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중국조선족 걸출한 교육가-림민호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6월25일 09시15분    조회:403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림민호
항일구국운동의 선구자

 

림민호는 1904년 1월 3일 조선 함경북도 회령의 한 빈농가정에서 태여났다. 그 이듬해에 일가는 두만강을 건너 룡정에 이주, 후에 화룡현 동성촌 고성툰으로 옮겨갔다. 1919년 룡정의 3.13반일시위 운동에서 그는 비록 열다섯살에 나는 소년이였지만 친구와 둘이서 천주교 례배당 종루에 올라가 3.13반일운동시작의 종소리를 울리며 민족독립운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1928년 9월 중순, 림민호는 조직의 추천으로 모스크바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하였으며 1932년 5월 동방대학교에서의 4년간 학습생활을 끝마치고 9월 조선 함흥, 흥남 지역으로 파견되여 지하사업을 하다가 3월 28일 흥남에서 일본 헌병에 체포되여 6년 판결을 받고 서울 서대문감옥에 압송되였으며 감옥에서 감옥당국과 맞서 싸웠기에 1년 연기되여 7년 옥고를 치르게 되였다.

1940년 출옥한 림민호는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다가 1942년초, 돈화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1945년 일제가 무조건투항을 선포하여 광복을 맞이한 후 림민호는 돈화현 부현장으로 사업하였으며 1946년 10월 《연변일보》전신인 《길림일보》조선문판의 총편집으로 임명되였다.

조선족의 걸출한 교육가

림민호는 영용한 항일투사였을뿐만아니라 연변대학창립에도 탁월한 기여를 했다. 1948년초, 당시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있던 림춘추와 함께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석하여 연변에 민족대학을 꾸릴것을 제기, 그해 12월에 연변대학주비위원회가 성립되였는데 주비위원회 주임으로는 림춘추, 부주임으로는 림민호가 임명되였다. 구체사업은 림민호가 맡아했다. 그는 학교의 성질을 문과, 리공과, 의과, 농과를 망라한 종합성 민족대학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림민호는 전국 각지에서 조선족 지식인들을 물색하여 손수 초빙장을 써서 그들에게 보내여 교원문제를 해결하였는데 가장 큰 곤난은 경비문제였다. 그때는 국내전쟁이 한창인 때여서 동북인민정부거나 길림성 정부에 손을 내밀 형편이 못되여 조선족 유지인사들과 함께 《연변대학리사회》를 건립하여 상점, 약방, 공장을 꾸려 갓 창설된 학교경비를 보탰으며 유지인사들을 동북 각지에 파견하여 조선족들에게서 의연금과 물자를 지원 받기로 하였다. 결과 동북 각지 조선족들이 쌀과 돈, 그리고 학교에 수요되는 많은 물품들을 무상으로 지원하였다.

당시 교실이 없어 공업학교를 빌어 쓰다가 1950년대초 지금의 연변대학 자리로 옮겨 올 때 그곳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였으며 불에 타버린 일본관동군 병영이 벽체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는 친히 교직원과 학생들을 이끌고 불에 타버린 병영을 수리하여 교실로 쓰고 새로운 사무청사와 실험실을 설계하여 짓고 나무를 심었다.

림민호는 조선민족대학의 창립과 발전을 위하여 로심초사하고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 당의 교육방 침을 관철집행하고 근검하게 학교를 꾸려 특색있는 민족대학의 교풍을 수립하고 교육과 교수개혁을 진행하여 연변대학의 창립과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쌓았다. 그는 1950년 10월, 동북조선족을 대표하여 국경1주년 경축행사에 참가하여 모주석과 주덕의 접견을 받았다.

