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산동반도서 가장 먼저 골프투어에 눈을 뜬 사람
조글로미디어(ZOGLO) 2014년4월16일 13시11분    조회:851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박영권
칭다오화칭국제여행사유한회사 박영권 부사장

  프로필:

  이름: 박영권(49)

  1965년 생, 길림성 연변 왕청현 출신

  1988년 톈진대학 공업자동화전공 졸업

  1988년 7월~1989년 7월 칭다오항만관리국 기술자로 근무

  1989년 8월~1993년 2월 중국청년여행사 칭다오분사에서 근무

  1993년 3월~2001년 말 화칭여행사 일한부 경리

  2002년~현재 화칭여행사 부사장

  연변1중 칭다오동문회 자문위원

  前산동성조선족여행업계골프협회( KTG) 제1대 회장

  前제5대 칭다오조선족골프협회 회장

  현재 KTG 명예회장

  (흑룡강신문=하얼빈) 이수봉 박영만기자 = 칭다오화칭국제여행사유한회사의 박영권 부사장은 1988년 조선족 대학생으로서는 제일 먼저 칭다오에 정착했다. 당시 전국 각지서 제1진 조선족 대학생 8명이 칭다오에 왔는데 그 속에 박 부사장이 있다.

  1988,89년 당시 한국인들이 산동에 많이 왔었고, 민간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학졸업을 앞두고 박 부사장은 신문을 보고 이런 소식을 알게 되었고, 향후 칭다오가 발전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낯설고 물선 땅- 칭다오를 선택했다. 당시 칭다오에 조선족이 전부 400명 미만이었는데 조선족 군인 출신들과 짠지장사 아줌마들이 많았다.


박영권 부사장은 칭다오에서 서비스업이 각광을 받을 것이라며 여행업계에 발을 들여 놓은것이
다행스럽다며 여행사 입구에서 미소를 지었다./본사기자

  칭다오항만관리국에 배치되어 기술자로 1년동안 근무하다 공천단시위에서 주관하는 중국청년여행사에서 한국과의 교류에 조선족 통역이 필요하다며 서류국을 찾아 개인 서류를 뒤졌다고 한다. 그때 박영권이라는 조선족 젊은 대학생의 이름이 떠올랐고 , 사업관계로 여행사에서 잠시 '빌려' 일을 보게 했다. 그 연고로 박 부사장은 여행업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으며 1993년 화칭여행사로 직장을 옮겼다. 화칭여행사는 '전국 백강여행사 기업'에 속한다. 이젠 조선족여행업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초년고생은 은을 주고도 못산다

  박 부사장은 대학 졸업배치로 칭다오항만관리국에 가서 등록하라는 통지서를 달랑 들고 책가방을 메고 칭다오에 도착했다. 아는 사람도 반기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봉급이 적어 3위안으로 하루 생활을 해결했다. 또 기숙사부터 출근하는 곳까지 거리가 멀어 걸어다니는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돈을 빌려 자전거를 구매했는데 봉급에서 생활비를 떼고나면 빌린 돈을 물기가 어려웠다.

  당시 노동자들이 배에서 화학비료를 하역했는데 한달에 받는 돈이 그의 월급보다 2~3배 많았다. 그래서 박 부사장은 설비관리를 하면서 노동자들 속에 섞여 25킬로그램씩 되는 비료 포대를 메여날랐다. 이렇게 40~50일 해서 번돈으로 자전거를 사느라 빌린 돈을 물어주고 얼마정도 남게 되었다.

  그는 칭다오에 첫 도착해서 방게를 가장 먹고 싶었는데 지갑이 넉넉하지 못해 군침만 흘리다 돌아섰다. 빚을 다 문 그날 저녁 박 부사장은 한꺼번에 방게 8마리를 사서 집에서 쪄서 먹었는데 지금도 그때 그 맛을 잊을수가 없다고 한다.

  박 부사장은 칭다오 생활이 어려웠고, 설상가상으로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어 많이 고독했다. 또 완전 타의에 의해 자기 전공을 버리고 여행사에 근무하는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연변으로의 귀향을 결정했다. 당시 연변맥주공장에서 인재가 필요하다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추운 동북으로 떠난다고 친구들이 돈을 모아 털구두까지 사주었다. 그리고 환송 연회를 베풀었다. 환송 연회가 끝난후 카드를 놀다 기차를 놓쳐 버렸다.

  그는 돈이 없어 어렵게 구매한 기차표를 찧어버리며 "아, 칭다오서 사는것이 내 운명이구나"하며 한바탕 호탕하게 웃고는 그냥 칭다오에 눌러앉게 되었다.

