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총기 난사 사고 피해자들의 유족. AFP=연합뉴스
알리시아 로드리게스는 갓 열살이 된 미국 텍사스의 평범한 소녀였습니다. 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알리시아가 지난 24일(현지시간) 총기 난사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떄문입니다. 엄마 생일엔 고양이와 새를 직접 그린 카드를 선물하는 사랑 넘치던 이 소녀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알리시아가 위험한 장소에 있었던 긧도 아니죠. 자신이 있어야할 곳, 학교에 있었을뿐입니다. 학교.
총기 난사범이 난입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텐데요. 25일의 총기 난사로 인해 목숨을 잃은 이는 26일 현재까지 어린이 19명과 교사 2명입니다.
알리시아 로드리게스가 엄마에게 보낸 생일 축하 카드. AFP=연합뉴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이런 학교에서의 총기 난사 사고가 올해 들어서만 네번째라는 겁니다. 지난 2월1일엔 버지니아주 브리지워터 대학교에서, 3월4일엔 캔자스주 올레이스 이스트 고등학교에서, 지난달 22일엔 수도 워싱턴DC의 에드먼드 버크 고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미국 곳곳에선 조기가 게양됐습니다.
주간지 뉴요커는 26일 이런 카툰을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렸습니다. “(미국이라는) 시스템이 절박한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 지금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음 비극까지 기다리시겠습니까?”라는 내용입니다.
뉴요커 카툰. [the New Yorker instagram]
총기 규제에 대해 오랜 기간 적극적 목소리를 내온 뉴욕타임스(NYT)나 CNN과 같은 특정 정치성향의 매체 이외에도, NBC 등 비교적 중립적 성향의 매체들 역시 이번 사고를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총기 규제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일까도 싶습니다. 어린이들까지 희생시킨 총기 사고를 근절하기 위해선 총기 구입을 더 까다롭게 하는 것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같아 보이죠. 그러나, 총기 규제 문제는 미국에서 뿌리 깊은 정치적 문제입니다.
낙태를 두고 여성의 자기 신체 결정권, 즉 ‘선택 찬성(pro-choice)’라고 찬성하는 쪽과, 태아의 생명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명 중시(pro-life)’가 뾰족하게 대립해온 것처럼 말이죠. 거칠게 표현하면 총기를 갖는 것도 개인의 자유이며 이를 연방정부 등이 규제할 수 없다는 쪽은 주로 공화당이고, 전미총기협회(NRA)라는 이익단체의 자금 지원을 받습니다. 결국, 돈과 표에 목숨이 날아가는 셈이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dl 지난 11일 백악관에서 열린 총기 규제 행사 에 참석한 한 고등학교 총기 사건 생존자를 위로하고 있습니다. AFP
올해, 한국뿐 아니라 미국도 선거의 계절입니다. 조 바이든 정부의 중간 평가 성격인 선거가 11월 8일 예정돼있습니다. 상원 의원 100석 중 34석, 하원 의원은 전체, 주지사 50석 중 36석 등이 선출됩니다. 지난 25일 텍사스 주정부와 경찰이 총기난사 사고 관련 기자회견을 열었을 때, 민주당 측 텍사스 주지사 후보로 나선 베토 오루크가 갑자기 등장했던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오루크는 기자회견 중간에 불쑥 나타나선 현 주지사인 그렉 애벗을 향해 무능하다고 비판하는 발언을 했죠. 그 발언을 하다가 저지되고 쫓겨났습니다.
뉴욕타임스(NYT) 등 친 민주당 성향의 매체들은 오루크에 초점을 맞춰 보도를 했으나 텍사스 현지 매체들은 오루크가 난입했다는 맥락으로도 보도했습니다. 오루크는 지난 2020년 민주당 대통령 선거 후보를 뽑는 경선에도 바이든 대통령과 함께 출사표를 던졌던 정치인입니다. 그가 굳이 11월 선거가 없었다면 기자회견 중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등장 방법을 과연 썼을지 의문입니다만, 적어도 그는 총기 규제 필요성에 대한 주의 환기를 하는데는 성공했습니다.
영화 '미스 슬로운' 스틸컷. [영화 '미스 슬로운']
영화로 역사와 정치를 배우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단초는 제공해줄 수 있죠. 총기 규제 법안을 둘러싼 로비와 정치자금의 치열한 싸움을 보여주는 미국 영화 중 하나가 2016년에 나온 ‘미스 슬로운’입니다. 총기 규제를 막으려는 공화당 측의 막대한 자금과 로비 세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주죠. 이 영화가 나온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상황이 개선 아닌 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 개탄스럽습니다. 알리시아를 포함한 19명 어린이 희생자들의 명복을 빕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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