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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시 북흥과자공장의 창시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2월31일 09시11분    조회:13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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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영숙
비전의 나래 펼치는 북흥과자공장 


연길시 북흥과자공장의 창시자 김영숙 공장장 


노년일대

  (흑룡강신문=연길2011-12-31) 김명록 특약기자 = 연길북흥과자공장이라면 대뜸 김영숙 공장장을 떠올리게 된다.북흥과자공장의 창시자이자 형상이 바로 김영숙이다.

  김영숙은 1960년에 연길시식품공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선후 주임, 해방로상점 영업조 조장,랭식점 경리도 해보았으며 연길시익민식료품공장의 공장장 중임도 맡았다. 그러다가 1987년에 앞당겨 퇴직하고 연길시북흥과자공장을 세웠다. 그는 친척과 취업대기 청년을 하나 둘 받아들여 경영을 시작했다.

  규모가 크든 작든 기업이라 이름을 달면 살려간다는 것이 생각대로 쉽지 않았다. 김영숙 여사가 공장을 차린 이듬해 연말부터 일년동안 사탕가루공급이 정지되다싶이 되었다. 당시 일부 공장들에서는 생산을 담보하고 돈벌이를 위해 사카린을 대용하였다. 김영숙 공장장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만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갓만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공장의 제품과 자신의 신용을 목숨처럼 아끼는 그녀는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머리속에는 공장의 신용과 소비자들의 이익만 있었다.그는 생각에 생각을 하다가 공장에 용광로를 걸고 조선족의 전통방법으로 엿을 달여 과자가공에 투입하였다. 물론 원가가 높아 이윤이 떨어지고 무척 힘이 들었지만 그녀는 "북흥과자가 너무 맛있다."는 고객들의 칭찬에 더없이 기뻤고 새 힘이 솟아나군 했다.

  북흥과자공장이 잘된다는 소문이 인근에 퍼지자 과자공장들이 연길시에 우후죽순처럼 일어서면서 시장경쟁이 아주 치열하게 되었다.새로 일어선 한 공장의 공장장은 자기 가슴을 탕탕 치면서 "북흥과자공장은 우리공장인데 우리가 그까짓걸 먹어치우지 못하겠나?" 하고 큰소리 쳤다. 그 공장에서는 바로 상하이의 기술원을 초빙해다 새 과자를 생산하였다. 북흥과자공장의 판매원들이 김영숙 공장장을 보고 "상점들에서 규모가 크고 집체경영공장의 상하이과자를 받지 우리 과자를 받겠냐"라고 맥이 풀린 소리를 했다. 더우기 심한 것은 그 공장에서 자기 공장에 와 일하면 호구를 해결해 주고 정식 노동자로 받아준다고 했다. 북흥과자공장의 몇몇 기술공을 빼앗아 가려 시도했다. 그리하여 북흥과자공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김영숙 공장장은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느꼈으며 크게 놀랐다. 그녀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었고 입술이 말라 부르트고 목소리마저 변해갔다. 그는 우선 종업원들의 정서를 안정시키는 한편 새로운 방도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며칠밤 뜬눈으로 지새운 그녀는 시장경쟁에서 이기려면 선진적인 기술을 들여와 질좋은 새 과자를 생산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그는 주저없이 베이징, 상하이,선전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새 제과기술을 배웠으며 상해 기술원을 초빙하여 맛있는 상해과자를 생산했다. 그리하여 다시 공장이 활기를 띠게 되었고 흔들리던 기술원마저 안착하고 생산에서 솜씨를 보였다.

  김영숙 공장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이듬해 11월에 서울행을 택했다. 그녀는 서울구경을 제쳐놓고 여러곳을 수소문하여 서울시의 과자공장을 찾아다니며 보고 듣고 했다. 그러다가 서울시 신사동에 있는 서울대한 제과기술학원에 입학했다.그녀는 학습에 일념하면서 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루 시간을 두배로 늘여도 모자랄만큼 바삐 보냈다. 3학년 학기에 배울 과목을 한달사이에 남들이 일년에 배울 학과목과 실습과목을 소화해야 했다. 침식을 잊고 낮과 밤이 따로 없이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열심히 공부하는 이 "연변아줌마"를 보고 제과학원의 사생들은 저마다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녀는 남들이 달러를 벌고 있을 때 엄청난 학비를 지불하면서 '자비유학'으로 몇달간 과자생산의 새 기술을 배우고 돌아왔다.

