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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전쟁 부추기는 ‘푸틴의 두뇌’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9월11일 05시42분    조회: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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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두긴의 딸 다리야 두기나가 차량 폭발로 사망했다. 두긴은 ‘유라시아주의’를 주창해온 정치철학자다. 그는 러시아가 유라시아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다.
알렉산드르 두긴이 8월23일(현지 시각) 딸 다리야 두기나의 추도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AP Photo


8월23일 러시아 모스크바 오스탄키노 TV 센터에선 국수주의 운동가 다리야 두기나를 기리는 추도회가 열렸다. 사흘 전인 8월20일 밤, 두기나가 몰던 차량이 도로에서 폭발했다. 향년 29세. 두기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극렬 지지자로 러시아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뉴스 사이트의 편집국장이었다. TV 시사 프로그램에도 자주 나갔다. 지난 4월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측이 자행한 부차(Bucha) 학살을 조작극이라고 몰아붙이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8월23일)에 따르면, 수백 명에 달하는 정치인, 방송인, 부호들이 추도회에 결집했다. 푸틴 대통령의 대리인,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레오니트 슬루츠키 하원 국제문제위원장, 미디어 재벌이며 푸틴의 최측근인 콘스탄틴 말로페예프, 부차 학살에 가담한 ‘와그너 그룹(용병 기업)’의 소유자 예브게니 프리고진 등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우크라이나가 두기나를 죽였다’라며 보복을 결의했다.

추도회의 절정은 두기나의 부친이자 저명한 정치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의 연설이었다. 이 부녀는 사건 당일 모스크바 외곽의 한 행사에 참석했다가 두긴의 자동차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두긴이 다른 자동차에 탑승하게 되면서 두기나 홀로 부친의 자동차를 몰았다. 두긴은 “(내 딸은 여러분이) 위대한 조국을 위해 싸우고, 우리의 신념과 러시아 정교회를 지키기 바란다. 딸은 우리 민족을 위해 죽었”으니 “우크라이나를 반드시 무찔러야 한다”라며 추도사를 마쳤다.

알렉산드르 두긴의 별명은 ‘푸틴의 두뇌, 예언자, 라스푸틴’ 등이다. 푸틴의 크림반도 합병 및 우크라이나 침공의 ‘설계자’로도 불린다. 캐나다 오타와 대학의 마이클 밀러먼 같은 사람은 두긴이 러시아의 ‘비공식 국가 이데올로기’를 정초했다고 본다. 이번 폭사 역시 당초의 표적은 두긴이었다는 시각이 유력하다.

두긴이 러시아 전역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계기는, 1991년 극우 신문 〈덴〉에 쓴 ‘대륙들 간의 거대한 전쟁’이란 기사다. 소련 몰락 이후 초강대국의 지위를 잃고 박탈감에 시달리는 러시아인들에게 다시 거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당대 세계 질서의 구도는 선(善)과 악(惡)을 각각 대표하는 두 글로벌 세력의 투쟁이다. ‘악(惡)’은 개인주의와 물질주의를 숭상하는 미국 등 서방국가다. 두긴은 이들을 해양세력(‘영원한 카르타고’)이라고 부른다. 이에 대항하는 ‘선(善)’한 대륙 세력은 개인과 물질이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 공공선을 개인의 이익보다 중시하는 문명이다. 그 대표인 러시아는 고대 로마에서 동로마제국(비잔티움)으로 이어진 ‘기독교 적통(러시아 정교회)’을 이어받은 ‘영원한 로마’다. 두긴은 양대 세력의 투쟁이 오직 한쪽의 파멸로만 종료된다고 봤다.

선(러시아)이 악(미국)을 파멸시키려면 무엇을 해야 하나? 이 기사에서 두긴의 대안은 ‘보수혁명(conservative revolution)’이다. 미국 국제관계 유력지 〈포린어페어스〉(2014년 3월31일) 기사(‘푸틴의 두뇌’)에 따르면, 두긴이 제시한 보수혁명의 모범사례는 ‘살로 공화국(베니토 무솔리니가 1943년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선포한 나치 독일의 괴뢰국)’이다. 두긴은, 나치의 사이비 과학 단체인 아넨에르베(Ahnenerbe, 독일 민족의 고대 세계 지배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려 했으며, 유대인 수용소 인체실험을 주도)와 히틀러 친위대(SS)가 추진했던 ‘전후 유럽질서 구상’을 높이 평가한다. 이에 따르면, 유럽은 인종별로 각각 획정된 국가들이 ‘영주국 독일’을 모시는 위계적인 국제 공동체로 재구성될 예정이었다.

러시아군 헬기가 8월24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제공 동영상 갈무리

나치 구상 닮은 ‘유라시아주의’ 제시



두긴은 1997년 발간한 저서 〈지정학의 기초:러시아의 지정학적 미래〉로 일대 파문을 일으킨다. 슈퍼마켓에서 판매할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누린 이 책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유라시아주의’다. 두긴의 유라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함께 일컫는,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러시아는 지정학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독특한 지위를 갖고 있다. 러시아는 유럽에도 아시아에도 수렴될 수 없다. 결국 러시아가 생존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유럽과 아시아를 러시아 민족이 지배하는 대제국(Great Empire)으로 통합하는 것뿐이다. 나치의 ‘전후 유럽질서 구상’과 일맥상통하는 발상이다. 두긴의 ‘유라시아 제국’은 옛 소련의 모든 소속 국가, 동유럽의 옛 사회주의 블록뿐 아니라 유럽연합(EU)에 대한 섭정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동쪽으론 만주, 신장, 티베트, 몽골의 합병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

이 책에서 두긴은 러시아의 운명을 가로막는 악의 세력(미국 등 서방국가)에 대한 구체적 격퇴 방안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자중지란을 유도하는 것이다. 미국에 대해선 ‘거짓 정보’ 등을 통해 “모든 형태의 불안정과 분열”을 조성한다. 영국은 유럽대륙과 반목(예컨대 EU 탈퇴)시키는 동시에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등의 분리주의 운동을 선동한다. 독일 등 서유럽은 에너지, 식량 같은 천연자원을 지렛대 삼아 러시아 쪽으로 견인한다.

