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북경의 뉴스가 있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3년4월8일 14시17분    조회:391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박복선

 북경의 조선족 행사장에 가면 항상 말없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는 그를 볼 수 있다. 혹간 그가 보이지 않으면 빈자리가 금방 느껴진다. 행사장에서 그를 찾는 사람이 여기저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웬 일이요? 오늘은 왜 안 보이지?”
  “…”
  솔직히 그는 뭔가 꼭 붙어있는 그림자를 방불케 했다. 북경에서 조선족행사다 하면 거의 번마다 어길세라 얼굴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신분이 기자이니 다들 당연지사로 여길지 모르겠다. 그런데 “기자”라고 초청을 받는 사람이 그를 포함해 극소수인 경우가 비일비재이다. 그것도 정년퇴직을 한지 거의 10년이 되는 사람이 현역으로 뛰고 있는 상황임에도 말이다.
  실제 그는 벌써 국가급 모 잡지사에 근무하던 시절부터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그때 그 시절 역시 민족사업에 대한 애착으로 휴일이 따로 없이 민족사회 뉴스인물과 사건을 찾아 열정을 불태웠으며 사회 각계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기자라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인터뷰 도중에 좌우명처럼 이 한마디 말을 곱씹었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일상을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즐거움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그는 단지 글을 쓰기 위해서 쓰는 기자가 아니었고 또 단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을 찍는 기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북경에서 사람들이 행사를 가질 때 의례처럼 그를 빼놓지 않고 찾는 이유를 다소나마 알 것 같다.
  그는 기자신분을 천직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예전에 중학교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훗날 기자로 일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지난 세기 60년대 후반 중학교를 나온 그는 하향 지식청년이라는 신분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향 지식청년이란 지난 세기 50년대부터 70년대 말까지 중국에서 자원 혹은 부득불 도시에서 농촌에 내려가 농민으로 된 청년들을 말한다. 그때 그는 연길시 서쪽의 민흥촌에 가서 촌민들과 함께 과수나무를 가꾸기도 했다. 훗날에는 연길시 비단공장의 초창기의 노동자로 있었다.
  1972년, 그는 “문화대혁명” 후의 첫 기의 공농병 학생으로 되어 북경 중앙민족대학에 추천을 받아 공부를 하는 행운을 안는다. 졸업 후 그는 연변사회과학원 언어연구소에 배치 받아 10여년간 사전편찬과 번역연구에 종사하면서 훗날의 기자 직업에 알게 모르게 한걸음 또 한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그 무렵 그는 북경에 살고 있는 총각과 천상 연분을 맺었다. 그들 부부는 장장 7년 동안 북경과 연길 양쪽에 갈라져 있으면서 “이산가족”의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북경에 전근된 후에도 고생은 인차 끝나지 않았다. 한동안 숙소의 작은 침실에 침대 둘을 한데 이어놓고 아들과 딸, 남편과 그 이렇게 넷이서 비좁게 엉켜 살았다.
  “정말 그토록 행복할 수 없었어요. 일가족이 끝내 함께 살게 되었거든요.”
  북경 국가급 잡지사의 기자생활은 그에게 또 다른 무대를 펼쳐주고 있었다.

 

  동북 3성을 비롯해 전국의 조선족사회가 주무대로 되고 있었다. 위로는 부장이나 장군, 아래로는 좌판을 벌인 장사꾼이나 광천수 심부름꾼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인물상이 만화경처럼 눈앞에 등장하고 있었다. 국가급 잡지사 기자의 신분은 그를 모모한 고위관리나 장군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게 했으며 또 몸으로 겪고 맛보았던 인생의 고락은 그를 어느 회사의 직원이나 가게의 가판대에 서있는 점원들과 이웃처럼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게 했다.
  그는 조선족사회에 흠씬 빠져 들어갔다. 큰 인물이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린 성과에 경탄했고 작은 인물의 소소한 노력이라도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조선족사회의 인물과 사건은 그의 손을 거쳐 글로, 사진으로 되어 잡지의 지면을 장식했다.
  2004년 정년퇴직을 할 때 그의 이름은 벌써 북경에 파다히 알려지고 있었다.
