 있고 연극무대에서 수요하고 부르면 언제나 달려갈 준비가 돼있다고 말하는 김동현씨,《방귀도》《지현장》《술주정뱅이》처럼 실감나는 연기로 재탄생할 또 다른 새롭고 즐거운 김동현씨의 별명들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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