  상해 새 기술과 한국선진기술을 들인 결과 북흥과자공장의 과자는 조선족 구미가 맞고 부드러우며 고급스러웠다. 과자품종은 원래 전병 한가지에서 수십가지로 늘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말못할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자란 김영숙 공장장은 근본을 잊지 않았다. 해마다 '3.8절'이나 노인절이면 연변광영원을 찾아가서 위문금과 위문품을 드렸고 위문공연도 하였다. 노인들의 회갑잔치를 치러주었고 해마다 불쌍한 엄마를 선정하여 2만여위안의 위문금을 의연하였다. 2천여위안을 들여 북산가두에 전병굽는 기계를 증정하여 가두에서 자금난을 해결하도록 도와주었으며 가두노인 활동실을 꾸릴 때도 서슴없이 천위안을 주었고 400위안짜리 녹음기와 2천여위안어치의 무용복을 사주었다. 해마다 주둔무장경찰부대에 찰떡이며 송편을 갖고 갔으며 종업원들을 데리고 가서 김치를 담그어 주었으며 훈련에서 어지럽고 땀에 젖은 옷을 씻으라고 세탁기를 사주었다. 이 몇년사이에 김영숙 공장장 손에서 빠져나간 의연금만 해도 40ㅡ50만위안이나 된다.이는 실로 한 여공산당원, 여창자, 여사영기업가의 미거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공장장한테 정부에서는 많은 배려와 영예를 주었다. 그녀는 선후로 지린성,연변조선족자치주,연길시의 '우수사영기업가', '우수공산당원', '노동모범','성과 주 '10대여걸', '민족단결모범','3.8붉은기수'등 영예칭호를 받았으며 1992년에 중국조선족여성을 대표하여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1994년 9월 26일에 김영숙 공장장은 '전국민족단결진보선진개인'의 영예를 안고 인민대회당에서 장저우민, 리펑 등 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는 영예를 지니기도 했다.


현임 최정식 사장이 생산현장을 돌아보고 있다.

  장년일대

  김영숙 공장장은 간고한 역경속에서 거꾸러지지 않고 그 치열한 시장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억척스럽게 분전하면서 너무 지쳐 끝내 몸져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 공장의 계주봉이 아들 최문일한테 차려졌다. 최문일 씨는 연변일중을 졸업하고 참군했다. 복원하여 고향에 돌아온 후 그는 연변건축공사에서 일하다가 1996년부터 북흥과자공장에서 조장,주임을 맡으면서 생산제일선에서 발벗고 나섰다.

  최문일은 자기의 정치사상 각오와 종업원들의 소질을 높이자면 학습을 틀어쥐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많은 면에서 지식의 박약으로 고배의 맛을 본 그였다. 그는 2001년 8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연변과학기술대학 경영관리전과를 졸업했다. 그는 자신이 솔선수범으로 학습할 뿐만 아니라 종업원을 조직하여 정책학습과 기술학습을 함께 틀어쥐었다. 평소에도 종업원들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정신면모를 개변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교육을 강화했다. 2003년에 새로 이 공장에 들어온 한 청년일꾼은 노임이나 타면 되지 학습은 무슨 학습인가 공개적으로 말하면서 학습은 뒷전이었다. 최문일은 그를 찾아 자영업이 전반 사회경제에서 빠뜨릴 수 없는 주요 환절이며 자영기업에 기여하는 것이 곧바로 국가에 기여한다는 도리를 깨우쳐 주었다. 반복적인 담화를 그쳐 그 청년은 전변을 가져와 생산과 학습에서 앞장섰다. 그리하여 2005년 그 청년은 공장의 선진생산자로 당선되어 표창받았다.

  최문일 씨가 공장의 경영을 책임지고 아내 문순희가 생산과 관리를 책임졌다. 이들 부부는 분공이 다르지만 시종 생산제일선에서 종업원들을 조직, 영도하면서 하나하나의 난관을 돌파했으며 어머님이 창업한 공장의 길을 활짝 더 넓혀갔다. 그들은 '안전과 양질로 믿음을, 영양과 별미로 효익을, 제품은 백성이 마음에 들게,기업은 정부가 시름놓게'라는 네구절로 공장의 경영방침을 제정하고 직장주임,판매원,위생원, 공급원의 직책을 분명히 제정하고 장례제도와 처벌제도를 엄격히 집행했다.최 씨 부부는 우선 원재료 선택부터 소홀히 하지 않고 합격품이 아니면 아무리 저렴한 가격이라도 절대 접수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장의 종업원들과 함께 재료배합, 반죽순서와 시간, 온도 등 기술난제를 풀어가면서 생산하기에 이 공장의 제품은 시종 검험부문 검사에 순리롭게 통과되었으며 줄곧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그들은 생산의 필요로 발전촌에 6천제곱미터에 달하는 식료품공장을 새로 세우고 한국의 선진설비, 일본의 선진설비를 들여왔다.