  인젠 퇴직을 했으니 천륜지락을 즐길 수 있었다. 널찍한 집이 있었고 아이들도 모두 성장했다. 돈도 여유가 있었고 시간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그는 부엌에서 맴도는 가정주부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게 집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는 6남매의 막내로 자랐다. 그의 다른 형제들은 이런저런 원인으로 50, 60대 나이에 세상을 마감했다. 그래서 인생의 유한함을 더구나 절실하게 느꼈다.
  와중에 큰 오빠는 짧은 인생에서 화려한 그라프를 그었던 사람이었다.
  연변의 정부관원으로 있던 오빠는 연변에서 첫 사람으로 연변을 땅과 바다, 하늘 입체적으로 발전시킬 데 대한 제안을 내놓았다고 한다, 오빠는 또 연변민항 설치 준비사업에 관여했던 담당자의 일원으로 있었으며 연길민항 초대 당지부서기이기도 했다. 지난 세기 80년대 도문-심양행 철도를 도문-천진까지 연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연변발전에 대한 특출한 기여로 공로기입 표창을 받았다.
  “저도 남은 인생을 오빠처럼 소중하게 그리고 보람 있게 보내고 싶었어요.”
  기회는 항상 대기자에게 차례진다. 마침 흑룡강신문사 북경지사가 그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퇴직한지 단 한달만에 특파원의 신분으로 다시 출근을 시작했다. 잡지사에서 약 20년 근무하면서 쌓았던 경륜과 인맥관계는 그에게 두 날개를 달아주고 있었다.
  그는 북경 민족사회의 동태를 사진과 글로 부지런히 기록했다. 잡지사에서 전국 조선족을 주대상으로 했다면 이때부터 그는 조선족은 물론 재중 한국인, 재중 조선인을 포함한 전체 조선민족을 상대하는 기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북경 민족단체의 기념행사와 축제, 설맞이모임… 조선민족이 움직이고 모이는 곳이면 늘 그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그에게는 여간해서는 말 못할 고충이 하나 있었다. 원인불명의 청각장애로 인터뷰를 할 때 물음 하나를 두세 번 반복해야 하는 경우가 자주 생겼다. 그렇다고 취재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료 등을 수집하여 사전에 내용을 파악했고 모든 보조수단을 이용하여 기사내용을 충실하게 만들었다.
  그가 나중에 카메라에 남다른 애착을 품게 된 원인도 그런 연장선에 있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그에게 카메라는 손목시계나 휴대폰처럼 지참품으로 되었다. 언제인가부터 그는 단지 카메라 애호가가 아닌 진짜 촬영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는 퇴직할 무렵 촬영 기량을 한 단계 높이고자 조선족으로는 유일하게 북경 한국인사진동호회에 가입했다. 알심을 들여 찍은 사진을 내놓고 수준급 강사와 회원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귀담아 수렴했다.
  인젠 어떤 모임에서는 그를 기자로만 아니라 촬영사로 극진히 모실 정도라고 한다.
  현재 그가 메고 다니는 사진기는 본체와 카메라, 배터리 등을 두루 합치면 일여덟 근이나 된다. 백여 근이 되나마나한 왜소한 체구에 그걸 메고 다니는 자체가 일장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그는 그냥 즐겁기만 하단다.
  “사진을 찍는 게 좋았어요. 제가 보고 느끼는 것을 그림으로 담을 수 있었거든요.”
  거의 기사마다 손수 찍은 사진을 곁들였다. 어떤 때는 순 사진으로 지면을 장식하여 취재현장을 그림으로 실감나게 독자들에게 펼쳐보였다.
  지금도 취재는 예나 제나 다름없이 그의 일상으로 되고 있다.
  그는 국가급 잡지사에 근무하던 그때부터 북경 조선족사회의 20여년의 변화를 거의 빠짐없이 사진으로 기록하고 글로 서술했다. 그동안 북경조선족운동회, 북경조선족민속축제 조직위, 조선족노인협회, 조선족기업가연의회 등 단체와 기구에서 일제히 그에게 감사패와 표창장을 증정했다.
  그때마다 그는 조선족기자로서 보람을 뿌듯하게 느꼈다.