칭다오에 발을 들여놓고 외로움에 박 부사장은 고향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그래서 지금도 노래방에 갈때마다 '머나먼 고향'과 '전선야곡'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그가 이 두 노래를 얼마나 불렀으면 친구들은 18번 노래임을 다 안다고 한다.

  가장 먼저 방게를 먹다

  중국 속담에 '가장 먼저 방게를 먹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개척의지가 있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다. 박 부사장이 바로 골프투어(여행)에서 가장 먼저 방게를 먹은 사람이다.

  그는 1999년 산동성에서 제일 처음으로 골프투어를 개발했다. 중국 전체에서는 첫번째로 해남도가 1997년 골프투어를 개발했다. 그가 중국 전체적으로 두번째로 골프투어를 개발한 셈이다.

  당시 박 부사장은 골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1998년 10월 그는 한국의 골프투어 여행사 사장을 초청하여 칭다오의 골프장을 고찰하도록 했다. 그 한국사장은 "골프를 칠줄 아는가"고 물었고, 박 부사장은 "모릅니다. 3개월 시간을 주시요"라고 답했다. 그후 박 부사장은 친구한테서 골프채를 빌려 골프연습에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그는 자기 주견이 강해서 "내가 옳다고 판단하면 그 길로 간다"고 자평했다.

  당시 주변에서 골프채도 잡아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골프투어를 개발할수 있는가하며 우려했다. 그러나 성격이 곧은 그는 "내 길을 간다"며 옹고집을 부렸다. 그때 당시 골프투어를 개발한다는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3개월후 골프를 모르면 안된다고 머리를 흔들었던 한국 사장 등 4명을 다시 초청해서 골프시합을 했다. 한국 사장은 "안심된다"며 협력 계약을 체결했다.

  박 부사장은 골프를 배운지 3개월만에 100을 깼으며 현재는 70여타를 심심찮게 치고 있다. 1999년 골프투어 개발후 화칭여행사를 통해 입국한 한국 관광객이 200명에 달했는데 이듬해에는 10배로 늘어났고, 또 해마다 2000명씩 늘어났다. 2003년에는 골프투어 한국 관광객이 최고 1만 5000명에 달했다. 당시 화칭여행사를 통해 입국한 한국 관광객 가운데서 골프투어 관광객이 35% 를 차지했다. 골프투어 개발로 여행사는 대박났다. 현재 산동반도에서 골프투어 하면 박영권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부사장은 새로운 여행상품을 시장에 내놓았을 때 여행객들이 즐거워 하면 일한 보람을 느낀다며 그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신용을 목숨처럼 여기다

  박 부사장은 여행업계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신용이라고 말한다. 신용이 없는 한탕주의는 결국 자신을 매장시키는 악과를 낳는다며 절대적인 신용을 강조했다.

  그가 칭다오 와서 20년동안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여행사업을 시작하면서 개통했던 핸드폰 번호이다. 그간 핸드폰은 여러차례 바꾸었지만 번호만은 한번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한번은 10년전에 거래했던 한국 관광객이 핸드폰에 전화하고 찾아왔었는데 10년후에도 기억하고 있다는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며 그때면 여행업에 종사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1989년 칭다오서 경공업박람회가 열려 당시 그가 통역과 가이드를 했었는데 토프톤 김순기 회장도 그의 안내를 받았다. 그후 토프톤이 칭다오의 제1호 한국기업으로 진출했다. 박 부사장은 그때 통역과 가이드를 했던 역사가 자랑스럽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박 부사장은 때론 환율손해를 많이 본다고 한다. 여행상품은 3~6개월 전에 내놓아 불변하는데 만약 그때 환율변동이 생기면 손해를 본다고 한다. 그때면 '울며겨자 먹기'식으로 밑지면서도 여행을 조직해야 한다. 바로 고객과의 약속을 깰수가 없기때문이다. 한번 신용을 지키지 않으면 여직 쌓아온 모든 공적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러한 신용이 밑바탕이 돼서 오늘이 있게 된것이다.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

  화칭여행사의 신용이 인정을 받아 제일 처음으로 한국영사관에서 지정한 담보비자 시점으로 확정 되었는데 반년후에 성공을 거두어 상하이, 션양 등지에 보급하게 되었다. 당시 한해에 7~8만건 담보비자를 했던것으로 기록된다. 그래서 박 부사장의 소속 여행사는 산동반도에서 한국 비자업무를 가장 많이 취급한 여행사로 자리 매김했다.

  박 부사장은 항상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만나 보고 꼭 돌아올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담보금을 내기 어렵다는 사람은 담보금을 받지 않고 담보비자를 신청해 주었다. 어느 한번은 할머니 한분이 울면서 찾아 왔다. 딸 결혼하는데 한국 갈수 없다며 사정했다. 그는 할머니의 딱한 사정을 듣고 돈을 담보하지 않고 담보비자를 신청해 주어 할머니가 소원을 풀었다. 그 할머니는 한국서 돌아온후 선물을 들고 찾아와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박 부사장은 그럴 때마다 기분이 좋아 둥둥 뜬다고 한다.

