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영원한 민족간부 최채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5월16일 13시58분    조회:419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최채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 (17)

최채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 민족간부는 자격이 없다.》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민족간부이며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아들, 영원한 민족간부 최채의 불후의 명언이다.

최채는 1914년 11월 23일 조선 황해도 신천군의 독립운동가 최중호와 어머니 류중현 녀사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최채의 원명은 최윤상이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후 1920년 7살 되던 해에 최채는 김구를 따라 독립운동에 참가한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고 중국의 상해로 이주, 상해에서 조선아동들에게 민족주의사상교육을 실시하던 인성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 그는 상해 혜중중학에 입학하고 학교의 아동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에 부친 최중호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잡역에 종사하였으며 이듬해인 1932년에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단, 반제동맹에 참가하여 본격적인 반일독립운동에 뛰여들었다.

1931년 《9. 18》사변이 일어나자 최채는 상해한인청년동맹의 일원으로 항일구국운동에 참가했으며 그해 11월 상해한인반제동맹에 가입했다. 1932년 상해에서 《1.28》사변이 일어나자 상해말에 익숙한 그는 일제를 반대하기 위한 모금 선전활동에서 한몫을 톡톡히 담당했다. 일제가 상해와 남경을 점령한후 최채는 부평초마냥 무한과 장사로 떠다니는 신세가 되고말았다. 그후 1940년 3월 중경에 가서 아버지 최중호와 친분이 있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찾아가 거기서 조선의용대에 참가하고 의용대 총부 선전조 간사로 활동하였다. 후에는 또 부대를 따라 태항산으로 진군, 팔로군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일제와 싸웠다.

1942년 최채는 황하를 건너 연안으로 가는 길에 무정과 정일선을 만났다. 무정은 하룡장군의 부대에서 조선족간부를 수요하니 거기서 활동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결국에 그는 연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팔로군 제120사 정치부 적공부에서 전선을 지원하는 적후사업을 시작하게 되였다. 그는 적공부에서 사업하면서 화북조선독립동맹 진수분맹을 조직하였고 적공부의 파견을 받고 태원시교 유격구에서 태원시내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대한 사상사업을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최채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46년 5월까지 화북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 주임을 맡으면서 국민당점령구에서 지하공작을 했다. 장기간 적후에서 지하공작을 했던 원인으로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한후에도 최채는 줄곧 조선의용군과 행동을 같이 하지 못했다.

1946년 5월 최채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태원시에서 지하공작을 접고 동북으로 파견돼 동북민주련군 할빈위수사령부 독립 8퇀 교도대대 교도원을 맡았다. 1947년 12월말, 그는 사업의 수요로 부대에서 지방정부로 옮겨 길림성인민정부 민족청 편역과 과장을 담임했다. 림춘추가 민족청을 조직하면서 조선족간부가 급히 필요했던것이다.

이때 전국적으로 아직 전쟁이 한창이였고 후방인 연변에는 해야 할 일이 태산같았다. 최채는 또 조직의 지시에 따라 연변일보사 사장과 연변인민방송국 국장을 겸해서 맡았으며 1948년 11월 림춘추가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옮겨가면서 중공연변지구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였다.

1952년 2월 최채는 중앙민족사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였고 7월에 중앙인민정부에서 연변의 민족구역자치를 비준하면서 그는 연변조선족자치구 주비위원회 비서장으로 임명되였다.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로 개칭)가 창립되면서 최채는 제1임 자치구인민정부 부주석으로 당선되였으며 정법, 민정, 문화교육 등 사업을 주관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임 부주석으로 당선된 최채(오른쪽).

1954년 12월, 최채는 중공연변지위 부서기로 임명되였고 1956년 12월에는 중공연변주위 제3서기로 임명됐다.

1958년 5월, 최채는 10년동안 몸을 담갔던 연변을 떠나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취직했다. 최채는 사업을 함에 있어서 아주 엄격했다. 그의 노력하에 길림성 민족경제와 민족문화교육 등 각항 민족사업은 기꺼운 성과를 거두었다. 최채가 민족사업을 주관하는 동안 길림성민족간부학교, 길림성민족가무단, 길림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프로가 섰으며 1958년부터 그는 전문가와 학자들을 조직하여 길림성내 조선족과 몽골족의 력사와 현황에 대해 조사하고 《중국조선족략사》, 《연변조선족자치주 개황》, 《장백조선족자치현 개황》, 《전고기몽골족자치현 개황》 등을 편찬하였다.

1960년부터 1961년 사이 최채는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의 10여명 간부를 이끌고 장백조선족자지현에 내려가 1년 반 동안 깊이 있는 조사연구를 진행해 존재하는 문제를 성당위, 성정부에 반영해 고도로 되는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성당위와 성정부에서는 여러 부문의 령도들을 조직해 장백현에 내려가 현지사무를 보았으며 생산과 생활에 장기적으로 존재하던 문제와 곤난을 해결했다.

