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신문≫창간 40돐에 즈음하여
신기덕
어제(4월 1일)가 바로 ≪길림신문≫ 창간 40돐이 되는 날이다. 나는 오늘 오전 시간을 리용하여 위챗계정에 오른 ≪길림신문≫ 관련 내용들을 대부분 읽었다.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길림신문≫도 이젠 중년에 들어서게 되였다. 이 40년간 신문사에서는 참으로 힘겨운 창업의 길을 걸으며 실로 많은 일들을 해냈다.
장춘에서 오래 동안 사업하고 생활해오면서 나는 ≪길림신문≫과 ≪장백산≫ 잡지의 ‘신세’를 많이도 졌다. 이 글에서는 제목에 맞게 ≪길림신문≫과 관련된 내용만을 적는다. ≪길림신문≫은 너무도 오래 접촉하여 잘 알기에 어찌 보면 오랜 친구와도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좀 깊이 생각하면 ≪길림신문≫은 진정 나의 스승이고 도사였다.
내가 연변일중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문학의 초행길을 아장아장 걸을 때 ≪길림신문≫사 문예부의 분들은 모두가 나의 문학스승이고 향도자였다.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나는 모양새가 말이 아닌 졸작을 들고부끄러움도 모르고 하루 건너 문예부로 찾아다녔다. 나는 그분들의 가르침과 관심 속에서 점차 문학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이미 수필도 200여편 쓰고 수필집도 출간한 상태이다.
그리고 길림성교육학원 민족교육부에서 사업할 때 ≪길림신문≫사의 요구에 따라 교육교수와 관련된 ‘인성교육’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시간이 4년 반이란 긴 시간이였고 칼럼의 편수도 110여편이였다. 한가지 칼럼을 4년 반이란 긴 시간 동안 발표한 사람도 필경 많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퇴직한 후에는 신문사의 요구에 따라 24절기의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보는 24절기’ 글 24편과 ‘듣는 24절기’ 글 24편을 발표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우리의 명절과 기념일]이란 계렬글을 30여편 발표하게 되였다. 그리고 로년들의 생활칼럼 20여편도 계렬로 발표하였으며 려행수기도 계렬로 발표하였다. 이외 기타의 글들도 적지 않게 발표하였다.
≪길림신문≫의 도움이 컸기에 절기글의 평균 조회수가 5,000을 훨씬 넘기고 최고의 조회수는 1만 7,000을 초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길림신문≫에서 조직한 [미인송컵] 문학작품 평선활동이 있었기에 나는 영광스럽게 금상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론문을 제외한 나의 많은 글들이 ≪길림신문≫사 편집들의 가르침을 받아 발표될 수 있었다. 나는 그 과정에 많은 것을 터득하고 배울 수 있었다. 하기에 나는 길림신문사를 절대 잊을 수가 없으며 언제나 마음 속에 신문사에 대한 고마은 마음을 그들먹 담고 있다. 과거의 일들을 돌아보노라니 그냥 ≪길림신문≫사가 너무도 고맙고 사랑스럽다.
40년간 신문사가 거둔 성적은 많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가야 할 길은 멀기도 하고 험난하기도 하다. 새롭게 맞띠우는 형세에 맞게 신문사가 잘 꾸려져 가면서 큰 발전과 성과가 있기를 충심으로 희망한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두손 모아 ≪길림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빈다.
编辑: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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