  언제인가부터 꿈 하나가 그의 마음 깊이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지난 기간 촬영한 사진들은 한데 묶으면 책장 하나를 채울 수 있는 분량이었다. 이런 사진들을 잘 정리하면 의미 있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북경 조선족사회의 변천사를 테마로 하는 개인 사진전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실은 오래 전부터 신변의 많은 지인들이 그에게 이런 사진전을 권유하고 있단다. 지금까지 그가 남긴 북경조선족사회의 사진기록은 북경에서 단 혼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보적이기 때문이다.
  이맘쯤이면 누군가는 벌써 그의 이름을 입에 번지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긴 “박복선”이라는 인물은 이미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사진처럼 또렷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글/김호림
                 중국민족 2013년 1기

파일 [ 5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땅거미가 어둑어둑 깔리는 1월 12일 초저녁, 전화기 건너편으로 또랑또랑하고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코로나19로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충분히 최련화 가수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순간이였다. 최련화 가수는 각종 무대와 경연프로그램을 휩쓸고 있는 요즘 말로 한창 주가를 올...
  • 2021-02-19
  •   —연변오덕된장술유한회사 리동춘 대표리사의 야망 문인숙 연변오덕된장술유한회사 리동춘 대표리사 “무식한 놈이 두려움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나를 두고 한 말 같다. 나는 전통된장에 미쳐서 인생 후반전을 된장사업에 바쳤다. 그 사이 좌우명도 ‘된장 먹고 된사람 되자’로 바꾸었...
  • 2021-02-09
  • 무한도전이 남기는 그라프 -쉼없는 언론인 림장춘선생의 거침없는 질주   안려홍   림장춘선생을 다루는 글을 쓰려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앞서 텔레비죤에서 자주 나오는 〈무한도전(无限挑战)〉이라는 프로그람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림장춘선생의 언론인생애가 이 명사와 신통히도 맞물린다는 판단에서였다. 견...
  • 2021-02-04
  •   1966년생 김영애 교사는 교학 31년차에 접어든 베테랑 교사다. 1985년 안산시조선족학교를 졸업한 그는 료녕사범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89년, 당연하다는 듯이 모교에 돌아와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내 동생같이, 내 자식같이 대하자”라는 마인드로 늘 자신을 관리해온 김영애 교...
  • 2021-02-04
  • 청도신라호성실업회사 최성 사장 공무원에서 콰징기업인으로 변신한 최성 사장이 아리랑그룹의 창시자인 아난씨와 함께 생방송프로에서 인증샷을 남기고 있다.       최성씨는 연길텔레비죤방송국에서 근무하다가 2001년 4월 청도시경제기술개발구 대외경제무역국에서 투자유치를 담당하는 공무원으로 전근해왔다...
  • 2021-01-29
  • 준마상 책임편집상 수상한 림은화 편집을 만나 “문학작품 편집, 어딘가 딱딱하고 따분할 것만 같으시다구요? 사실 해보면 얼마나 보람찬 작업이라구요.” 문학의 ‘따분’한 이미지는 젊은이들사이에서 문학이 점점 멀어져가는 분야로 떠밀려나게 되면서부터 생겨난게 아닌가 싶다. 그 ‘따분&r...
  • 2021-01-27
  • ○대형 심리학 과학경기 리얼리티쇼 프로에 ‘천재’들 운집 ○경기 시간 40분, 황혜령 1분 30초에 완성, 장내를 경악케 ○황혜령, 온라인 쇼핑몰에 ‘광고모델’로 ‘등장’ 1월 8일 밤, ‘천재’들만 출연한다는 〈최강대뇌〉 제8시즌 제1기 경기에서 황혜령이고 부르는 처...
  • 2021-01-15
  • 《길림성식물지》(총3권)출판을 위해 90대 고령에도 수년간이나 연길시 조양천진 삼성촌 5대에 거주하면서 일에 여념없는 원 연변농학원 교수 96세의 김수철옹, 오늘도 그는 사진기를 들고 박람회 관람을 다닌다.   작품을 롄즈에 담는 김수철옹   지난해 12월 29일, 화가인 마동석의 작품이 며칠전인 26일부터 ...
  • 2021-01-14
‹처음  이전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