몽골족들을 도와 목축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최채는 성민족사무위원회 조사연구조의 간부들을 배치하여 전고르로스몽골족자치현, 진뢰현, 조안현 몽골족들이 집거한 향, 진, 촌, 툰에 내려가 목축업생산정황을 조사연구하고 실제곤난을 해결해준 한편 선진경험을 보급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최채는 장춘감옥에서 갖은 박해와 멸시를 당했으며 1972년에 석방되자 구태현 음마하라는 농촌으로 《정배》를 내려갔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당중앙 11기 3중전회 이후 최채는 다시 길림성당위 통전부 부부장 겸 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으면서 길림성정협 부주석으로 임명되였다. 1981년에는 길림성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선출되였다.

1985년 최채는 파란만장한 혁명사업의 제1선에서 물러났다. 비록 공직서류에는 1940년에 혁명사업에 참가한것으로 기록되여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썩 전으로 거슬러 1932년에 이미 혁명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구태여 따지지 않았다. 평생을 민족혁명가, 민족간부로 살아온 최채는 인생의 황혼에 비록 몸은 사업터를 떠났지만 마음만은 잠시도 민족사업을 떠나본적이 없었다.

2006년 8월 5일, 한생을 혁명과 당의 민족사업에 바쳐온 최채는 장춘에서 병환으로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룡정시문화관 관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리광평씨는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집단이민사 연구에 떨쳐나섰습니다. 그는 자비로 오토바이, 사진기,비디오 등을 갖추었습니다. 회갑나이를 넘긴 그가 수십킬로그람 되는 사진기재 들을 지니고 수만킬로메터를 달린다는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매년 ...
  • 2006-03-02
  • [한겨레] 재일동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온 ‘권투영웅’ 홍창수(31) 선수가 27일 세계 챔피언의 영광과 짐을 스스로 벗어던졌다. 홍 선수는 이날 세계복싱평의회(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 1차 방어전에서 도전자인 동급 1위 호세 나바로(24·미국)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꺾은 뒤, 타이틀 반납을 선언했다. 그는 “...
  • 2006-03-01
  • [img count='1' width='400' img] 28일 2005전국10대법관으로 당선된 연길시 인민법원집행국부국장 비운룡이 영예를 안고 돌아왔다.
  • 2006-03-01
  •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 단주앙번 일가견 기자는 25일 오후,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이며 현재 북경민족대학박사생 도사, 2년간 운남성 성장조리직을 맡았던 단주앙번(장족)을 만날수 있게 되였다. 3년전 처음 연변을 다녀온적이 있는 그는 먼저 연변조선족의 미풍량속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특히 《...
  • 2006-02-28
  • 26일, 최고인민법원, 인민일보, 중앙텔레비죤, 법제일보에서 련합으로 주최한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평의활동이 북경에서 있었다. 연길시인민법원 형사재판정 부정장 비운룡이 2005년 길림성10대 우수법관에 이어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으로 평의되여 최고인민법원 원장 소양으로부터 《금법추상》(金法槌奖)을...
  • 2006-02-28
  • [한국일보 2006.02.26 18:19:24] “그는 한 많은 이국 땅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25일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젠덴쓰(全電通)노동회관에서 지난해 12월 28일 타계한 재일동포 고 김경득(金敬得)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다. 한국인과 일본인, 민단과 조총련을 가리지 않고 회장...
  • 2006-02-27
  • [원제: '신선족'으로 중국서 떳떳이 살고싶다] -흑룡강지역 첫 한국류학생 김재윤씨 최근년간 한국인들의 중국 진출이 많아지면서 '신선족'이라는 신조어가 동포사회에서 류행되고있다. 한국 웹사이트인 네이버 오픈사전에 따르면 신선족을 "류 학, 현지 근무 등의 명목으로 중국으로 건너왔다가 아예 중국땅에 눌러앉아 살...
  • 2006-02-27
  • 국내 최장기 연재 집필 이규태 떠나다 [조선일보 2006-02-25 22:03] 조선일보 이규태(李圭泰·73) 전 논설고문이 25일 오후 4시쯤 지병인 폐암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이 전 고문은 1983년 3월 1일자 본지에 ‘이규태 코너’를 연재하기 시작, 지난 23일자 신문에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별사를 싣기까지 모두 6702회...
  • 2006-02-26
  • 얼마전에 연변의 한 문학지가 마련한 모임에서 성보호텔 정영채회장과 자리를 같이하였다. 여러 말이 오간 가운데 연변은 일본, 한국과의 물류관문으로서 장차 동북아물류중심이 될 복된 고장이라는 얘기와 더불어 지금은 문화인들이 어렵지만 이렇게 어려움속에서 성취를 해야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는 정회장의 말씀이 인상...
  • 2006-02-24
  • 민족력사에 혼 앗긴 리광인씨 《잠적》 10년동안에도 수백만자 력사서 써내 력사학자 리광인씨한테서 도합 4권으로 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한국학술정보[주])를 받아든 기자는 책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느낄수 없었다. 《남성편》(1, 2권), 《녀성편》, 《소년아동편》으로 묶어진 책은 총 125만자, 140편의 전기가 수...
  • 2006-02-2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