1950년 10월1일 국경기념일에 참가한 림민호(왼쪽 여덟번째)를 비롯한 조선민족대표들

림민호는 연변대학 초창기부터 시종 국내외교류와 합작에도 알힘을 넣었다. 그는 선후로 수많은 교원과 학생들을 조선의 김일성종합대학, 모스크바대학에 보내여 공부를 시키고 북경대학, 중국인민대학에 보내여 연수를 시켰다. 그리고 교류와 합작을 통하여 대학교경영의 보귀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다년간의 대학교경영실천가운데서 우량한 건학전통을 개척하고 민족문화를 계승하고 문화의 융합과 창조로 연변대학의 귀중한 정신적자산을 마련하였다.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림민호교장에 대해 《연변대학교 교장으로 20년 6개월, 그는 만인이 우러르는 고매한 인격과 탁월한 리더로 연변대학의 기틀을 잡았고 온갖 경제적위기와 정치적풍파를 이겨내고 연변대학을 살려내고 성장시켰으며 참된 교육가로서의 귀감을 보여주었다. 자유, 정의, 평화, 평등, 인간존엄성이라는 인류의 보편적이고 영원한 리상을 추구했고 연변대학의 민족적, 지역적 특성을 강조하되 중국의 주류문화, 조선과 쏘련의 교육문화를 융합하고 조화시키고 타민족의 형제자매들도 껴안음으로써 연변대학의 독자적인 힘을 키워냈다. 또한 대학교의 주체는 교수요, 대학교의 중심은 교학과 연구라는 확고한 신념아래 다양한 개성을 가진 교수들을 품어주고 그들이지혜와 창조력을 발휘하도록 해주었다.》 (《림민호평전》 제276페지)라고 평가했다.

림민호가 제정한 연변대학의 3대 사명은 인재의 양성, 진리의 탐구, 지역과 국가 건설을 위한 봉사였고 강의와 과학연구를 병행으로 교수의 질을 제고하는것이였다.

《대학은 인재를 양성하는 곳인 동시에 진리를 탐구하고 과학을 연구하는 곳이다. 인재를 키워야 과학연구를 할수있고 과학연구를 해야 좋은 강의를 할수있고 뛰여난 인재들을 키워낼수있다.》라고 생각한 림민호는 과학연구 각별한 관심을 돌렸다.

1950년 연길역에서 조선대표단을 영접하는 림민호(앞줄 오른쪽 첫번째)

시대의 평가

1966년에 일어난 중국의 《문화대혁명》에서 수많은 좋은 간부들이 박해를 받았다. 림민호도 례외가 아니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여 얼마되지 않아 홍위병들에게 《변절자》《주자파》(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집권파)로 몰리워 박해를 받았다. 림민호교장은 문화대혁명의 박해를 받아 1970년7월 14일 66세의 아까운 나이에 원한을 풀지 못한채 불행히 서거했다.

림민호가 세상뜬지 8년이 지난 1978년 7월 14일, 중공연변주위에서는 결정을 내려 그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고 명예를 회복하여 주었으며 추도회와 유해이장식을 거행하였다. 그의 골회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일부분이 연변대학정원에 뿌려졌고 나머지는 화룡현 동성향 고성촌 뒤산 림씨묘지에 안장되였다.

림민호 프로필:

1904년 조선 함격북도 회령군 태생.

1920년대 혁명에 참가.

1926년 중국공산당 동만구역위원회 청년부장.

1928년 9월 조직의 파견을 받고 모스크바동방로동대학에 입학, 1932년 5월 졸업.

1933년 일본경찰에 체포, 서울 서대문감옥에 수감.항일전쟁 승리후 돈화현 부현장, 《길림일보》 부총편집, 《연변일보》 총편집 력임.

1948년 12월 연변대학주비위원회 부주임, 연변대학의 주요한 창시인의 한사람으로 됨.

1949년 3월 연변대학 설립이후 제1임 부교장 겸 당지부서기, 개교후 20여년간 그는 전교와 일상사업을 주관함.

문화대학명기간에 피해를 받아 1971년에 서거함.

