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기억속의 60년》-《장백의 노래》와 시인 김철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5월8일 12시51분    조회:510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김철


 


조선족이 낳은 당대의 저명한 시인 김철선생이 문단에 발을 들여놓던 20세기 50년대 초반, 그가 조선전선에서 돌아와 신문기자로 일할 때였다.서정시 《앵두 네알》을 써서 문단과 독자들의 이목을 끌었고 단시 《지경돌》과 노래 《귀환병과 처녀》(동희철 작곡)가 신춘문예에 입선되여 한창 주목을 받고있을 때였다.

어느날, 중공 연변주위 제1서기로 계시는 주덕해동지가 시인 김철과 작곡가 정진옥을 자기 집무실로 불렀다. 주덕해동지는 그들 두사람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하였다.

《한가지 중요한 임무를 맡기겠소.》하더니 느릿느릿한 어조로 말끈을 꼬았다.

《연변은 로항일근거지요. 수많은 항일렬사들이 나온 곳이요, 그러니 우리가 그들을 노래하는 큰 작품을 하나 써야 하지 않겠소.》

그들 두 사람은 주덕해서기의 말뜻을 인츰 알아차렸다.

《예, 알겠습니다》

다음날, 그들은 주덕해서기가 포치한 로선을 따라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장백현 북쪽의 밀영지였다. 교통이 불편한 당시, 집안현을 거쳐서 장백현으로 가는 길은 상상외에로 험난하였다. 그들이 집안현에 당도했을 때 어느새 주덕해동지의 지시를 받고 왔다는 장백현정부의 찦차가 와있었다. 그때만 해도 몹시 어려울 때여서 전현에 단 한대 밖에 없는 찦차였다.

집안현에서 장백현까지 가자면 이틀이 잘 걸린다는것이였다. 산길은 좁고 험하였다. 구불구불 타래지면서 톺아오르는 산길은 산 하나를 넘는데 반나절이 잘 걸렸다. 산우에 올라 내려다보니 산아래 압록강은 한줄기 파아란 띠와 같이 아득히 굽이쳐 흐르고 벼랑은 어찌도 험했던지 당금 찦차가 굴러 떨어질것만 같았다. 동행했던 민간문학작가 정길운씨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있었다.

그들이 《비행기령》이라는 산굽이를 돌 때였다. 차를 몰던 운전수가 《비행기령》의 유래를 말해주었다. 1945년 일본 관동군이 진격해오는 쏘련홍군의 기세에 못이겨 조선 청진쪽으로 후퇴할 때였다. 일본 장교들을 실은 차가 여기서 차머리를 미처 돌리지 못해 벼랑으로 비행기처럼 날아갔대서 이름을 《비행기령》이라 했다는것이였다. 내려다보니 진짜 비행기라도 날만 했다. 그들 일행 역시 간담이 서늘해졌다.

집안현을 떠난지 이틀만에 해질무렵에야 그들은 장백현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그들은 밀림을 향해 떠났다. 옛날 항일투사들의 생활을 체험하려는 심산이였다. 4월인데도 눈이 녹지 않아 무릅까지 쌓인 눈길을 헤쳐가기엔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들은 눈길에 신는 설피라는걸 신고 걸었다. 밀림을 지나 백두산꼭대기까지는 불과 60리밖에 안된다는데 그들은 하루종일 걸어서도 겨우 30리밖에 못걸었다. 눈길에 오도 가도 못할 형편, 하는수 없이 그들은 밀림속에서 하루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그들은 우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았다. 그 옛날 항일투사들처럼, 모닥불에 손은 따스해도 등은 시려났다. 항일투사들의 간고한 삶이 느껴졌다. 이틑날, 그들은 도저히 전진할수가 없어 현성으로 되돌아왔다. 현성에 되돌아 온 그들은 오후에 갑자기 폭풍을 만났다. 북쪽으로부터 하늘이 새까맣게 흐려오더니 눈보라가 치기 시작했다. 변덕스런 심산의 날씨, 그들에게는 창작의 절호의 기회가 생겼다. 김철시인은 즉흥시가 떠올랐다.

구름을 휘감아 몇백리

백설을 이고 몇천리

장백산! 아, 장백산!

사나운 눈보라

절벽을 쳐부셔도

창공에 웃뚝 솟은

장백산!

