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승리의 군기를 비춰준 불멸의 영령-리홍광장군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5월6일 10시06분    조회:447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리홍광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13)
 
각 책들에 다르게 실린 리홍광의 초상사진.
《우리의 하늘에 높이 걸려서 승리의 군기(軍旗)를 비춰주는 홍광 돌격하라! 우리의 제1로군! (高悬在我们的天空中 普照着胜利军旗的红光
冲锋呀我们的第一路军)》
항일전쟁시기 동북인민혁명군의 총지휘였던 양정우장군(1905~1940)이 작사한《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군가》. 이 《군가》에는 《홍광(红光)》이란 익숙한 단어가 핵심단어로 등장한다. 그렇다. 다름아닌 양정우장군의 가장 친밀한 전우이며 동북항일련군의 우수한 장령이였던 조선족항일명장 리홍광이다. 양정우장군이 친히 작사하여 노래로까지 기렸던 리홍광은 후날 중국의 모택동주석마저 《리홍광은 동북의 유명한 의용군 수령중의 한분이였다(李红光是东北有名的义勇军领袖之一)》고 높이 평가했던 위인이기도 했다.
투사들이 알고있는 리홍광
김일성동지는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제5권 제14장(장백사람들), 제4절(남만의 전우들과 함께)에서 전우 조국안(1936년 희생)을 통해 다음과 같이 리홍광을 기술하고 있다.
길림성 영길현 태생인 조국안은 1934년 가을부터 1군 2사 사장 겸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가 지휘하는 1군 2사는 조선사람들이 반석에서 조직한 반일인민유격대를 모체로 하고 여기에 위만군과 산림대에서 넘어온 사람들로 구성된 1사 1련대를 포함시켜 꾸려진 사단이였다. 사단의 기본활동구역은 반석현과 그 주변일대였다.
1935년 8월 몽강현(현재 정우현) 나루훈에서 1군과 상봉하게 된 김일성주석은 인사하러 찾아온 조국안이 조선족출신의 전령병감을 한명 골라달라는 청탁에 흔쾌히 동의하면서 《조사장은 조선사람들과 무슨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게 아닌가?》고 묻는다. 이에 조국안은 《특별한 인연은 없는데 리홍광, 리동광(중공남만성위원회 조직부장. 1937년 희생)을 알게 된 다음부터 조선동무들에게 매혹되기 시작했습니다. 리홍광이 소본량을 료정냈을 때 우리가 얼마나 감탄했는지 간도사람들은 아마 다 모를겁니다.》하고 대답한다.

2008년 5월 8일, 료녕성중공당사학회 부비서장 장대용(张大庸 좌3), 무순시사화과학원 원장 박파(좌4), 무순시사회과학원 부원장 왕보래(王宝铼 우1),무순시사회과학원당사연구실 주임 류창(刘畅 좌2)등 고찰일군들이 장군의 묘지를 찾아 참배하고있다.
조국안이 말하는 소본량이란 류하현일대에서 인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략탈하던 위만군의 악질 고위장교였다. 당시 소본량이 둥지를 틀고있던 삼원포는 사방이 산들로 둘러싸여있고 그 지세가 험난하여 군사주둔요지로 알맞은 곳이였다. 당시 남만에 있는 여러 항일련군들이 수차 이곳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성사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삼원포를 공략한다는것은 범의 아구리에서 이발을 빼기보다도 더 어렵다》는 말이 나돌 지경이였다. 바로 이런 부대를 리홍광이 류하현 삼원포와 고산자, 량수하자 일대에서 녹여낸것이다. 리홍광은 소본량을 녹여낸 다음 량수하자부근에서 1군 지휘부가 적의 대병력에 의해 포위되였을 때 누구도 비할수없는 대담성과 높은 기지를 발휘하여 양정우를 구출한다. 그때로부터 양정우를 비롯한 1군 간부들은 그를 생명의 은인으로, 용맹의 상징으로 총애하였다.
조국안은 리홍광이 전사했을 때 양정우이하 1군의 모든 간부들과 대원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다 말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항일련군 제1군의 전투력사과정에서 리홍광은 줄곧 양정우장군의 친근한 전우였으며 믿음직한 조수였다. 1934년 12월에 양정우장군은 중공만주성위에 보내는 보고서에 이렇게 적고있다.