  최 씨 부부는 경상적으로 상점,가두,향,촌에 내려가 민족민속식품시장의 수요를 요해하였으며 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수시로 식품분석회, 전시회를 개최하군 한다.시장의 수요에 충족을 주기 위해 새 제품개발연구에 기술역량을 집중시켰으며 빵, 과자, 단설기, 월병 단일생산으로부터 전통민속식품인 입쌀만두, 감자만두,칠색만두,꿀떡 등11개 계열의 150여개 제품으로 늘였다.품종을 대폭 늘였지만 질관리만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들은 원재료 구입관을 엄격히 하고 원재료 서류를 만들고 품질기록을 어기지 않았으며 가공과정에서 차질제품이 나오지 않도록 중시를 돌렸다.

  이처럼 질관리를 착실히 틀어쥔 결과 이공장에서 생산한 단설기계열제품이 2001년 지린성질량만리행추진회서 '중점보호제품'으로 추대되었으며 '북두천' 오인월병은 '지린명품'으로 평의되었고 2004년에는 '북두천'표 단설기계열제품이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로부터 '명표제품'으로 평의되었고 2006년 7월에 길림성'저명상표'로 평의되었다.

  이들 최 씨 부부는 어머님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회복리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머니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28년간 연변광영원에 해마다 1만여위안을 지원해주었으며 주내 재해지역이나 성외 재해지역에도 사랑의 손길을 주었다. 사천 문천지진때도 4천위안 기증했으며 홍기촌에 삼태자가 태어났을 때 6천위안을 보내주었으며 가두를 통해 빈곤호에 부조를 해주었었고 생활이 곤란한 대학생 2명을 뽑아 해마다 2천위안씩 부조해 주었다.

  하여 사람들은 어머님의 핏줄을 타고난 자식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북흥과자공장 일각

  청년일대

  김영숙 공장장의 손자 최정식이가 지금 북흥과자공장의 공장장 책임을 맡고 있다. 김영숙 할머니가 학교시절부터 배구팀에서 솜씨를 과시하였고 아버지 최문일은 한때 길림성축구팀의 문지기로 활약하였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체육재능과 소질을 따라서인지 최정식이도 초등학교때부터 달리기와 축구에 남다른 특기를 보였다. 그는 연변대학 체육학부를 졸업하고 지금은 아버지한테서 계주봉을 이어받은 셈이다.

  김영숙 할머니가 두손으로 창업을 하였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발로 뛰어다녔다. 최정식이는 머리로 하고 있다. 그는 컴퓨터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공장사이트를 만들어 공장을 널리 홍보하고 있다. 또한 컴퓨터를 통해 주문을 받고 제품판매를 하고 있다. 지금 연길시에 8개 판매점을 두고 있으며 제품은 북경,청도,상해 등지는 물론 조선,한국에 수출되어 환영을 받고있다.

  올해 28살인 최정식이가 아직 나이 어려 기술면에서 약하고 경험이 부족하지만 청춘의 열기로 하여 공장은 생기로 넘치고 있다.

  북흥과자공장 창립초기 공장장 김영숙이 200위안을 꿔서 2명의 일꾼을 데리고 15제곱미터 되는 공장에서 조선족들에서 제품을 생산했다는 것이 이젠 옛말로 되었다. 20여년의 간고한 창업으로 공장은 8천제곱미터의 부지면적을 갖고 있으며 1500만위안의 기업자산을 용납하고 있으며 90명의 종업원과 두개의 분공장을 갖고 있다.부단한 기술혁신과 비전을 거쳐 지금은 연간 800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당당한 기업으로 부상하였다.

  이 공장에서는 '성신'이라는 두글자를 기업의 명줄로 간주하고 식료품의 질과 신용을 높인데서 이미 여러차례나 연길시 '질신용단위','우수사영기업','문명자영업',연변조선족자치주 '신용기업', 지린성 '성신기업합법권익 중점보호단위',칭호를 수여받았으며 2006년에 연길시위와 정부로부터 '민족단결선진집체', '노동모범집체'로 표창받았다. 이밖에 성,주,시 기술감독국의 '식료품질 단위'로 명명되었으며 한국세계식료품박람회에서 북흥과자를 선보여 '우수식료품'상까지 타게 되었다.

  필경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능가하는 법이다. 세대를 내려오며 창업을 하는 북흥과자공장의 앞날은 더욱 휘황찬란하리라 믿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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