몇천리 몇만리더냐

작곡가 정진옥씨도 흥이 나서 고함을 지르며 눈보라속을 뛰어다녔다. 그는 떠오르는 선률을 적으려고 피아노를 찾았다. 하지만 전현에 피아노 한대 없는 상황, 할수없이 근처 소학교에 달려가 발풍금을 찾았다. 그러나 그 발풍금도 고장이 나서 바람이 새는 바람에 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성이 난 정진옥씨는 발로 풍금을 차번져놓고 다시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 순간에 대합창 《장백의 노래》의 기본선률이 형성되였던것이다. 《장백의 노래》는 이토록 흥분속에서 작곡되였다.

그런데 한 대목에서 작사자와 작곡가지간에 분쟁이 생겼다. 제1악장 뒤부분에

실실이 피어나는 모닥불 연기

어느 화전농의 간장이 타느냐

애가 타느냐

이런 대목이 있는데 작곡가는 《애가 타느냐》를 《애가 타는구나》로 고쳤다. 시인은 시적으로 보아 이렇게 하면 말이 안된다고 《구나》를 《냐》로 고칠것을 고집했는데 작곡가는 《구나》로 해야 맛이 난다고 고집을 썼다. 그들 둘은 옥신각신하다가 나중에 끝내 시인은 작곡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말았다. 그래서 작품이 세상에 발표되고 그것이 책으로 출판될 때도 그렇게 나갔지만 지금도 시인은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얼마후에 연변가무단에서는 이 작품을 가지고 북경에서 열리는 전국 대합창콩클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떠나기전야에 주덕해서기는 이 작품을 심사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곡은 참 좋은데  복장이 틀렸구나, 그게 뭐냐, 촌티나게, 당장 새옷을 한벌씩 해입고 가!》

그리고는 인츰 경비를 하달하였다. 그래서 연변가무단에서는 사람마다 처음으로 멋드러진 양장 한벌씩 해입게 되였다.

북경에서 시합이 시작되였다. 《천교극장》이라는데서 공연하게 되였다. 그런데 무대가 너무 커서 몇십명밖에 안되는 합창대로서는 도저히 그 무대를 채울수가 없었다. 북경이나 상해에서 온 국가급 예술단에서는 방대한 합창대오로 무대를 꽉 채웠다.그러나 노래가 시작되자 어디서 그런 우렁찬 목소리가 나왔는지, 배우들은 감격에 못이겨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목청껏 불렀다. 관중들도 감동이 되어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다. 우렁찬 박수갈채가 극장을 들썽하였다. 평의심사결과 모든 위원들은 《장백의 노래》를 1등으로 꼽았다.

이듬해, 모스크바에서는 제6차 세계청년련환절이 열렸다. 중국에서는 1등작인 《장백의 노래》를 중국을 대표한 출전프로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장백의 노래》는 세계무대에서도 인기를 모았다.작품평의심사석상에서 평의심사위원장이며 세계 저명한 작곡가인 쇼스타코위치가 먼저 엄지손가락을 내곱았다. 《호로쑈, 호로쑈!》그의 평가는 대단히 높았다. 그 바람에 다른 위원들도 대찬성이었다.

이렇게, 시골에서 태어난 대합창 《장백의 노래》는 세계무대를 들썽하고 나라를 위해 큰 영예를 따오게 되였다.

그런데 문화대혁명시기 이것이 큰 화를 불러올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이 대합창 《장백의 노래》때문에 작사자 김철 시인과 작곡가 정진옥은 투쟁대회에 끌려나왔다. 죄명은 《장백의 노래》가 타국의 수령을 노래했다는것이였다. 시인 김철은 엄정하게 말하였다.

《아니오! 이건 우리의 영광스런 항일투사들을 노래한것이오!》하였더니 철없는 반란파ㅡ중학생 아이들은 추켜든 그의 골을 내리누르며 죄를 승인하라는것이였다. 하지만 시인 김철의 엄연한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항일투사를 노래한것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이오?》그래서 그는 완고불변의 반동작가로 외국간첩이라는 얼토당토않는 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우고 말았다.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한 루명이였다. 우리 민족의 자랑, 중국의 자랑인 대합창 《장백의 노래》는 문화대혁명의 대폭풍속에서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큰 재난을 모면할수없었던것이다.