《리홍광동지는 일처리에서 견정하고 군사상에서 자립적인 지휘능력을 가지고있으며 사업에서 적극적이다…》
영광으로 빛나는 장군의 발자취
1910년, 조선 경기도 룡암군 (지금의 한국 경기도 용암군)단동면에서 출생한 리홍광은 리홍해, 리의산이라고도 불렸다. 9살 되던 해에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에 못이겨 그는 부모를 따라 중국 길림일대로 이주했고 1926년에 길림성 이통현 류사저자툰에 정착했다.
1927년 리홍광은 농민동맹회에 가입하였으며 1930년 3월에 이통현 삼도구에서 로농적위대를 세우고 대장을 담임하였다. 적위대는 친일분자를 견결히 타격하고 악패지주를 엄벌하여 군중들의 옹호와 환영을 받았다. 1930년 8월, 중공반석현위가 성립된후 리홍광은 적극적으로 진보활동에 참가하여 당지 당조직의 신임을 얻었다. 이해 그는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 되였으며 9월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88년 11월 25일, 반석시조선족중학교는 반석시홍광중학교로 개칭, 학교에서 세운 리홍광장군동상에 당시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셨던 팽진위원장이 친히 《항일민족영웅 리홍광장군》이란 제사를 남겼다.
1931년 8월, 중공만주성위는 군중항일투쟁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반석중심현위를 건립하고 중심현위가 령도하는 쌍(양)이(통)특별지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특별지부 조직위원을 담임하였다.《9.18》사변후, 리홍광 등은 전문적으로 한간을 징벌하는《개잡이대》를 내왔는데 리홍광이 대장을 담임하였다. 1932년 2월, 그는 반석중심현위 위원으로 조동되여 반석적색유격대 대장을 담임하였다. 같은해 4월, 그는 반석《4.3》반일폭동을 친히 조직하고 령도하였다. 1932년 6월, 중국공산당이 직접 령도하는 동북 첫 항일무장- 만주공농반일의용군 제1군 4종대가 반석지역에서 성립되였는데 리홍광은 대부(隊部)에서 사업하였다. 그후 의용군은 중국공농홍군 제32남만유격대로 개칭되였으며 양정우가 대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교도대 정위를 담임하였다. 1933년 9월, 남만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로 개편되고 양정우가 사장 겸 정위, 리홍광이 군참모장 겸 제1사 사장을 담임하였다. 극히 어려운 조건하에서 리홍광과 양정우 등 공산당원들이 령도하는 동북인민항일무장은 동북지역에서 투쟁을 견지하여 일본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조선진공작전 전개, 25세를 일기로 희생
리홍광은 조선 국내진공작전도 활발하게 전개, 륙속 승전고를 울리며 조선인민들의 항일투지를 크게 고무하했다.
1934년 12월과 1935년 1월 리홍광은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 하성읍과 동흥성을 습격했다. 그번 작전이 얼마나 신출귀몰했던지 당시《동아일보》등은 《리홍광은 약관의 녀비적》이라는 오보를 내기도 했다.
특히 동흥성은 놈들의 방어공사가 든든하여 《금성철벽》이라 부르는 곳이였다. 하지만 리홍광은 부대를 이끌고 달밤에 동흥성을 들이쳤고 일본놈의 주구 열두놈을 체포했다. 또한 대량의 총과 탄약,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후날 사학가들은 이 전투가 《일본 불패 신화》에 타격을 줬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1935년 5월 상순, 리홍광은 부대를 거느리고 일본괴뢰군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망원경을 들고 적들의 기관총화점을 까부실 유리한 지형을 찾고 있는데 돌연 기관총탄이 그의 오른쪽 흉부를 꿰뚫고 나간것이다. 붉은 피가 그의 낡은 군복을 붉게 물들였다. 리홍광의 4명 경위원이 즉시 그를 담가에 메고 동쪽의 산등성이를 넘어 환인현 해청화부락으로 호송하였다. 그러나 상처가 엄중하여 구급치료를 하였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튿날인 1935년 5월 12일, 남만에서 위력을 떨치던 항일명장 리홍광은 불행하게 25세를 일기로 희생되였다.