  박영권 부사장은 그런 멋에 "좋은 아이템이 있어 신세를 바꿀수 있었는데도 지금까지 여행사 서비스업을 고집하고 있다" 고 실토했다.

  hljcfb@163.com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연변농악무》와 나의 아버지 하태일 50년대 흥겨운 농악무의 한장면, 앞줄 꽹과리를 손에 들고 앉은 자세로 춤추는 사람이 하태일선생 《연변농악무》는 그 화려하고 다채로운 예술형태로 공연에서 마지막 종목으로 무대에 등장하여 관중들의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력대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있다. 우...
  • 2012-08-05
  • 금융위기 실패 딛고 선 조선족사나이 편집/기자: [ 김웅견습기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2-08-03 09:56:38 ] 클릭: [ ] -연변가신경제무역유한회사 최중철사장을 찾아 최중철(35살)이 연길시 애단로 흠전빌딩에서 한국KCC금강화학공업 장판무역을 시작한것은 2010년 3월이다. KCC 장판은 친환경재료로 제...
  • 2012-08-03
  • -중국프로축구 최년소감독 북경팔희팀 최은랑씨를 만나   19세기 50년대로부터 “축구의 고향”으로 불린 연변은 수많은 축구인재들이 용솟음쳐나왔지만 대다수가 선수로서만 꽃을 피운 축구인들이였다.   특히 1992년 중국축구 프로리그가 개시되면서부터 연변팀 이외의 타팀에서 고삐를 잡은 조선족...
  • 2012-08-02
  • 건군절을 며칠 앞두고 필자는 중국인민해방군 공군대좌 리광남을 만나 함께 식사하고 주숙하는 기회를 만났다. 리광남은 중국인민해방군 공군장비부 고급공정사, 전문기술대좌다  리광남(1950년출생)은 1970년에 참군, 1995년 대좌계급을 수여받았다. 그는 선후로 과학연구항목 수십건을 완수하여 1, 2, 3등 공을 각각...
  • 2012-07-30
  • 김숙자 재한동포총연합회 회장   (흑룡강신문=하얼빈) "조선족 동포들은 한국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을 20년 동안 묵묵히 했어요. 한중 수교 후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는데, 앞으론 눈치 덜 보고 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내 최대의 조선족 동포단체 재한동포총연합회가 재한다문화총연합회로...
  • 2012-07-27
  • 연변일보   암을 선고받고도 자기의 일터를 꿋꿋이 지켜온 녀성이 있다. 딸로서 엄마로서 또한 수감인원들의 “큰언니”로서 병마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씩씩하고 충실하게 보내는 그가 바로 돈화시간수소의 유일한 녀경찰 김해옥(46세)씨이다. 수감인원 관리사업에 몸 잠가온 9년간 그녀는 녀성 특유의 섬세...
  • 2012-07-27
  • 성공가도 달리는 조선족 3세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한국 증권업계 전산(컴퓨터 관련)인력가운데 유일한 중국인으로 조선족 김성희(33)씨가 현재 대우증권에서 근무하고있다.   최근 몇년 한국증시에 상장하는 중국기업들이 늘어나면서 한국금융의 중심지 서울 여의도에 중국인 전문인력도 증가하는 추세다.   ...
  • 2012-07-26
  •   -서예학박사 조선족 서영근교수의 잊지못할 “통신학습”   지난 20세기 90년대초 한글서예로는 불모지대와 다름없는 연변에 서예에 심취해서 침식을 잊은 20대의 청년이 있었다. 굶주린 사람이 빵을 먹듯 서예에 대한 집착과 여러 대회에 출품한 작품이 입선되는 등 천부적인 소질로 주위의 이목을...
  • 2012-07-26
  • http://hljxinwen.dbw.cn   2012-07-25 10:16:43             흑룡강성 할빈적 권기민 미국 하버드대 연구원으로 임용   (흑룡강신문=하얼빈) 정봉길 기자 김세영 견습기자 = 흑룡강성 할빈적 권기민(조선족,28세)씨가 올해 미국 하버드대학 물리학부 광학전공 박사과정을 마치고 하버드대...
  • 2012-07-25
  •   공식석상에서 늘 빛갈고운 한복차림이였던것과는 대조적으로 인터뷰시 검은색 블라우스를 입은 함순녀(48세)한테서는 차분한 카리스마가 풍겼다. 현재 연변가무단 부단장이자 연변무용가협회 주석인 함순녀는 오로...
  • 2012-07-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