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북경의 뉴스가 있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4월8일 14시17분    조회:392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박복선

 북경의 조선족 행사장에 가면 항상 말없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그를 볼 수 있다. 혹간 그가 보이지 않으면 빈자리가 금방 느껴진다. 행사장에서 그를 찾는 사람이 여기저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웬 일이요? 오늘은 왜 안 보이지?”
  “…”
  솔직히 그는 뭔가 꼭 붙어있는 그림자를 방불케 했다. 북경에서 조선족행사다 하면 거의 번마다 어길세라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신분이 기자이니 다들 당연지사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런데 “기자”라고 초청을 받는 사람이 그를 포함해 극소수인 경우가 비일비재이다. 그것도 정년퇴직을 한지 거의 10년이 되는 사람이 현역으로 뛰고 있는 상황임에도 말이다.
  실제 그는 벌써 국가급 모 잡지사에 근무하던 시절부터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그때 그 시절 역시 민족사업에 대한 애착으로 휴일이 따로 없이 민족사회 뉴스인물과 사건을 찾아 열정을 불태웠으며 사회 각계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기자라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인터뷰 도중에 좌우명처럼 이 한마디 말을 곱씹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일상을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움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그는 단지 글을 쓰기 위해서 쓰는 기자가 아니었고 또 단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을 찍는 기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북경에서 사람들이 행사를 가질 때 의례처럼 그를 빼놓지 않고 찾는 이유를 다소나마 알 것 같다.
  그는 기자신분을 천직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예전에 중학교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훗날 기자로 일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난 세기 60년대 후반 중학교를 나온 그는 하향 지식청년이라는 신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향 지식청년이란 지난 세기 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중국에서 자원 혹은 부득불 도시에서 농촌에 내려가 농민으로 된 청년들을 말한다. 그때 그는 연길시 서쪽의 민흥촌에 가서 촌민들과 함께 과수나무를 가꾸기도 했다. 훗날에는 연길시 비단공장의 초창기의 노동자로 있었다.
  1972년, 그는 “문화대혁명” 후의 첫 기의 공농병 학생으로 되어 북경 중앙민족대학에 추천을 받아 공부를 하는 행운을 안는다. 졸업 후 그는 연변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에 배치 받아 10여년간 사전편찬과 번역연구에 종사하면서 훗날의 기자 직업에 알게 모르게 한걸음 또 한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북경에 살고 있는 총각과 천상 연분을 맺었다. 그들 부부는 장장 7년 동안 북경과 연길 양쪽에 갈라져 있으면서 “이산가족”의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북경에 전근된 후에도 고생은 인차 끝나지 않았다. 한동안 숙소의 작은 침실에 침대 둘을 한데 이어놓고 아들과 딸, 남편과 그 이렇게 넷이서 비좁게 엉켜 살았다.
  “정말 그토록 행복할 수 없었어요. 일가족이 끝내 함께 살게 되었거든요.”
  북경 국가급 잡지사의 기자생활은 그에게 또 다른 무대를 펼쳐주고 있었다.

 

  동북 3성을 비롯해 전국의 조선족사회가 주무대로 되고 있었다. 위로는 부장이나 장군, 아래로는 좌판을 벌인 장사꾼이나 광천수 심부름꾼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인물상이 만화경처럼 눈앞에 등장하고 있었다. 국가급 잡지사 기자의 신분은 그를 모모한 고위관리나 장군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게 했으며 또 몸으로 겪고 맛보았던 인생의 고락은 그를 어느 회사의 직원이나 가게의 가판대에 서있는 점원들과 이웃처럼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게 했다.
  그는 조선족사회에 흠씬 빠져 들어갔다. 큰 인물이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린 성과에 경탄했고 작은 인물의 소소한 노력이라도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조선족사회의 인물과 사건은 그의 손을 거쳐 글로, 사진으로 되어 잡지의 지면을 장식했다.
  2004년 정년퇴직을 할 때 그의 이름은 벌써 북경에 파다히 알려지고 있었다.
  인젠 퇴직을 했으니 천륜지락을 즐길 수 있었다. 널찍한 집이 있었고 아이들도 모두 성장했다. 돈도 여유가 있었고 시간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는 부엌에서 맴도는 가정주부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게 집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는 6남매의 막내로 자랐다. 그의 다른 형제들은 이런저런 원인으로 50, 60대 나이에 세상을 마감했다. 그래서 인생의 유한함을 더구나 절실하게 느꼈다.