깊은 산속에 모신 유체와 《리홍광지대》
리홍광의 유체는 당시 제1사 후근부 부장인 한진이 책임지고 비밀리에 지금의 신빈현 홍묘자촌 대청골의 큰 호두나무밑에 묻었다.
지난 1997년 신빈, 본계, 환인현 당사연구실이 합동 답사해 장군의 묘소를 확인했다. 《답사록》은 《(길쭉한) 중국식이 아닌 (동그란) 조선식 무덤 형태 등을 볼때, 부하 한진이 그의 주검을 수습해 매장한 곳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장군의 묘소를 깊은 산속 음지에 쓴것은 일본군이 유체를 훼손할가봐서였다고 분석했다.
한편 장군의 존함으로 명명된 《리홍광지대》의 전신은 동북조선의용군 제1지대였다.(후에 동북민주련군 독립4사,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 등으로 개칭되였음) 사료에 따르면 《리홍광지대》는 1946년 2월 23일 통화시에서 창건되였다. 이날은 양정우장군 순국 6돐기념일이자 쏘련홍군 탄생기념일이기도 했는데 통화시 각계 인민들은 항일련군 제1로군 총지휘이며 정치위원인 양정우와 참모장 리홍광 및 기타 혁명선렬들을 추모하는 추도회를 열고 양정우동지와 리홍광동지의 빛나는 업적을 회고하였다고 한다. 료동군구의 지도자들도 이 회의에 참석하였는바 회의에서는 양정우와 리홍광 동지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료동군구의 명령에 의해 통화지대와 조선의용군 남만1지대를 각각 동북민주련군 료동군구《양정우지대》와《리홍광지대》로 명명하였다.
《리홍광지대》는 동북해방전쟁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해방후 장군이 유격대를 창건한 반석현에는《홍광》이라 명명한 거리, 상점, 공장, 학교들이 나타났다. 1988년 11월 25일, 반석시조선족중학교는 반석시홍광중학교로 개칭했다. 학교에서 세운 리홍광장군동상에 당시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계셨던 팽진위원장이 친히 《항일민족영웅 리홍광장군》이란 제사를 남겼다.
 
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 여러 책들에 실린 리홍광사적.
불령의 영령, 미스터리로 남은 사진
지난 2010년 11월 25일, 장군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료녕성 무순시에서는 장군의 탄생 100돌 기념 및 무순지구조선족항일장령연구학술회를 가졌다. 오래전에 이미 장군의 사적은 여러 책자와 신문, 잡지와 방송 그리고 혁명렬사사적관을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그번 대회는 다시 한번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빛나는 로정을 회고하는데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특히 우리글로 장군의 업적을 정리함에 있어서 미스터리로 제기되고 있는 부분들이 나타나 흥미를 자아내기도 했다.
민족출판사에서 1982년에 출판한 조선문판 《불멸의 투사》(흑룡강성사회과학원 지방당사연구소, 동북렬사기념관 편집)와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97년에 출판한 《연변조선족력사화책》(연변해외문제연구소 편저)에 실린 리홍광장군의 초상사진과, 연변인민출판사에서 1990년에 출판한 《중국조선족인물전》(한준광 주필) 그리고 《세기와 더불어》(김일성회고록 제5권)에 실린 리홍광장군의 초상사진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동일한 인물인데 왜 서로 다른 모습의 초상사진이 실리게 되였을가? 이 초상사진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것일가? 력사학자들의 진일보로 되는 연구를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1,《세기와 더불어》-김일성회고록(제5권) 조선로동당출판사(1994년).
2,《불멸의 투사》-흑룡강성사회과학원 지방당사연구소, 동북렬사기념관 편집. 민족출판사(1982년).
3,《중국조선족인물전》-한준광 주필. 연변인민출판사(1990년).