유라시아주의의 ‘반(反)미’ ‘반(反)서방’은 단순히 러시아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두긴이 진심으로 증오하는 대상은, 유럽과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 싹트고 성숙되어 전 세계로 전파된 ‘근대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유라시아주의는 당초 19세기 말 유럽으로 이주한 러시아 몰락 귀족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형성된 ‘반(反)근대사상’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서유럽에서 싹튼 근대적 흐름(개인주의, 인권, 시장경제, 민주주의, 사회적 위계의 파괴, 신 중심 세계관의 해체)을 증오했다. 초기 유라시아주의자들은 ‘신으로부터 황제-성직자-귀족-농노로 이어지는 지배’ ‘남성의 여성 지배’ ‘영주국의 가신 국가 지배 질서를 의미하는 제국(empire)’ 등을 착취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영성(靈性, spirit)이 오랜 세월에 걸쳐 정착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질서’인 동시에 전통(관습)이라고 봤다. 그들에 따르면, 근대 자유주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과 영성을 거역하는 ‘인위적 질서’이며 ‘악’일 뿐이었다.

두긴은 초기 유라시아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한다. 이런 그가 갈구하는 ‘보수혁명’에서 ‘보수’의 의미는 현재 서방국가의 보수주의와 결이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서방의 보수주의자들은 큰 정부를 두려워하고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한다. 그러나 두긴의 보수주의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직분에 따라 국가 공동체 및 전통적 가치(계층과 젠더)에 복속해야 한다.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 역시 제국의 질서를 따라야 한다. 이런 반자유주의적 관점이 ‘러시아=세계의 구세주’라는 신념과 결합되면서 반서방·반자유주의 국제연합의 맹주로 러시아를 규정하게 된다.

그런데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러시아의 운명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당면 과제가 있었다. 푸틴이 러시아와 ‘영성적 통일체(spiritual unity)’라고 표현한 바 있는 우크라이나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조치다. 두긴이 볼 때, 우크라이나의 완전 독립은 러시아가 아시아와 유럽의 지배권을 가지는 대제국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 결정적 장애물이었다. 두긴은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우크라이나의 동쪽과 남쪽 지역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2008년 러시아는 조지아 침공을 감행한다. 조지아 내 남오세티야 지역의 친러시아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작전이라는 명분을 내걸었다. 마이클 밀러먼에 따르면, 당시 남오세티야를 방문한 두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군대는 수도 트빌리시 등 조지아 전체를 흡수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인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도 점령해야 한다.” 모스크바 국립대 교수였던 두긴은 2010년대 들어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친러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글에서 이렇게 선동한다. “(반러 분자들을)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두긴이 1990년대부터 내놓은 주장들 중 상당수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 의해 현실에서 실천되었다는 사실은 심상치 않다. 물론 영성을 떠들어대는 신비주의 세력이 정치권력에 접근한 사례는 의외로 많다.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온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신비주의자의 의견을 국가 정책 차원에서 적극 수용하고 실천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우크라이나 없이 러시아 제국 없다”



사실 두긴이 푸틴 대통령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고 있느냐는 국제 학계와 언론의 논쟁거리 중 하나다. 서방 언론 중 다수는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두긴의 관점이 수년의 시차를 두고 푸틴에 의해 실현된 것 외에도 두 사람의 사상적 관계에 대한 수많은 정황이 있다고 주장한다. 푸틴이 두긴의 추종자인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과 계획에 따라 두긴의 담론을 활용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푸틴의 언술에 두긴의 사상이 녹아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기 어렵다.

미국 CBS(4월12일)가 스탠퍼드 대학 후버연구소의 존 던롭 선임연구원을 인용 보도한 바에 따르면, 푸틴은 러시아 대통령 임기 6개월 만인 2000년 11월 “러시아는 항상 유라시아 국가임을 인식해왔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2011년, 푸틴은 러시아 총리 신분으로 발표한 ‘유라시아를 위한 통합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정치, 새로운 경제적 토대에 기반한” “현대 세계의 축이 될 강력한 초국가적 연합(일명 ‘유라시아 연합’)”을 제안한다. 2000년대 말부터는 “러시아는 자체적 질서를 가진 독특한 문명”이란 수사를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민주주의나 인권, 자유 같은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가치들은 서방국가들의 것일 뿐 ‘러시아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우크라이나 침략 직전의 연설에서, 푸틴은 ‘유라시아 대 서방’이란 문명 충돌 관점에서 러시아의 군사작전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텔레그램에 올린 동영상에서 두긴은 “우크라이나 없이 러시아는 다시 한번 제국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두기나 폭사 이틀 뒤인 8월22일, 이 사건의 범인이 우크라이나 비밀요원이라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측은 러시아가 전쟁의 동력을 살리기 위해 기획한 자작극이라고 반박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두긴이 자신의 딸을 의도적으로 희생시켰다거나 푸틴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내부 불만 세력의 시도라는 음모론들이 횡행하고 있다.

진실과 상관없이 두기나의 폭사는 그동안 교착상태였던 전황을 다시 격화시킬 계기로 작용될 전망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크림반도 탈환을, 러시아 지도층은 피의 복수를 외치고 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독립기념일인 8월24일, 이 나라 동부의 소도시인 채플린을 맹폭해 50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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