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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라경의 칭찬을 받은 조선족수학천재-한경청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5월5일 14시58분    조회:7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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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과학자 한경청연구원은 우리 나라 통제리론분야의 거목이다. 그가 연구해낸 《선형통제계통리론 구조적방법》은 1982년부터 중국과학원 연구생과 중국과학기술대학, 상해교통대학 등 여러 대학 자동통제학과 연구생 교육과정으로 되였다.

한경청연구원은 전국과학기술대회상, 중국과학원 과학기술진보상 2등상, 국가교육위원회 과학기술진보상 2등상,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 <<광화>>과학기술성과상과 총장비부군대과학기술진보상 2등상 등 일생동안 무수한 연광을 받아안았다.

그는 또한 중국계통공정학회 상무리사, 중국계통공정학회 계통리론전문위원회 부주임, 중국계통모방학회 상무리사, 중국자동화학회 통제리론전문위원회 위원 등 직무를 력임했다. 2008년 4월, 한경청연구원은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화라경 교수와 함께

화라경의 칭찬을 받았던 조선족수학천재

1937년 압록강변 장백현 한 산골마을에서 태여난 한경청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엄한 가훈속에서 학습에 남달리 전념했다. 입학해 3년만에 소학교과정을 다 떼고 우수한 성적으로 장백현중학교에 입학한 한경청은 아버지가 해방전쟁에 이어 조선전쟁에 나가고 어머니가 세상을 뜨다보니 가난속에서 학업을 마치지 않으면 안됐다. 고중에 입학한뒤 한학급 애들보다 서너살 어렸던 그는 늘 때를 굶기가 일쑤고 기운 옷이나 남이 버린 신을 신었지만 수학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수학박사의 야무진 꿈을 가진 한경청은 1954년 길림대학 수학학부에 진학, 1958년 21세 어린 나이로 훌륭히 졸업해 중국과학원 수학연구소에 배치받았다.

그가 금방 연구소에 배치받았을 때는 마침 중국땅을 뒤흔든 대약진시기였다. 연구소에서는 로동단련을 시킨다며 지식인들을 중국과학기술대학 산하의 공장에 내려보냈는데 한경청도 포함됐다.

그러나 시골에서 태여나 받은 갖은 고생으로 로동단련이 두렵지 않았던 그에게 행운이 닥쳐올줄이야! 갓 설립된 과학기술대학에서 수학교원이 모자랐던것이다. 그 수학교원자리는 한경청에게 차려졌었다.

여기에서 행운은 그치지 않았다! 화라경! 그보다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우리 나라 저명한 수학자인 화라경교수의 조교수로 사업하게 되였던것이다!

한경청은 뛸듯이 기뻤다. 그는 화라경교수가 강의원고를 쓰면 거기에 맞게 련습문제를 내고 학생들의 숙제를 검사하며 학교에서 화교수의 조수로 일했는데 수학머리가 총명해 화라경교수의 칭찬을 받았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더없이 중요한것은 정신력! 》

과학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1963년 중국과학원의 추천으로 쏘련 모스크바대학 수학력학학부에 류학가 함수해석학, 상미분방정식, 최적통계 등 지식을 열심히

학습했지만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966년 한경청은 귀국하지 않으면 안됐다.

문화대혁명때 한경청은 《조선수정주의집단사건》에 말려들어 2년동안 고초를 겪지않으면 안됐다. 자신은 애매하다고 여겼지만 당시로서는 앞날에 희망이 없어보였고 과학일군으로서도 더는 과학연구를 할수 없을것 같은 괴로움에 죽고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문득 동북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북에 갔다가 북경으로 돌아올 때 렬차에 짐보따리를 가득 실어주고 렬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저를 바래주는 식솔들의 모습은 그의 머리를 무겁게 했다. 만약 여기서 생을 마감한다면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나? 가족을 위해서라도 힘내 살아가야겠다고 그는 생각을 고쳤다.