당중앙의 옳바른 시책에 의해 이 《죄명》이 시정되자 연변가무단에서는 이 노래를 다시 무대에 올렸다. 쓰라린 력사를 회억하면서 배우나 관중들은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며 이 명작을 감상하였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지난 2001년 10월 7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 정판룡교수는20세기 중국 조선족이 낳은 가장 우수한 문화지성인중의 한사람이며 저명한 문학교수, 교육가이고 문학평론가, 산문작가이자 사회활동가였다.   정판룡 프로필:     1931년 10월 2일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면 항교리에서 출생 1949년 연변대...
  • 2013-07-24
  • "결혼이주여성들은 늘 도움을 받고 누군가 돌봐줘야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주민들도 주인의식을 갖고 제 몫을 하면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한국에 공부하러 왔다 함께 공부하던 한국인 남편을 만나 정착한 중국 국적의 조선족 박경희(40) 씨는 23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주민...
  • 2013-07-23
  • -개원시조선족중심소학교 남춘매교원의 교육리념 학생들을 지도하고있는 남춘매선생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항상 더 잘해주었더라면 더 훌륭하게 자랐을걸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과거 못다한 사랑을 더 많이 베풀어주려 합니다.》 이는 료녕성 개원시조선족중심소학교 1학년 담임교원 남춘매선생...
  • 2013-07-23
  • 실험의기를 소개하고있는 료양시조선족학교 정옥향선생님 《우리 학교, 우리 학생을 위한 일이라면 누가 알아봐주지 않더라도 또한 한푼의 보수도 따지지 않고 선뜻 나서는 선생님이십니다.》료녕성 료양시조선족학교 정옥향선생님에 대한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의 한결같은 평가이다. 한족학교에서 조선족학교로 전근 1992년...
  • 2013-07-22
  • 로기순박사 고명한 의술과 고상한 의덕을 갖춘 의학가로 살아 생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의—로박사》로 불리우면서 존경을 받았고 세상뜬후에는 자신의 유체까지 연변의학원 병리표본실에 바쳐 의학연구에 헌신한 사람, 그가 바로 세계 조선족의 제1대 생화학자이며 중국조선족 의학교육의 선구자인 로기순박사이...
  • 2013-07-22
  • ㅇ2006년 3월 7일 길림신문사를 찾은 성인대 전임 부주임 리정문(중간사람). ㅇ2006년 3월 7일 장백산잡지사를 찾은 성인대 전임 부주임 리정문(중간사람). ㅇ길림신문 장춘이주 좌담회에 참가한 리정문부주임(왼쪽사람). 리정문 프로필 1940년 5월, 길림성 부여현에서 출생. 1961년 9월-1968년 2월,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
  • 2013-07-22
  • 정규창교수   일요일 발표예정 정규창교수는 유명한 진단학전문가이며 연변의학계 원로이며 룡정의과대학(후에 연변의학원으로 발전했음)의 주요창시자이다. 정규창은 1917년 10월 1일 조선 평안남도 숙천의 한 빈곤한 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세살때 부모를 따라 오늘의 룡정시 세린하 수북촌에 와서 자리잡았다. 그가 ...
  • 2013-07-22
  •   —세계스포츠낚시연합 윤태근회장 일가견 (흑룡강신문=하얼빈) 진종호기자= 방대하고 무질서하며 무조직상태에 처한 세계 낚시계를 하나로 묶어 세계 5억 낚시 동호인들의 최대 축제인 낚시월드컵을 5회째 개최해온 세계스포츠낚시연합(WSFF) 윤태근 회장은 남북분단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 통일된 조국에서 낚시...
  • 2013-07-19
  • ㅡ한국 하나은행 심양 서탑지행 태영화지점장 흑룡강성 밀산태생인 태영화(1969년 생)는 소학교 4학년때 부모따라 료녕으로 이주, 1991년 심양사범대학 국제무역전공학부를 마치고 심양 교통은행 국제부에 배치받아 업무골간으로 활약했다. 지난 2004년 외국계은행으로는 최초로 심양에 진출한 한국 하나은행의 지성규 초대...
  • 2013-07-19
  • 오태호선생오태호선생은 1928년 12월 24일, 길림성 연길현(현 룡정시)광개향 후동촌에서 출생했으며 1944년 룡정제2국고를 거쳐 1950년 10월에 연변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연변대학을 졸업한 후 오태호선생은 연변일보사의 기자로 취직하면서 1986년 4월 정년리직하기까지 장장 36년간 연변일보사, 연변인민...
  • 2013-07-1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