4,《혁명회상기 리홍광지대》-료녕민족출판사 편집. 료녕민족출판사(1985년).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한동국리력 필명 방원(方圆) 1946년 중국 길림성 연길현(현재 룡정현)팔도구 출생 2005년 연변 작가협회 연변 문학원 수업 2007년 윤동주 문학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학관련상 수상 현재 연변작가협회 회원   “저는 지금도 작가가 아닙니다. 오직 영원한 독자일 뿐입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산진해미...
  • 2012-07-19
  • 연변일보   무용예술가 최옥주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흥취를 가지고 세계명작, 명인자서전을 두루 읽었다. 최옥주선생은 15살 어린 나이에 조선무용대가인 최승희처럼 훌륭한 무용가가 되고싶다는 야무진 꿈을 가졌고 책에서 명인들은 자기의 작품을 간직해두더라며 그도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 농악무를 추는 사...
  • 2012-07-17
  • "조선족에게 南과 北은 `이혼한 부모님`…우리가 오가며 사이좋게 할 것" [특파원이 만난 사람] 표성용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베이징 등 21개 지부, 회원 3000명 달해…조선족 은행 곧 설립 북한 투자환경 우호적…협력할 사업 많지만 큰 돈 벌지는 못해 표성용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은 "중국...
  • 2012-07-15
  • 흑룡강신문 성공가도 달리는 조선족3세 이야기    길림 화룡태생 장승권(35세)씨가 광동성 혜주시에서 자동화설비분야사업으로 삼성, LG, 토요타, 팍스콘 등 국내외 기업들의 인정을 받고있다.   장승권씨는 2006년 광동성 혜주시에 첩흥과학기술유한회사(JS TECH)를 꾸렸다.   JS TECH의 주력업종은 자동화설비분야다...
  • 2012-07-13
  •   남영전. 1948년 3월 3일(음력) 출생, 고중을 졸업한 뒤 농촌에 하향도 했고 로동자로도, 선전부문 간부로도 있었으며 《장백산》잡지 주필로 있다가 2010년 3월 퇴임했다.  그의 학력을 보면...
  • 2012-07-11
  • 흑룡강신문 '할빈 조선민족 백년사화' 저자 서명훈 선생을 찾아서    최근 기자는 77세에 '할빈시 조선민족 백년사화'란 저서를 펴낸 서명훈선생님 댁을 찾아갔다.올해 여든셋 고령임에도 기자가 집 근처에 도착했다는 전화에 8층에서 아래층까지 내려와 기자의 손을 잡아주셨다.   50여년동안 민족사업...
  • 2012-07-10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한국 김활용회장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 후대들에게 바른 교육과 교육시설을 제공하고저 중한수교초부터 장장 20년간 해마다 두차례이상씩 중국을 찾는 한국로인이 있다. 그가 중국을 방문한 차수는 60차에 도달하며 조선족집거지인 연변으로부터 시작...
  • 2012-07-09
  • (흑룡강신문=하얼빈) 마국광기자 , 김유권특약기자 = 레노보그룹(联想集团) 흑룡강성목단강시통달컴퓨터유한회사의 황미영(42세, 사진)총경리는 성공한 기업가, 우수한 인민대표로 인정 받고있다.   1991년 흑룡강건축대학을 졸업한 황씨는 건축설계사 부친이 몸담고있는 건축설계원이 아닌 농촌의 한 개발회사를 선택했...
  • 2012-07-05
  • 중앙민족대학 문예연구소 리암     《지장보살》 김교각은 중당이래 우리 나라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중국불교지역인 조선반도 삼국시기 신라의 고승이다. 사람들은 줄곧 그를 우리 나라 불교 4대명산의 하나인 구화산의 개산불조(開山佛祖)로 추앙하고있다. 그의 행적에 관하여 력대의 문헌에는 많은 기록이 있...
  • 2012-07-03
  •  성공가도 달리는 조선족 3세 이야기 끈질긴 노력과 인내로 이뤄낸 쾌거   광동성조선민족련합회 장성근부회장   (흑룡강신문=하얼빈) 할빈출신인 장성근씨(43세)는 피어린 노력을 통해 홍콩, 혜주, 천진에 3개의 전자회사를 설립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대학교의 문턱에도 들어가보지 못한 그가 이런 쾌거를 이뤄낸...
  • 2012-06-2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