  와중에 큰 오빠는 짧은 인생에서 화려한 그라프를 그었던 사람이었다.
  연변의 정부관원으로 있던 오빠는 연변에서 첫 사람으로 연변을 땅과 바다, 하늘 입체적으로 발전시킬 데 대한 제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오빠는 또 연변민항 설치 준비사업에 관여했던 담당자의 일원으로 있었으며 연길민항 초대 당지부서기이기도 했다. 지난 세기 80년대 도문-심양행 철도를 도문-천진까지 연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연변발전에 대한 특출한 기여로 공로기입 표창을 받았다.
  “저도 남은 인생을 오빠처럼 소중하게 그리고 보람 있게 보내고 싶었어요.”
  기회는 항상 대기자에게 차례진다. 마침 흑룡강신문사 북경지사가 그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퇴직한지 단 한달만에 특파원의 신분으로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잡지사에서 약 20년 근무하면서 쌓았던 경륜과 인맥관계는 그에게 두 날개를 달아주고 있었다.
  그는 북경 민족사회의 동태를 사진과 글로 부지런히 기록했다. 잡지사에서 전국 조선족을 주대상으로 했다면 이때부터 그는 조선족은 물론 재중 한국인, 재중 조선인을 포함한 전체 조선민족을 상대하는 기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북경 민족단체의 기념행사와 축제, 설맞이모임… 조선민족이 움직이고 모이는 곳이면 늘 그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그에게는 여간해서는 말 못할 고충이 하나 있었다. 원인불명의 청각장애로 인터뷰를 할 때 물음 하나를 두세 번 반복해야 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그렇다고 취재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료 등을 수집하여 사전에 내용을 파악했고 모든 보조수단을 이용하여 기사내용을 충실하게 만들었다.
  그가 나중에 카메라에 남다른 애착을 품게 된 원인도 그런 연장선에 있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그에게 카메라는 손목시계나 휴대폰처럼 지참품으로 되었다. 언제인가부터 그는 단지 카메라 애호가가 아닌 진짜 촬영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는 퇴직할 무렵 촬영 기량을 한 단계 높이고자 조선족으로는 유일하게 북경 한국인사진동호회에 가입했다. 알심을 들여 찍은 사진을 내놓고 수준급 강사와 회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 수렴했다.
  인젠 어떤 모임에서는 그를 기자로만 아니라 촬영사로 극진히 모실 정도라고 한다.
  현재 그가 메고 다니는 사진기는 본체와 카메라, 배터리 등을 두루 합치면 일여덟 근이나 된다. 백여 근이 되나마나한 왜소한 체구에 그걸 메고 다니는 자체가 일장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그는 그냥 즐겁기만 하단다.
  “사진을 찍는 게 좋았어요. 제가 보고 느끼는 것을 그림으로 담을 수 있었거든요.”
  거의 기사마다 손수 찍은 사진을 곁들였다. 어떤 때는 순 사진으로 지면을 장식하여 취재현장을 그림으로 실감나게 독자들에게 펼쳐보였다.
  지금도 취재는 예나 제나 다름없이 그의 일상으로 되고 있다.
  그는 국가급 잡지사에 근무하던 그때부터 북경 조선족사회의 20여년의 변화를 거의 빠짐없이 사진으로 기록하고 글로 서술했다. 그동안 북경조선족운동회, 북경조선족민속축제 조직위, 조선족노인협회, 조선족기업가연의회 등 단체와 기구에서 일제히 그에게 감사패와 표창장을 증정했다.
  그때마다 그는 조선족기자로서 보람을 뿌듯하게 느꼈다.
  언제인가부터 꿈 하나가 그의 마음 깊이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난 기간 촬영한 사진들은 한데 묶으면 책장 하나를 채울 수 있는 분량이었다. 이런 사진들을 잘 정리하면 의미 있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북경 조선족사회의 변천사를 테마로 하는 개인 사진전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실은 오래 전부터 신변의 많은 지인들이 그에게 이런 사진전을 권유하고 있단다. 지금까지 그가 남긴 북경조선족사회의 사진기록은 북경에서 단 혼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이맘쯤이면 누군가는 벌써 그의 이름을 입에 번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긴 “박복선”이라는 인물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사진처럼 또렷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글/김호림
                 중국민족 2013년 1기

파일 [ 5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흑룡강신문=하얼빈) 마헌걸 특약기자 = 조선족 김창걸화백의 작품이 '2014중국국례예술대사'(国礼艺术大师) 달력에 입선돼 눈길을 모았다.   중국의 전통예술을 계승하고 발양하기 위하여 그리고 전세계를 향하여 중국예술가들이 이룩한 휘황한 성과와 창의성을 전시하기 위하여 중국국가서화원, 홍콩특별행정구...