2년이란 시간뒤 그는 《죄명》을 벗었지만 조직에서는 또 그를 《5.7》간부학교에 로동개조를 보냈다. 허무하게 흘러가는 시간앞에서 그는 배웠던 과학 기초지식들이 잊혀지는것만 같았다. 부푼 꿈을 안고 들어선 과학의 전당이 지금은 지옥같이 느껴졌다. 과학일군으로서 과학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엇인가! 그는 아예 그리운 동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동북에서는 그가 《조선수정주의집단사건》에 관련됐다는 서류를 보고 그를 받지 않았다. 그는 북경에 머물러있을수 밖에 없었다. 그가 할수 있는것이란 과학탐구밖에 없었다. 그는 언젠가는 과학인재가 다시 존중을 받을 때가 올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이를 물고 과학연구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한 그는 하루를 25시간 맞잡이로 살았고 글을 너무 쓴탓에 오른손 엄지인대가 늘어났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이렇게 육체적,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한경청은 두각을 나타냈다. 이 시기 그는 《저지문제중의 유도법》이란 저서를 써냈다. 한경청은 무슨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못해낼것이 없다는 도리를 다시 한번 느꼈다.

그랬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신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고생끝에 락이 온다》

1977년말 상해에서는 통제리론가회의가 있었다. 한경청은 처음으로 회의에 파견되였다. 사실 이번 기회는 한경청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중국에서 과학자 송건과 한경청이 1962년에 함께 시작한 통제리론연구는 당시만 해도 이미 세계선진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겪고 난뒤 선진국들과의 격차가 커졌다는것을 이번 회의를 통해 실감한 회의참가자들은 현대통제리론강습반을 꾸릴것을 제의하면서 총책임자로 통제리론분야에서 명망이 높은 한경청을 추천했다.

그는 과학연구일군의 사명감으로 전국적인 현대통제리론강습반을 여러차례 꾸렸는데 학생들과 뭇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이 시기 《선형통제계통리론 구조적방법》이란 연구체계를 형성했는데 이 《구조적방법》은 1982년부터 중국과학원 및 중국과학기술대학 등 학교에서의 자동통제학과 연구생교육과정으로 되였다.

그는 역경을 이겨냈던것이다.

청화대학 제자들과 함께

《자랑찬 제자들을 키워 나라에 헌신케 해야! 》

문화대혁명으로 심리고생을 많이 해서였을가! 국가과학연구를 위해 로심초고해서였을가! 몸이 허약했던 한경청연구원은 2008년 4월 21일 뇌혈전으로 세상을 마감했다. 그때 나이는 71세였다.

나라의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우수한 과학인재가 필요하다고 느꼈던 한경청은 생전에 지식을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전수해주면서 국가를 위해 수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키워냈다. 그의 제자들로는 현재 대학교수, 기업연구소의 선임연구원 등 다양하다. 생전에 한경청은 제자들이 각자 일터에서 제 몫을 잘해낸다는 소식을 접할 때 가장 기뻐했단다.

《한교수는 아무런 보수도 따지지 않고 다리가 불편한 상황에서도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구성과를 적극 보급했었죠. 한교수는 진정한 학자이고 참으로 우수한 분이였죠.》중국과학원 생물물리연구소 김록송교수는 이렇게 스승을 회억했다.

한경청에게는 황일이라고 부르는 중국수학계통과학원 연구원을 맡고있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스승을 이렇게 평가한다. 《독립적인 사상과 독특한 주장을 갖고있는 한교수님은 아주 너그럽고 인자한 분이였죠. 매번 학술토론때면 저희들에게 자유로운 토론공간을 제공해주어 학생들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시켜줬죠.》

한경청연구원은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그의 맏아들은 과학기술대학 컴퓨터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재직하고있고 둘째딸은 북경대학 생물학부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딴후 미국 정부기관에서 근무하고있다.

한경청연구원은 과학자의 길을 걸으며 비록 어렵고 힘든 시절이 있었지만 한번도 자신이 선택한 길을 후회한적이 없었다고 한다.

일생을 오직 순수 연구와 후진양성에만 전념하며 우리 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조선족과학자 한경청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지혜를 일생동한 한껏 빛내였다!
 

/ 중앙인민방송국 최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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