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성옥
21년전인 2004년 6월 19일, 《길림신문》사에서 조직한 ‘중국조선족 인력 송출 실기 현상’ 공모 시상식 날, 나의 서투른 글 <보내지 못한 다섯번째 편지>가 은상을 받아 너무 행복한 순간이였고 따라서 그 결실이 더 보람차 항상 《길림신문》에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내가 받은 이 은상 원고의 내용이 좀 특이하여 저 세상으로 가신 부모님을 존경하고 그리는 심정을 담아 간단히 적어 본다.
우리 2남2녀 4형제 중 오빠가 시내 직장을 다니고 농촌 소학교 교원인 남동생이 농사일하는 안해와 함께 뇌막염 후유증으로 휠체어 타시는 부모님을 모시고 화목하게 살았다. 80년대, 남동생부부는 자기 둘의 힘으로 농사를 지으며 돼지며 닭을 키워 덩실하게 120평방 벽돌집을 짓고 아버지 환갑상도 동네 들썽하게 잘 차려드려 부모님의 만족을 자아냈다.
90년대 초반, 남동생이 먼저 외국을 나가게 되였고 2년후 안해도 함께 따라 출국했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시아버님을 잘 모시던 둘째 며느리는 너무 비통해하며 시아버님 제사상에 놓을 상감을 국제 택배로 한 박스 보내왔다. 너무 감탄한 일이였다. 그러던 남동생 안해가 하루는 숙식을 제공하는 일터로 간다면서 집을 나간 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린근 친척들의 말에 의하면 더 좋은 남자와 산단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우리 남동생이 일 잘하지, 도박도 안 놀지... 나는 그 리유를 알 수 없어 직접 편지를 써 본다고 몇번 필을 들어 보았지만 주소가 없어 보내지 못하였다. 집에서 이 불길한 소식을 들은 70세 고령 어머니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하루아침에 쓰러졌고 4년 후 영영 돌아가셨다...
나의 이런 안타까운 편지 내용을 쓴 원고가 《길림신문》 공모에 입선되였다니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또한 마음속으로 남동생 안해가 세상 한끝 어디에서라도 이 편지를 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도 있었다.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 그 시상식이 있은 후 나와 《길림신문》사의 인연은 깊어만 갔고 원고만 있으면 우선 《길림신문》을 생각하게 되였다.
고향 마을을 떠난지 45년이 되였지만 당시 마을의 제일 어려운 식수문제를 해결한 리동앙 지서를 회억하여 <닭으덩때 마을과 리지서>라는 글을 써서 《길림신문》에 투고하였는데 발표 되였다. 닭으덩때(홰)처럼 바위돌 언덕 우에 집을 짓고 사는 우리 동네는 강가에서 60여메터 사이 둔 언덕물을 길어 먹었는데 겨울에는 길이 미끄러워 물지게 지고 넘어져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70년대 리동앙 지서가 부임되면서 적극적으로 상급에 경비를 신청하고 또 전 마을을 령도하여 엄동설한에 곡괭이로 땅을 파서 수도 관도를 설치해 끝내 마을 사람들이 신선한 물을 마시게 되였다는 내용이였다. 나의 원고가 신문에 발표되자 리동앙 지서 유가족과 동네 어르신들의 한결같은 칭찬을 받았다.
어느날, 한 고향 친구가 가여운 어머니를 그리는 문장을 볼펜으로 써서 신문에 발표할 수 있겠는가고 보내왔다. 그 내용은 자기 어머니가 쪽잠을 자는 병이 있어 길을 가다가도, 심지어 밥을 하다가도 쪽잠을 자야 하고 더욱이 쌀을 이고 40여리 길을 다니며 웃돈 20전을 받아 가정 살림하느라 별의별 고생을 다 하신 어머니를 회억하는 내용이였다. 나는 두말없이 제목을 <꿈속에서도 보고 싶은 엄마>라 달고 토 하나도 빼놓을세라 잘 수정하여 본인의 이름으로 《길림신문》에 투고하였는데 인차 발표되였다. 문장이 발표된 신문을 본 후 친구는 눈물이 글썽하여 40년간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이젠 마음이 풀린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외에도 선후로 여섯편의 원고가 나의 이름으로, 네편의 원고를 잘 다듬어 작자 본인의 이름으로 투고하였는데 모두 《길림신문》에 발표되였다.
나는 나머지 인생도 여전히 좋은 사람, 좋은 사적을 많이 써서 《길림신문》을 보다 더 멋지게 꾸리는데 약간의 도움이라도 주고싶은 마음뿐이다.
编辑: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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