  • 2014-01-08
  • 칭다오 래서 마포숯불갈비 김금수 사장   프로필 :   김금수 (62)   길림성 서란시 평안진 출신   25년 식당 경영 경력   칭다오 래서시 마포숯불갈비 사장   롯디빵커피숍 경영 사장   래서조선족번영회 회장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래서지회 지회장    김금수 사장은 "조선족들의 잘사는 모습, 우수한...
  • 2014-01-07
  • 촬영사들이 원해숙녀성의 창업경험을 현지 취재하고있다. 상해동방TV위성방송 기록편《먼곳의 맛》(远方的味道)촬영제작팀이 금년 1월1일부터 4일까지 나흘간 백산시 혼강구에 심입해 조선족녀기업가 원해숙(56세)녀성의 창업정신과 치부경험을 주제로 그가 경영하는 민족특색의 전통적인 음식,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 2014-01-06
  • 신동일   솔직히 옷이라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는 듯 했다. 그가 시초에 몸을 담은 곳은 의류업체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대학교를 나온 후 북경 모 호텔의 한국부에서 근무했고 또 북경 어느 골목의 식당을 경영하기도 했단다.     천사처럼 날개옷을 입고 하늘을 붕붕 날고 싶었지만 날개옷은 종내 보이...
  • 2014-01-06
  • 류봉식 화백 천안문광장에 느닷없이 펭귄 한마리가 나타나고 있었다. 펭귄은 남극 같은 추운 기후에서 서식하는 새이다. 단지 남반구의 추운 기후에서 서식하던 이 새는 북반구의 온대지역, 그것도 북경의 심장부에 불쑥 나타나 일장 괴이한 풍속도를 그린다. “대비가 너무 심해서 황당한 느낌이 들지요?” 화백...
  • 2014-01-04
  • [기획2]놈들의 말꼬리에 머리태 끌리워 화형당한 최계옥렬사 건국 65주년 맞이 특별기획보도-《81년만에 공향에 돌아온 항일녀전사의 충혼》 제1편 조선인들이 비교적 집중적으로 모여 산 차조구(지금의 안도현 석문진)일대는 19세기말부터 항일의병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였다. 박영철선생의 외가집은 바로 차조구 동흥...
  • 2014-01-03
  • “烤牛仔” 허만석사장의 이야기 훤칠한 키에 약간의 고수머리, 항상 얼굴은 밝게 빛나고 웃음이 가득한 사람이다. 그런 모습이여서 보는 사람마다 나이보다 많이 젊어보인다는 평이다. 허만석은 나라가 해방되기전인 19세기 40년대에 양천허씨집안의 3남3녀중 둘째로 태여났다. 형제는 많은데 부친은 일찍 병으...
  • 2014-01-02
  •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김춘명의 영웅본색 들어본다 사적보고요청으로 김춘명은 전국을 기본상 다 다녀왔다  /자료   영웅모범인물인 김춘명은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중 제일 년소자이다. 36세이다. 《감동중국 조선족걸출인물》표창대회참석차 연길에 도착하기 바쁘게 투숙호텔에서 본지의 인...
  • 2014-01-02
  •   김홍광원사 중국과학원 공정열물리연구소 학술위원회 주임인 조선족과학자 김홍광이 일전 중국과학원 기술과학부 원사로 당선되였다. 당일, 53명의 중국적 과학자와 9명의 외국적 과학자가 2013년 중국과학원 원사로 선거, 당선되였는데 김홍광이 그중의 일원으로 되였다. 올해 57세, 흑룡강성 연수현에서 출생한 김...
  • 2014-01-02
  • 졸음운전 방지 연구 부경대 중국인 유학생 (부산=연합뉴스) 뇌파센서로 자동차 운전자의 눈 감김 정도를 측정해 졸음운전을 예방할 수 있다는 이색 연구결과 내놓은 부경대학교 전자공학과 박사과정에 다니는 중국인 유학생 이강씨 2014.1.2 > ccho@yna.co.kr (부산=연합뉴스) 조정호 기자 = 뇌파센서로 자동차 운전자의 눈...
  • 2014-01-02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