 

참고문헌:

《연변대학 산책》 류연산 저 민족출판사

《교육가 림민호 평전》 김호웅 저

《림민호 교장선생님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주청룡 저


길림신문 김영화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흑룡강신문=하얼빈) 지난 겨울 베이징의 유명 관광지인 용경협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표현한 얼음궁전이 지어졌다. 왠만한 대학 캠퍼스 규모의 얼음궁전에는 거북선, 남대문, 첨성대 등 한국의 대표적 역사유물이 얼음으로 만들어져 전시됐다.   한중문화우호협회가 베이징에서 한국을 알리기 위해 용경협 관리공사와...
  • 2013-04-27
  •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11)   1938년 10월, 1000여명의 일위군과 가렬처절한 격전을 벌이다 마지막까지 적들에게 굴복하지않고 차디찬 우스훈하에 뛰여들어 장렬히 최후를 마친 《팔녀투강》(八女投江)의 영웅적 전설이 있다. 그8명 녀전사들속에는 2명의 조선족녀전사가 들어있는데 그중의 한 사람...
  • 2013-04-27
  • ㅡ단동홍성경제무역유한회사 한연옥리사장 한연옥프로필; 1956년 길림성 집안시 출생, 70년대 료녕성 개원조중 졸업후 지식청년으로 농촌 하향, 1986년 료녕중의대학 졸업후 심양시 모 병원에 배치, 1988년 사직하고 심양시대외무역회사에 취직, 1992년 자체무역회사 창립, 현재 산하에 무역회사외 5개의 합영회사 경영, 련...
  • 2013-04-26
  • 출국과 도시진출 등으로 인한 탈농으로 사라져가는 우리 민족의 전통마을 그리고 초가삼간들, 이를 마냥 가슴아프게 생각하고 허름한 자전거 하나에 몸을 맡긴채 민속문화, 이주력사, 유적 심지어 일상까지 조용히 렌즈에 담으며 두만강 천리길을 누비고있는 사진작가 류재학(59살)씨. “노래에서 나오는 초가삼간을 ...
  • 2013-04-24
  •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10) 화룡시 투도진에서 20리가량 떨어진 골안에는 약수동항일근거지가 있다. 이곳은 항일녀영웅 김순희가 농민들을 이끌고 굴함없는 항일혁명투쟁을 벌인 곳일뿐만아니라 영웅이 중국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귀중한 생명을 바친 곳이기도 하다. 김순희는 1910년에 안도현 소사하의...
  • 2013-04-24
  • 우리 말 속담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꿩먹고 알먹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창업에 고민하는것은 두려움보다 적합한 아이템이 없기때문인것이다. 만약 일석이조의 아이템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아이템이 어데 있을가? 그런데 기자는 일전에 심양시 철서구 북일로 심양국제방직성내 “구완성(古玩城)”에서 한...
  • 2013-04-23
  • 드라마틱 소프라노 한선녀씨는 열쇠뭉치를 집문밖에 꽂아놓은채로 사무실에서의 인터뷰를 약속할만큼 “평소 물건을 많이 흘리고 다닌다”지만 언제 어디서든 악보만은 꼭꼭 챙기는 “꼼꼼한” 사람이다. 1987년 연변대학 예술학원 성악전업을 졸업한 한선녀씨가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배치받았지만 민...
  • 2013-04-22
  •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9)   한단시섭현석문진석문촌에 있는《항일전쟁순국렬사릉원》진광화초장지. 중화대지의 하북평원과 섬북고원을 이어주며 하북성과 산서성의 변계를 이루고있는 태항산은 험준한 산령과 기이한 산봉으로 의연히 웅위로운 기상을 떨치고있다 1942년 봄, 항일전쟁시기 팔로군...
  • 2013-04-22
  •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8) 2012년 7월 29일, 북경합창협회 8.1건군절경축 정률성군가작품음악회의 한장면. 중국 최고의 3대 음악가로 섭이, 선성해와 나란히《새중국 창건 특수기여 영웅모범인물》(《쌍백인물》)에 오른 정률성은 중국현대음악사상 무산계급혁명음악사업의 개척자의 한사람으로,영...
  • 2013-04-19
  • -연길시 하남소학교 교본교연조 주임 최종화교원 지난 2012년 5월 31일,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장안순서기는 연길시 하남소학교(한족학교)를 시찰하는 과정에 이 학교 교본교연조 최종화주임(고급교원)의 교수장면을 보면서 높은 평가를 내렸다. 최종화주임의 강의장면은 연변텔레비죤은 물론 길림성라지오방송국 민족단결...
  • 2013-04-1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